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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강연 - 성령의 창조 활동 - "새 인간, 새 공동체, 새 문화 " / 제4차 전국대회

관리자 2022-10-13 (목) 23:17 1년전 260  

                           삼위일체력에 나타난   

                                                        “ 성령의 창조 활동 - 새 인간, 새 공동체, 새 문화 ”

                                                                   (행2:37-47, 신6:1-5, 요 4:37-42)                

                                                                                                                                                   최 부 옥 목사 (말씀목회연구원장)

                                                                                      Ⅰ.


얼마 전, 총 16부작으로 꾸며진 법조(法曹)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전 국민은 물론, 세계 애청자들의 찬사와 감동과 사랑을 받으면서 종영이 되었다. 그러면 왜 드라마 작가는 그것도 주인공이 자폐스펙트럼 증후군(症候群)에 걸려 있는 연약한 여성 장애인 변호사인 그를 ‘이상한 자’라고 칭하였을까? 무슨 생각에서 그런 표현을 부여했을까?  


물론 가장 완전함을 나타내는 이상(理想)형이란 명예를 부여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탈선적이거나 비정상적 성격을 보인 이상(異狀)자임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 보다는 그를 이 시대에 찾아보기 쉽지 않은 남다른 변호사임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그의 선임인 정명석이 우 변호사의 그런 좌우 가리지 않는 직설적 활동(?)을 평가하면서, 자신과 같은 직업적인 ‘법 기술자’가 할 수가 없는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평한 데서 이 연유를 본다. 


결국 법조계의 이 낯선 신입 우 변호사의 이상(異常)한 활동은 놀랍게도 기존의 두 대형 로펌과 그 법조 지평인 판검사 진용에도 적잖은 변혁을 유발했다. 참 법(法)의 준엄함과 따뜻함도 동시에 보여 주었고, 법 적용이나 변호 활동도 그 법의 핵심과 정신을 충분히 살려내면서 판결에 임하면,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결과를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음도 보여 준 것이다.  


우영우 이야기를 대하면서, 우리 시대도 법 기술자들이 폭주하고 있는 때임을 새삼 절감한다. 자기 법조 왕국을 견지하고자 비판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고, 지금은 나라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와 모든 실권까지도 거머쥔 이 기가 막힌 시대에, 이상한 우영우 이야기는 정말 큰 울림을 준다. 비정상이 정상 위에 군림하여 횡포를 부리는 시대의 통증도 느낀다. 그러기에, 그런 법 기술자들의 잘못된 행보를 제압해 줄 또 다른 이상한 우영우의 등장이 새삼 그리워진다.  


사실 우리는 나사렛 예수에게서도 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냄새를 충분히 맛볼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율법 기술자들로 백성의 삶과 종교를 좌지우지하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그릇된 행태와 그 위험성을 놓고서도 목숨을 건 진리투쟁을 하셨기 때문이다. 정죄를 위한 법이 아니라, 생명 구원을 위한 법의 길을 열고자 목숨을 버리셨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그 때에 정말 이상한 랍비였고 목자였다. 교회는 그런 예수의 길을 가고자 부름 받은 집단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단을 다시 본다. 1953년에 출범한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그 시대 엄청난 이상한 교회였다. 문자와 글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온 몸으로 증언하는 일에 앞장서면서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우리 교단은 20세기를 보내는 한국교회와 역사에 참 이상한 교회였다. 그 바람에 우리는 주변 교회들로부터 ‘기장 때문에 한국교회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문제는 지금의 우리들이다. 그때의 이상함이 지금에는 증발된 듯 보이기 때문이다. 남다른 위기감마저 감지된다. 그 실체가 무얼까? 그것은 규모의 왜소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우리다움’을 드러내왔던 기장의 정체성의 상실이 보다 큰 이유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장의 퇴락은 한국교회로서도 큰 위기이다. 한국교회가 왜 우리를 귀하게 보았던가? 우리가 교회의 소금과 빛의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맛보게 해주었던 까닭이 아니었겠는가!(마5:13-14참조).  


o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본 연구원은 이번 제 4차 전국대회의 총론적 주제를 성령(聖靈)의 사역 활동에 집중하려고 한다. 이는 전통적인 신론이나 그리스도론에 앞서서, 성령론의 이해와 숙지가 우리 교회와 목회를 되살리는 데, 더욱 시급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기장 신학 마당에는 성령론적 접근들이 빈곤한 것이 사실 아닌가! 또한 이 영역이 보완될 때, 우리에게 부여된 은사인 ‘이상한 교단’(?)이란 그 위치의 회복도 가능하리라 본다. 


