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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하나

관리자 2019-08-22 (목) 08:14 4년전 1201  

본문) 약 2:1-13, 사 57:14-19, 눅 14:1-11

 

처서를 보내면서, 계절의 급격한 변화를 실감한다. 무더위의 맹위도 꺾이며, 가을의 정취가 물씬하다. 더위에 힘들었지만, 건강으로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때마침,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열한 번째 주일이며, 창조절기(創造節期)를 준비하는 주일이기도 하다. 그 동안 성령께서는 매주에 주시는 말씀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 사람들에 비하여 보다 차원 높은 삶을 향유하면서 종말시대를 건강히 순례(巡禮)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여러분은 이번 강림 절기에 주신 말씀들을 통하여, 삶에 어떤 일깨움을 받으셨는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며, 어떤 면에 영향을 받았는가? 성령께서 내 마음에 어떤 도움을 내려주셨다고 생각되는가? 긴 절기를 보내면서, 이런 부분에서도 깊이 성찰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절기 후반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여서, 구원의 성취를 맛보도록 계속 인도받았음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절기 끝 주일인 오늘에 주시는 성령의 선물은 또 어떤 것일지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여하자. 여러분은 함께 읽은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의 내용의 키 워드(key-word/핵심)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주신 말씀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떤 품성(品性)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지를 찾아보자. 본문의 상황에서 드러난 주님의 말씀보다는 마음에 더 집중해 보자는 말이다. 

 

먼저 최근 소식을 접한 한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을 소개드리고 싶다(행복한 家.8.6자). 

우리에게 ‘기부(寄附) 천사’부부로 유명한 정혜영-션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들 부부는 첫째 하음의 돌이 다가오자, 여러 생각 끝에 돌잔치를 하기는 하되, 아이에게 좀 더 의미 있는 돌잔치를 해주리라 마음을 모았다. 그래서 이 아이를 위하여 틈틈이 모은 돈과 잔치에 쓰려고 준비한 돈을 모두 모아, 2,000만원을 가지고 하음이와 함께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을 찾아갔다. 그래서 그 돈을 그곳에 기부하였다. 

 

그 바람에, 그 돈은 그곳에 있던 심장(心臟)질환 어린이 2명과 귀 질환 어린이 1명을 돕는 수술비가 되어, 무려 3명의 어린이 환자들을 소생시키는 소중한 기금이 되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주변의 이웃들이 아이의 돌잔치의 때를 물어왔다. 션 부부는 이미 돌잔치를 조용히 잘 끝냈다고 답하였는데, 이에 놀란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러면, 아이가 잔치석상에서 돈, 청진기, 연필, 쌀, 책 등등의 진열품 중에서 무엇을 붙들더냐’고 물었다. 그에 대한 엄마아빠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 하음이는 돌잡이로, 이웃의 손을 잡았습니다’ ----.

 

오늘 본문들은 이웃이나 인간 사랑이 어떤 마음과 영성(靈性)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웃 사랑이란 단순히 지침을 제공하고 지시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또 어떤 심성(心性)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맛보게 해주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김혜영-션 부부처럼). 그 점에서 오늘의 말씀들은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矜恤)과 자비(慈悲)의 품성에 더욱 주목하게 한다. 곧 이웃 사랑이 우리의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지를 밝혀 주려고 한다. 

 

서신서를 보자 / ‘No Discrimination!-!’

야고보서 내용을 보면, 당시 초대교회 내부의 복잡했던 어려운 상황을 엿보게 해준다. 그 중에서 교회 공동체의 건강성과 온전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교회 지도자 야고보의 지적을 통하여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간을 차별(差別)하며 업신여기는 문제였다(1-4절). 그것도 경제적 차이와 빈부의 차이에서 나온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교회 안에서 힘없고 가난한 교우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야고보가 직접 이 문제와 그것이 초래할 죄악상과 그 결과의 무서움을 상세히 거론하면서 경고하는 것을 보면, 당시의 교회는 이 문제로 인한 내부 진통이 상당했음이 분명하다. 이 교회의 뒷 결과도 확인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런 문제가 해소되지 못하면 교회는 무너지기에, 반드시 해결해야만 될 일이라는 점이었다.  

