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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25) - 결혼 주례사 & 예비부부 교육 교안

관리자 2021-10-23 (토) 07:43 3년전 421  

결혼 주례사 / 김oo (신랑) - 김oo (신부)  


말씀) - ‘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막10:6-9절) 



주례사) “ 창조 질서를 이루는 가정이 되라 ” 


두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하여 부부로 부름을 받았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는 그 길이, 새 길이 되고, 문이 되며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디 낡은 옛 사람들의 관습에만 머물지 말고, 

‘부부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건강하고 창조적인 부부상을 보여 달라. 


O 이를 위해, 본 주례자는, 여러분의 도움을 위하여, 간단히 몇 가지 부탁을 드리겠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손과 마음에서 놓지 말고 살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여러분들이 부부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지혜와 총명과 문제 해결의 비법(秘法)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에, 하나님이 말씀에서 깊은 영감과 해법을 취하기 바란다. 


둘째, 부부간에는 충분한 대화를 나누며 살아라.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하나다. 하나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소통에 따라 결정된다. 

     부부는 서로를 돕고 세워주기 위하여 묶어진 존재이다. 

     그러기에 서로 말조심하여, 피차에 인격과 감정을 헤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상대를 가르치려는 마음이 아니라, 돕고 이해하려는 겸손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 잊지 마라. ‘둘이 하나 되기’에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 

   이제 둘이 살기 시작하면, 서로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할 거다. 


-  창조주께서는 두 사람을 묶어 주실 때, <패키지>로 묶어 주셨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패키지란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함께 받으라고 옵션으로 제시해 준 것이다. 

    예컨대, 여러분 두 사람(남-녀), 두 가정들, 두 가계 전통들, 종교, 가치관, 생존 방식들 

    모두가 서로 다른데-, 이제부터는 그 다른 둘이 서로를 ‘우리의 것으로’ 함께 받아서, 오직 

   ‘우리들만의 것을 함께 만들어 내라’고, 이 역사적인 결혼의 자리에로 불러내신 것이다. 


-  어찌보면, 요즈음 대유행하는 <오징어 게임>보다, 더 박진감 있고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  이 때에, 서로의 다름을 ‘틀렸다’고 보는 순간, 서로 죽는다. 

   상대의 다름 속에, 내 인생의 성숙과 풍성함이 담겨 있다고 보게 되면, 서로 살게 된다.  

-  특히 상대의 약점부터 뜯어고치려고 덤비지 마라. 차라리 장점을 열심히 고취해 주어라. 


-  결혼생활-, 장거리 여정(旅程)이 될 것이다. 상당한 인내(忍耐)와 기도(祈禱)가 필요하다. 

-  마치 농부가 가을 거지를 위하여, 긴 시간 참고 기다리듯, 잘 견디어 내야만 한다. 


-  특히 어려울 때가 중요하다. 병들고-사업에 실패하고-직장 생활에 시련이 올 때가 있다-! 

-  그 때에 바로 성숙한 부부의 진면모를 보여 줄 때이다. 그 때를 반드시 잘 살려내시라.   


셋째, 열려 있는 가정을 만드시라. 

     하나님 섬기는 일에 열려 있어야 하고, 부모 형제자매들에게도 열려 있어야 한다. 

     특히, 주변의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을 당하는 이웃들에게까지 섬김이 열려있어야 한다

     나만 살려면, 결국 나도 죽고 너도 죽게 된다. 만고(萬古)의 법칙이다. 

     하지만 모두를 살리려고 넓은 마음과 수고를 하면, 진짜 큰 인물(부부)들이 될 것이다. 



O 여러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과 여기 모인 모든 하객들의 큰 뜻과 바램이 분명히 있다. 

   바로 그 뜻이 무엇인지를 항상 물으며, 부디 새 세대의 귀감이 될 부부가 되기 바란다.  



