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강연 -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 제3차 전국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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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주제강연 내용은 지난 10월 11일(월)에 개최된 본 연구원의 제3차 전국대회 주제강연 내용 전문입니다. <주제> - "하나님의 구원(Salvatio Dei)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 (창12:1-4, 눅10:25-37, 갈3:5-9) 이 내용은 코로나19로 인하여, 큰 곤경에 빠진 한국교회의 내일을 열기 위한 세 본문 중심의 특별 강연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에게 일찍이 주셨던 축복 속에 담겨진 구원의 비밀들이 어떻게 전체 성경 66권에 광범위하게 제시되어 있는 지를 분석하면서, 건져낸 구원론에 관한 소중한 증언입니다. 큰 유익을 얻기 바랍니다. <주제강연 전문>
“ 하나님의 구원(Salvatio Dei)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 - 창12:1-4, 눅10:25-37, 갈3:5-9 - 최부옥 목사(말씀목회연구원장) o 들어가는 말 지난 2년간 우리 모두는 코로나19를 말하지 않고 지난날이 없을 정도의 나날들을 살아왔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촌의 기존 질서도 대 변혁을 겪어왔고, 우리의 삶의 현장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거리 두기’의 일상화로 이웃과의 관계는 더 멀어졌고, ‘마스크 쓰고 살기’로 교제의 삶은 봉쇄당했다. 비대면, 재택근무, 온라인 강의와 학습과 모임들이 일상화되면서, 아이들 중에는 ‘왜 학교에 가야하느냐’라는 의문을 던질 정도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 모임을 최상위의 기본 질서로 삼아온 우리 한국교회의 시련은 너무도 컸다. 특히 ‘모이는 교회에 구원이 있다’고 줄곧 역설해 온 한국 개신교회가 안게 된 피해 상황은 상상을 넘는다. 각종 집회가 통제되면서, 예배의 기반이 무너진 듯했으며, 교우들에게는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괜찮네?’라는 신호를 심어줄 정도가 되었다. 성도들에게 ‘모이고 헌신하라’며 일관되게 강조하던 목회자들의 목회와 설교 방향에, 치명적인 장애를 만난 것이다. 이에 참지 못한 일부 교회들은 방역 당국과도 상당한 마찰도 불사하면서 집회를 강행하기도 하였다. 그 바람에 교회 중심의 확진자들이 나와서, 교회가 사회로부터 ‘코로나 번식의 숙주가 아니냐’라는 따가운 눈총도 받기도 했다. 그렇잖아도 한국 종교들 중 가장 사회적 신뢰도가 낮은 개신교가, 이런 일들로 더욱 불신을 받게 된 셈이다.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교회의 힘은 계속 줄어들지-, 세상에의 신뢰는 더욱 잃고 있지-, 실로 가슴 아픈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정말 외부와 싸우려면, 내가 가진 진정한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힘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랑의 힘이 있어야 비로소 상대가 누구든 우리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 저 머리 깎인 삼손과 흡사하다. 사랑이 바닥이다 보니, 교회가 주장하는 그 어떤 소리도 힘을 내지 못한다. 자업자득이다! 대체 무슨 힘으로 싸우겠다는 것인가 진정 지금은 자성과 회개가 필요한 때로 보인다. 지금이 바로 우리 내부의 과제들부터 풀고, 진정한 힘을 충전하는 일에 집중해야할 때이다. 코로나19가 우리 모두에게 더 이상 저주가 아닌 축복이기를 바래서라도, 지금은 우리가 깊이 자성하며, 허물어지고 무너진 우리 내부의 진영을 복구시켜야 한다. 지금은 영광의 내일(來日)을 위해, 우리의 무기(武器)들을 예리하게 갈아야 할 때이다. 머잖아 코로나 시대도 지날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보다 성숙한 우리의 모습이 나오지 못하고 예전의 낡은 것들로 세상을 대하려 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지금보다도 더 혹독히 몰락하는 교회의 시대를 만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제 우리 생명들 모두를 새롭게 구원해낼, 영적 삶의 방식(뉴 모럴)들을 생산해야 한다. 즉 그 생명 구원을 위한 <말씀의 백신>을 제작하고 세상에 공급하며 투약해 주어야만 한다. 그 시작은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경청하는 데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o 먼저, 땅과 하늘의 탄식(歎息)과 신음을 들을 수 있어야 (롬6:13-17 참조) 우리의 대선각자(先覺者)인 바울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그 경계선(境界線)에 선 존재들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에서 방황하는 존재가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의 영광을 대망(待望)하면서, 현재의 혼란을 분별하고 고난과 시련을 견디며 극복해가야갈 존재로 보았다. 그의 증언들을 확인한다. ☞ “현재의 고난(苦難)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榮光)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다음의 세 가지 부류의 탄식(groan)소리를 듣고 반응할 수 있는 영적 감각(感覺)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롬8:22-27).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은 그 탄식에 반응하고 기도하면서, 성령과 함께 행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세 가지 탄식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피조물(the creation)의 탄식이다(19-22절). 