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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강연 - " 역사 전체에 변혁을 주신 예수 "(2) / 제6차 전국대회

관리자 2024-10-15 (화) 22:28 2일전 22  

제6회 2024 전국대회 주제 강연 


                                                 삼위일체력에서 본 성자(聖子) 예수의 세계

                                                                     역사에 대 변혁(變革)을 주신 예수 (2)

                                                  -금단의 벽은 없다/ 고쳐 쓰시는 하나님 / 이념이 아닌 사랑을-

                                                                      (눅9:51-56, 사53:10-12, 행9:1-9) 

                                                                                                                                              최 부 옥 목사 (연구원장/ 증경총회장)


( 본 강연은 지난해 제5차 전국대회의 삼위일체력에 나타난 성자(聖子) 예수의 사역에 관한 두 번째 발표문이다. 제5차 대회에서는 성자의 계절 중에서, 성탄절-주현절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에 집중하면서, 자녀의 시대를 여신 예수, 자녀의 삶을 제시하신 예수, 하늘 가족을 탄생시킨 예수에 관하여 증언했다. 그러기에 오늘의 증언은 성자의 나머지 계절 들 중에서 사순절(고난절)과 부활절 영역에서 예수 사역의 핵심 부분들이 증언된다. ) 


1. 한계 앞에서 선 우리, 되찾아야만 할 우리의 모습 


현재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너무 안타까운 처지에 있고, 엄청 많은 장벽에 직면해 있다. 자주 듣게 되는 소리 중 하나는,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시대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해 주는 시대’라는 말이다. 세상을 깨워야 할 교회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얼마나 난감한 언사인가! 이는 고등종교를 대상으로 한 각종 종교 여론조사에서, 기독교가 가장 낮은 신뢰도를 얻고 있음에서도 확인된다. 


엔데믹 시대에 들어선 요즈음은 우리 기독인의 숫자도 크게 내리막길에 들어선 게 분명하다. 한때 국민 20%가 넘는 1,000만 이상의 성도들이, 최근에는 그 반토막 정도의 성도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예배드리는 셈이라는 통계 보고가 있을 정도이다. 신학교의 입지가 너무 좁아졌다! 지금 우리 안에서는 교회들의 통폐합, 폐쇄, 목회자의 이중직 허용 등. 생존을 위한 교회와 목회자들의 비명들이 계속 들리고 있잖은가!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쳇 지피티(Chat GPT)를 비롯한 고도의 각종 AI 인공지능 시대가 활짝 열려서, 우리 교회의 목회와 강단에까지도 거세게 밀려들어 왔다. 이것은 이제 교회 출석 없이도 예배나 설교가 가능해졌다는 점이고, 이런 인공지능을 이용한 다양한 설교 및 예배 매체들까지 등장하여 인간 영혼들에 영향을 주게 된 상황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영혼 없는 설교>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음을 말하기도 한다. 


이 대변혁의 거센 폭풍을 현재의 우리 연약한 교회들이 어찌 감당할 수 있을 건가!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변화는 예측이 불가하며, 그 파장을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은, 마치 풍랑을 만나 갈릴리 바다의 배 안에서 우왕좌왕하던 제자들의 모습과 비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막4:35-38 참조). 가장 부끄러운 요인은, 외부의 비판이 아니라, 우리 교회 내부의 (교회답지 못한) 역기능적(逆機能的) 모습들에 있다. 


우선은 교회가 세상에 발산할 예수의 향기가 바닥이고, 복음의 가치들이 무너진 일들이 가장 심각하다. 현재의 우리는. ‘머리 깎여서 들릴라의 품에 안겨있는 저 허약한 삼손’과 같고(삿16:19-21), 복음과 사랑의 역동성을 상실하여 강도 만난 이웃을 돌아볼 영혼이 없던 저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들과 흡사하다(눅10:30-32). 세상의 불의를 막아줄 힘이나, 약자들을 대변할 지혜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교회가 되었다. 파수꾼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먹기만 탐하고 짖지 못한 개 신세처럼 되었다(사56:10). 


