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 인물을 생산하는 기도 공동체 "
본문) - 삼상 1-2장, 눅1:5-, 57 딤후 1:3-5
원로 - 최부옥 목사
오늘은 우리 양무리교회의 생일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뜻을 받아, 교회가 출범한 지 어느덧 서른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한 것이다. 강남 대치동에서 시작하여 4년간을 보낸 후, 일원동 시대로 20년간을 보냈으며, 이곳 송파구 가락동에서의 14년을 이렇게 맞이했다. 그동안을 귀하게 인도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올린다. 그리고 숱한 역경 중에서도 여기까지 묵묵히 동행해 준 우리 성도 여러분들께도 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
출범 시에 교회 설립목사로서의 내가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올렸던 기도가 있었다. ‘주님, 우리 양무리교회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하는 정도의 교회는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런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에, 우리는 그동안 일반 교회와는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다소 차별화된 길을 걸어오고 있다.
이 교회는 말씀목회가 시행되는 교회,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매 주일 강단에서 말씀으로 만나는 교회, 그래서 삼위 하나님의 통전된 뜻이 선포되고, 그 뜻을 좇은 균형 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역동하는 교회였다. 특히 ‘모퉁이 머릿돌 예수’의 교회 되기를 원했다. 곧 예수 안에서 동서가 만나고, 남북이 만나며, 강약이 만나고, 빈부도 함께 아우르는 교회이길 원했다. 교회가 장학숙을 세워서, 농어촌교회와 공생하는 도시교회의 모습을 갖춘 일도 그 일환이다.
작지만 큰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를 원했다. 규모나 숫자가 아닌 내용과 품질로 답을 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교회 되길 원했다. 하늘과 깊이 소통하고 세상에는 빛과 소금으로 만나게 되는 교회 되길 원했다.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성장 된 굵은 평신도가 많이 생산되길 원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되는 교회, 중심이 되는 교회이길 원했다. 이를 위하여 목사인 나부터 더 커야 했고, 품도 넓고, 사랑도 깊어야만 했으며. 기도도 뜨거워야 했다.
이런 나의 기도와 열망에 응답하신 일이 내가 교단의 제100회 총회장으로 섬기게 된 일이었다. 아주 작은 교회 목회자가 중요 교단과 한국교회를 섬기게 된 일은 전적으로 기도의 응답이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담긴 꿈을 이루어 보라며, 안겨주신 은총의 기회였다. 우리 교회가 노회와 총회에서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큰 뜻을 받들어 일하게 된 일도 분명 기도의 응답이다. 지난 6월 첫 주 환경주일 교회들 모임에서 우리의 역할은 여전함을 보았다.
이날을 맞이하여 우리가 더욱 주목할 일이 있다. 우리의 교회나 국가는 물론, 우리의 가정과 자녀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가 더욱 뜨겁게 기도(祈禱)하는 일이다. 하나님 백성에게 기도는 생명과 생존을 위한 호흡이다. 이 기도가 힘을 잃으면, 우리는 정말 허약해진다.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도가 진실하고 간절하며 뜨겁고 끈질기면, 그곳에서는 새 생명이 태어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며, 하나님이 응답으로 허락하신 새 삶의 지평이 펼쳐진다.
우리는 이제 바로 다시 그곳에 서야만 한다. 마침 오늘 본문들은 그런 기도의 힘으로 승리하신 분들에 대한 소개의 글들이다. 소개될 주인공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분들이다. 곧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인 사가랴, 그리고 젊은 목회자 디모데를 위한 밤낮으로 기도했던 사도 바울이다. 그리고 성경에는 없으나 기도를 통해 응답받은 나 최부옥 목사의 경험도 증언할 것이다.
우리는 사무엘과 세례 요한의 탄생, 그리고 디모데 탄생의 배경에 대한 말씀을 함께 보았다. 이들은 각각 신앙사에서 어떤 분들이었고, 그들 탄생에 대한 증언에서 어떤 공통점이 있는 지를 찾아보자. (삼상1:10-11,17-28, 눅1:13-20, 딤후1:3-8 참조)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무대)을 활짝 열었던 인물로 선택받았던 이들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족장 시대와 사사 시대를 마감하고, 세계사 속에서 첫 왕족 국가 시대의 문을 열었던 주역이었고, 세례 요한은 온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발대로 와서 그의 앞길을 활발히 닦았던 주역이었다. 그리고 디모데는 성령과 교회 시대에서 목회자의 목양(牧羊)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게 된 때의 대표 모델로서 쓰임 받게 된 인물이었다.