그들은 원래 창조주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던 생명체들이었다(창1장. 참조). 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주관하던 첫 사람들의 타락으로 함께 에덴에서 추방되면서, 썩어짐에 종(從)노릇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탄식은 거기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을 학수고대한다. 복락원의 길, 창조질서의 회복의 문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 만이 열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갈5:5, 빌3:20절). ☞ 코로나19의 판데믹은 이런 피조물의 탄식의 절규를 확인하게 해준 실체이다. 그리고 최근에 지구촌 전반에 걸쳐서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이상(異狀) 기온과 각종 천재지변에 따른 각종 재해 현상들은, 피조물들의 호흡 자체가 얼마나 힘들어졌는지를 잘 확인해 주고 있다. 초대형 산불, 대홍수, 빙하붕괴, 수온(水溫) 상승, 지진, 사막화, 흉년, 가뭄, 바이러스 전염병 확산 등등-, 실로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그들의 소망은 깨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출현(교회)에 희망을 둘 뿐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the children of God)의 탄식이다(23-25절). 이들은 성령 세례를 받은 무리들로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지만, 그들을 에워싼 삶의 어두운 환경과 대적들의 거대한 힘 앞에서 그들 역시 힘에 부친 자신의 부족함에 탄식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하늘의 소명도 알고, 믿음으로 구원도 얻었으나, 대장(大將)되신 주님의 응원(應援)을 인내 속에서 고대해야할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타락한 세상에 대한 승리는 예수뿐이어서, 오직 그의 오심만이 희망으로 본다. 셋째는 성령(聖靈-the Spirit)의 탄식이다(26-27절). 사실 ‘성령의 탄식(歎息)’이란 말 자체가 낯설다. 왜 성령께서 탄식하시는 걸까? 본래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뿐, 그 뜻의 변경을 구하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본래 하나님의 뜻이 그의 택하신 자녀들을 통하여, 피조물과 만물의 회복과 구원을 이루려 하신다는 데에 있음을 잘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성령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더욱 응원을 보낸다. 하늘 아버지께 온전한 기도들 올릴 수 있도록-,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자녀들로 온전히 서도록-, 그리고 거룩한 능력이 행사되도록 깊은 탄식 속에서 간구(懇求)하신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힘이 되는가! 이런 탄식과 신음에 귀를 기우리면서, 이제 우리 신앙의 기반이 될, ‘하나님의 구원(Salvatio Dei)’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 주제는 코로나 이후에 우리가 세상에 보다 새롭게 드러내 보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고, 교회의 얼굴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내어놓는다.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더욱 다진다는 마음으로 내어 논는다. 이 구원론의 주제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와,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들의 영으로서 교회를 세우신 성령께서 일관되게 제시하신 것이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꿰뚫어 우리에게 핵심 구원론으로 제시하셨던 내용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본 주제에 관련된 세 본문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신앙 역사와 그 역사적 흐름들을 좇아가 보려고 한다. 분명히 우리의 힘의 근원과 구원의 양대 산맥(山脈)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o 아브라함이 받은 복(福)에서부터 담겨진 구원의 이중적 틀 : 아브라함이 누구인가? 그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뢰는 신구약 성서 전체에 가득하다. 복음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임을 첫 장 첫 절에서 선언할 정도이다(마1:1). 그의 존재는, 예수께서 소개하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보면(눅16:24-31), 정말 대단하다. 그가 하늘 심판대에서, 거지 나사로에게는 자비를, 부자에게는 심판을 선언할 정도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땅에서의 그의 존재감(存在感)은 여전하다. 세계를 움직이는 지금의 4대 종교들(개신교,카톨릭,유대교,이슬람) 모두도,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祖上)이라고 말하는 데에, 전혀 이의가 없다. 그의 그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신뢰는 어떻게 얻은 것일까?