이를 위한 접근이 보다 성서적이고 목회적이기 위해서, 본인은 그 동안 우리 교단이 채택해왔던 삼위일체력의 성서일과표(Lectionary)에 나타난 지난 3년간(2018.9-2021.8)의 성령 하나님의 활동상을 성령강림절기의 말씀들 속에서 추적해 보았다. 모두는 총 41주간의 성령 사역에 관한 증언들이다. 전체 내용은 담아낼 수 없었지만, 그러나 성령의 창조적 활동이란 측면에서 세 가지 중심 뼈대가 구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바로, ‘새 인간, 새 공동체, 새 문화’였다. 


                                                                                             Ⅱ.


Ⅰ. 성령의 첫 번째 활동으로서의 <새 인간(人間) 창조>    


성령의 창조사역의 핵심은 인간을 새 인간(new human being)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있다. 이는 외모나 형상의 뜯어고침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속사람의 내용과 품질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이는 율법교사 니고데모의 방문을 받으신 예수께서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born again)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지적하신 데에서 나온 것이다(요3:5참조).   


그러면 본래의 인간은 어떤 존재였나? 본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形象)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서(창1:26-27 참조), 그 모습은 흙에다 하나님이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된 존재였다(창2:7). 곧 하늘과 땅의 결합에다 신령한 생기를 받아서 만물의 영장이 된 존재였다.  그러기에 인간은 본래적으로 두 차원의 양식을 먹고 살게 된 존재이다.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양식과 땅이 제공하는 육체의 양식을 함께 공급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신8:3, 마4:4 참조).  


이 생태적 리듬을 원래대로 균형 있게 보전하고 유지한 곳이 바로 에덴이었다(창2:8-9).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그 복을 누렸다. 하지만 뱀이란 유혹자의 유혹에 넘어가서 ‘먹으면 죽으리라’고 각인된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창3:6), 인간 존재의 삶의 균형 추(錘)가 영적 욕구에서 육체의 욕구 쪽으로 넘어갔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땅의 욕망을 더 쫓는 존재가 된 것이다. 감히 신(神)의 영역을 넘보며, 죄악 세상에까지 눈이 뜬 원죄(原罪)를 안은 타락자가 되었다. 


결국 실(失)낙원한 인생, 본향을 빼앗긴 인생의 고단함은 끝없는 소외(疏外)와 방황(彷徨)과 그리움이었다. 무엇을 해도 갈등과 번민과 좌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삶이 되었다. 소위 예수께서 지적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된 것이다(마11:28).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간들은 숱하게 많은 방패 막(幕)들을 찾아 매달렸다. 재물, 명예, 권력, 지식, 인맥, 건강, 외모, 무기, 철학, 종교 등등에다 자신을 위한 보호막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임기응변용일 뿐이지 근본적인 안식과 편안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이 대체 무엇일까? 


영원히 나를 보호해 주고 안식하게 하여줄 참된 주인을 내 영혼이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 몸과 육체가 아닌, 영혼과 마음을 지켜 줄 참 주인(主人)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썩어질 밧줄들에 불과한 세상 것들이 어찌 방황하는 나에게 평화를 안겨 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러면 방법이나 대안은 무엇인가? 내가 육의 인생에서 벗어나 영의 사람으로 거듭날 때이다. 내 인생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참 주인으로 굳게 붙들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나의 모든 행동과 일들이 나의 머리와 계획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마음과 믿음에서 나왔는지를 점검하면 된다(잠16:2, 마5:28참조). 점검하다보면, 내가 아담과 그리스도 중에 누구의 후예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행동과 머리에서 나온 나의 일들은 내가 여전히 아담의 후예임을 입증하여 주지만, 말씀과 믿음을 좇아서 나온 모습은 내가 이미 새 주인을 섬기는 자가 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그렇다면 옛 주인인 아담과 새 주인인 그리스도 중, 누구의 힘이 우월할까? 분명한 것은 아담의 힘은 혈육의 힘이다. 자연히 본능과 체질로 힘을 과시한다. 굉장한 힘이다. 하지만 예수의 힘은 그런 혈육과 본능을 떠나야 만날 수 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실체를 볼 수 있고(창12:1),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란 멍에를 매야 그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마16:24)


