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창조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재일동포선교-개척선교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창조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재일동포선교-개척선교주일

관리자 2019-08-29 (목) 10:12 20일전 58  

본문) 창 3:1-13, 22-24, 마18:1-14, 롬 5:12-21 

 

창조절기(創造節期)가 시작되었다. 오늘부터 시작된 이 절기로 인하여, 삼위일체 교회력의 셋째 해의 새로운 한 해가 열린 것이다. 본 교회력으로는 이 창조절기가 년 중에 진행되는 전체 7절기(창조절-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의 시작(始作)이기 때문이다. 이 절기는 이 다음의 대림절까지 포함하여, <성부(聖父) 하나님의 절기>에 들어간다. 성도 여러분께서는 이 절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시고, 그 분을 향한 창조 신앙이 더욱 깊어져서, 우리의 삶의 뿌리와 근원이 더욱 든든해지는 은혜의 계절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이 때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확인하고, 그의 구조와 섭리 안에서 운행되는 창조 세계의 보전을 위해 지음 받고 세움 받은 창조주의 청지기와 동역자로서의 인간 창조, 그리고 그에게 부여된 역할과 책임적 삶에도 관심하며 지키는 절기이다. 이 절기의 색깔은 녹색(綠色)이다. 

 

마침 우리 총회는 이 창조절 첫째 주일을 재일동포(在日同胞)선교주일로 지키며 동시에 교회개척선교주일로도 지킨다. 이 주일은 모두 선교주일들로서, 우리의 민족의 또 다른 뿌리와 새 교회공동체를 위한 뿌리 내리기란 측면에서, 창조절 첫 주일의 말씀과 연계되어 묵상할 수 있다고 보인다. 그러면, 오늘 첫째 주일에 주시는 세 본문 말씀들의 핵심적 주제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이란 현장(現場)이 어떤 곳이며, 그곳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근간(根幹)은 어떤 것이고, 또 그것을 지켜내기 위한 질서(秩序)를 위해(危害)하려는 세력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를 지적하면서, 나중에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창조질서의 보전의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이들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 증언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이번 <성부의 절기>부터는 구약의 이야기를 앞세워 그 내용을 펼쳐가면서, 거기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하여 예고되고 대비된 부분이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속에서 어떻게 펼쳐지었는지를 확인해보고, 서신서에서는 그렇게 예언과 성취의 과정에서 이룩된 확실한 구원과 생명의 질서를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 현장에서 어떻게 정착시켜 나아갔는지를 확인하려고 한다. 

 

미리 확인해 둘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과 인간이 살며 활동할 무대로 ‘에덴’이란 곳을 마련하셨다는 점이다(2:7-8참조). 처음의 에덴은 동방의 어느 지점쯤에 위치한 이름이었는데, 나중 다른 구절에서는 동산(東山) 자체의 이름이 된다(15절, 3:23, 겔28:13참조). 히브리어에서 ‘에덴’은 ‘즐거움’과 ‘기쁨’의 뜻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에덴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곳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창1:31참조). 

 

이런 에덴이 자연스럽게 낙원(樂園-paradise)으로 각인되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 동산에 살 생명들을 위하여 풍성한 먹거리들을 두셨기 때문이었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고, 특히 매우 특이한 두 나무들인, ‘먹으면 생명(生命)을 살리는 나무’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까지를 그 동산 중앙에 두셨기 때문이었다(2:9참조). 

