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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한가위감사주일 - 교회연합주일

관리자 2019-09-04 (수) 21:41 14일전 38  

본문) 창11:1-9, 막13:14-27, 고후4:1-6

 

9월에 접어들면서, 가을 날씨가 완연할 뿐만 아니라, 가을장마까지 염려되는 때이기도 하다. 창조 세계의 일기변화가 무쌍함을 절감한다. 게다가 금주는 빠른 추석(秋夕)명절이 들어 있어서 우리 마음도 많이 분주할 것이다. 모처럼의 가족 모임이 단합과 연대성이 강화되는 기회가 되기를 빈다. 한국교회는 교회연합(敎會聯合)주일로도 지키게 된다. 부디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분열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씻고 연합이 주는 힘과 기쁨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고 보면, 추석이나 교회연합, 이 두 가지 특별주일에 관심할 주제는 서로가 흩어짐을 면하고 하나 됨과 결속을 이루는 데에 있다고 보인다. 

요즈음은 핵(核)가족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가족이 이웃사촌만 못한 가족들이 되어버린 시대에 산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도 가족은 역시 가족다워야 한다. 불신과 이기심이 팽배한 시대에 그래도 가족만은 서로의 따뜻한 방패가 되고 쉴만한 그늘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연대와 유대감을 강화시킬 방안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도 그렇다. 최고의 이웃사촌이 되고, 또 다른 가족들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내부의 하나 됨에서 더욱 힘써야할 뿐만 아니라, 교파나 이웃교회들과의 연대성 강화도 역시 절실하다. 이런 점에서 특히 한국의 개신교회가 타종교들인 불교와 천주교에 비하여, 많이 밀리는 현상인데-, 이것이 우리의 모습들을 여러모로 부실하게 만들고 있다. 이웃 사랑의 정신이 반영되어야할 곳도 이곳이다. 반드시 연합정신이 극대화되어, 교회분열을 넘어 하나로 가야만 한다. 

 

창조절 둘째 주일인 오늘에 주신 말씀은 어떤 말씀들인가? 본문들 내용을 보면, 마침 ‘흩으심’에 대한 이야기와 ‘모으심’에 대한 이야기가 대조적으로 얽혀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흩으심과 모으심의 주도권 행사는 모두 하나님이 하신다. 어느 대상들은 흩으시고, 어느 대상은 모으신다. 결코 일방적이 아니다. 물론 흩으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아니다. 그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로 모으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런 데도 흩으시는 경우는 어떤 때인가? 

 

여기에도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죄악 세상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심판(審判)으로서의 포기 상황에 따른 조치이다. 노아 홍수 때의 전반적인 일괄 심판이 그런 경우이다. 또 하나는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의 이곳저곳으로 흩으시는 경우이다. 제국들 휘하에서 한없이 고통하며 눈물 짓게 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을 차단하고, 차선(次善)을 통하여 인간이 회개하고 방향전환을 하여서, 당신께 돌아오게 하려하실 때이다. 

 

이때는 심판은 심판이지만, 그것은 모으시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나온 조치(措置)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국에 패망하여 당한 고통과 비애가 그런 경우랄 수 있다. 여기에는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전체가 아닌 일부라도 돌아오려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택한 백성’(the elect)이나 ‘남은 자들’(remnant) 이야기가 거기에 해당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무조건 모으려고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게 아니다’싶으면, 가차 없이 흩으시기도 하신다. 즉, 하나님은 흩으심으로 인간을 심판(審判)하기도 하시고, 모으심으로는 구원(救援)도 하시는 분이다. 에덴에서 당신의 첫 작품들인 첫 사람 아담 부부를 밖으로 추방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가해보라. 그 마음은 어떠하셨겠는가? 당신의 최고의 질서인 말씀을 의심하고 반역한 행위이였기에 부득불 추방령을 내리셨으나, 그 마음은 편치 아니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건과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나 다시 복(復) 낙원 할 기회를 열어놓으셨다. 