 

예전에도 교회의 차별로 인한 진통의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때는 가난한 교우들을 구제(救濟)하는 데 있어서, 교회가 본토 히브리인 성도들과 헬라파 교포인 디아스포라 성도들에 대한 차별을 했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그 위기는 교회가 교포출신으로 살림할 집사7인을 선정하여 맡김으로서 극복했었다(행6장 참조). 그러면, 그런 차별 현상이 왜 교회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몇 가지 결정적인 이유들이 있다. (우리 교회의 상황도 함께 보자).

 

첫째는 세상 만민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크신 뜻과 영광을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교회는 차별을 일삼는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을 아예 말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회의 문제들은 약자를 통해서가 아니라(아니, 교회는 약자들의 순수한 믿음과 기도로 큰 혜택을 보기도 한다), 오히려 우대 받는 강자를 통하여 발생하고 있음을 간과(看過)하고 있기 때문이다(5-7절). 넷째는 구원의 핵심이 되는 이웃 사랑의 싹을 아예 무시하고 외면하는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교회는 사람을 차별하는 일과 업신여기는 일을 매우 무겁게 여기고, 반드시 척결해야만 한다. 이제 본문들에 담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자. 

 

1) 야고보는 먼저 우리가 지금 어떤 신을 믿고 섬기는 자들인지를 일깨우면서, 사람을 차별하면 왜 안 되는 것인지를 일깨운다(1절). 그를 위해, 야고보는 우리가 믿는 주님을 ‘영광(榮光)의 주’로 고백한다. 그 영광의 주는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데, 그는 이 세상의 권력과 힘과 지위와 소유로부터 밀려나, 제도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불이익을 당하면서 온갖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세상의 모든 이들의 친구와 도우미로 사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2) 게다가 그의 아버지 여호와 역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뇌물(賂物)로 인간을 상대하지도 아니하시고, 오직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고 사랑하신 유일한 신이었기 때문이다(신10:17-19 참조). 그런 유일하고도 탁월한 신을 믿고 섬기는 이들이 서로 차별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그 하나님께 큰 죄(罪)를 짓는 것이다(9절). 그것도, 모든 율법 중에 최고의 법인 이웃 사랑을 파기하는 행위를 한 것이어서, 율법 모두를 범한 자가 되어 무거운 책임을 져야만 함을 말한다(8,10-11절). 

 

3) 그러면, 이 과오와 범죄를 극복해낼 길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 교회와 교우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만을 사랑하려는 과오(過誤)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내가 믿은 하나님이 보다 관심하시고 지시하시는 대상과 일에 보다 집중해야만 한다. 그런 영적 훈련이 잘 되어야만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 교회는 자기 취향(favoritism)을 성취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동호회(同好會)의 모임도 아니다. 그 대신 세상에서나 평소에나 자기가 전혀 해보지 못한 차원의 섬김. 사랑. 돌봄. 나눔 등을 해보면서, 보다 새롭고 넓은 세상의 이웃으로서 살아보기 위해서 부름 받은 공동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 이웃 사랑의 기초적인 영적 기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바로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향한 무한한 긍휼(矜恤)과 자비(慈悲)의 마음이다(누락된 마지막 절인 13절 참조). 그리고 겸손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다(빌2:3-5절). 특히 이 마음들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우리 자신이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받아 보았던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받았던 것을 나누려고만 하면, 되잖은가?

 

그렇다. 긍휼과 자비, 그리고 겸손과 상대 존중의 마음은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동인(動因)들이다. 모든 것을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입장과 처지에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의 연약한 형편도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다면, 이웃 사랑은 얼마든지 가능해 진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차별을 넘어 화합과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공존과 공영의 세상을 열어가게 된다. 성령께 도움을 구하여보자. 

 

복음서를 보자

매우 위험한 병인 수종병(水腫病-신체 조직안에 림프액인 장액(腸液) 따위가 많이 괴어있어, 몸이 붓는 질병으로서,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병)에 걸린 중환자 한 사람을 바라보며, 바리새인-율법학자들과 나사렛 예수의 생각과 대처 방안이 너무도 큰 차이를 보였다. 