그 세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무엇이 우월한가가 제대로 보인다. 아담의 파멸작용보다 예수의 구원 능력이 우월하고, 범죄의 힘보다 은혜의 힘이 우월하며, 정죄의 힘보다 의롭게 하심이 우월하고, 사망과 불의의 힘보다 생명과 의의 힘의 우월하며, 죄에 비하여 은혜의 풍성함과 결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것임을 새롭게 보게 된다. 이것이 새 아담 예수의 가족이 된 증표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된 영적 삶이 지금 내 안에서 어떻게 자리했는지 살펴본다. 


1) 영적 사람은 세상의 삶을 거류민(居留民)의식과 나그네 의식 속에서 산다(벧전2:11 참조).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존재로서, 그 아버지가 계신 하늘의 영원한 본향(本鄕)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일종의 다아스포라 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세상의 현재는 나그네 여정이고, 자신에게는 반드시 돌아갈 처소가 있음을 믿고 대비하며 살아간다 (요14:1-3 참조). 이는 실낙원을 극복하고 복낙원을 지향하는 존재의 삶의 특성이기도 하다. 


2) 이런 의식을 가진 이들은 여러 면에서 이중적(二重的) 내지 다중(多重的) 사고 속에서 산다. 세상과 하늘이란 이중의 시민권자로 산다. 지금과 영원이란 양면적 시간대에서 산다. 육과 영이란 양면적 삶에도 눈이 떠서 산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란 사랑의 양 날개를 펼치고 살아간다. 이런 이중적 의식 구조는 자신이 임의로 선택할 사안이 아님도 잘 안다. 그것은 이 둘이 모두 그 생명력에서 연동(連同)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곧 필연적 사안이고 패키지적(package) 사안(事案)임도 잘 알기 때문이다. 


3) 그러기에 영적 사람들은 이 둘의 영역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주어진 나날의 삶에 더욱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보이는 땅의 세상과 육체의 영역에 대한 영적 대응을 잘해야만, 그 후의 하늘의 응답과 축복도 누릴 수 있음을 믿고 살아간다. 깨어 있는 종말론적(終末論的) 삶이어야만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음도 믿는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이 모든 것을 더하여 받게 될 것도 믿고 산다’(마6:33참조). 즉 나는 먼저 아버지의 것을 구하고, 내 것은 아버지가 챙겨주시는 그런 삶의 얼개 속에서 살아간다.    


4)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모습에는, 세상 사람들과는 확연히 차원이 다른 삶을 지향(志向)하며 살아간다. 


먼저는 자신을 만세 전부터 예정(豫定)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選擇)과 섭리(攝理)를 마음으로 시인하며 산다(엡1:5-6). 이 의식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간다. 즉 자기의 의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은혜만을 드높이며 살아간다(롬1:8-17). 


둘째는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召命)에 따라 살아간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삶의 대전환(轉換)을 맛보게 된다. 그러면서 선교적 존재(missional being)로 새 출발한다. 동시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직분(職分)을 성직으로 받들고 그에 따른 본분들을 목숨처럼 여기며, 거기에 담진 사명(使命)을 잘 감당하고자 생명을 다해 충성하며 살아간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도(道)를 실천하며 살아간다.    


셋째는 매사에 성령을 좇아 행한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활짝 열어준 새 삶과 환경에 순복함으로 나타난다. 그런 그에게 성령은 보혜사로서 그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면서, 그를 하나님의 선하신 대리자로 높이 들어 사용하신다(행2:37-47참조). 그의 연약함은 감춰주시고, 부족함은 채워주시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신 은사들을 극대화시켜서 주의 놀라운 일들을 펼치며 살게 하신다. 인간 세상의 최고의 벽까지도 능히 넘어서게 하신다(신4:6-8,26:18-19). 



Ⅱ. 성령의 둘째 활동으로서의 < 새 공동체인 교회 창조 > :  


실낙원한 인생들이 집단(集團)과 그 힘에 대하여 스스로 눈이 뜬 사건이 있었다. 바로 바벨탑 사건이었다(창11장). 그들은 자신들의 고단함과 외로움과 상실감을 상쇄하고자 모든 족속의 힘을 결집시켜, 높은 성(城)과 성읍을 세워서 자기들의 이름을 세상에 드높이고자 했다. 즉 신의 도움이 없어도 자신들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과시하려고 했다(11:4 참조).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아성을 쌓은 것이었다. 