 

우리의 보편적인 낙원관은 어떤가? 이상향이나, 유토피아, 천국으로서 아무런 수고나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간주하거나, 그것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피안(彼岸)의 세계를 염두에 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노동. 무임금 수준으로 그저 무한히 편한 곳으로 꿈꾼다. 아무런 제재나 통제도 없는 무한 ‘내 자유대로 산다’는 성격이 짙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말씀에서 만나는 낙원은 뜻밖에도 매우 자율적(自律的)이면서도 동시에 타율적(他律的)인 질서(秩序)가 주어진 곳이다. 그런 질서에 부합되면 행복(幸福)한 곳이지만, 그 질서에 어긋나면 불행(不幸)에 빠져 살아가게 되는 매우 엄격한 생존 지침이 설정된 곳이었다. 그러기에, 그곳 에덴은 생과 사의 경계 구분이 명확하여 자신을 위하여 분별력을 제대로 갖추고 살아가야만 할 곳이었다. 그러면 그곳의 대표적인 질서의 내용들이 무엇인지 보자. 

 

1) 그곳은 확실한 주인이 계신 곳이다. 그러기에 그의 세계에 사는 인간은 자기한계(自己限界)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마치 조물주이며 주인인양 처신하면 안 된다. 비록 자기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되었다고 해도-,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여 실행할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리고 창조주 세계를 주관하고 관리하는 위임(委任)을 받았다고 해도-, 그는 나약한 인간이지 결코 하나님일 수가 없음을 명심해야하는 곳이다. 그런 경계선 월경은 절대 범죄이다. 

 

2) 삶의 규칙과 질서를 제시하신 말씀이 있는 곳이다. 어떻게 살면 구원을 받고, 어떻게 살면 죽는 지에 대한 엄중한 지침이 제시된 곳이다(3절). 그 말씀은 생사를 가르는 것이어서, 그곳에서 살려면 반드시 주어진 말씀에 순종(順從)하여야만 하는 곳이다. 순종이 요구됨은 그곳에는 말씀에 대한 의심과 사망의 길로의 유혹(誘惑)들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기도 함을 말한다. 

 

3) 노동(勞動)을 해야 하는 곳이다. 일거리가 많은 곳이다. 그것은 창조세계 보전을 위한 노동이다. 특히 노동의 질이나 조물주와의 관계성을 잇기 위하여 휴식(休息)이나 안식(安息)도 함께 주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 나라를 위한 노동은 영원한 나라의 안식을 보장하는 일로 주어졌다. 에덴은 나의 의미 있는 땀과 눈물과 피를 통하여 보전하고 지켜내야만 하는 곳이다. 

 

4) 주어진 사안에 대한 선택(選擇)도 하고 책임(責任)도 져야 하는 곳이다. 해야 할 일에 대한 명확한 설명과 방향 제시는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거기에 대한 최종적인 선택과 책임은 인간에게 주어진 세계가 에덴이었다. 생명나무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시고, 그 중에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게 되리라는 경고는 하나님이 하셨으나, 거기에 빠져든 아담 부부의 모습에는 직접 개입하여 않고, ‘네가 어디 있느냐’(9절)는 추궁만 하신 곳이다. 

 

이런 곳이 바로 에덴이며 낙원이라면, 그 에덴은 어디일까? 위에 제시된 특성들을 참고하면, 에덴은 바로 우리 가정이고 사회이며(창세기), 교회 공동체이고(복음서), 내 개인의 영적 실존이며 인류의 보편적 특성(로마서)이다. 결코 나와 우리의 실존과 삶의 현장과 무관하게 저 멀리 펼쳐진 황홀하고 아름다운 멋진 피안적 정경(情景)이 아니다. 물론 그곳도 있다. 우리가 이 험난한 삶의 여정을 무사히 통과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표현이 불가한 곳에 이르게 되리라. 오늘부터 우리는 이런 에덴의 바다(!)를 잘 건너기 위한 항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구약을 보자

시작부터가 유감스럽다. 조물주의 엄중한 말씀을 놓고 유혹자가 그 말씀을 들었던 인간들 사이에 끼어 들어와서 그들이 과연 그 말씀을 제대로 믿는 지를 엿보다가, 조금의 허술한 틈이 보이니까, 즉시 개입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과 의도를 의심하게 만들면서, 그곳의 인간들을 새로운 망상(妄想)의 길로 즉시 빠져들게 하면서, 에덴에서의 행복했던 삶을 뿌리 체 흔들어 놓았다. 그 바람에 그들은 실낙원(失樂園)의 주인공이 되었고, 인류사에서 저주와 사망을 안겨 준 원조(元朝)가 되고 말았다(롬5:12). 그 주요 내용들을 다시 보자.

