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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설교(5) - " 교회의 얼굴, 하나님의 마음 "

관리자 2022-08-17 (수) 15:33 1년전 166  

본문)  행9:1-9, 창13:8-13, 14:11-16, 요8:1-11 


우리는 그 동안 우리 교회의 문제 때문에 함께 만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담임 목사의 부재로 인한 공백을 채우기 위한 시간이었으나, 내용상으로는 이후의 새로운 우리 교회를 어떻게 출발하여야 할 것인지를 듣고 배우기 위한, 숙려(熟慮)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들은 교회에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 측면에서 집중해서 들어오셨다. 얼마나 도움이 되셨는지 궁금하지만, 매주 받으신 말씀 때문에 여러분은 여러 면에서 적지 않은 도전들을 받으셨으리라 믿는다.   


오늘은 이전 보다 새로운 차원의 증언으로 여러분을 만나려 한다. 바로 ‘앞으로의 우리 교회의 얼굴은 무엇이어야 할까’라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오늘날 한국교회 전체가 큰 위기에 빠졌다는 점과 함께, 그 일원인 우리도 그 위기에서 허덕이는 중이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이 보는 교회의 이미지, 즉 교회의 얼굴이 이전만 못하게 상(傷)해있음을 뜻한다. 


교회를 향한 이미지가 좋다면, 교회는 부흥한다. 사람들이 신뢰(信賴)하며 몰려들어 온다. 하지만 이미지가 나쁘면 교회는 힘을 잃는다. 뭔가 교회의 얼굴에 보여줄 것을 못 보여 주거나 실망을 안겨주면, 사람들은 미련 없이 교회를 등지고 만다. 당연히 전도도 안 되고, 교회의 신자들도 계속 줄게 된다. 그러기에 교회는 자기 얼굴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닌 희망과 기쁨과 생명을 안겨 줄 교회의 밝은 얼굴이 되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들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 교회의 얼굴은 세상과 이웃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그의 일원으로서, 내 이웃과 가족과 세상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가는가?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다. ‘내 얼굴은 내 마음의 거울’이라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내 얼굴은 죄는 없으나 책임만은 강하다’. 얼굴은 마음이 시키는 것을 전할 뿐인데도 그로 인한 온갖 책임(責任)은 그 마음이 아닌 그 얼굴이 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간은 교회의 얼굴이 가지는 중요성과 함께, 교회가 제 얼굴을 제대로 보여 줄 때가 언제인지를 말씀드리려 한다. 한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실 때이다. 반대로 교회가 제 빛을 잃고 어두워진 것은 그 교회의 주인이신 성령과 말씀을 거스르며 살고 있을 때이다. 초대교회의 순교자 스테반 집사의 얼굴을 기억하시는가. 그는 자신 안에 계신 성령 때문에, 그의 적대자들에게 돌로 맞아죽어가는 순간에도 천사(天使)의 얼굴을 보여 주었던 분이었다(행6:15참조). 

  

이를 위하여 나는 이제 우리 성경 속에서 가장 강렬하고도 확실하게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얼굴들을 보여주었던 사례(事例)들 세 가지를 소개드리며,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생생히 잘 보여 준 아브라함의 사례이다(창13-14장). 둘째는 성자 하나님의 얼굴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신 나사렛 예수의 모습이다(요8장). 셋째는 가장 당신을 난폭하게 박해하고 괴롭혔던 자를 택하고 앞장세워서, 당신의 큰일을 행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모습이다(행9장). 이들의 모습은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를 온 세상에 제대로 보여주신 얼굴들로서,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믿음의 자부심을 크게 안겨준 구체적 내용들이다. 


1) 아브라함은 아람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그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메소포타미아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건너 온 이방인이자 거류민이었다. 창조와 역사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떠나라’는 지시에 순복(順服)하면서, 그렇게까지 삶 전체를 바쳐서 따르는 그런 아브라함을 귀하게 보셔서, 그때부터 그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면서 그를 통하여 당신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셨다(창11:27-12장 참조). 


본문은 그 첫 과정에서 발생한 사례 중 하나이다. 가족(家族)들 관리(管理) 문제였다. 아브람에게는 본래 세 형제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막내인 하란이 죽으면서 남긴 자식, 조카 롯이 있었다. 장남인 아브람이 그 조카를 끌어안았다. 당연히 가나안의 먼 길까지도 함께 왔다. 그런데 그들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살 때는, 삼촌과 조카 사이에는 이미 소와 양의 가축들이 많았고 금은도 풍부하여, 서로 엉키면서 힘들고 불편한 일들이 발생했다.