                                             < 주례자 최부옥 목사 / 2021. 10. 16 > 




- <예비 부부교육 교육 교안> 


부부(夫婦)교육(예비) /  김o o –김 o o 예비 부부 /                   2021. 9. 4  15시


주제) “ 창조질서에 적합한 가정 이루기 ” 

말씀) 창 1:26-31, 2:18-25, 막10:1-12, 엡 5:21-25,33 


o 바람직한 남녀(부부)관계 정립을 전하는 말씀 

본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관한 기록이다. 창조 일정의 마지막 여섯째 날의 하이라이트인 인간 창조였다. 그것도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제작하신 것이다(26-27절). 


그 때, 창조주는 그의 깊은 뜻 속에서, 인간을 ‘같지만 다른 존재’인 남자(男子)와 여자(女子)로 만드셨다. 성(性)이 하나가 아닌 둘로 만드신 것이다(27.하). 이는 남녀가 존재(存在)로서는 상호의존적이며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어 살고, 동시에 기능적(機能的)으로는 하나님의 영역인 생명 창조(생육)와 번성하게 하는 일에도 동역하도록 제작하신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본 질서였다-!


그리고 그런 신적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창조주께서는 앞에서 창조하신 자연 생태계를 안겨 주시면서, 먹거리로도 삼고 관리하며 살도록 배치하셨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조물주는 크게 만족하셨다(28-31절). 여기에서 우리는 꼭 되새김해야할 몇몇 대목들을 살펴야 하겠다. 


1) 인간에게는 창조주가 부여하신 천부적(天賦的)인 인권(人權)을 담아 주셨다(26절). 이는 불가침적(不可侵的) 성격의 인권이다. 창조주의 형상이 담겨있는 신적 영역을 가진 대상에게, 누가 감히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는 한, 누구도 인권에 손대면 안 되는 이유이다. 인간을 해(害)치거나 죽이면, 그것은 하나님께 해(害)를 가한 일이다. 그렇다. 신이 부여하신 인간의 존엄성은 지고(地高)한 것이다. 우리도 인간을 보는 눈이 새로워져야 한다. 


본래 ‘형상’이란 말은 ‘세워 놓은 상’이나 ‘신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주변에서는 그 상을 볼 때, 그 상이 가리키는 장본인을 보게 하는 대리적 효과를 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당신의 형상대로’의 인간창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 전체 피조세계의 한가운데에다 세우셨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 점 때문에, 만물이 인간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작 진정한 불행은 인간이 인간을 제대로 못 보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이 어찌 같은 인간 생명을 해치고 죽일 수 있을까?


2) 신이 당신을 닮은 사람을 만드신 것은, 신이 마음을 다해 사랑할 대상을 인간으로 설정해 두셨음을 말한다(26절). 관계에서 가장 큰 힘은 서로의 닮음에 있다. 가족 사랑이 가능한 까닭도, 서로 닮았다는 데에 있잖은가? 발가락이라도 닮으면, 자기 가족이며 혈족이다. 배제나 차별할 수 없이 품고 살 존재요, 생사고락을 함께할 존재이다. 하나님도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셔서 사랑하신 대상이 바로 인간(人間)이었다! 손주를 사랑하는 조부모들의 눈빛은 언제나 빛난다-!  


3) 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소중함도 환기시켜 준다(27절). 이 대목은 남녀를 남편과 아내로 창조하신 바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하고 상호보완적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말한다! 왜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은 것인가? 이것은 남녀가 언제 어디서나 서로 연합해야 비로소 창조주의 온전한 형상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남녀의 분리, 즉 1/2만의 인간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결코 대변할 수 없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관계가 남녀의 연합임을 말한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본래적 미완성이며, 생육과 번성도 불가능하다. 남녀가 연합(聯合)해야 그 다음이 가능하다. 성(性)차별이나 억압은 반신(反神)적인 행태이다. 서로를 보완하고 협력할 때, 남녀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요즈음엔 ‘미투’(Me Too)운동이 활발하다. 그 바람에 사회의 고위급 인사들이 하루아침에 추락(墜落)한다. 남성 우위적 성차별과 성폭력에 오랫동안 짓눌려왔던 여성인권이신장되고 회복되는 모습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교회든, 인간 사회에서는 남녀가 서로 마음과 지혜와 힘을 합하여야 온전한 청지기로 살아가게 된다. 


