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12:1-3, 마5:13-16, 롬 8:18-30, 시78:67-72
새 역사 70년을 맞이한 우리는 지금 <주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주제 아래 우리가 섰던 자리, 선 자리, 서야할 자리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와 역사 속에서 ‘화살촉’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 기장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주제만 보면, 구원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생존 때문인가, 우리의 약화된 정체성 때문인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가 중요하다. 생산적 고민은 창조로 이어지지만, 퇴보적 고민은 쇠락이 따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우리의 정황은 마치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의 상황에 빠져든 느낌이다. 코로나 판데믹의 후폭풍으로 한국교회 전체가 교세의 급강하와 신뢰성의 추락에 따른 뒷수습에 급급하다. 나라에는 제2의 아합과 이세벨과 같은 권력자가 등장하면서 지금껏 쌓아온 모든 국가적 사회적 기반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런 중에 거짓과 가짜 선지자의 발흥도 거세지면서 정작 화해와 통합을 주도해야할 교회들의 소리나 존재감마저 희미해졌다.
이럴 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선교에 참여해 온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가족들의 처지는 지금 어떠한가? 진정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사와 특성을 다시 추억하며, 우리에게 없는 것을 고민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있는 것과 있어도 강한 것을 더욱 능력 있게 발휘할 수 있도록 방향의 키를 잡아가는 일이 지혜라고 본다. 이를 위해 나는 오늘의 말씀들로 우리 자강(自强)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두 날개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하는 교회에게 미래를 맡기신다(창12:1-3). 본문은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과 복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시대로,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당신이 지시할 땅으로 가는 그에게 큰 복을 주셨다. 주시되 패키지형 복을 주셨다. 자신이 받은 복은 반드시 이웃과 나누어야 되는 철저히 옵션이 걸린 복이었다. 아브라함은 그 지시에 ‘아멘’하여 복의 근원이 됐다.
교회나 성도의 힘은 사랑과 섬김에서 나온다. 지금의 우리 교단 규모는 서로 사랑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우리는 교단내부로부터의 서로 사랑의 방안들을 꾸준히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양 날개를 활발히 펴야 살아나기 때문이다. 특히 교단 내부의 노회들 간의 파트너십을 제도화해야 한다. 예컨대 도농 교회간의 교류 및 자매결연을 장려하고 시골교회를 위한 예산 책정도 권장하여, 교인들의 교단 사랑의 마음을 꽃피워가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소금과 빛으로 자신의 삶을 바친 이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들을 이루신다(마5:13-16).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 된 이들에게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부여하신 내용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삶의 가치관과 방정식이 완전히 달라진 존재들이다. 주님처럼 세상을 사랑해야 했고(요3:16),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사는 존재여야 했다(마6:33). 이는 세상을 장악한 어둠의 권세를 향한 저항이며, 생명 세상을 향한 삶의 시작이다.
예수 당시 기득권자인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오용하여, 수많은 민중들을 죄인들\로 몰았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매도당하고 밀려난 사회적 죄인들을 가슴에 품으셨고, 심지어 부정한 무리들이 살던 사마리아도 계속 찾으시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고자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의 한국교회들 중에는 예수 없는 교회들이 범람한다고 본다. 사실 진정한 보수는 이런 약자와 죄인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신앙의 이념화 현상이 큰 비극이다. 극우 교인들의 발흥이 교회와 복음의 신뢰도를 격하시키고 있다. 그들은 죄인을 위한 복음 활동과 사회정의와 평화통일을 강조하면, ‘좌파다 빨갱이다’라며 공격하면서 교회의 선교활동의 가치를 희석시키고 분열시킨다. 그런 중에 성소수자와 동성애자에 대한 선교문제는 우리 교단의 사회선교의 입지를 더욱 협소하게 만들고 있다. 다양한 영역의 사회선교사들을 배출하는 우리들은 보다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우리만이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나사렛 예수의 밝은 얼굴을 환히 보여줄 담대한 복음이 필요한 때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들과, 성령의 탄식에 민감하게 듣고 반응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신다(롬8:18-30, 출2:23). 바울이 이렇게 교회 공동체들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탄식 소리에 응답해야 된다고 역설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체인 교회야말로, 자기 폐쇄에 빠지지 않고 주변의 연약한 이웃들에 힘과 지혜를 보태어주는 생산적 공동체가 되는 것이 서로 사는 길이며 그곳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탄식과 절규가 가득하다. 외부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얀마의 군부 독재, 이번에 튀르키에의 강진에 따른 수많은 참사 희생자들의 절규가 가득하고, 내부에는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태원 참사로 인한 국민의 탄식, 검찰 독재정치의 등장과 민주주의 퇴락, 무속종교와 거짓 선지자들의 횡포, 양극화 심화와 남북 경색으로 인한 전쟁위기 고조, 고조되는 기후위기에 대한 무대책, 초라해진 나라의 위상 등등 실로 탄식과 기도할 일들이 첩첩이 쌓여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 속에서도 주도권과 리더십의 교체를 이끄심을 보여주셨다(시78:67-72편). 여기에서 하나님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대세인 에브라임지파와 그들이 모였던 실로 성전을 버리시고, 소수면서도 여호와를 섬기는 데에 집중했던 유다지파와 시온 산인 예루살렘을 택하셨다. 그 바람에 기득권 세력인 요셉 지파가 시들고, 남부 유다의 새 인물인 다윗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다윗을 ‘양의 우리에서 취하셨다’(70절)가 그 원인이었다.
이는 무슨 말인가? 다윗이 그 당시 누구보다도 양무리를 돌보는 현장(現場)에 강한 인물이었기 때문임을 말한다. 당신의 양들을 잘 지키고 키워낼 강한 다윗임을 크게 보신 것이다. 어떤 교단이 다윗 형일까? 켐퍼스에만 갇힌 신학은 힘이 없다. 반면에 신학이 담장을 넘어 교회와 세상의 현장과 접목이 되고 일치를 이루면서, 제대로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길러내는 그런 교단과 교회가 될 때, 미래의 역사를 주도할 세력으로 등장할 것을 고하신 것이다. 산학(産學) 일치의 새 전통을 강화시켜야 우리가 산다. 그런 교회라야 새 시대에도 필요한 교회가 된다.
사순절이 열렸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뒤를 좇을 교단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의 현실은 실로 할 일은 많고 가진 힘은 빈곤하다. 그래도 좌절은 있을 수 없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세상과 현장에 공감능력을 탁월하게 갖고 있고 대처하는 능력만 제고된다면, 우리 기장의 시대는 반드시 열릴 것이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들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화살촉의 날카로운 영성과 함께, 모퉁이 머릿돌의 화합과 조화를 창조해내는 영성도 함께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