 

저들 유대인들은 두 가지 고정된 사고에 묶여 있었다. 하나는 그 수종병자가 하나님께 큰 범죄를 하였기에 그런 중병으로 벌을 받고 있다는 식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식이었고, 또 하나는 안식일에는 절대 일하면 안 된다는 문자주의적 신앙관에 붙들려 있었다. 그런 부정적인 의식들로 사로잡힌 자들이었기에, 수종병자에게 그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를 당신의 도움이 절대 필요한 자로서 보셨다. 그것도 ‘지금 여기에서’ 그를 돕지 못하면, 그는 끝내 도울 자를 잃고 병자로 살다가 불쌍히 죽을 자로 보셨다. 게다가 주님에게 안식일은 당연히 사람을 살리고 영육간이 건강을 도모하는 선을 행할 때라고 보셨기에, 안식일에도 거침없이 그렇게 그에게 자비의 손을 펴셨다. 바로 주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그 불치의 인간을 새 인간으로 되살아 나오게 한 것이다. 

 

요즈음 한국교회의 마음들이 저 바리새인들처럼 완고해져서 매우 슬프다. 특히 동성애자들을 향한 한국교회의 배타적 행동은 너무 지혜롭지 못하다. 환자를 치유 받아야할 자들로 보고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려는 마음이 아니라, 정죄와 배척의 대상으로 밀어내며 아예 담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마치 의인(義人)인척 행세한다. 이념이나 사고가 조금만 달라도 ‘좌파’라고 매도하면서, 전혀 대화나 협력이나 공조가 불가능한 것처럼 상대하려 들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웃 사랑은 자기와 같은 자들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다. 원수까지도 포용하면서 사랑하는 데에서 이웃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겸손(謙遜)해야 한다. 교회나 성도들이 이 시대에 앉을 자리는 낮은 자리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7-10절 참조).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스스로를 높이려는 위선적 행태는 주님에게서 즉시 내침을 당할 터일 것이기에, 정말 조심해야 한다. 진정 우리가 조심하고 경계해야할 대상은 교회 밖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교회 내부 곧 우리 자신의 위선과 교만에 있음을 명심해야만 하겠다. 지금의 우리들 교회들을 보라. 스스로 높아지려는 행세들은 많으나, 세상에 의하여 존경과 사랑과 높임을 받는 교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무시를 당하는 시대일 뿐이다! 

 

되지 못한 우월감을 회개하자. 위선적인 의인의 모습도 회개하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는 주님의 사명 부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지내고 있는 우리들 모습을 회개하자.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내 자리를 모든 자리의 끝자리로 알고,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겸손의 옷을 다시 찾아 입자(10절)!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붙잡고 엎드리자(11절). 

 

구약을 보자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친 후 돌아와 변화된 새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몸과 마음이 연약해져서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영적 지체자(遲滯者)들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로운 입장을 전하신다. 더 이상 그들이 스스로 성숙해져서 응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당신이 먼저 주도적인 의지와 도움으로 그들의 무기력한 피동적 행태를 고쳐서 그들을 기쁘시게 하여, 샬롬(평강)을 환호(歡呼)하게 하겠다고 예고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이런 입장과 자세 변화는 매우 신선했다. 절대자인 신이 나약한 인간들의 입장과 처지를 탓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당신의 태도와 눈높이를 낮은 인간 중심에다가 맞추어 상대하겠다는 것이기에, 새로운 신관(神觀)이 분명했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가 더 이상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신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을 끌어안는 긍휼과 자비의 주이심을 밝힌 것이어서,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크게 환호할 수밖에 없는 복음(福音)이었다(15절). 

 

그 뿐 아니다. 그는 마치 나약한 자식을 향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부모와 같은 마음을 확실히 드러내셨다. 비록 당신의 말을 제대로 좇지 못하는 자들이지만, 이제부터는 예전의 엄격하고 무서웠던 당신의 모습을 접고, 그 대신 그들과는 더 이상 다투거나 계속 분노하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영혼도 당신 앞에 피곤하지 않도록 따뜻이 배려하고 돌보시겠다고 했다(16-17절). 하나님의 이 예고는 나중에 세상에 오신 그의 아들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부족한 인간을 긍휼과 자비로 품으시면서, 인간들끼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구원의 다리를 보내주신 것이다. 

 

결론이다

주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품도록 기도하자. 겸손과 상대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마음을 옷 입자. 그래서 제대로 된 인간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들이 되자. 이런 영적 기반의 확보로, 모든 차별과 배척의 담을 무너뜨리고,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여호와의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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