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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26) - 나의 목회 수기 / 기독교사상 (2021.11호)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21-11-01 (월) 14:43 3년전 510  

                                                                  “ 아브라함의 후손의 삶을 좇아서 ”


                                                                                                                        최 부 옥 목사 /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무리교회 원로목사


o 들어가는 말 


뜻밖에 자기 증언의 자리에 섰다. 「기독교사상」의 요청으로 지금의 나를 새삼 드러내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70대 중반에 접어든 사람이지만,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기에는 난감하다. 그것은 그 동안의 세월과 삶의 모습들이 마치 ‘퇴적물(堆積物)처럼 쌓여서 형성된  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평생을 교회를 섬긴 목회자로 살아왔다. 따라서 그 동안 치열했던 삶의 여정을 잠시 말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의 양해를 부탁드린다. 


o 신앙과 신학의 족보 :  


군산의 선양동에서 태어난 나는 학생 시절 어머니께서 섬기던 금성교회에 나갔다. 당시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교회는 일제 적산 가옥들 중의 하나로 제법 고풍(古風)스러웠다. 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여서, 내 신앙 족보도 그 흐름을 타게 되었다. 교회 분위기는 비교적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에 힘쓰며, 은사 운동에도 뜨거웠다. 영적 열기가 살아 있었다. 


그 바람에 고교시절에도 각종 기도회, 부흥회, 산상기도 등에 열심히 참석했다. 방언 은사도 일찍 체험했다. 그러면서도 지역 교회들은 나라의 한일수교 반대 데모에도 앞장섰고, 매주 오후마다 초교파적으로 구국기도회를 진행하였기에, 거기에도 꾸준히 참석하였다. 개인 구원과 세상 구원의 양면적 흐름이 그때의 군산지역 교회들의 경향이었다. 


교회 내 학생회의 영적 활동도 비교적 활발하여, 그 열매로 우리 교회 친구들이 군산고와 남성고를 졸업 후 세 명이나 한국신학대학(한신대)에 입학하였다. 역대(歷代)급 목사후보생 배출이었다. 그래서 1968편은 나에겐, 한신중심-서울중심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해였다. 


o 나에게 한신대와 대학원의 6년간의 생활은 환골탈퇴(換骨脫退)의 시기였다. 훌륭한 교수님들과 신학과 세상 환경이 나를 거듭나게 하였다. 세상의 거친 파고들이 순진한 신학생을 씨름꾼이 되게 하였다. 군사독제 체제에 대한 저항도 활발했다. 학교의 큰 배경인 삼각산 인수봉은 나에겐 큰 바위 얼굴과도 같았다. 꿈과 이념, 인간과 세상, 신학과 한국교회의 다양한 현상을 놓고, 대화와 토론으로 날을 샌 때가 많았다. 옛 것들이 마구 무너져 내리는 시기였다. 


그 중에 나를 새롭게 구축하는 데에 유의미하게 영향을 준 스승들이 여섯 분이 있었다. 문동환 박사님은 기존의 기독교 신앙의 전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하게하셨다. 신연식 교수님은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시면서, 목자-학자-성자가 되라는 분수 넘치는 메시지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문익환 교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시편의 영성, 그리고 통일 세상에 눈을 열어주셨다. 안병무 선생님은 역사적 예수와 현장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셨다. 


박봉랑 박사님은 신학의 조직화에 눈을 띄워 주셨는데, 칼빈과 바르트 신학의 진수를 맛보게 해 주셨다. 덕분에 학부에서 졸업 논문상도 수상한 바 있다. 칼 바르트 박사는 대학원에서 논문으로 만난 스승이셨다. 내게 크고 놀라운 은총의 하나님에 가슴과 눈을 띄워 준 분이었다. 그 바람에 우리 부부가 스위스 방문 시에는 바젤의 유택(幽宅)까지 찾기도 했다. 이상의 교수님들은 서로 개성, 특성, 강점들이 달랐지만, 그들 세계를 수용해 온 나에게는 맛있는 ‘비빔밥 신학과 신앙’을 전수 받는데, 큰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었다. 천국에서 꼭 뵙고 싶은 분들이다.  


o 목회 여정(旅程) – 다양했던 45년의 세월


1) 학원 목회 - 대학원 졸업 후, 2년간을 보낸 곳이다. 충남 서천군의 판교에 위치한 충남성서고등학교의 전임강사로 부임하고, 그곳 판교교회의 부교역자를 겸한 목회 경험을 시작한 곳이다. 노회 직영이라서 당시 노회 내 가난으로 중고등학교의 정규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꾸준히 면학의 길을 찾아 그곳에 와서 수학하였다. 덕분에 신학교에서 배웠던 신학과 세상을 가장 따끈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목사 임직(1975년)도 그 기간에 받았다.