4) 사람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닮은 인격과 품성이 마치 “씨앗”처럼 내재되었음을 알린다(26,요일3:9). 창조주는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 모양대로’라는 표현을 무려 3차례나 사용하셨다. 그 ‘우리’는 누굴까? 창조 역사의 주역으로 참여하신 성부-성자-성령 삼위이신 하나님이시다. 세 분이 서로 역할을 분담하고, 서로 신뢰하며,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협력하셔서 일체(一體)가 되어 서로에게 ‘최상의 좋은 관계’를 보여주신 하나님 말이다! 


그 영성이 우리 인간 안에도 심겨져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모든 것을 다 주신 적이 없다. 극히 일부분만 주셨을 뿐이다. 미진한 부분은 무엇으로 채울까? ‘너’를 통해서 채워간다. 이제 그 부분에 눈이 떠서, 개발되고 발휘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부분하셨다. 남녀와 부부와 가족과 교회공동체와 세상에서까지 ‘창조주의 더불어 영성’이 발휘된다면, 창조주의 기쁨과 반가움은 최상(最上)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최상의 좋은 관계형성을 위한 헌신의 자리에 부부라는 이름으로 부름을 받았다. 



o 오늘의 말씀들은 첫 사람들의 부부 맺기와 관계설정에 대하여 말씀한다(21-24절). 그러면서 복음서에서는 부부의 이혼 문제가 곁들인 부부 관계의 성서적 이해를 말씀한다(막10:1-9절). 


에베소서에서는 또다시 부부 관계를 말한다(5:21-33절). 특히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받고 사는 교회 성도들에게서의 부부란 인식은, 세상 차원의 부부 인식과는 차별화되어야함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족관계 특히 부모와 자식관계까지 나아가서, 서로에게 유의할 사항들을 제시하여 주었다(엡 6:1-4). 결국, 가장 관계의 핵심은 부부관계에 있음이 드러났다. 


세 본문 공히 ‘부부는 둘이 한 몸’임을 강조되고 있다(창2:24,막10:8상,엡5:31). 그게 진리임을 말한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어서 하나 됨을 이룬 곳이 가정이며 부부이다. 그런 점에서 남편은 주도권을, 아내는 협력권을 함께 행사하여 공동의 성취와 유익을 이루어야 되는 사람들이 부부이다. 서로 경쟁하거나 견제하거나 비난하는 모습은 참부부의 모습이 아니다. 부부 모두의 장점을 함께 모아, 가정과 가족의 역량을 극대화하며 살아가야할 곳이 가정(家庭)이다. 그래서 받은 복이 자기 가정의 담을 넘어 이웃에게까지 가야 한다.


남자들의 선 자리가 중요하다. 여러분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부부의 관계가 튼튼하게 유지되도록 깨어 사셔야 한다. 아내한테 신뢰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남편들을 상상해 보라. 집에서부터 행복하지 못한 마음으로 세상일에 뛰어들었으니, 어찌 세상 일이 활발할 수 있겠는가? 외롭고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출근시키는 믿음의 아내들은 남편 살리기에 남다른 기도와 지혜가 발휘되도록 기도하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창조주가 우리 가정과 부부, 가족관계에 부여하신 깊고도 신비한 내용들을 잘 배우고 익히며 살아야 된다. 그게 지혜요 자산(資産)이다. 무식하여 부부의 모든 관계를 잃게 되면, 평생 열심히 벌어두고 쌓아둔 것들 모두는 한순간에 날릴 것이다. 행복과 재물을 멀리서 찾으려 말라. 부부와 가족에게서 먼저 찾으라. 기초가 든든한 사람이 장거리 선수요, 인생 승리자이다. 주의 말씀과 교회가 이를 돕는다. 이제 이런 제반 관계를 더욱 익혀보자


o 서로에게 ‘돕는 배필’로 부부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

본문은 첫 인류인 남녀의 결혼의 기원을 다룬다. 시작(아담)은 사람에 대한 조물주의 사랑과 배려에서 나왔다. 사람의 홀로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신 것이다(18절). 그래서 그의 짝을 만드셨다. 서로의 빈 공간을 채워주고, 하나 되어 창조주의 새 역사를 이루어갈 존재를 디자인하고 제조하신 것이다. 이게 바로 ‘내 짝은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고백할 이유이다. 