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고향-본토-친척-아비의 집(메소포타미아)을 떠나 내가 지시 할 땅(팔레스틴)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과(1절)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는 여호와의 약속(2-3절)에 온전히 순복(順服)하는 믿음을 보였기에, 그런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그가 자기 앞에 놓인 종교-종족-문화-거리의 장벽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福)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파악해야만 한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들어있고, 누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려는지를 밝혀 줄 확실한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받은 복들에는 두 가지 차원의 묵직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 2절은 아브라함 자신이 복의 뿌리요 시작이고 근원이 되는 복이다. 3절에는 그와 그의 후손이 받은 복을, 세상-이웃과도 나누어서 모두가 함께 그의 복을 누리며 살게 하는 복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복들을 주실 때 함께 묶어주셨다. 조건부의 성격을 담는 것들이었다. 마치 package-일괄처리처럼, ‘서로 성격이 다른 차원의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안겨 주셨다. 그 바람에 아브라함은 복을, ‘선택의 여지가 없는 패키지 복’으로 받은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나? 그가 만일, 그 중에 하나만 골라서 받겠다고 하는 순간, 그는 다른 하나까지도 아예 못 받게 되는 그런 조건부 성격의 복을 받아버린 것이다. 바로 ‘All or Nothing’(전체냐 전무냐의 결단을 해야 되는 복)이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이 안겨 주신 복을 받으면서, 생각 밖에 큰 책임(責任)과 부담(負擔)도 끌어안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진정 ‘복 받는다는 것부터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복은 좋지만, 그러나 거기에 걸 맞는 (사랑의) 책임과 부담을 함께 감당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안겨 주신 복의 실체임을 알게 되었다. 이 점에는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리라’(2절)는 첫 번째 복을 살펴보자. 인간이 스스로 복의 주체인 근원과 뿌리가 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능하기도 하다. 언제인가?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질 때이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절대 필수이다. 어느 정도의 사랑인가? 십계명과 예수님으로부터 요구된 수준, 즉 ‘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지시만 따르면 된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신6:5,막12:30참조). (☞ 예배와 기도와 묵상의 기원을 본다) 그러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3절)는 두 번째 복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내가 받은 복을 나 혼자만 누리지 아니하고, 받지 못한 세상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는 일이다. 곧 ‘이웃 사랑’의 복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능한 것인가?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곧 내 마음을 열고, 펴서 살려는 분명한 의지만 있으면 된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 주신 복은 바로 그런 성격의 복이었다! o 그 복(福)을 이중적 계명의 틀 속으로 묶어 주신 이유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그에게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주셨을까? 인간에게 하나 만이라도 임의로 택할 수 있게 하시면 안 되었을까? 안 되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에게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셨다! 우선 하나님이 보신 인간은 한없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어서, 복을 받으려는 열정은 간절하지만 나누어주려는 마음은 한없이 인색(吝嗇)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둘을 당신과의 약속(約束)으로라도 견고히 하나로 묶어 놓아야, 비로소 인간은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존재가 되어서, 하늘 백성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는 이중(二重)의 계명을, 처음부터 하나의 구원의 옵션으로 묶어서 제시하신 것이다!! (☞ 이는 성서의 종교, 히브리 사상이 일원론적(一元論的)으로 흐른 이유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받은 그런 패키지 복은,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실천을 전제로 한 복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런 하나님의 옵션 제시에 ‘아멘’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기뻐하셨다. 그 때부터 그가 받은 복의 실체가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서 서서히 세상에 드러났다. 그 복의 특징(特徵)은 이런 것이다. (☞ 선교와 섬김과 교제와 나눔 등이 나오게 된다) 곧 그들이 받은 복은 모든 생명체들의 머리와 두뇌(頭腦)가 되는 복이었다(신28:13참조). 이삭과 요셉을 보라! 