2) 군대 목회 – 공군 군목으로 만 3년을 복무(服務)했다. 당시에 전군의 군목단은 우리 기장 이 숫자상으로 가장 많았는데, 덕분에 선후배들과 타 교단. 타 종단의 동역자들과 교제와 교류가 활발했다. 부안의 의상봉, 대구의 팔공산, 광주의 제1전투 비행단에서 사역했다. 장기 요청이 본부로부터 있었으나, 현장 목회에 더 선호감이 커서, 예비역 대위로 마감하였다. 


3) 시골 목회 – 군산 원당교회의 청빙으로 5년간의 목회를 하였다. 오래된 교회였고, 특히 6.25 분단의 상처가 큰 곳이었다. 지역 청년들 전도와 기도와 말씀 운동에 힘쓰면서, 그게 지금의 원당교회의 든든한 기반이 되기도 했다. 마을의 90% 이상이 복음화가 되어서, 교회가 움직여야 마을이 돌아가는 형국이기도 했다. 근처에 군산대학교가 들어오면서 미래의 전망도 좋았으나, 해외 연수의 길이 열리는 바람에 그곳의 목회를 마감하였다. 


4) 해외 경험 – NCCK의 도시농어촌선교위원회의 추천으로 일본의 1년 과정인 Asian Rural Institute의 연수과정에 참여했다. ARI는 WCC와 일본교회와 사회의 후원 속에, 제3세계의 농촌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환경에 유익한 선진 유기농법으로 농사하면서, 지역과 농민을 살려내는 하나님 나라 일꾼양성에 앞장 선 학교이다. 일본 중앙부 도치키 현(縣)에 있다. 


세계 18개국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며, 농업과 일본 사회와 교회를 탐방하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보다 오래고 교세는 미약하지만(전 국민 1%미만), 자립심이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우리에 앞섰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 한국교회가 ‘잎은 무성하나 열매는 빈곤한 교회’라는 판단을 하게 되면서, 귀국 후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새 교회를 설립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게 개척교회를 시작한 계기였다. 


5) 도시 목회 – 서울 방배동에서 대원교회(1985-)를, 대치동에서 양무리교회(1986-)를 각각 개척하였다. 선교 중심의 교회를 목표했는데, 첫 교회는 그 비전을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판단 아래, 두 번째 교회를 다시 개척하였다. 기장 간판으로 강남 한 복판에서의 개척이 매우 힘겨움을 절감했다. 1990년에 일원동 시대에 들어가면서, 1996년에는 성전(聖殿)도 마련하였다. 성전 마련은 두 번의 빌딩들을 사고 파는 것으로서 해결했다. 그 사이에 첫 구매한 건물비가 세 배로 으르는 바람에, 큰 힘을 얻어서 교회가 2010년에 지금의 송파 가락동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작지만 강한 교회를 목표하면서, 우리는 은혜 중 적잖은 변신을 경험했다. 


o 성장과 성숙을 위한 씨름들


나에게 일원동 시대인 약 20여년의 목양 기간은 교회의 기반 형성과 목회자로서의 자기 역량 개발에 집중하던 때였다.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가 공교회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고, 또 목회자로서 자기소임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일에 기도와 고민을 해왔다. 그래서 그 기간에 씨름했던 주요 내용들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꾸준한 성지(聖地)순례 활동 – 나는 목회자의 해외여행 중에 가장 생산적이고 순도 높은 영성배양을 가져다 줄 여행은 성지 순례여행이라고 보았다. 성지순례는 과거로의 여행만은 아니라 성서 세계와의 만남이다. 아니, 밝은 미래를 열고자 하는 지혜로운 여행이기도 했다. 따라서 나는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성경이 달리 보이고, 증언할 이해도나 폭이 커짐을 절감했다. 교우들의 목회자의 순례여행에 대한 신뢰감도 깊어졌다. 그 순례지들은 매우 광범했다. 


내 경우는 성지여행이 안식년 대행이었다. 특히 시찰회 동역자들과의 해외연수 몫(사모들과)으로 함께 나가는 경우들이 많았다. 다녀 온 곳들은 대략 이랬다. 이스라엘-이집트-요르단-터키-그리스-로마-시리아-이란-팔레스틴-레바논-러시아-영국-독일-스코틀랜드-스페인-포르투갈-스위스-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폴란드-미국-캐나다 등이다. 그 중 몇 차례 반복한 곳들도 제법 된다. 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와 성지들도 둘러보았다. 큰 도움이 되었다.  