왜 이런가? 말씀의 사유(私有)화가 우리 교회를 타락하게 했다. 그 바람에 최고의 공의가 되어야 할 교회가 자신과 집단의 이익단체가 되게 했다. 이 점을 자성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논리를 내세우지만, 그때마다 어떤 말씀을 붙잡아야 할지, 헤매게 된다. 서로 자기가 붙들고 있는 한 신학 쪼가리와 말씀 뭉치가 복음의 전부요 전체 인양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한국교회에는 삼위 하나님이 분열되어 있다. 어느 쪽은 성부 측으로, 어느 쪽은 성자 측으로, 어느 쪽은 성령 측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덩치 싸움만 있지, 종합도 통합도 못하고 지낸다. 


그래서 본 연구원은 이런 아픔을 진단하면서, 그 대안과 출구를 내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교단이 지난 70회 총회 이래, 붙들고 지켜온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적 교회력이 이 분열과 위기 시대를 극복해 낼 가장 보편타당한 길이요 대안이라는 확신 속에, 오늘 주어진 주제 강연의 틀도 그렇게 준비했다. 우선 우리의 정체성(Identity)과 모든 대안 제시도 우리 성서가 잡아 준 삼위일체론적 틀 속에서 증언하려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삼위일체적 정체성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둘째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셋째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할 성령의 증인들이고 전해 줄 선교인(宣敎人)들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르지 않다. 모두 상호 간에 밀접하게 연계된 하나이다. 이제 그 내용들을 살펴본다.


o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이 누구인가? 그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뢰는 성서 전체에 가득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다(마1:1). 예수 자신이 소개하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보면(눅16:24-31), 그의 위상이 특별하다. 그는 하늘 심판대에서, 거지 나사로에게는 자비를, 부자에게는 심판을 선언할 정도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4대 종교인들(개신교, 천주교, 유대교, 이슬람)도,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그의 자손이란 의식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의 그늘이 구원의 망처럼 되어 있다.


그가 얻은 하나님의 신뢰는 그의 믿음 때문이다. ‘고향-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 할 땅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1절)과,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는 여호와의 약속(2-3절)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받은 복의 특성을 좀 더 들여다본다.


먼저 첫 번째 복인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리라’(2절)를 살펴보자. 사실 인간이 스스로 복의 주체인 근원과 뿌리가 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바로 복의 원천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굳게 맺어지면 가능해진다. 여기인 필수 요건이 있다. 복의 원천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 수준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제시하신 수준, 즉 ‘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수준이다. 그런 자가 복의 근원이 된다(신6:5, 막12:30 참조). 


그러면 두 번째 복인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3절)는 어떤 것인가? 내가 받은 복을 나 혼자만 누리지 아니하고, 받지 못한 세상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는 일이다. 곧 ‘이웃 사랑’의 복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가능하다! 곧 내 마음을 열고 펴서 살려는, 분명한 의지만 있으면 된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은 바로 이렇게, ‘받기도 해야 하고, 또 반드시 주기도 해야 하는 복’이었다. 


그런데 이 두 복에는 큰 특징이 있다. 이 두 복이 package처럼, ‘서로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다(option). 곧 아브라함이 받은 복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패키지 복’, 곧 그 둘 중 하나만 골라 취하려고 하는 순간, 다른 남은 하나도 아예 무효가 되는 그런 일괄처리(一括處理)형의 복이었다. ‘전부냐 전무냐’(All or Nothing)형이었다.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본질상 하나로 묶여 있었다. 이 얼마나 독특한 복들인가!


결국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이 불가분리 사랑의 구도를 수용하면서, 생각 밖에 책임과 부담이 크게 부여된 무거운 복을 받은 것이다. 실로 큰 멍에였다! ‘복 받는다’는 것부터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야만 되는 것이었다. 복은 좋지만-, 그러나 거기에 걸맞은 하나님과 세상과 이웃을 향한 책임을 함께 감당해야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이 두 복을 하나로 묶어주셨을까? 사랑에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기복주의에 빠져서 희생이나 섬김이 없는 야욕의 도구가 될 위험이 있고, 하나님 사랑 없는 인간사랑은 그 중심을 상실한 사랑이 되어, 교만해지거나 공의를 잃어버린 것들이 될 수 있기에, 이 둘의 상호 견제와 보완으로 사랑의 온전함을 담아내고, 사랑의 가치를 드러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을, 처음부터 복과 구원의 옵션으로 그의 백성에게 제시하셨다! 기독교를 일원론 종교로 세우셨다.