 

1) 유혹자는 피조물 중에 가장 간교한 들짐승인 뱀이었다(1절.상). 그가 여자를 상대로 매우 궁금한 듯,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전하신 말씀의 진위(眞僞)를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절.하). 평소 선악과 금지령에 대한 의혹이 강했던 여자의 마음 한복판에 미혹의 낙시밥을 질문으로 던진 것이다.

 

2) 여자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자기 편의적(便宜的)인 이해를 드러낸 것이다. 그 바람에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는 말씀이 여자에게서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2)라고 둔갑되고 말았다. 가짜 뉴스를 말했다. 뱀이 던진 미혹의 낙시밥에 여자가 덜꺽 걸려들고 만 것이다. 

 

3) 그러자 결론은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번지고 말았다. 여자의 헐렁한 답변에 용기를 얻은 뱀이 그에게 결정타를 쳤다. 즉 ‘하나님의 선악과 금지 이유는 인간이 그것으로 인하여 당신과 같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신적 존재가 될 것을 우려하여 금한 것이기에, 일단 그것을 따먹으면 결코 죽을 리는 없다’(4-5절)라는 뱀의 유혹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렸고, 그러기에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오히려 속임을 당한 기분도 들을 정도가 되었다. 

 

4) 자기들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선악과를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따먹지 않으면 그냥 바보가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따먹었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다. 그러자 급(急) 변화들이 그들에게 왔다. 진짜 하나님께서 염려하신 것들이 그들에게 발생한 것이다. 돌이킬 수 없이 초래된 대표적인 비(非) 에덴적 상황들 몇 가지를 확인한다. 

 

☞ 눈이 밝아졌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름’, ‘떳떳한 것과 부끄러운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좋은 현상 같으나, 하나님과의 관계 측면에서는 이제 자신의 영역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모든 것을 책임져 주셨던 하나님과의 절대 접촉의 영역이 무너지면서, 자기 판단의 영역의 담들을 쌓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에덴에서 없었던 숨기고 자기 것을 만들고 피아(彼我)를 구분하면서 은폐의 영역이 등장한 것이다. 

 

하나뿐이었던 양심(良心)이 양심(兩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게 바로 옷 벗은 자기들 모습을 감추려고 옷을 해 입게 되고(7절), 하나님의 방문 때 두려움 때문에 도피하고 숨으며(8-9절), 하나님의 책망과 추궁에 변명과 책임전가 내지 회피를 해야 하는 인간으로 변질되어 나타났다(11-13절). 그 변명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여자 때문’이란 수준까지였다(12절).  

 

5) 여호와의 심판은 말씀대로 분명했다. 그들에게 에덴에서의 추방령을 내리고, 에덴 안에 남은 생명나무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셨다(22-24절). 범죄자의 영생을 원천 봉쇄하신 것이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처럼 다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 무엇이 그리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그가 가지신 선하신 능력과 사랑으로, 당신이 알고 접하는 모든 부정(不淨)이나 불의(不義)를 다스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이었던 첫 사람 아담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둘째 아담인 예수의 차이와 가능성을 그토록 다양하고 긍정적으로 선포할 수 있었다(롬5:15-17참조)  

 

하지만 인간은 그게 불가능하다. 비록 긍정의 힘이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어도, 인간은 육신의 좁은 체질에 부정적인 지식이나 앎들이 접목되면 될수록, 하나님과 같이 대응할 수 없다. 정반대이다. 호기심과 유혹에 연약한 인간은 부정적 영역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자신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없는 이브의 욕망과 야망에 빠져든다.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고 성취시키면서, 자연히 각종 범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다윗의 시련도 그래서 왔다. 요즈음 한국교회와 사회를 어지럽히는 많은 큰 교회 목회자들의 탈선과 탐욕 사건도 바로 그 점을 입증해 준다. 