남녀는 서로 만나서 결합하고 협력하는 삶이 될 때, 창조주의 온전함에 들어가게 된다. 즉 조물주는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전체의 절반인 1/2만 주셨고, 그 나머지 1/2은 서로 짝을 만나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기에 남녀는 서로의 돕는 배필(配匹)을 만나기까지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기에 인생(人生)은 자기 짝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여호와께 은총을 받은 자가 결혼도 한다(잠18:22절). 씨는 밭이, 밭은 씨가 필요하잖은가!


1) 돕는 ‘배필’이란 용어를 보자(18,20절). 영어표기(表記)는 ‘helper’이다(NIV). 이는 성령을 소개하는 내용 중에 하나로 사용될 정도의 비중 있는 표현이다. 에베레스트 등반 시에 자기 생명을 지키고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에게 부여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부부는 서로 상대를 ‘내가 도와야할 사람’으로 인식해야한다. ‘나를 살릴 사람’이란 마음으로 서로를 받으면, 그 부부는 절대 성공한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를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할 사람으로 접근하면, 큰 불행을 만 나고 파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결혼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2) 배필을 만들 때의 신비한 장면도 나왔다(21-22절). 남자를 잠들게 하신 후(마취의 기원),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에 살로 채워서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이 점은 남녀가 빼와 살로 만난 존재란 말이다. 서로의 보완으로 정상적 인간이 되게 하셨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본질적으로 남녀는 닮음과 감쌈과 돌봄의 균등성을 가진 존재임을 말한다. 


3) 인간은 낯선 것에 힘들어 한다. 하지만 닮은 것에는 마음을 연다. 자기와 다르지만 닮은 신비한 이성으로서의 여자가 자기 앞에 등장하자, 남자는 즉각 환호(歡呼)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23절). 그래서 남녀의 동거(同居)가 이루어졌고, 결혼생활에 들어갔다. 그 둘의 혼인 주례자인 창조주의 선언이 있었다-‘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한다’(창2:24,막10:8-9,엡5:31). 


4) 부부의 결혼 생활은 서로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공유한 자연스러움 자체였다(25절). 

5)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과 배려도 튼튼했다.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고 관리할 권세도 주시면서, 사는 데 외로움이나 핍절함이 없도록 넉넉하게 하셨다(19-20절,잠31:11참조).


o 가부장적(家父長的)이 아닌 공속(共屬)관계가 기초된 부부여야 함을 전한 복음서 

사람이 자기 배우자를 버리는 문제(이혼)를 두고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온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셨다. 그들의 질문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느냐’면서 타당성 문제를 제기하였다(1-2절). 당신을 시험하는 것을 아신 주님은 모세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를 되물으셨다. 그들은 모세의 신24:1,3의 근거를 들어, 증서를 써주고 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답하였다. 


곧 그들의 모세 인용에는, 남편이 아내를 임의(任意)로 좌우하였던 당시의 사회적인 경향을 이용하여, 자기들도 아내 교체의 정당성이나 가능성을 확인받으려고 한 듯하다. 당시에는 그런 가부장적 부부관계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건강한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창조질서의 심각한 훼손을 불러올 완악함이 각 가정과 종교에까지 자리하고 있었다(5절). 그런 문제를 간파하신 주님은, 창세기에 나타난 제대로 된 부부관계를 상기시키며 일깨우셨다(6-9절).