     

문제를 심각하게 본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제의한다. ‘우리는 한 친족이다 나나 너나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左)하면 나는 우(右)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8-9). 그러자 조카 롯이 이 제의를 좋게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우선권을 행사하여, 그 당시 마치 에덴동산처럼 보였고, 또 가장 기름진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다(10절). 그 바람에 조카 롯은 도시(都市)문명을, 삼촌인 아브라함은 광야(廣野)문명을 택하게 살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 소돔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악하고 큰 죄인이었다고 전한다(10-13절). 그 도성들은 결국 하늘의 불과 유황의 재앙을 당해서 지구촌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곳들이 된다(창19장 참조). 오늘 본문 14장의 내용은 그런 소돔이 머잖아 밀려올 불행에 대한 예고편처럼 나타난 사건인데, 그런 과정에 그곳 시민이었던 롯의 가족들이 휘말려 들어간 것이다. 부족국가들의 연합 공세에 소돔성이 망하는 바람에, 롯 가족 모두가 포로로 끌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롯의 가족은 결국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그의 삼촌인 아브람이 그의 개인 군사들 318명을 데리고 급히 추격하여, 그 조카와 재산과 가족들 모두를 온전히 되찾아 왔기 때문이었다(8-17절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받는다.


-아브람의 너그러움과 양보의 미덕과, 고난에 처한 친족에 대한 뜨거운 책임성이 결국 조카 가족들을 구원해내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자신의 기득권과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갖고, 자신에게 주어진 우선권을 롯 앞에서 얼마든지 행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브람은 전혀 달랐다. 여리고 부족한 조카에게 지역 선택권을 양보하면서, 그의 새 출발을 보다 용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로 인한 자기의 불리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브람은 그런 조카가 정작 지역에 불어 닥친 어려움으로 생사문제가 걸린 시련에 빠져들자, 그는 조카의 구원을 위하여 목숨 건 추적을 한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다하여 끝내 롯과 그의 모든 것을 구원한다. 이런 혈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성, 약자를 향한 불리함을 끌어안는 모습, 그리고 불의한 세력들을 향해 목숨을 건 맞서는 모습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에 합당함을 판정받게 되면서, 그에게 영원하고도 확고한 영적 지위가 부여된다. 


-아브라함이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이 되었나? 이스라엘의 민족의 영원한 어버이 조상(祖上)이 되었다. 지금도 그의 핏줄에서 갈라져 나온 세계의 4대 종단들인 유대교-천주교-무슬림-개신교들은 모두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공인되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아브라함은 천국에서도 확고한 영적 지위를 누리는 인물이 되었다. 예수님이 소개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온 천국에서의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 심판대에 선 모든 자들의 천국행이나 지옥행이냐를 판정하는 주역이었다(눅16:19-31절 참조). 그것은 창13-14장의 아브라함의 의로운 처신과 분별력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인정(認定)이, 그러한 지위를 부여받게 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놀랍기 그지없다. 동시에 우리와 같은 인간이 영생의 나라에서 재판관의 대임(大任)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체도, 정말 경이(驚異)롭다.   


2) 요 8장에서 우리는 성자이신 예수님의 얼굴과 마음을 제대로 만나게 된다. 어떤 일 때문이었는가? 음행(淫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한 여인을 상대하신 그의 모습 때문이다. 즉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음행한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성전에 들어오신 예수 앞에 세웠다. 그러면서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命)하였는데, 예수 당신의 입장은 어떠냐’라고 예수의 입장을 물어왔다(2-6절). 거기엔 큰 이유가 있었다. 


그 부정한 여인을 정죄하려기보다는 예수를 무너뜨리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예수가 자비와 사랑을 이유로 여인의 처벌을 반대하면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되고, 처벌을 찬성하면 당시에 사형의 판결권과 집행권을 가졌던 로마인들의 권한을 반대하는 결과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미 그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계셨다. 율법을 범하는 있음은 간음녀(姦淫女)만이 아닌, 여자만 시비하고 있는 고발자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신22:22-24참조).   


주님의 대응은 아주 특별했다. 아마도 렘17:13을 암시하는, ‘땅에 글씨를 쓰시는 모습’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땅(대지)만큼 정직하지 못한, 인간 그들의 차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왜곡된 마음을 지적하는 방법을 취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뜻을 헤아릴 분별력이 부족한 그들은 예수의 손가락 고발이 아닌, 입술로 나오는 말을 직접 듣고자 했다. 그래서 결국 허리를 펴신 예수께서 한마디로 최후의 선고를 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7절).  


주님은 그런 후에 다시 몸을 굽혀 땅에 쓰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주님의 이 한 마디는 그곳에 엄청난 지각변동(地殼變動)을 안겨 주었다. 그곳의 고발자들 모두가 자신들이 그 여자를 더 이상 정죄할 자격이 없는 존재들임을 자신의 양심(良心)으로부터 지적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신들 누구도 그 여자에게 돌로 칠 자격이 없는 죄인들임을 자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깨달은 자들 모두가, 소리 없이 그 곁을 떠나갔다. 그 여자만 거기 남았다-! 