그런 현상은 결국 더 악한 집단의 출현을 가져올 일임을 아신 여호와께서는 결국 서로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조치를 통하여, 그들을 온 세상 처처로 흩으셨다(8-9절). 그 대신 그들과는 아주 다른 성격의 새 집단 형성을 시작하셨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시고, 그를 새로운 구원 공동체의 기반으로 삼으신 일이었다(창12:1-4참조). 그 특징은 그와 그의 후손들을 택하여 세우되, ‘여호와를 향한 믿음의 가계(家系)와 민족(民族)을 세우는 일’이었다. 곧 견고한 신본주의(神本主義) 공동체를 이 세상 무대에 만드신 것이다. 


그 바람에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신앙 가계와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무대에 중심인물들로 등장했다. 따라서 인류사에는 매우 특이하고 탁월한 유대인이란  백성이 우리 신앙과 구원의 모델로 등장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는 마치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모습과 흡사했다. 완전한 책임, 완전한 돌봄, 목숨을 다한 사랑으로 그들을 이끄셨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탈선과 배신에는 아주 단호하셨고, 질투하는 모습도 감추지 않으셨다.  


모세의 율법은 그들을 훈련시키는 신앙의 도구였다.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지침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받지 못하고 인간 정죄의 도구로 무기화시키는 바람에, 그들은 율법의 한계만을 드러내고 말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삶에 구체화시키기에는 율법 대신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 필요했다. 이웃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새로운 영적 집단도 필요했다. 바로 성령이 그 일을 주도하셨다, 교회가 탄생된 것이다.  


본 삼위일체력에 나타난 성령의 큰 사역은 바로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온 지구촌에 세우신 일이었다(창2장- 참조). 본래가 성부의 영이자 성자의 영이신 성령은 세우신 주의 종들을 앞세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고전1:2)는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온 교회들이 온 세상 구원 역사의 주도세력이 되게 하셨다. 더 이상 영웅 중심, 스타 중심, 개인 중심이 아닌 거룩한 집단 중심의 구원 사역을 펼치셨다.


교회를 세우신 성령께서는 거기에 몸담고 사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계명의 수행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초대교회 7집사들로 선임된 이들의 절대 조건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자’여야 한다는 지침은 바로 그 부분을 강하게 대변해 준다(행6:3,5절 참조). 그러기에 모든 성도들의 믿음과 헌신 생활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 된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는 마귀의 놀이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는 어떤 면들이 준수(遵守)되어야 할까? 


1)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본래 교회는 모임을 중시하기에, 성도들은 모든 예배와 모임의 자리를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무대와 기회로 삼아야 한다. 받으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주는 자가 복이 있음을 선포하신 주님의 마음을 좇아서 그래야 한다. 무엇으로 섬기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gifts)들인 재능, 물질, 시간, 건강, 지식과 같은 것들로 섬겨야 한다. 그래서 서로의 부족을 보완하면서, 공생-공영-공존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2) 그 어떤 차별이나 배타적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영이 아니라 육체를 따르는 행동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좋지 못하다. 이를 위해서 성도 상호간의 공감(共感) 능력은 탁월해야 한다. 그래서 가난이나 환란이나 각 가지 삶의 곤경에 처한 교우들과 항상 웃고 울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롬15:15참조). 이웃 사랑에는 그 어떠한 한계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차원에 따라서, 원수(怨讐)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된다.     


3) 하나님 선교(Missio Dei)의 전위대(前衛隊) 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주의 성령은 당신의 백성들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신다. 그래서 우리에 앞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보게 하신다. 그래서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하고 기쁘게 그의 선교에 동참하고 동역하게 하신다. 그럴 때, 하나님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각 가지 기적(奇蹟)와 표적(標的)으로 당신의 현존과 능력을 드러내 주신다(마28:19-20참조).  


4) 성령은 우리를 모퉁이 머릿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의 자리에서 살아가도록 이끄신다(엡2:20-23). 모퉁잇돌의 영성이란 서로 원수된 것 중간에 들어가 막힌 담을 헐고 서로 화평(和平)하게 하는 것이다. 그 근원은 예수의 십자가였는데, 이 십자가로 거듭난 새 사람은 작은 예수가 되어 분열과 대립된 양측을 화목하게 하는 자가 된다(엡2:14-18참조). 어느 한쪽에 승패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평안과 일치를 안겨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여기에는 이해, 협력, 용서, 헌신, 기여, 배려, 양보, 나눔, 조율, 일치, 화합, 사랑 등이 따른다. 