 

오늘 세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물로서의 영적 질서는 이렇게 보인다. 당신의 창조세계를 거스리는 자들을 향한 심판으로서의 흩으심과 하나님이 정해주신 영적 질서인 말씀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향한 보호로서의 모으심이 양립되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창세기를 보자

실(失) 낙원한 인간들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자신들의 불안전성과 나약함을 함께 극복해내자는 취지에서 일종의 담합(談合)을 도모하는 행위를 전개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도전행위가 바로 바벨탑 건설이었다. 그것도 자신들에게 아직 언어가 하나일 때를 이용하여(1절), 서둘러 만들어 냈다. -‘자, 성읍과 (바벨)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9절)

 

1) 여기 인간들의 바벨탑 건설에는 다음의 세 가지 의지(意志)들이 담겨 있었다(1-4절). 

첫째는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인데, 이것은 당시에 하나님이 구름 넘어 높은 하늘 어느 지점에 계신 분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터에-, 자신들이 쌓은 높은 탑으로 그 구름이 머무는 지점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인간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과시(誇示)하려던 속셈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모습은 명백한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결과물이었고, ‘인간은 피조물일 뿐, 조물주가 될 수 없다’는 금단(禁斷)의 절대 벽을 허물고자 도전 행위였다. 

 

즉 ‘인간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원죄의 대표적 결과물이다. 그래서 부단한 실험과 도전이 지구촌 역사 속에서는 다양한 시도들이 잇따르고 있다. 영웅이나 스타들의 등장, 독재자들의 횡포, 과학기술만능주의, 전쟁을 통한 무자비한 생태계와 인간 파괴, 이기주의와 배타주의와 폐쇄(閉鎖)주의 등등이 하나님의 창조의 열린 질서에 계속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둘째는 ‘자기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다. 자기가 한 일을 놓고 어찌 하나님만 높여야 하느냐는 반발이 그 안에 담겨 있음이다. 이거 역시 인간의 자기 정체성 상실에서 나온 결과였다. 창조주 앞에서의 피조물의식, 주인 앞에서의 종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의 관리자요 청지기일 뿐이다. 종이 교만(驕慢)하면 금방 자세가 무너진다. 단순히 자신에게만 과오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주인에게도 심대한 피해를 끼치게 된다. 

 

셋째는 ‘흩어짐을 면(免)하자’는 것이었다. 실낙원 당한 자의 실존적 불안을 드러낸 마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목(和睦)을 회복하면 끝날 일인데도,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인간들 끼리끼리 뭉쳐서 숫자의 힘을 형성하여 조물주의 위력과 맞서고자 하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들까지도 대형교회 만능주의에 빠져 든 것도 그런 면이 강하다. 소형교회가 갖는 열등감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행태이다. 하나님 상대는 집단 속에 묻혀서 해결하려면 안 된다. 나부터의 올바른 마음과 태도가 우선적이다. 

 

2) 그런 인간들의 바벨탑 건설 작업들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와 대책이 내려졌다(5-8절). 

그러한 인간들의 높아지고자 하는 눈물겨운 작업들이(!) 여호와에게는 매우 하찮은 일이었다(5절). 그들이 구름에까지, 피라밋처럼 돌과 흙더미를 쌓아 올리기 위하여, 쏟은 정성과 노력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을까! 얼마나 많은 힘없는 양민들이 죽어야했고, 자원을 쏟아 부어야만 했었을까?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모두가 무가치한 행태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들은 후유증(後遺症)에 시달려 서로 망하게 될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5-6절). 

 

여호와의 판단은 그 일을 당장 중단시켜서 그들이 다른 일에 열심하며 살도록 돕는 것이었다. 중단시킬 방법은 하나였다. 그들을 결속시키고 있었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서로 흩어지게 하는 일이었다. 패역(悖逆)한 인간 결집 행위와 도시 문화를 깨뜨리는 일이었다(7-8절). 