그 여자만 남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그 여자만 죄가 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 여자는 여전히 고발당한 피고인일 뿐이다. 재판이 가능한 예수만 거기 계셨을 뿐이다(9절). 세상의 사이비 재판장들은 떠나고, 하늘의 진정한 재판장인 예수만 거기에 계셨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재판을 받게 될 순간이 온 것이다. 영원자로부터의 재판만 남아있는 순간이었다. 


어떤 판결이 떨어졌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다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9절). 정말 의외의 선고(宣告)였다. 판결을 유예(猶豫)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러하셨을까? 그 여인의 재판은 처음부터 불공정한 것이었기 때문이지, 그녀가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님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재판으로서의 성립 자체가 되지 않은 것이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녀가 다시는 이런 죄목으로 이런 수치스러운 법정에 서지 않게 되기를 바라시며, 그렇게 선고하셨다.  


결국 이 여인은 극적으로 살아났다. 몸도 살았지만, 영혼도 살아났다. 죄가 무엇인지, 양심이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그 누구보다도 깊이 깨닫고 배운 인물로 살아났다. 게다가 그는 하늘의 재판장으로부터 자신의 죄에 대한 선고 유예를 받은 존재로 살아났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범죄를 통제할 확실한 브레이크가 장착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또 다른 선고 유예자들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델로도 등장하기도 했다-! 


간음한 여인을 대하는 현장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과도 크게 비교된다. 우리 교회들은 이 둘 중에 누구와도 같다고 생각되는가? 열 내면서 죄인을 찾아 돌을 던지려고 고발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가, 아니면 그 죄인에게 씌워진 불공정과 어긋남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예수와 같은가? 그렇다. 지금은 이 예수의 마음을 드러낸 교회의 얼굴들이 몹시 그립다-!! 


3) 행9장에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매우 뚜렷이 보여준 곳 중의 하나이다. 그곳에서는 당신의 제자들인 믿는 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하려고, 체포 영장까지 소지한 체 이웃 나라인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까지 밀고 들어 온 박해자 사울을 직접 찾아와 만나셔서, 끝내 당신의 확실한 제자요 종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바울은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를 통하여, 자신이 의지해왔던 철옹성같은 율법이 산산조각 남을 체험하였다. 


인간이 찾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은 똑같은 것이 아님을 밝혀주신 장면이다. 하나님은 죄 자체는 심판하시고 반대하시지만, 그 죄악과 어둠에 짓눌려 지내는 인간들과 그들이 안고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서는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심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죄인들, 박해자들, 가난하고 약한 자들, 소외된 자들, 부족한 자들을 찾으신다. 그래서 부르시고 기회를 주시고, 그들이 소유한 재능으로 당신의 큰일을 하도록 고취하신다. 


여러분은 요즈음의 열풍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잘 아실 것이다. 분명한 것은 주인공 우영우가 만일 건강한 인물이었다면, 결코 세계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정신지체 장애자인 사회적 약자이기에, 그렇게 열광하는 것이 다.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은사를 통하여 사회적 약자들도 세상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겨 주었기에 그렇게 큰 반응을 일으켰다고 본다. 은사 공동체인 교회는 그런 일들을 계속 생산해야한다. 서로 고취하고 격려해서 부족한 인간도 큰일을 할 수 있음을 제시하는 역동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바울이 당신과 성도들을 혐오하고 박해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요 율법에 대한 복종으로 간주했기 때문임을 아셨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으로 보셨다. 따라서 그런 마음에 예수와 그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이해만 충족되면, 그는 그 열심과 열정으로 누구보다도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할 수 있는 전사가 될 것도 더 잘 아셨다. 그래서 찾아주셨고, 그 결과로 주님은 당신의 교회 시대를 열게 되는 최고의 일꾼을 얻어 내셨다(딤전1:12-17 참조). 


o 주님은 인간을 보실 때, 외모나 외형을 보시는 분이 아니다. 마음과 그 중심을 보신다. 그리고 속이 올바르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불러 쓰신다. 그것도 아주 파격적으로 쓰신다. 그러니 인간적 형편에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라. 대신 마음과 자세를 주님과 그의 말씀에 맞추고자 전심을 다하라. 주님은 한번 마음을 주시면, 항상 함께 하시고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신다. 아브라함에도 그랬고, 간음하다 붙들린 여인에게도 그랬으며, 바울도 그랬다. 예수의 마음을 품어, 여러분 교회는 오직 예수의 얼굴만 보여주는 곳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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