이들의 등장의 배경을 보면, 그들 조상의 뜨겁고도 간절한 간구(懇求)가 있었음이 공통점이다. 사무엘은 그의 어머니 한나의 통곡과 금식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세계 요한은 아버지 제사장인 사가랴의 오랜 간구가 있었기 때문이며, 디모데는 그의 조상들인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깨끗한 믿음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놀라운 생애와 업적이 그 조상들의 신실한 믿음과 기도의 산물임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다.
1) 먼저 한나란 여인이 시련 속에서 보여준 믿음의 행위를 보자.(삼상1:10-11,17-28 참조)
한나에게는 남편 엘가나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식을 못 가진 여인의 통한(痛恨)이 있었다(16절). 특히 자식을 가진 그의 또 다른 적수(敵手. 6절)인 부닌나의 괴롭힘과 차별 행위는 해마다 가족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큰 고통이었다. 히브리 말에는, 여자가 임신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비(慈悲)를 받은 것으로 간주 되었기에, 그의 아이 낳지 못하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당한 일로 간주 되어서, 한나에게는 더욱 큰 아픔이었다(5-8절).
결국 한나는 목숨을 건 승부사의 기도를 여호와께 드렸다(9-11절). 통곡의 기도였고, 자식을 주시면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겠다는 서원(誓願)을 드렸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살 나실인(삿13:5, 민6:1-21 참조)으로 살게 하겠다며 약속까지 드렸다. 결국 그의 처지를 헤아린 제사장 엘리의 축복까지 받아낸 한나는(17-18절), 비로소 아들로 사무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서원대로 아기가 젖뗀 순간에 그 아이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평생을 여호와께 바치는 예전을 실천하며 경배를 드렸다(24-28절). 삼상 2장:1-8은 그녀의 가슴 벅찬 찬송이 나온다.
결국 이러한 어머니의 기도와 신실한 믿음은 하나님께 그 아이가 평생의 은혜를 입게 되면서 아들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선지자로, 왕족 국가로의 대격변을 주도하는 인물이 되는 열매를 얻었다. 기도가 역사를 이루고 인물을 세우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2) 제사장 사가랴가 아들 요한을 받게 된 과정도 살펴보자. 그의 탄생에 관련된 증언에서 보면, 아기란 생명체는 대체 어떤 존재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눅1:13-29, 시127:3-5 참조)
제사장 사가랴는 자신이 늙도록 자식을 얻지 못한 일을 두고, 아주 오랜 세월 하나님께 꾸준히 간구(懇求)를 드린 사람이었다. 그런 일은 사가랴 자신이 밝힌 것이 아니라, 그가 아들 요한을 받게 되리라는 통보를 전하던 천사 가브리엘이 그에게 ‘너의 간구함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라고 직접 전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내용이었다(눅1:13, 19절).
결국 예수의 선발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세례 요한은, 그 아버지 사가랴의 오랜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생명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큰 뜻을 세상에 전달할 인물을 보내실 때, 사가랴처럼 오랜 기도로 기다리던 신앙인을 선택하여 태어날 아기의 부모가 되게 하셨다. 하지만 헤프닝도 있었다. 정작 사가랴는 아들을 받으리라는 천사의 통보를 듣는 순간에는, ‘자기들이 늙었는데, 어찌 이 일이 있겠느냐’며 자기 늙음의 한계성을 앞세워, 의심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그는 아기를 받기까지 시한부 벙어리가 되는 벌칙을 당하기도 했다(20절).
그렇게 사가랴 부부는 요한의 부모가 된다. 예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눅7:28)랄 정도의 큰 평가를 받았던 세례 요한의 부모가 된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이다. 기도 없었다면 어찌 그런 영광이 주어질 수 있겠는가! 시편 시인은 일찍이 말했다. ‘자식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 그들이 원수와 담판할 때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127:3-5참조)라고 하였는데, 사가랴 부부는 때늦은 아들 요한을 통하여, 모든 인간적 수치를 씻어내고 만민이 부러워할 어버이가 된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
3) 교회 목회에 시련을 겪고 있던 디모데를 응원하는 사도 바울을 보자. 디모데가 가진 역량과 은사를 고취하는 선배 사도 바울의 접근 방식이 매우 귀하다.(딤후1:3-8, 딤전5:23 참조).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백성을 돌보는 목회(牧會)란 업무는 매우 특별하다. 목회자는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돌봄과 사랑을 당연히 받게 되는 영역이지만, 동시에 인간관계에서 피할 수 없이 입게 되는 상처와 아픔과 외로움도 많이 당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목회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동료와 가족과 성도들과의 더불어 연대와 협력 구조가 매우 필요하다.