원주민들이 못 보는 것들을 유목민(nomad)요 나그네인 그들이 먼저 보았고, 상대가 알지 못하는 것을 먼저 알고-보고-듣고-말하게 되면서, 세상 전체를 그리로 안내해가는 주역이 된다. 그 바람에 자신들도 살고 이웃들도 살리는, ‘더불어 생존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 생략 (일부)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은, 그 후 모세가 등장하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서 그 실체를 드러냈다(요4:22참조). 모세와 예수,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로서, 모세는 율법을 동족에게, 예수님은 복음을 세상 만민에게 전하셨다. 인류는 바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원의 도리’를 접하면서 그 말씀의 빛 아래로 다모여 들었다. 그 빛 아래에 오는 이들은 누구나 눈과 귀와 입이 열리는 기적과 구원을 맛보면서, 이 세상과 이웃을 선도하며 사는 주역들이 되었다. o 역사의 부침(浮沈)을 겪어온 이웃 사랑 – 이스라엘 신앙의 실패의 결정적 요인 문제는, ‘이웃 사랑’이란 것이 말이나 생각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그 어려움을 체득해야만 나올 수 있는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꾸준한 훈련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웃사랑의 실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핏줄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그 모델로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의 ‘이웃 사랑’은 어디에서부터였나? 매우 낮은 곳과 밑바닥 에서부터였다. 시작은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 부터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노예 생활을 하면서, 짓눌리고 빼앗기고, 나그네도 되어서, 헐벗고, 병들고, 두들겨 맞기도 하며, 그래서 주변에서고통 당하는 숱한 이웃들의 아픔에 공감(共感)할 줄 아는-, 소위 ‘좋은 이웃’이 되는 실전(實戰) 훈련을 참으로 치열하게 받았다. 그 후 그들이 가나안의 안정된 생활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들 가슴에는 경고용 딱지 한 장이 늘 붙어 있었다. ‘너희는 종(從)이었었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 그것을 망각하면 내가 멸(滅)하겠다’(신15:15을 비롯한 신명기 전체). 그러면서 그들의 새 땅에서의 삶에는, 언제나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과부-나그네들, 그리고 경제적 약자인 제사장-레위인을 돌보는 생활들이 옵션으로 부과되었다. 실제로 그런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잘될 때, 이스라엘은 항상 건강하였다. 그런 건강했던 이스라엘이 비극에 빠져 든 것은, 그들이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패키지의 복들을 저버릴 때였다. 그것은 그들이 사사 시대를 거부하고, 세상의 왕정체제를 택하면서, 권력의 맛- 돈의 맛- 전쟁의 맛에 빠져들어, ‘하나님 사랑’만 붙들고, ‘이웃 사랑’을 외면한 데서 나왔다. 곧 인간을 신분과 소유와 환경에 따라 차별하면서 부터였다. 하나님은 격노(激怒)하셨다. 그것은 당신과의 계약 위반(違反)이었고, 아브라함 자손임을 포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 일들, 곧 약자를 착취하고, 불의로 재물을 모으며, 힘없는 자들에게 군림하면서, 당신 앞에 나와서는 마치 흠 없는 자처럼, 뻔뻔하게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제사를 역겨워하셨다(선지서들). 당신을 성전 안에서 제물이나 받고, 복이나 베풀어주는 신으로 취급하며, 세상과 인간의 일과는 상관이 없는 신처럼 취급하는 행태를 비난하셨다. 인간이 二元論에 빠져든 요인이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종교를 죽은 종교로 만들었고, 백성들을 길 잃게 한 것이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나라가 남북의 분열과 패망으로 이어졌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우상종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참혹한 멸망을 당했다. 그들의 잔인한 혼혈 정책으로 인하여 문제의 사마리아인들이 생산되기도 했다. 남왕국 유대는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70여년의 서러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어지는 제국들의 식민 백성으로, 주권(主權)상실의 나락 속에 빠져서 신음하며 살아야 했다. o 예수 오심과 성령의 강림 – 무너진 구원의 방정식을 복원시키기 위하여 예수께서 왜 오셨나? 그런 잘못된 얽힘으로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고자 오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처음의 복의 구도’를 회복시키고자 오셨다. 그 일 때문에, 주님은 당시에도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고 이웃사랑은 외면하며, 편협한 종교관으로 수많은 죄인들만을 양산하던, 당시의 유대교도들과 치열하게 싸우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뽐냈지만, 주님은 신앙과 삶을 분리시킨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사정없이 책망하셨다(요8:44 참조). 그 유명한 황금률(黃金律-Golden Rule)인, ‘무엇이든지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니라’(7:12절)를 보라. 이 내용은 대접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마음과, 대접하여야 하는 의지적 마음을 절묘하게 함께 묶어주신 말씀이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신 복의 패키지적 실체를 연상시키신 내용이다. 