5) 성령 하나님이 한국교회사에서 놀라운 창조적 역사를 펼치셨던 대표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는 한국교회 안에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敎長老會=약칭,기장)라는 개혁적 장로교회를 지난 1953년도에 설립하신 일이다. 그때의 교단 출범의 4가지 선언들은 이랬다. 바리새주의 배격& 복음의 자유 확보, 건전한 교리 수립& 신앙 양심의 자유 확보, 노예적 의존사상 배격& 자조자립 정신 함양, 그리고 편협한 고립주의 탈피와 세계교회들과의 에큐메니칼 연대였다. 


이런 출애굽 정신은 예수님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는 정체성 부여에 대한 뜨거운 응답이었다(마5:13-14).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의 동참과 동역을 본격화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우리 교단은 세상과 교회의 선교적 연대를 견인하는 한국교회의 독보적인 모퉁잇돌이 된 것이다. 성령은 이런 우리를 정의, 평화, 생명의 기치로 이끌어주셨다. 그래서 원수들을 하나 되게 하고, 이웃 사랑이란 화해의 끈으로 모두를 하나 되게 인도하셨다. 


그 바람에 기장의 선교는 개인의 영적 구원에만 머물지 않고, 병든 세상과 사회와 역사의 구원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예언자적 영성과 사회 개혁적 생명 운동에 광범위하게 참여하였다. 지난 70년대의 반독재 투쟁 및 민주화운동, 80년대의 인권과 빈민과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운동, 90년도의 평화통일운동, 2000년대의 자연 생태계 살림운동을 하나님의 선교 차원에서 주도하였다. 이 모든 일은 우리 교단의 선교이념인 정의-평화-생명운동의 기치아래 진행했다. 


하지만 가장 우려되는 일은 교단 정체성의 약화(弱化)이다. 문제는 그 대부분의 이유들을 교단의 규모에 대한 고민에 나왔다는 점이다. 한국교회 안에서의 우리가 전체의 중간 정도에 불과하다는 열등감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런 정체성 약화에 대한 진단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본다. 규모로 따지면, 우리는 처음부터 작았다. 그럼에도 다른 교단들에서는 우리를 크게 보았다. 우리를 경계하면서도 따르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그랬나? 


신학이 컸고, 인물들이 굵었으며, 세상을 향한 교회의 외침이 야무졌기 때문이다. 오직 교회만이 외쳐야할 시대정신이 기장에서는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멍에를 매는 일에 매우 담대했었다. 기장은 한국교회의 <화살 촉>이란 장공 김재준의 의미 부여가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영적 전통과 능력의 샘물이 지금은 무척 고갈된 상태이다. 그 탄탄한 존재감 역시 크게 시들어 있다. 진정한 ‘이상한 교단’(?)의 회복이 그리워졌다. 


다시 생각해야 한다. 모퉁잇돌이나 화살촉은 결코 규모에 의해 평가될 것들이 아니다. 규모로만 따지면, 그 돌은 마치 다윗 손에 들려있던 물맷돌처럼, 처음부터 작은 것이었고 그 역할에서는 이쪽과 저쪽 모두의 판(判)을 새롭게 변화시켜 줄 능력이 있었던 돌이다. 따라서 우리 기장은 이제 성령이 우리 조상들에게 쥐어 주셨던 영적 무기들에 대하여 재 관심을 해야 한다. 그걸 되찾아야만, 21세기에도 그 역량 면에서 큰 교단으로의 역할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둘까?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에다 주목해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큰 나라의 백성이길 원하셨다(신4:6-8절 참조). 하지만 그 큰 나라는 숫자와 땅에서 큰 것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에서 크고, 공의로운 규례와 법도에서 큰 나라였다. ‘big’이 아니라 ‘great’가 하나님의 목표였다. 당신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거룩한 백성이 되고, 그래서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high above all nations) 하나님의 찬송과 명예와 영광이 될 성민(聖民)이기를 원하셨다(신26:18-19,28:1참조). 우리 기장이 바로 이런 차원의 교단과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전념하는 일이 훨씬 시급한 일이라고 본다. 덩치만 컸던 골리앗은 본래부터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Ⅲ. 성령의 셋째 활동으로서의 < 새 문화(文化) 창출 > : 


성서의 백성들이랄 수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지금 전 세계를 지배하는 4대 종파들로 흩어져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과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이다. 이들은 물론 혈통적인 후손들도 포함하지만, 신앙 때문에 후손된 이들도 대다수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파적 입장 때문에 서로간의 분쟁과 전쟁도 서슴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시인(是認)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아픔과 함께 희망도 갖게 하는 부분이다. 