하나님은 그런 당신의 선하신 뜻에 ‘아멘’하는 아브라함을 기뻐하셨다. 그때부터 그가 받은 복의 실체가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서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포와 교육, 선교와 섬김, 교제와 나눔들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이러한 복들은 모든 생명체의 머리가 되게 하는 복이었으며(신28:13 참조),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복이었다(창12:2-3). 


o 이웃 사랑이 흔들릴 때 – 이스라엘 신앙과 존재가 무너지다


하지만 실제적인 큰 문제는 하나님 사랑의 측면보다는 이웃 사랑에 있다. 이웃 사랑이란 말과 생각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그 어려움을 체득해야만 나올 수 있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실현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친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그 모델로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의 ‘이웃 사랑’의 연단은 매우 낮은 곳과 밑바닥에서부터였다(시146:7-9 참조).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부터 시작했다. 그것도 그들이 노예 생활을 하면서, 짓눌리고 빼앗기고, 나그네 되어서, 헐벗고, 병들고, 두들겨 맞기도 하며, 그래서 주변에서 고통당하는 숱한 이웃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소위 ‘좋은 이웃’이 될 실전 훈련을 무려 400여 년이 넘도록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에서 치열하게 받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이웃 사랑을 본격적으로 실천해야만 했다. 그때 그들 가슴에는, ‘너희는 종(從)이었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 그것을 망각하면 내가 멸(滅)하겠다’(신15:15-)라는 경고용 딱지가 항상 붙어있었다. 그러면서 언제나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과부-나그네들, 그리고 경제적 약자인 제사장-레위인을 돌보는 생활들이 옵션으로 부과되었다. 그들의 세 절기들(유월절-칠칠절-초막절)을 보면, 그중 유월절은 하나님 사랑을, 후반의 두 절기들은 모두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요구되었다. 그때의 그들은 건강히 살았다. 


그런 이스라엘이 비극과 저주에 빠져든 것은 그들 조상이 받았던 패키지의 복들을 저버릴 때였다. 그들이 세상의 왕정 체제를 택하면서, 권력과 돈과 정파와 전쟁의 맛에 빠져들면서, ‘하나님 사랑’만 붙들고, ‘이웃 사랑’을 외면할 때였다. 인간을 신분과 소유와 환경에 따라 차별하고 교만을 부리면서부터였다. 이 점을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그것은 당신과의 계약 위반이었고, 아브라함 자손임을 포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 일들, 곧 약자를 착취하고, 불의로 재물을 모으며, 힘없는 자들에게 군림하면서, 당신 앞에 나와서는 마치 흠 없는 자처럼, 뻔뻔하게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제사를 아주 역겨워하셨다(소선지서들 참조). 그들이 당신을 성전 안에서 제물만 받고 복이나 베풀어주는 신으로 취급하며, 세상과 인간의 정의로운 삶과는 상관이 없는 신처럼 만들면서 예배와 삶을 분리하는 행태를 미워하셨다. 그런 그들은 여호와의 신앙을 죽은 신앙으로 만들었고, 백성들을 길 잃게 하였다. 여호와의 생명의 종교를 겉과 속이 다른 이원론 종교로 추락시킨 것이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나라가 남북의 분열과 멸망으로 이어졌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우상 종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앗시리아에게 참혹히 멸망을 당했다. 그들의 잔인한 혼혈 정책으로 인하여 문제의 사생아 집단인 사마리아인들이 나오기도 했다. 남 왕국 유대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여 년의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어진 제국들의 식민지 백성이 되어, 주권 상실의 나락 속에서 탄식하며 살아야만 했다. 


o 예수 오심과 성령의 강림 – 무너진 구원의 방정식을 복원시키려고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나? 그런 잘못된 얽힘으로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고자 오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처음 복의 구도(構圖)’를 회복시키고자 오셨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주님은 당시에도 여전히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고 이웃 사랑은 외면하며, 편협한 종교관으로 수많은 죄인만을 양산하던, 당시의 유대교와 치열하게 싸우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고집했지만, 예수님은 신앙과 삶을 분리시킨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사정없이 책망하셨다(요8:44 참조).