교회 목회자는 그 누구보다도 주변의 협력과 사랑, 특히 기도의 지원이 크게 필요하다. 특히 깨어있는 신도들의 기도 응원은 엄청난 보약(補藥)이다. 성도들의 올바른 목회자 사랑은 자기 자식들의 신앙육성에도 큰 도움이 된다. 교회 목회자와의 건강한 관계 유지가,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가는 귀한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관계가 불편하면, 가정과 자녀에도 화가 될 수 있다.
4) 내 32년간의 본교회 개척 목회에서도, 기도는 언제나 제일의 핵심 사역이었다. 기도할 제목들이 정말 많았다. 특히 1996년 9월에 9억원의 일원동 성전을 빚더미 위에서 매입한 일을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사43:20)을 부르짖으며 해결한 이래, 교회는 매월 초하루 기도회를 집중적으로 가졌다. 청계산, 광주, 순복음 금식, 삼각산 기도원 등을 많이 찾았다. 그중 2002년은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다. 아들 결혼에다, 후반엔 아들 부부와 딸까지 셋 모두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더욱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유학비가 가장 비싼 나라 영국에, 자식들 세 명이 한꺼번에 유학하는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돈 많은 목사‘라는 소문도 얻었다(지금까지도 그렇지만-). 장학금을 받아서 가게 되었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처음부터 부모로써 그 행보를 말리지 못한 것은, 본인들이 실력으로 가기에, 하나님이 앞길을 도우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없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이 채워 주실 하나님을 믿었다. 실제로 믿는 대로 그렇게 해 주셨다!
딱 하나, 기억될 만한 기도가 2005년도에 있었다. 아들로부터 한 반가운 소식을 들은 후였다. 영국 대학교들에는 아시아 각국에서 유럽의 사회정책을 위해 공부하러 온 유학생들이 많은데, 바로 그들을 대학 당국의 허락을 얻어 자신이 그들을 학교로 초청하여 큰 규모의 아시아와 유럽의 학자들 첫 국제적 연구모임을 개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기도 부탁과 함께 들은 것이다.
청계산 초하루 기도회에서 이 문제로 기도하려는데, 그때 부족한 아비로서의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면서, 갑자기 통곡(痛哭)이 터졌다! 그때 드린 눈물의 기도는 이랬다. ’하나님, 저는 정말 힘없고 무능한 육신의 아버지입니다. 열심하는 저 아들을 도울 힘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제 아들은 당신을 아버지로 믿고 기도하는 종입니다. 하오니 만일 그들이 필요한 것이 있어서 당신을 찾거든, 부디 당신이 참 아버지가 되셔서, 그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세요‘
그 후 한 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아들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왔다. 학교 교수회에서 후반기 장학금 배정이 끝나고도 잔여분 처리를 놓고 의논을 했는데, 그 잔여분(-내년 생활비 전액 정도의 거액)을 가족있는 한국 유학생 최영준에게로 주자고 결의했다는 것이다. 난 그때, 하나님이 이 아비의 기도를 듣고 싶어 하셨음을 느꼈다. 그래서 들으시고 은혜의 보따리를 풀어주신 것이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의 손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 믿음으로 난 세 손주에게 늘 전한다. ’우리는 갈수록 잘되는 사람들 임을 잊지 말라‘
나는 보고 산다. 이런 기도는 나와 함께 교회를 섬기고 기도하며 믿음의 생활을 해오고 있는 우리 장로님 권사님들과 성도들에게도 모양의 차이는 있으나, 실로 엄청나게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예전의 그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로 기도의 사람들에게 귀하고 소중한 인물들을 생산하게 하시고 키워서 보게 해주신다. 우리에게는 진정 간증할 일들이 많다!
0 여러분, ‘기도는 곧 창조요 생산’임을 굳게 믿으시기 바란다. 내가 기도를 전능자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상대하는 결정적인 통로라고 믿는다면, 이 논리는 매우 타당할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나다. 나는 계속 기도하며 사느냐는 점이다. 아니면 기도가 막혔는가, 과연 어떤가?
또한 ‘기도는 섬김이며 봉사’임도 기억하시라. 이는 내가 직접 상대의 처지에 들어가지 못해도, 기도하며 동참과 협력이 가능하다는 믿음의 논리 때문이다. 특히 몸과 재정과 건강 등에서 힘이 약해진 이들에게 의지할 도구는 단연 주님을 향한 기도이다. 기도가 살았다면, 나는 결코 약자가 아니다. 전능자의 능력과 힘이 발산되기 때문이다. 내 기도의 봉사와 섬김의 몫을 어떻게 감당해 오고 있는지도 점검해 보자. 이 기도의 축복과 은혜가 후임 오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계속 충만하시길 빈다. < 2024. 6.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