그래서 황금률(절묘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황금률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핵심 계명으로서의 ‘이웃 사랑’을, 최종적으로 묶어낸 내용이었다(5:38-48참조, 22:36-40, 눅6: 31, 롬13:8-10. 갈5:14 참조).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을 첫째로, 이웃 사랑을 둘째로 지키는 데에서, 영생(永生)이 주어질 것임을 천명하셨다(막12:28-31참조). 그러면서 당신 자신은, 친히 이웃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모델이 되셨다. 그들 유대 종교와 사회가 아예 외면했던 죄인들, 여자들, 아이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 성소수자들(마19:12,사56:3-5참조), 이방인들과 같이, 삶의 그늘진 영역에 소외되어 있는 자들을 친히 찾아가, 교제하시며 그들의 친구로 사셨다. 하나님께서 진정 누구의 편에 계신 지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셨던 것이다. 당신의 추종자들에는, 그런 소자들을 선대(善待)한 일들이 곧 당신에게 한 일이라면서, 주님은 세상의 약자들과의 연대(連帶)를 계속하셨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여건을 갖고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영벌(永罰)이 있으리라’고도 경고하셨다(마25:41,45참조). 반면에 죄인 세리 삭게오의 이웃 사랑에로의 회심을 아브라함의 후손 다운 행위라고 높게 평가하셨고(눅19장), 오늘 복음서 본문의 강도만난 이웃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도 ‘선한 이웃’이란 높은 평가를 내리셨다.(그런 평가가 정통 교인들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행위들을 비판하면서 나온 주님의 평가였음을 주목하자). o 교회 시대를 여신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예수의 복음을 앞세워 세상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복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실천하는 교회 공동체들을 온 지구촌에 세우셨다. 본문의 갈라디아 교회도 바로 그 뜻으로 세워졌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을 통한 구원론으로, 교회를 흔들던 거짓 교사에 넘어가면 안 되었다. 교회가 율법을 쫓으면 유대인만을 위한 ‘적은 무리’가 될 뿐이지만, 예수의 복음을 좇으면 만민(萬民)을 살리는 ‘주님의 참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o 흔들리는 교회, 길을 잃고 자기 방어에 급급한 한국교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믿음과 구원의 복들을 어떻게 전승받았는가? 우리가 꼭 지켜내야 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소중한 힘들을 사탄에게 빼앗긴 것은 아닌가? 이 세기적 대재앙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의 부족에서가 아니라, 이웃 사랑이 부족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우리 교회들은 진정 큰 복들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주고 나누어야할 이웃과 세상은 찾지 못한 체, 헤매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고통 하는 이웃들을 얕잡아 보고,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담을 쌓고 배척하던 저 유대 종교인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칭찬은 안정된 자리에 있고, 규모가 크고, 가진 것들이 많다고 받는 게 아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지침을 제대로 실천할 때 받는다. )) 작가 김훈이 쓴 소설 <흑산(黑山)>을 보면, 우리 역사에 들어온 초기의 교회에서 예수의 복음이 어떻게 백성의 삶속에 자리하였는지를 소개하는 글이 있다. 말씀을 들은 부자 교우들이 자신의 소유를 자기 종들에게 나누어주고, 종의 문서를 포기하고 그들에게 넘겨주던 일들이 나타난다. 교회가 세상에 새 구원의 질서를 들여다 놓았던 모습이었다! 처음엔 미친 짓 같으나, 그게 결국 당시의 어두웠던 세상을 살려낸 것이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다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성령이 그런 이유 때문에 교회 공동체를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인간들을 사랑하는 일까지도 보여줄 때에 비로소 입증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다가, 원수(怨讐)까지도 사랑하기를 요구하신 일이 있다. 그런 정도의 사랑이 없는 하나님 사랑은, 왠지 공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의 분리는 신형 이원론이고, 보이지 않는 이단에 불과하다. 교회를 주님의 교회가 아닌 인간들의 교회로 전락시키는 죽은 교회가 되게 하는 일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의 교회일 수 없다. 구원은 불구의 신앙에서 나올 수 없고, 일원론적 신앙의 말씀과 실천에서만 나온다. 우리는 저 마귀가 장악한 엉성한 이원론적 교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참 성도들이 모인 예수의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 o 코로나 이후에 선포된 구원의 메시지 – 세상과 이웃 사랑에 집중해야 코로나 이후의 한국교회는 재건(再建)에 많은 공력을 들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을 제대로 전하고 보여주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날개가 다시 정상적으로, 그리고 활발하게 날 수 있도록 대비하여야 한다. 