‘무엇이든지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니라’(마7:12절)는 황금률 말씀도 그래서 나왔다. 대접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과, 대접하여야 하는 믿음의 의지적 마음을 절묘하게 함께 묶어주신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신 복의 패키지적 실체를 연상시키신 말씀이다. 이는 산상설교의 핵심 계명으로서의 ‘이웃 사랑’을, 최상의 법으로 제시하신 말씀이었다(마5:38-48 참조, 22:36-40, 눅6: 31, 롬13:8-10. 갈5:14).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을 첫째로, 이웃 사랑을 둘째로 지키는 데에서 영생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셨다(막12:28-31). 그러면서 당신은 친히, 이웃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모델이 되셨다. 그들 유대 종교가 인과응보란 핑계로 아예 외면해 버렸던 죄인들, 여자들, 아이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 성소수자들(마19:12, 사56:3-5 참조), 이방인들과 같이 삶의 변두리로 밀려난 자들을 친히 찾아가셔서 교제하시며, 그들의 친구로 사셨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누구의 편에 계신 지를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당신의 사람들에는, 그런 소자들을 선대한 일이 곧 당신에게 한 일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여건을 갖고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영벌이 있으리라’라고도 경고하셨다(마25:41,45참조). 반면에 죄인이었던 세리 삭게오의 이웃 사랑에로의 회심을 아브라함의 후손다운 행위라고 높게 평가하셨고(눅19장), 강도 만난 자를 선대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선한 이웃’이란 높은 평가를 하기도 하셨다.


o 흔들리는 교회, 길을 잃고 자기방어에 급급한 교회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이중적인 복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우리가 꼭 사수해 내야 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소중한 복들을 지켜내고 있는가, 아니면 사탄에게 빼앗겨 버렸는가? 그걸 진단해 보아야 하겠다.


소중한 추억이 있다. 작가 김훈의 소설 <흑산(黑山)>에는, 우리 역사에 들어온 초기의 교회에서 예수의 복음이 백성의 삶 속에 어떻게 자리하였는지를 소개하는 글이 있다. 그 속에는 말씀을 들은 부자 교우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기 종들에게 나누어주고, 종의 문서를 포기하며 그들에게 넘겨주던 일들이 나타난다(행2:43-47 참조). 교회가 세상에 새 구원의 질서를 들여다 놓았던 놀라운 모습이었다! 처음엔 그런 행위가 미친 짓같이 보였으나, 그게 결국 당시의 어두웠던 세상을 살려낸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성령이 그런 이유로 교회들을 세우셨고, 성도들을 부르셨다. 이 일들은 하나님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인간들을 사랑하는 일까지도 보여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분리는 신형 이원론이고, 보이지 않는 이단일 뿐이다. 교회를 죽은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이다. 아브라함 후손의 교회임을 포기하는 일이다.


우리에겐 절대 잊지 말고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 삼위 하나님 말씀에는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제시한 사랑의 기준선(guide-line)이 선명하게 있다.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은 목숨을 다하기까지 해야 하고(막12:30 참조), 이웃 사랑은 원수(怨讐)까지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마5:44, 롬12:18-21 참조). 


이 복의 실체는 모세가 등장하고, 예수께서 오심으로서 참모습을 보다 선명히 드러냈다(요4:22 참조). 모세와 예수, 인류는 바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원의 도리’를 접하면서, 그 말씀의 빛 아래로 다 모여들었다. 그 빛 아래에 모이는 이들은 누구나, 눈과 귀와 입이 열리는 기적과 구원을 맛보게 되면서(행2:21, 겔36:27-28 참조), 이 세상과 이웃을 선도하며 사는 생명의 주역들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들(교회)은 과연 그곳에 들어가 있는가?


o 우리 교회의 과제 – 삼위(三位) 하나님이 제시해 준 세계를 붙잡아야 


이 위기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교회의 안일하고 나태한 태도와 비성서적인 행위들을 자행하며 살아온 일에 깊은 회개와 반성들이 선행되어야 한다(사32:9-14 참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 내용을 제대로 전하고 보여주지 못하고 살아온 일들을 성찰하고 회개해야 한다. 특히 교회가 어떤 점에서 세상의 신뢰를 잃었고, 또 현장에서 선교의 동력을 상실했는지를 찾아서 고쳐가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우리가 함께 씨름하면서 극복해 내야 할 일들이 있다고 보기에, 이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그의 나라에 대한 구도(構圖)’가 있기 때문이다.