 

3) 인류 최초의 바벨탑 문화는 거기에서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9절). 그렇다고 하나님의 이런 봉쇄가 인간의 바벨탑 문화의 꿈을 완전히 끝장낸 것이 못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도모하려는 각성이 없는 곳에서는, 금방 삐져나올 수 있는 대안적 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의 심판은 적지 않은 긍정적 낙수(落穗)물을 남기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은 더 이상 이 세상과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첫 조상의 과오에서 벗어난 삶에서 찾아야만 된다는 각성하는 인물들이 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자(무리)들이 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면서, 창조세계를 바르게 보전해가게 된 일이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할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환난(患難)의 시절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택(擇)하신 백성들을 친히 지키시고 돌보실 것인지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매우 강렬하게 소개하신 종말론적(終末論的)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후반에 가서는 당신(인자)이 하늘에 오르신 후, 심판의 주(主)로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까지도, 당신의 택하신 자들을 모으시리라고 놀라운 약속까지도 더하여 주셨다. 

 

1)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잔인한 공격과 박해와 짓밟힘을 당한 때는 언제인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짓밟힘을 당하고 해체 당하게 될 때와, 헬라제국 치하에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잔인무도한 유대종교에 대한 박해했던 시절과, 로마전쟁 후엔 서기 70년 이후에 진행된 유대인 말살시기 등이었을 것이다. (후에, 2차대전시 히틀러로 인한 600만 대학살 사건도 참조). 이런 뼈아픈 박해들을 그들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의 박해 내용은 그 중에 안티오커스 4세 시절에 대한 회상과 앞으로 다가올 로마제국의 대(大)탄압의 예언들이 복합적으로 담겨져 예수의 예언형식으로 올려진 듯하다(14-19절). 

 

하지만 본문들의 핵심(核心)은 그런 대 환란과 박행 속에서도,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기억(記憶)하셔서, 그들을 찾아서 극진히 돌보신다는 데에 있다(20-23, 27절 참조). 그 주요 내용들을 확인해 본다. 

☞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減)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 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20절) 

☞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느니라’(23절) 

☞ ‘또 그 때에 그가 천사(天使)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27절). 

 

2) 그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게는, 그런 대 환난 때에 대피(待避) 혹은 대응(對應)의 특별한 행동 지침들과 주의 사항들도 함께 친절하게 제시해 주셨다(14-18절, 21-25절 참조). 

☞ 특히,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는 때가 되면, 인자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인데, 그 때의 인자는 심판의 주시오 동시에 구원의 주로 오실 것이다’(24-26절)도 밝히고 있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자신의 계시(啓示)에 의한 가르침과 성령에 감동에 따른 교훈들과 사도의 자격을 의심케 하면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하게 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대응의 메시지를 담았다. (마치 요즈음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의 경우처럼).   

또한 사도는 그들의 특징과 문제점을 먼저 지적하면서, 동시에 종말시대 곧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영적 자세들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함께 짚어준다. 

 

1)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자신에게 부여된 사도의 직분을 어떤 자세로 감당해가고 있는 지를 분명히 밝힌다(1-2절). 그는 ‘자신의 사역에는 그 어떤 숨은 부끄러움이나 속임이 전혀 개입되지 아니함’을 강조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받고 주신대로(진리) 드러낸다고 역설한다’. ‘이 점을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良心)을 향하여 자천(自薦)하며 사역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2) 그러면서 자신이 받은 계시인 복음을 받지 못한 자라면, 그는 복음이 가리어진 자이기에, 망할 자들임을 선언한다(3절). 또한 세상 신에 붙잡혀 믿음이 아니라 혼미한 마음에 빠져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받지 못할 자들도 망할 자들임을 선언한다(4절,6절). 

 

3) 그는 끝으로 자신의 선포의 실체(實體)에 대하여도 단호히 선언하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자기(들)가 예수를 위하여 성도들을 섬기는 종이 된 것’을 선포한다고 말했다(5절). 이 선포에는 그가 하나님 사랑과 교회와 복음을 위한 이웃 사랑에 붙들려 살고 있는 존재임을 명확히 드러낸 것으로서, ‘이 종말 시대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이 진정 누구이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실체와 함께 방향 제시를 하였다고 보인다. 

 

결론이다

가정이나 교회는 모두 에덴의 또 다른 장소이다. 당연히 구성원들은 서로 하나 되어야 하고, 살기에 가장 좋고 아름다운 처소를 이루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가정도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품속에 거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흩어지는 아픔에 평화도 잃고 고단함을 위로할 곳을 잃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다. 겸손히 그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 주의 은혜 안에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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