2) 장학숙(獎學塾) 운영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 – 도시교회는 농어촌 교회의 희생 위에 번영하였기에, ‘빚진 교회들’이다. 그 중에 가장 힘겨워하는 목회자들은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자녀를 둔 농어촌 교회목회자들이다. 자녀를 서울로 보내기에는 실력보다는 돈이 문제가 된 경우가 컸다. 그래서 대도시에 위치한 우리는 그런 농어촌 목회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무료 숙소를 제공하기로 했다. 공존, 공생, 공영의 정신으로 도농교회와의 선교 연대를 추구한 것이다. 


처음엔 그런 학생들이 많을 줄 알고, 숫자가 많아지면 시찰회 교회들에게 권유하여 함께 이 운동을 확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숫자는 많지 않았다. 물론 제법 적잖은 젊은이들이 혜택을 보았고, 우리 역시 그들 때문에 유익했고 행복했다. 교회 수련회로도 교류하곤 했다. 겨울 방학 때에는 시골 학생들의 서울 나들이에 임시 숙소로도 제공됐고, 해외 선교사나 그 가족들의 잠정 체류지로도 활용되곤 했다. 이런 운동이 서울노회 몇 교회들로 확대됨은 큰 기쁨이다. 


3) 총회 구역공과 및 동역자들과의 성서연구 모임 주도 – 기장은 초기부터 신학이 교단 교회들은 물론 한국교회와 역사까지도 주도해 왔다. 민중,민주,인권,환경,통일,평화,정의,일치,연합이란 굵은 신학적 주제들을 생산하고 확산시켜왔다. 이는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비롯한 훌륭한 선생님들 덕분이다. 그 바람에 기장 신학운동은 교리신학에 머물지 않고, 복음의 사회화를 통한 참여 신학 색채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숱한 오해와 비판도 받아왔다.


그런 우리가 절벽을 만난 때가 있었다. 90년대에 들어 나라에 민주화 시대가 열리자, 그 동안의 저항의 영성에 집중해왔던 총회 구역공과 내용들이 ‘옛 것이 되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그 다음을 향한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그 때의 우리는 말씀의 준비가 되지 못했다. 대비 없이 광복을 맞은 독립군들의 난감함이랄까-! 비상이었다. 대응할 말씀 준비가 시급했다. 그러던 중, 교육원에서 내게 총회 구역공과 집필 팀을 이끌 기회를 부여했다. 


위기 탈출의 방향은 어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말씀이 주어진 상황에 보조 역할을 해온 패러다임에서, 말씀이 상황을 조정하며 길 내주는 패러다임으로 자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말씀 연구에 사활을 걸고, 5년간 매달렸다. 이런 작업은 집필자들도 힘들었고, 교단도 힘들어 했다. 총회에서 구역공과 내용과 틀을 놓고 찬반토론을 한 적은 처음이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바로 이 길이 우리가 지켜내고자 한 모든 것들을 다 살린다는 믿음위에서 밀고 갔다. 그 때 함께 한 동역자들의 가슴은 뜨거웠다. 흔들림 없이 성경연구를 이어갔다. 그 열매는 달았다-! 기장 형(型), 말씀 목회의 씨앗들이 뿌려지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4)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에 참여 – 나와 교회는 공동체 속에서 자리를 잡아야 정상적이 된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지면, 해당 모임에 적극 참여하면서 균형 잡기에 힘썼다. 교단의 공식적인 연합체인 NCCK활동과 그 연합 활동에의 참여, 약 13여 교단으로 된 한국교회 목회자 개혁그룹인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일명-한목협)에의 참여, 그리고 본 교단의 갱신모임인 기장21세기목회협의회(일명-21세기목협)에의 참여 등이 내가 진.보수 교단인사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연대해 온 기관들이다. 교단장일 때는 카톨릭과 함께 교황까지 만났다. 


그러다보니 각 기관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한국교회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보람과 함께 아픔도 안고 기도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서 2015년엔 교단장으로 예루살렘과 로마교회를 방문하면서, 세계 기독교계 4대 종단인 유대교-이슬람-카톨릭의 본부와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다. 그 때 얻은 수확은 정말 컸다. 이들은 서로는 달라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공통의식 아래 하나였음을 확인한 일이었다. 이 시각은 내가 분열된 한국교회 각 교단은 물론, 타 종파들과의 대화의 소재로 삼고 말씀 준비하는 데에까지도 큰 유익이 되었다. 


o 기도해 오고 있는 과제들 


1) 교단의 정체성과 역할 강화 – 한국교회에서의 ‘기장은 작지만 강한 교단’이었다. 속칭 ‘기장이 타야 비행기가 난다’는 속어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기장은 마치 머리 깎인 삼손처럼 보인다. 정체성의 퇴락현상도 크고, 민중신학 이후의 더 나은 차원의 신학을 개발하는 일에 실패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엇을 만들어 치고 나가는 기상이 너무 약화된 느낌이다. 화살들은 있으나, 그것을 목표물까지 계속 쏘아댈 힘이 크게 부족하다. 그게 큰 고민이다. 