1) 성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이시면서 밝혀주신 구도는, 바로 그들을 온 세상에서 ‘큰 나라와 큰 백성으로 세우시는 일’이었다(신4:6-8). 여기에서의 ‘큼’이란, 국토나 인구나 광물이나 군사력 같은 가시적(물적)인 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식에서, 그리고 생각과 마음에서 큰 백성이었다. 온 세상을 품고 도우며 살릴 수 있는 영적 크기요 가슴과 품의 크기였다. 영어로는 ‘big’이 아니라 ‘great’였다. 이는 당신이 크시니, 자녀들 역시 크기를 원하신 마음이기도 하다.


2)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밝히셨던 그의 나라인 진리의 나라를 추구하는 일이다. 주님은 ‘당신은 그 진리를 위해 태어났고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기에, 나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다(요18:37). 주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라고 소개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진리의 실체적 모습들은 어떤 것들이었나?  


곧 힘센 자 중심이 아닌 약한 자 중심이었다. 의인보다는 죄인부터 살리시려는 방식이었다. 건강한 자 우선이 아닌 약한 자 우선이었다. 한쪽만의 승리가 아닌 양쪽 모두의 승리였다. 하나님 사랑만이 아닌 인간 사랑과 함께하는 방식이었다. 정죄보다는 회복이었다. 억압이 아닌 격려였다. 따돌림이 아닌 함께였다. 정의, 평화, 생명의 축들을 견고하게 이 땅위에 세우시고자 하셨다. 그게 그의 진리의 실체(實體)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택하시는 모습도 주목해야 한다. 주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온전한 자보다는 상처받은 자를, 완전한 자보다는 배신자까지를, 되돌려 쓰셨다. 베드로는 물론, 사도 바울도 바로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주님의 사람을 고쳐 쓰시는 모습에 감동하면서, 그런 주님의 마음과 정신을 바탕으로 온 세상 죄인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데에 전력을 하였다(행9:1-9, 고전1:26-31 참조)


3) 성령 하나님의 경우는 어떤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인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주님 예수를 <모퉁이 머릿돌>로 온 세상에 소개했다(엡2:14-22). 왜 그랬나? 그의 선교 현장은 언제나 서로 다른 이질적 차원의 영역들이 가득했다. 동과 서, 남과 북, 강과 약, 부와 빈, 지식과 무지, 정상과 비정상, 군림과 배척 등으로 진정 서로 하나 되기 어렵기만 한 곳들이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의 모퉁이 머릿돌 론(論)을 내세우면서, 이 상극적 대상들을 향하여 선택이 아닌 포용과 보완으로, 단독보다는 하모니로, 군림보다는 섬김으로, 독점과 독주보다는 채움과 인내로 서로를 돕고 살릴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이질(異質)을 넘어 동질(同質)의 감동을 안겨 줌을 세상에 뜨겁게 전했다. 


바로 이런 선한 가치관과 목표가 뚜렷한 교회 만들기가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함께할 교회들은 격려해 주고, 맞서고 거슬리는 세력에게는 경고하고 일깨워주는 선한 일꾼들이 바로 우리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우리 내부의 현안들을 다시 본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쳤는지를 보겠다. 


o 교회 발전에 발목을 붙잡고 있는 어둠의 족쇄(足鎖)들 :


세칭 태극기 부대를 이끄는 전광훈 바람의 후유증이 너무 크다. 그를 최고의 선지자로 추앙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은 그를 메시아처럼 추종한다. 그는 한국교회와 사회 안에 있는 모든 극우(極右)세력의 대부처럼 되었다. 교회들에는 그곳 소속원들이 제법 많다. 그들은 현 윤석열-김건희 무속(巫俗) 정권의 등장에도 크게 기여한 것을 빌미로, 그들과 한통속에 되어 각종 영역에서 무도한 행태들을 무수히 자행하고 있다. 그래서 묻는다. 그의 일들이 성경에 부합된 게 무엇인가, 예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들은 교회를 살리는가 죽이는가? 


