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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8-13 (화) 12:49 4년전 1127  

본문) 갈 5:1-15, 출31:12-17, 마12: 9-14

 

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다. 금번 성령강림절 후반에는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들이 매주 다양한 지침들로 제시되면서,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그 바람에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흔들리지 않고 방향을 찾아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귀한 나침판과 길잡이를 만나서 매우 좋다. 

 

오늘 주일의 세 본문 말씀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웃 사랑을 향한 증언들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전의 말씀들과 다른 점은,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安息日)이라는 영적 시스템(system=체계)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적이고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안식일이 가지는 새로운 영적 메시지들을 취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토록 완벽하게 보이는 안식일에 대한 제도를 포함하여, 우리의 신앙 교육 안에는 뜻밖에도 이웃 사랑을 저해(沮害)하게 하는 우리 내부적(內部的)인 요인들이 산재되어 있는데, 오늘 말씀들은 바로 그 부분에 대하여서도 포괄적인 진단과 함께 대응 방안들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존재하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느냐’는 주님의 지적은 정말 생산적 신앙에 대한 분별력을 높이기에 적합한 지침(指針)이 된다. 

 

따라서 오늘은 먼저 구약의 말씀을 앞세워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의 제정해 주신 의미와 그 이유에 대하여 성찰하겠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주일(主日) 개념으로 정리된 성일이지만, 그 뿌리와 정신과 가치는 안식일 계명과 같이 가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매우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안식일 제도가 예수 시대에 와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또 거기에서 나온 문제점도 함께 살펴보며, 그런 현상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적인 대응과 평가를 통하여, 진정으로 안식일이 안고 있는 기본적 정신을 제대로 찾아보고자 한다. 

 

서신서인 갈라디아서에 가서는, 이미 유대인 중심의 성전체제에서 이방인 중심인 교회 체제로 옮겨갔고, 또 토요일인 안식일 중심에서 일요일인 주일(일요일) 체제로 옮겨갔으며, 예식도 할례에서 세례에로 옮겨 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 이방인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의 갈등 요인으로 등장한 율법 중심과 할례에 대한 요구들이 그들에게 어떤 도전과 방해가 되고 있었는 지를 살펴보겠다. 

 

이런 지적과 함께, 오늘 우리들의 주일성수의 의미와 목적도 다시 정리하면서,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 사랑의 행보를 보다 건강하게 발전시키고자 한다. 

 

구약을 보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본문의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을 만나 뵙는 장소인 성소(회막) 건축과 제사장 직무에 대한 지시를 최종 마무리하는 마지막 부분에 주어진 명령이었다(출25-31장 참조). 예배 행위의 최종 마무리 차원에서 주어진 계명이 바로 안식일 계명이었다는 말이다. 이는 앞에서 거론되는 성소와 제사장과 제사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할 최종적인 시스템과 틀로서의 안식일(安息日)이 공식화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호와께서 친히 밝히신 안식일에 대한 취지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여호와는 이 날을 ‘나의 안식일’(my Sabbaths)이라고 선언하셨다(13절). 이것은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한 주간인 7일간의 삶의 일정 중에서, 특정한 날을 아예 ‘당신의 날’로 성별(聖別)하시고 구별(區別)하셨음을 말한다. 이것은 당신의 백성들이라면, 전적으로 성별하여 지켜야할 날이란 말이다. 어떤 인간도 자기 임의로 그 날을 훼손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셨다.

 