1) 우선 주님이 창세기에서 불러들여 인용(引用)하신 말씀이다. ‘창조 때에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고, 결혼하면 그들은 부모 곁을 떠나서 한 몸이 된다. 둘이 한 몸을 이룬 것이다(창2:24). 그런 짝 지음은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기에, 사람이 감히 나누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부부의 이혼이 불가함을 천명하신 것이다. 


‘짝지어 주신’이란 ‘쉬네쥬크센’(헬)이란 ‘멍에를 같이 하다’는 뜻이다. 곧 부부는 하나님이 묶어주신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부여된 과제를 감당하기 위하여 일하는 공동(共同)사역자라는 말이다. 즉 서로에게 속하는 공속(共屬)적 관계에 들어간 것이기에, 일단 부부가 되면 인간이 임의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선포는 곧 부부관계 유지의 핵심이 될 하늘의 법이다!


2) 그런데도, 현장의 가정들은 이 규정을 위반한 이탈(離脫)로 신음하고 있다(10-12절). 배우자를 버리고 다른 이성에게 재혼하는 남녀들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주님은 책임(責任)을 져야한다는 말씀으로 대신하셨다. 즉 하나님이 허락하신 법적 배우자가 아닌 남녀의 행음(行淫)에 의한 탈선적 행위이기에, 간음죄로 묻겠다고 하셨다.  



o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기반한 가족 관계를 이루라는 서신서

여기에도 부부관계와 가족관계에 집중한다. 특히 교회에 속한 크리스쳔 부부와 가족들이 가져야할 그리스도교적인 가치들을 기반으로한 부부와 가족관계가 되어야함을 강조한다. 


1) 크리스쳔 부부의 상호관계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던 차원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인 사랑과 복종의 관계를, 부부 관계에 그대로 적용시켰다. 참된 부부는 말씀으로 변화된 윤리적인 생활에서도 성숙하게 대처해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2) 아내는 교회가 머리인 주님께 복종하듯, 자신의 머리로 세우신 남편에게 복종하고 존경도 해야 한다(22-24,33절). 이는 주님은 교회의 머리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성서의 근거에 근거한다(22-24, 창3:16, 딤전2:11-12등 참조). 남편은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25-28절). 이런 점은 매우 특별하다. 주님의 사랑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아가페’ 사랑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쳔 남편의 아내 사랑은 수준을 주님의 교회 사랑수준으로까지 목표하라는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혁명적인 발상인가! 


3) 이렇게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일, 곧 성서적 부부관계를 이룰 때, 큰 비밀(祕密)이 있음을 예고한다(32절).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차원에서 발생하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포함하는 표적들을, 가정과 가족(부부) 사이에서도 맛볼 수 있음을 암시한다. 


4) 자녀들은 어떠한가?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는 십계명 중 인간에게 부여된 첫 계명으로서, 땅에서의 형통과 장수의 복이 약속된 것이다(6:1-3). 부모들에게도 엄히 요구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여야 된다(4절). 


o 결론 - 창조질서를 좇는 예수 가정을 이루자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기초단위는 가정이요 가족이다. 가정이나 가족이 무너진 곳에서의 세상의 번영이나 안녕은 신기루일 뿐이다. 그런데 마귀는 가정과 가족의 파괴와 붕괴를 집중적으로 노린다. 요즈음 얼마나 가족 윤리와 가정 파괴의 소식이 많은가! 특히 부부가 이혼하고 또 재혼하는 과정에서 버림당한 아이들의 탄식과 신음이 하늘을 찌른다. 상처 받은 부모들로 인하여 죽임당한 아이들이 너무 많다. 지옥이다! 어디 그뿐인가?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의 미래에 마치 시한폭탄처럼, 짙은 검은 구름들이 끼어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창조질서에 눈이 뜬 믿음의 가족들의 역할이 그래도 희망이다. 창조질서를 제대로 훈련받은 예수의 가족의 역할이 그래도 희망이다. 부부를 살리고 자녀를 생산하고 잘 양육하자. 그래서 이 어두운 세상까지도 밝힐 가정과 가계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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