그들의 활동과 언행들을 보면, 지금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명하셨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나라’라는 개념과 인식을 송두리체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이는 우리 교회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과제들이기도 하다. 대략 세 가지 문제가 크게 보인다. 그게 무엇인가?


1) 이념(理念) 지상(至上)주의 문제다. 이는 그 집단이 보여준 가장 심각한 이단적 모습이다. 분단이 가져온 배타적 이념이 우리 교회의 최고 가치인 사랑-화해-평화보다도 훨씬 우위에서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그들은 같은 보수 동류(同類)들이라는 목회자들이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거나 요구를 거부하면, 그 거친 입으로 사정없이 그들까지도 ‘빨갱이’, ‘배신자’로 정죄한다. 더 심한 짓도 한다. 이에 적잖은 목회자들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동조한다. 실로 교회와 목회를 형편없이 추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의 존엄을 박살낸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왕 마귀 짓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 조국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전쟁 없이 민족의 화해로 평화통일을 이루려는 일은 그 자체가 복음 운동이자 진리와 생명인데도,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런 접근 자체가 아예 좌파적 행동으로 매도되고 있다. 진리를 선포할 자유가 봉쇄당한다. 예와 아니요를 못하고 있다. ‘종북 좌파’, ‘빨갱이’라는 극우적 표현을 일삼으면서 민족들과 교회와 교인들까지도 눈치 보고 편 가르기 하는 짓들을 극우교회들이 한다. 


그러면 왜 한국교회가 이런 좌파 혐오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가? 그 원류는 해방 직후인 1948년, 남북 총선 문제로 인하여 4.3 제주에서 자행된 3만 여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의 대량 학살에, 월남한 <서북기독청년단>이란 기독교도들이 그 주역으로 활동한 일에서 기인한다. 이념 문제로 인한 동족 말살 행위의 첫 대참사였다. 문제는 그들이 그 후에 한국기독교의 보수 진영의 주류 세력이 되었고, 그 참사에 대한 회개나 참회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6.25와 분단을 거치면서, 그런 반공(反共) 이념이 교회 신앙과 진리의 최상위 자리를 점해 온 것이다. 


이렇게 자리한 강고한 인간적 교리는 그 후 한국교회의 정상적 신앙 흐름을 크게 왜곡시켰다. 예수님의 ‘원수도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의 한계선도 간단히 무력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손양원 목사 같은 이가, 자신의 아들들을 살해한 공산주의자를 용서하며 그 살인자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음으로써, 한국교회 신앙사에서 원수 사랑에 대한 최고의 감동과 교훈을 안겨 주었던 그 위대한 업적과 그 의미를 완전히 희석시킬 정도로 그 정죄의 위세를 떨친 정도였다. 심히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어떤 유형의 신앙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한다. 한국 신앙인의 참된 자존심인 원수 사랑한 손양원 신앙의 회복이냐, 아니면 원수는 절대 사랑할 수 없다는 서북학살세력의 계승이냐-? 분명히 하자. 교회가 보여주려는 예수의 얼굴은 무엇이겠는가? 사랑의 얼굴인가, 폭력의 얼굴인가?


2) 동족(同族) 문제이다. 태극기 부대는 어떤 통일을 원하는가? 동족(同族)인 북한을 향한 그들의 언행은 우리 한국교회에게도 심각한 장애와 후유증을 안겨 주었다. 특히 현 정권이 들어선 이래, 북한과 그 세력들을 원수시 하고 철저히 제거해야 할 세력으로 몰아가면서 충돌과 전쟁 위기는 고조되었고, 동족의 공존의식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성서가 제시한 동족에 관한 윤리를 조금이라도 알고는 있는 것인가? 이 부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도 잠시 살펴보자. 