2) 그 날은 어느 날인가? 여호와가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신 날이었다(17일). 이런 안식일에 대한 구도는 하나님에게는 그 날이 일정의 마지막 날이지만, 인간에게는 일정의 첫날이라는 의미로 다가 온다. 이것은 우리가 주일(일요일)을 한 주간의 첫날의 개념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게 된 근거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안식을 맛본 후, 삶의 일정에 참여하게 된다. 첫날의 훼손은 남은 모든 날들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이런 안식일 제정의 이유를 밝힌 까닭은 당신 자신을 위함보다는 인간인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즉 연약하고 모순된 구조를 가진 인간을 위하여 창조주께서 그런 휴식 행위를 자원(自願)하셨다고 판단된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원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인간들의 물질과 돈에 욕심과 탐욕이 너무나 강하여, 그에 대한 통제장치(統制裝置)가 절대 필요하다고 보셨기에 안식일 제정을 하셨다. 만일 안식 없이 일에만 매달리면, 금방 지치고 병들어 죽게 될 것이 뻔하다고 보셨기에 아예 무리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제재의 선수(先手)를 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14-15절)라는 매우 격(激)하신 말씀을 주신 것도, 모두 인간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둘째는 창조주가 인간의 생체 리듬을, 엿세 일하고 하루 쉬면, 건강이 유지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무엇이든 가능하게 제작하셨으나, 그러나 연약함에 쌓여 있는 존재로 지으셨다. 그것은 삶을 휴식(休息)이란 시간과 더불어 돌아보며 생각하고 살라는 메시지를 담아주신 조물주의 절묘한 솜씨이다. 휴식과 사고(思考)는 안식의 근간이다. 하지만 몸만 편한 것이 진정한 휴식이 아니다. 사고의 전환이나 시각의 전환이 병행될 때, 진정한 휴식이 주어진다. 

 

3) 그런데 조물주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한걸음 더 앞으로 이끄셨다. 육체의 휴식의 차원을 안식(安息)의 차원으로 업그레이드하신 것이다. 참 안식은 기본적으로 ‘거룩함’(Holiness)에서 찾게 하셨다. 휴식을 단순히 육체적 노동에서의 해방으로 보지 아니하고, 내 속 사람인 마음과 영혼의 정화(淨化)에서 얻을 수 있게 하셨다. 죄지은 사람, 범죄한 영혼에게 안식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그 날을 ‘거룩한 날’이며,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신 까닭도 바로 그 연유에서였다(13-14절 참조). 

 

4) 그러면 우리의 거룩성은 어디에서 확보될 수 있는 것일까? 회개하며 씻어내는 것만 해결책은 아니다. 유지와 보전이 그에 못잖다. 그런 점에서 관계(Relationship)는 절대적이다. 그것도 거룩하고 깨끗한 영혼들과의 연결고리가, 마치 수도 파이프처럼, 늘 연결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절대 중요하다. 누구와의 연결인가? 기차의 레일처럼 둘이다. 첫째는 조물주 여호와와의 연결 관계를 공고히 하는 일이다. 하나님 사랑의 행보를 통하여 가능하다. 둘째는 그가 사랑하시는 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해가는 일이다. 여기에서 이웃 사랑의 행보도 가능하게 된다. 

 

놀랍기는 이런 두 가지 측면의 사랑 행위들이 바로 안식일(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다 가능해 진다는 점이다! 예배와 말씀을 받으면서 하나님 사랑을 강화시키고, 매 주일 만나고 평생 동행을 하는 성도들과의 교제와 삶의 연대를 지속하면서 이웃 사랑도 계속해 간다. 그러면서 엿새간의 세상에서의 삶도 대비한다. 주일을 성수(聖守)하는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5) 안식일의 궁극적인 축복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날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표징이되, 그것도 ‘영원한 표징(sign)’이기 때문이다(13,17절).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 분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영원한 당신의 나라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을 위한, 사전 예표(豫表)이며 그림자로 보여주신 증표(證票)라는 것이다. 이것은 왜 우리가 안식일 준수에 힘써야만 하고, 엄수해야할 일인지를 일깨워 주신 말씀이 아니겠는가! 부디 주일 성수를 통한 영생의 복도 누리자-!

 

복음서를 보자

예수 당시의 유대인의 안식일 이해는 긍정적 이해보다는 너무 부정적 이해에 기울어져 있었다. 잘 지켜서 인생에 유익한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잘 지키지 못하여 혼나고 매 맞게 되는 저주와 심판적 기류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사랑하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마치 매 많이 맞고 자란 아이들과 비슷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찌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산될 수 있겠는가! 그런 감시와 심판자들은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니 주변엔 끼리 집단만 형성될 뿐, 어울림은 불가능할 뿐이다. 

 

이것은 당시의 율법 종교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사랑만 대변하면서, 이웃 사랑에는 장벽을 높이 쌓아두고 있는 기형적 종교에 빠졌음을 말한다. 그러기에, 한번 죄인이면 영원한 죄인일 뿐, 회복이나 소생을 기대할 길이 전무하였다. 바로 그런 강고한 잘못됨과 어긋남을 온전함과 건강함으로 되돌리려 오신 이가 바로 예수이셨다! 예수님은 율법 정신 회복과 그 안의 담긴 복음(福音)적인 영역을 회복하는데 집중하셨다. 