이 일은 시급하다. 특히 이웃 사랑의 말씀-정신-훈련-섬김의 체질 형성을 위하여 우리 교회들은 보다 많은 낮아짐의 훈련과 기도에 열정을 모아야만 한다. 예컨대, 아브라함의 축복에 담긴 소명을 확실히 이해하는 일과, 예수의 제자들에게 부여된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는 선교적 주제를 의식화(意識化)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변화를 견인할 주체로서의 소명(召命)의식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훈련을 집중해야 한다. 1)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성부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두 가지 차원에 눈이 뜬 인물이기를 원하셨다. 첫째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일이었다. 그래서 복의 저장소(貯藏所)가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다. 그런 후에 그가 받은 그 복을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고 베푸는 자가 되는 일이었다(창12:1-3). 그 바람에 그와 그의 후손들의 평생의 목표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도 이제 그 일을 제대로 해보자! 2)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만 살았던 갈릴리 민중들을 당신의 제자로 택하신 성자 예수님도 보라. 주님은 그런 보잘 것 없는 무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는 높은 차원의 삶의 새로운 소명(召命)을 주셨다(마5:13-16). 그 때 그 소명을 부여받은 제자들로서는 세상과 이웃이란 큰 덩치를 끌어안고 살아가기에는 분수에 넘치고 또 범접하기에는 한없이 초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명에 순복(順服)하였기에, 그들의 삶의 무게와 가치는 인류 최고의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게 필요하다. 3)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 하나님을 보라. 성령께서는 성령 받은 무리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의 소명실현을 세상에 펼치는 무리들이 되게 하셨다. 예수의 미션을 지구촌 모든 민족들의 삶과 가슴에 심게 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나아가게 하셨다. 그래서 유대교의 자기중심적 신앙의 장벽을 넘어서, 사랑의 세계화를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치며 헌신한 무리들이 되게 하셨다. 그들이 선교의 요원들로 들어간 곳곳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천되면서, 어둠과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개인과 가정과 세상과 역사를 구원해냈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그런 선배들의 수고와 헌신의 기반 위에 있다. 우리의 풍요와 부유의 자리는 그들의 눈물과 수고와 피 흘림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소명의 단절이 아닌 계승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멍에가 부여되어 있다. 선배와 조상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의 역사를 이제 후배들에게도 전승해 주어야할 책무가 있다. 그러기에 지금의 우리는 무뎌진 소명의 칼을 이전 보다 날카롭게 갈아야 한다. o 나가는 말 – 다시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은 모든 계명 중의 최고의 계명이요(막12:33-34참조), 우리가 모든 세대를 향하여 계속 선포하고 보여 주어야할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이다.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계명들은 다 이 계명들 안에 있다. 이 계명 준수가 참된 복이요, 마르지 않는 복이며, 하늘나라에까지도 이어지는 복이 될 것이다. 이 일을 잘하는 교회되어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모인 교회인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를 이룰 것이다 이제는 진정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녀들과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할 때이다. 우리는 이 험난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할수록, 보다 선명하고 확실한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좇아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 교회라야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도 희망을 주는 ‘지속가능한 참 구원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자!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다시 이웃 사랑에 나서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에게 병든 세상과 인류를 진정 치유하고자 한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책망과 비난의 힘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힘을 뜨겁게 드러내면 된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올린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무어든 가능해진다! ( 2021년 10월 11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