광야 40년을 마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때, 모세는 여호와의 특별 명령을 받는다. 주변에 흩어져 사는 동족과의 전쟁이나 마찰을 엄중하게 금하신 것이다. 구체적으로, 야곱의 쌍둥이 형제였던 에서의 후손들인 세일 사람들이나,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 자손인 모압과 암몬족들과의 전쟁을 아주 엄히 금하셨다(신2:5,9,19 참조). 


예수님의 사마리아를 상대하신 모습도 그 맥락이다. 정통 유대교가 혈통적으로 부정한 자들이라고 철저히 혐오하고 배제한 사마리아를 예수님은 적극 품으셨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반드시 구원받고 회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셨고, 당신의 제자들에게까지도 그들을 향한 선교를 계속 발전시키도록 명령하셨다. 성령께서도 제자들과 선교사들을 계속 사마리아에 파송하시면서, 그들도 구원받게 하셨다(행1:8, 8장). 이런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 남북 분단으로 고통하는 우리나라와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유념하고 지켜야 할 진리요 선교적 사명이 아니겠는가! 


동족은 하나님이 핏줄로 묶어주신 연(緣)이다. 그러기에 동족 문제는 절대로 평화로이 해결하려고 접근해야지, 힘으로 누르거나 짓밟거나 원수 관계로 보면서 접근하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여러분은 가족이나 혈족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푸는가?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성경은 이 미묘한 동족 문제에의 접근에 대한 예시(例示)도 제공한다. 곧 창 33장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깊은 두려움 속에서 만나면서 화해와 평화를 위해 드러낸 낮은 자의 모습을, 가장 지혜로운 표본으로 제시했다.


평화나 화해의 몸짓은, 세상이 못하면 교회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선도할 수 있다. 남북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이다. 남북이 가까워지면, 주변 나라들이나 온 세계인들이 우리의 친구가 되려고 하지만, 동족이 서로 싸우면 우리는 결국 온 세계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되고, 그들의 종속 국가가 되고 말 것이다. 교회는 동족 문제를 재정립해야만 한다. - 대립과 파멸이냐, 화해와 평화냐? 


3) 강대국(제국) 의존 문제이다. 태극기 부대의 손에는 성조기, 이스라엘기, 심지어 일본기까지 들려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대신에 주변의 패권(覇權)국가들을 더 의지하고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태이다. 참 두렵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 특히 우리 교회 안에는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편 가름 언어들이 난무하다. 일부 정치권에서나 사용하는 용어들, 종북 좌파, 친일파, 친미파, 친북세력, 친중파 등등이다. 이는 모두 자기 안에 그리스도나 그를 향한 믿음이 없음을 보여준 행태이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하다. 미국과 일본은 정말 끝까지 우리의 친구와 방패막이가 되어줄까? 특히 자신의 과거의 범죄 사실을 완강히 부정하면서, 독도(獨島)가 자기네 땅이라고 계속 고집하는 일본이, 위기의 우리를 도울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


성경이 답한다. 저 남북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세력들은 바로 그들이 매달렸었던 그 제국들이었다. 여호와가 그토록 남 유다에게 형제인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하여 앗수르에게 매달리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음에도(사7:4-9,28:16,30:15). 남왕국은 끝내 앗수르 제국에 매달려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몰락시켰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남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고, 나중엔 그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애굽에 매달리다가, 종국에는 그 앗수르를 몰락시킨 신흥제국 바벨론에 의하여 남왕국도 무참히 무너졌다. 이런 사례는, 미국과 일본에 매달리는 우리에게도 큰 경고가 되는 게 아닌가! 


동족들은 싸우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 되어 큰 힘을 내기 위하여 존재한다. 남북은 하나 될 때 강해지고 함께 영화를 누린다. 경제문제, 일자리 문제, 출산 및 인구문제, 자원문제, 역사문제 다 해결될 것이다. 이 길은 분명 쉽지 않지만 그래도 남북을 동족으로 묶어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존중하고, 기도하며 함께 평화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이게 결국 우리가 모두 함께 살게 될 지름길이다!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진리의 빛을 발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명 공동체이다. 세상 권력에 끌려다니면서 우리의 중심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 민족의 하나 됨은 만고의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때에 교회는 예수께서 가슴에 품고 계신 진리의 나라 백성이 되도록 이끌어 세우며, 성도들이 조국 평화통일의 주체 세력이 되고, 영적 독립운동 세력들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o 선교의 변화가 요청되는 교회들 – 금단의 벽 없애고, 모통잇돌 예수의 넓은 품을