본인은 지난 2015년 교단 제100회 총회장 자격으로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그리고 로마의 교황청 등을 방문하면서 그곳의 수장인 교황과 리더들을 만나 잠시 교제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는 포인트가 모두를 서로 가까이 대면할 수 있게 한 핵심 포인트임을 발견하면서 기뻤었다. 또한 그런 부분은 교회 분열로 진통하고 갈등하는 한국교회들을 상대하는 데에도, 매우 좋은 접근책(策)이 될 수 있음도 확인했다. 


그러면 개신교도인 우리의 오랜 문화적(文化的) 특성(特性)은 무엇인가? 본래 견고한 종교일수록, 자신들의 교리와 진리를 구원의 도리로 세상 속에 정착시키기 위한 지고한 노력들을 기우린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구원 세상을 열기 위해 우리 삶의 현장 속에 어떤 종교와 질서와 가치관을 세상 속에 심으려고 노력해 왔는지를 찾아보자. 이 점에서도 주도적 역할은 당연히 성령이시다.  


1)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만남과 언약 관계에서 찾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기반에서 살아야 된다는 점이다(창12:1-3). 이 점에 대해서는 지난 제3차 전국대회에서 깊이 다룬 적이 있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 부분은 성경 66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확실한 구원관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이 뜻을 확인해 주셨다. 


2) 이런 삶을 자자손손 지속하기 위해서는 견고한 시스템에 필요하다. 이는 절기(節氣) 중심으로 우리의 믿음의 삶을 구축하고 실천하며 사는 일이다. 본래 1차 산업이 주산업이었던 이스라엘은 일 년에 세 차례의 절기들을 지켰다. 유월절기-칠칠절기-초막절기였다(신16:1-17). 이런 절기의 지속과 반복을 통하여, 하나님은 백성들의 하나님 사랑(유월절)과 이웃 사랑(칠칠절-초막절)을 뿌리내리게 하셨다. 생활 신앙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놀라운 착근 방식이었다.  


-그 중에 매우 주목할 만한 법적 시스템이 하나 추가 되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생활 신앙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하여 제정된 재판(裁判) 시스템이었다. 바로 각 성과 지파들마다 재판장과 지도자들을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공정한 재판을 하게 하신 일이었다(신1:16-17, 16:18-20 참조), 하나님은 이런 재판을 당신의 것으로 선언하시고(1:17), 온전한 재판을 위하여 두 가지 핵심적인 가이드라인(guide-line)까지 제시하셨다. 


-하나는 재판관들의 뇌물(賂物) 수수 금지였다(신16:19). 뇌물은 지혜자나 의인의 눈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공의(公義-just)만을 세우는 일이었다(신16:20). 결국 이런 공적 사회적 질서를 통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돌보는 일에 망설임 없이 힘을 내게 하셨다. 동시에 재판관들은 자기들이 다룰 법을 가지고 개인 이익에 빠져들어 사회정의를 해치지 못하도록, 제어(制御)장치도 확실히 해 두셨다. 이는 실로 참 민주주의의 근간이 아닌가! 


3) 그 후 교회의 주이시고 삼위(三位)의 일원(一員)이신 성령께서는 이러한 절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반으로 하되, 삼위일체론적 시각으로 지킬 수 있도록 절기들을 7절기들로 세분화시켜 주셨다. 그게 어떤 절기들인가? 창조절과 대림절인 성부(聖父) 하나님의 계절, 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인 성자(聖子) 예수님의 계절, 그리고 성령강림절로서의 성령(聖靈)의 계절로 균형을 잡아 주셨다. 이런 절기의 순환(循環)을 지켜나가면, 모든 성도들은 삼위 하나님을 년 중 내내 만나게 되면서, 건강하고 성숙한 생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4) 이는 실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거룩한 삶의 진행표이다. 머잖아 약속의 땅인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날을 대비하며 사는 사람들의 종말론적(終末論的) 삶의 시간표이기도 하다. 이 절기 일정표가 생활화되고, 반복적 훈련을 하며, 믿음과 실천의 삶으로 이어질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날까? 개인적이건 교회 공동체이건 심지어 민족 공동체에게까지도 큰 의식의 변화가 생성되면서, 새 종교와 새 문화 형성까지도 정착되게 될 것이다. 