 

복음서를 보자

인간의 연약한 품성을 잘 아신 예수께서 그에 대한 결정적인 대비책으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謙遜)을 삶을 위한 안전한 처방으로 제시하셨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인간적 유혹을 꺾고 먼저 자신의 존재를 낮추는 일부터 하도록 특별한 지시를 하셨다(1-5절). 이런 말씀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어느 제자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나온 것이지만, 내용상에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어린아이들을 모델로 삼아, ‘탈(脫)아담의 삶’을 그렇게 지시하신 것이었다. 

 

겸손을 인격화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까지 안게 되고(빌2:3), 어떤 작은 자도 업신여기는 과오를 범하지 아니하게 되면서(10절),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을 넘어서, 나중엔 제일 큰 자로의 자리로 나아갈 길도 열리게 되기 때문이었다(3절, 눅14:10참조). 

 

주님은 특히 공동체 속에서 ‘낮은 자를 실족(失足)하게 하는 일’에 대하여 매우 날카롭게 대처하신다(6-9절). 실족이라 함은 유혹하여 죄짓게 하는 일을 말하는 데, 이는 에덴의 삶을 파괴한 뱀과 우리 조상 아담부부의 어리석은 처신들을 염두에 두신 지적임이 분명하다. 교회도 에덴인데, 교회 역시 유혹자와 실족하게 하는 자가 있어서, 낮은 자들을 신앙에서 떠나게 하고 무너뜨리게 하는 일이 자행됨을 경고하셨다(지난주일 야고보서 참조). 

 

믿음의 식구들은 명심해야만 한다. 작은 자에게는 그들을 돌보는 천사(天使)가 함께 있어서,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주변의 일들이 우리 심판주이신 하나님께 직보(直報)되고 있다는 것과(10절), 그만큼 하늘 아버지의 ‘잃은 자’에 대한 관심과 찾고자 하는 열정은 절대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12-14절 참조). 그러기에, 우리에게 ‘나도 살고 너도 살 가장 안전한 자세’는 모든 이들에 향한 겸손과 섬김에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어거스틴 일관된 주장). 

 

서신서를 보자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을 말한다(12절). 이 두 사람은 개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대표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우리에게 죄와 사망을 안겨다 준 첫 사람 아담이고, 또 다른 이는 생명과 구원을 은혜로 안겨 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죄와 사망은 아담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통해서 들어왔으나, 생명과 구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서 가져다 주셨다(18-20절 참조). 

 

그런데 매우 감사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의 힘은 아담이 준 범죄의 힘을 압도하고(15절), 의의 힘은 정죄의 힘을 압도하며(16절), 생명의 힘은 사망의 힘을 압도한다(17절)는 점이다. 즉 예수의 구원과 은혜는 아담이 전승해 준 죄와 사망과 정죄 보다 단연코 우월하여서, 그를 믿고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기쁨과 감사를 안겨준다는 점이다(17절,하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힘이 인간이 안고 있는 나약함을 압도하심에서 나왔다.  그게 복음의 큰 힘이다. 겸손과 말씀에의 복종과 낮은 자들을 향한 섬김의 자리를 굳게 하자. 

 

결론이다

인류는 실낙원의 아픔과 후유증을 깊이 앓고 있다. 인류는 지금 사망의 왕과 영생을 주 그리스도의 양분 체제하에 있다(20-21). 게다가 사망의 권세를 더욱 기승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허락된 에덴들인 내 자신, 가정, 교회, 민족을 무차별 파괴하고 범죄 하게 한다.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제대로 믿어야 한다. 두 가지이다. 우리들은 내 안의 에덴을 보전하고 향유하기 위한 거룩한 씨름과 함께, 복낙원을 갈망하는 이들을 살려내는 일에도 헌신해야한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