1) 삼위 되신 하나님에게 금단(禁斷)의 벽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저 요나처럼 자신의 니느웨를 만들면 안 된다. 제자 요한과 야고보처럼 예수 방문을 거부한 사마리아를 하늘의 불로 쳐 몰살하게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 스스로가 사람들을 죄인과 의인으로 갈라놓으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께서 당신을 그곳에 죽게 한 자들을 생각하시며, ‘아버지여 저들을 사(赦)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눅23:34)라고 기도하셨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손안에 정죄의 돌이 있으면 안 된다(요8장-). 


우리는 동성애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에 대하여는 선교적 대응을 하되, 그 방안은 보다 성숙하고 지혜로와야 한다. 저들은 교회에 침투하여 몰락시키려는 저 사악한 이단들과는 차원이 아주 다르다. 그들은 고통의 그늘에 사는 매우 취약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사랑이 정말 무엇인지,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맛보고 싶어 하는 목마른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저 사마리아를 찾으시고 그들 집에도 묵기도 하시며, 구원을 안겨주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지혜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요4:40 참조).


비록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난 행동을 보이더라도,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고 싶어 하는 무리이다. 그들의 행위들은 수용할 수 없으나, 그들 마음의 고달픔을 헤아려서, 복음과 사랑의 따뜻한 햇볕을 쬐어서 양지에 나올 수 있도록 그 방안을 찾아 제시하려는 선한 목자 된 교회의 성숙한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 정죄의 힘은 교회의 문을 닫게 할 것이나, 포용의 힘은 교회 문을 활짝 열게 하리라. 


2) 교회는 모통잇 돌 예수의 영성을 실현하는 장이 되도록 체질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모인 곳이다. 당연히 사도와 평신도들이 함께 복음과 선교를 도모했던 그 사도행전적 교회를 목표해야 한다. 에큐메니컬 영성도 보장되어야 하고, 민주주의적 대화와 토론 문화도 확립되어야 한다. 


교회에는 세상 현장에서 외치는 구원을 호소하는 음성에도 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평신도들이 일하는 세상 현장 역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큰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의와 공의와 사랑이 펼쳐져서, 전 백성들이 살아가기에 안전할 수 있도록 평신도들에게 훈련 시키고 파송하는 하나님의 선교 체제를 극대화하는 노력들을 해야 한다.


o 나가는 말 – 다시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으로


이제는 진정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들과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이 험난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할수록, 보다 선명하고 확실한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붙들고 실천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런 교회라야 이 위기의 시대에도 ‘지속 가능한 참 구원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제 다시 이웃 사랑으로 결집하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웃을 사랑하자. 거기에는 그 어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우리들이 되자. 우리에게 병든 세상과 인류를 진정 치유하고 살려내겠다는 소명 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책망과 비난의 힘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용서의 힘을 보여야 할 때이다. 심판할 일은 하나님의 몫이다. 사랑의 역동적인 힘을 살려내야만, 교회의 선교도 새롭게 날 수 있으리라.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은 모든 계명 중의 최고의 계명이요(막12:33-34), 우리가 모든 세대를 향하여 계속 선포하고 확인시켜 주어야 할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이다.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계명은 다 이 계명들 안에 다 들어있다. 이 계명 준수가 참된 복이요, 마르지 않는 샘이며, 하늘나라까지도 이어지는 다리가 될 것이다. 이 일을 잘 감당할 때, 비로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모인 교회가 될 것이다.



<참조자료> 1. 세 본문으로 만나는 나사렛 예수 (사순절 편), 2011, 최부옥 / 생명나무

                 2. 부활절에 만난 예수와 그의 사람들, 2013, 최부옥 / 생명나무 

                 3. 교회력에 따른 삼위일체론적 설교를 향하여 / 2021, 최부옥 / 말씀목회연구원

    

                 4. 기념강연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2023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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