 

본문은 율법의 핵심이기도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본래부터 ‘살림의 종교’인 유대교를 ‘죽음의 종교’로 만든 바리새인들의 문제와 대면하면서, 예수께서 어떻게 싸우시고 극복하셨는지를 생생히 전한 내용이다. 그러면 그들과 예수가 왜 그토록 치열하게 맞선 것일까? 

 

1) 안식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는 문자적 지시에 충실한 것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예수는 ‘안식일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살리고, 복을 받게 하며, 무너진 삶을 회복하게 하는 때’로서 이해하셨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임을 드러내셨다. 본문의 경우처럼,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일은 안식일에도 전혀 문제될 것 없다는 입장이셨다(11-13절 참조). 

 

2) 장애우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너무 컸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장애나 가난이나 질병은 모두 죄의 댓가요 열매로 알았다. 인과응보의 시각으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강도만난 이웃을 보고도, 그렇게 외면할 수가 있었다(눅10:25이하).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그들을 당신의 협력이 필요하고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로 보셨다. 그러기에 당신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게 안식일 여부나 죄인 여부에 상관없이, 즉시 도움을 주신 것이다. 사마리아인의 태도를 참된 이웃 사랑의 모델로 간주하며 높이 평가하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정착운동을 두고, 친북(親北) 내지 종북(從北) 논란이 극심하다. 북한을 보는 시각 차이 때문에, 그런 대립이 일고 있다고 본다. 북한을 원수나 척결해야할 대상으로 보느냐, 아니면 그들도 언젠가는 우리와 함께 살아야할 동족이요 혈족이다고 보느냐? 이 시각의 차이는 행동까지 다르게 해 주기에, 매우 중요하다. 전자는 행동이 거칠고 공격적이다. 하지만 후자는 그들을 끌어안고, 함께 잘 되는 길을 찾으려 한다. 묻고 싶다. 머잖아 통일시대가 열릴 때에는, 과연 누가 돌아온 이웃들을 맞이할 호스트가 될까? 

 

서신서를 보자

이방인 교회인 갈라디아 교회는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만 했다. 즉 율법이 가진 이웃 사랑의 죽었던 영역을 되살리되, 그 영역을 온 세상 만민에게까지 확산시키기 위하여, 나사렛 예수가 동족인 바리새인들의 증오와 배타적 입장에 맞서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핏 값을 지불하며 얻어낸, 자유(自由)의 산물이었음을 알아야만 했다. 만일 예수가 그러지 아니하셨다면, 복음은 끝내 이스라엘과 유대교를 넘지 못한 체, 그들을 구원하지도 못하였을 것 아닌가!  

 

1)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 안에 스며들어온 낡은 유대교 세력들에게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바울은 그들을, 교회 안에서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7절), ‘적은 누룩’(9절), ‘요동하게 하는 자’(10절), ‘십자가의 걸림돌’(11절), ‘어지럽게 하는 자들’(12절) 등등으로 규정하면서, 교회의 형제들이 자정(自淨)능력으로 그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요구하였다(12절). 

 

2) 그들은 할례(割禮)를 통한 구원의 확증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할례는 유대인들의 정체성 확립에는 도움이 되는 표지였으나, 세계 만민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2-4절). 게다가 할례는 율법 안에서의 아주 작은 표식 중의 하나인데, 그것으로 인간의 구원 여부를 판정하는 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는 무모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3) 그러면, 할례가 구원의 표지가 아니라면, 무엇이 구원을 받았다는 표지(標識)란 말인가? 

☞ 성령에 의한 믿음을 따라 사는 삶(life)이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뿐이다(5-6절).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면서, 이웃 사랑하기를 내 자신같이 행하는 일이다(13-14절) 

 

결론이다

주일을 다시 생각하자.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의 무대로서의 주일을 기뻐하자. 그리고 성숙한 주일성수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하자.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손 마른 이들’이 참 많다.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는 자가 되자. ‘내 몸처럼 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곧 모든 율법의 성취’라는 말씀을 가슴에 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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