5) 동시에 이런 의식을 보유한 신앙 공동체 출현도 가능하다. 곧 재물과 소유를 자기만족과 욕망 충족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 돕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도구로 삼는 인생들이 출현한다. 제2의 삭게오들이 배출된 것이다(눅19:1-이하). 원시교회에서 다 함께 같이 지내면서,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던 공동체도 있었다(행2:44-46절 참조). 이는 이사야가 본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실 때 보였던 환상인,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일이 현실화된 사건이었다(사11:7참조).     


6)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매사에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에 앞서서 자기부터 성찰하며 문제를 야기한 교우들 입장에서 이해와 사랑의 심정으로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신앙인 출현이 가능하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상대하실 때 품으신 ‘바로 그 마음’에 기인한 것이다. 곧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배려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이다.    


7) 역사의 종말(終末)과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믿으며 대비하고 사는 신앙인의 출현이다. 이들은 모든 생명의 주권과 생존하게 된 일은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임을 믿으며, 자신의 삶의 매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산다. 육체의 자랑은 절대 금물이며.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를 원한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믿음 위에 살기 때문에, 육체를 심으려하지 않고 의와 가치와 생명을 심고자 힘쓰며 산다. 


8)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서 주의 나라가 이 땅 위에도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며 사는 공동체의 등장도 가능하다. 죽어서 천국만을 목표하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 땅에서의 묘목심기가 중요하다. 거두기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되기를 소망한다. 이들은 정의, 평화, 생명이라는 성경에 나타난 최고의 가치관을 기둥으로 삼고 헌신하며 산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멤버로 부르심을 받은 기장 공동체들 식구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물론 그 밖의 남은 자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Ⅲ.


o 이상에서 우리는 삼위일체력의 성서일과표에 나타난 성령께서 행하신 창조적 사역들의 광범위한 실체와 현상을 살펴보았다. 분량은 3년분 치였지만, 그 내용들은 결코 이 좁은 지면에다 다 담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주요한 주제들 중심으로 일관성을 이룬 성령의 창조적 사역의 틀을 세 가지로 접할 수가 있어서 매우 유익했다. <새 인간, 새 공동체, 새 문화 창조>를 주도하신 성령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확실한 결론은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지금도 여전하시고, 광대하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부합되게 변화되도록 이끄신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교회 일반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접근에도 큰 변화가 필요하다. 은사 중심의 성령, 축복 중심의 성령관은 매우 위험하고 더 이상 교회의 얼굴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성령 안에서 성숙해진 평신도들 배출도 성령의 큰 뜻이다                


우리 모두 인간과 세상과 삶의 틀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만 하겠다. 성령의 이끄시는 놀라운 능력이 이러하기에, 종교개혁자인 죤 칼빈(Calvin))은 일찍이 그의 성령론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Chritian Life)>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다. 성령은 결코 한국교회 일반이 생각하는 은사나 능력이나 기적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사람을 새롭게 하고, 교회의 변화를 견인하며, 삶의 질과 품격을 문화 차원에까지 고양시키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제는 한국교회의 부흥보다는 성숙을 논할 때이다. 성도들의 품격을 논할 때이다. 입의 전도나 선교가 아닌 삶의 선교를 견인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수준 높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출현을 위해서도, 성령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문제가 다시금 강조되고 배우고 익혀야할 과제이다. 이 발표 작업을 이끌어 주신 성령 하나님께 감사를 올린다. 아울러 이 일을 위해 본 강연 내용이 한국교회의 새로운 성령 사역 증진에도 귀한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2022. 9. 12 > 



< 첨가물 : 교회력에 따른 삼위일체론적 설교를 향하여 / 말씀목회연구원 2021. 

           자료목차 1-3차년도 종합본 / Ⅲ. 성령(聖靈) 하나님의 계절 p. 11-12  

           본서에서의 내용 배치는 p.610 –815까지의 분량으로 기재(記載) 되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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