한목협도 예전만 못하다. 목협 1세대들의 퇴장과 함께 추동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교회들은 연합 대신에 오히려 더 분열했을 뿐이다. 우리 기장목협도 대동소이하다. 이런 중에 맞이한 코로나19로 인한 타격과 전광훈 중심의 극우 기독교세력의 발흥은 교회의 대사회 공신력에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저들은 이념중심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진정 새로운 신학과 말씀운동이 절실하다. 21세기의 한국교회를 선도할 결정적인 신학과 신앙운동은 과연 무엇일까? 


2) 교회의 신뢰 회복과 개신교 리더십 개발 –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예수의 얼굴과 마음을 세상에 보여 줄 교회와 리더십이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는 카톨릭에 비하여 많이 부족하다. 출신 대통령들을 비교해 보면, 확연하다. 왜 그럴까? 교회의 설교와 신앙교육의 패러다임의 차이로 보인다. 지금의 교회는 교회 일꾼은 잘 키워냈지만, 세상 섬김의 평신도 육성에는 너무 빈곤하다. 최고의 복음을 갖고, 최하의 열매가 부끄럽다. 


o 내게 드러난 은사들 


1) 저술(著述) 활동 – 2000년대 접어 들면서, 나에겐 책을 출판하는 일이 잦아졌다. 교단의 필요를 필두로, 교회 성도들의 양육과 성경공부 교재와, 특히 삼위일체력에 따른 세 본문 설교 자료집으로서의 전권(6권) 집필 등, 모두가 자의반 타의반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집필하였다. 그리고 총회장 사역기와 목회 은퇴와 함께 시작된 말씀목회연구원의 연구물 집필 등으로 어느 덧, 14권 이상을 출간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한다. 


2) 말씀목회연구원 창립과 삼위일체력 중심의 목회운동 – 은퇴 직전에 나는 뜻을 함께 한 후배 동역자들과 함께 말씀목회연구원(Word Pastoral Care Institute)을 설립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말씀연구에 함께 한 후배들이다. 말씀이 이끌어가는 목회와 설교를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교단이 제62회 총회에서 채택한 삼위일체론적 성서일과에 따라, 매 주일 세 본문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홈페이지(www.wpci.kr)를 통하여, 외부와 교류한다.


교회력에 따른 설교 자료집 전권출판기념식 때에 설교하신 박근원 박사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세계교회가 거의 손들어버린 삼위일체 교회력을 최부옥 목사가 이렇게 다시 살린 것을 보면, 삼위일체의 영이 최 목사에게 임하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 교회력 설교를 지난 십 수 년간 계속하면서, 이 성서일과가 한국교회 강단을 사유화에서 구원할 것이며, 삼위일체력은 분열과 일치를 못하는 한국과 사회와 교회를 통합하는 데에, 아주 대안적 자료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3) 한 달 살이 & 건강 돌봄 – 태국 치앙라이에서의 한 겨울 한 달 살이를 삼년 간 지속했다. 새로운 사람들, 환경들, 선교사와 원주민들, 그곳 교회와 문화 체험들이 나를 새롭고 풍성하게 한다. 건강 돌봄은 이곳 송파 위례 안에서의 매일 1시간 이상 걷기 등으로 해결하며 지낸다. 


o 소중한 선물들과 간절한 소망 

가족 이야기로 마쳐야 하겠다. 아내 오생근과 함께 가계를 꾸린 지가 어연 49년째이다. 풍상에도 흔들림 없이 동행해 준 아내가 갈수록 더 사랑스럽다. 남매를 두었는데, 딸은 교육 분야에서, 아들은 사회정책 분야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들의 건재가 우리 부부의 힘이다. 세 손주들을 생산하여 건강히 키워내고 있는 며느리의 소중함도 더할 나위없는 자부심이다. 


미력한 내가 교단의 제100회기 총회장 중책을 감당했던 일은 과분한 축복이었다. 그 때는 정말 힘든 때여서 활동량도 많았고 경험들도 많았다. 후대를 위하여 <총회장 사역기>로 기록을 남겼다(2017년). 앞으론 주어진 연구원 사역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양하고 풍성한 사역들을 계속 증거 하려고 한다. 교회의 일치와 조국의 평화통일을 깊이 소원한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길목에서 끝까지 주님께 귀히 쓰임 받고 싶다 *  

                                                                                                                < 기독교사상/ 2021.11호 / P79-89 에 기제된 내용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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