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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평화통일주일

관리자 2019-08-07 (수) 23:17 15일전 43  

본문) 롬 12:9-21, 레 19:9-18, 눅 6:32-38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웃 사랑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지금 한 여름의 뜨거움 못지않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입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몰아가신다. 일반 신들은 오직 자기를 섬기고 사랑하면 만족할 터인데-, 우리의 하나님은 전혀 다르다. 당신을 향한 사랑과 함께,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 특히, 힘없고 가련하여 돌봄이 필요한 백성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뜨겁기를 요구하신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온 세상 만민의 주님이시다. 자기만을 위하라는 이기적, 탐욕적, 독선적, 배타적인 면은 전혀 없으시고, 불신자를 포함하여 온 세상 만민과 생명체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으로 가득하시다. 차별이나 배타적인 태도도 전혀 없으시다. 그 분에게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당신이 직접 창조하시고 생산하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를 믿는 우리는 이토록 속이 좁고 편협할까-? 

 

그런데 하나님의 인간사랑 방법은 매우 특출한 면이 있다. 그런 당신의 인간 사랑과 관심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이란 분을 우리의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시고 복을 주시면서, 당신의 이 세상 사랑을 구체화하시고 확대해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다음의 두 가지 차원의 복을 살펴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를 복(福)의 근원이요 시작이요 뿌리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창12:2). 또 하나는, 그렇게 받은 복을 혼자만 즐기게 하지 아니하고, 그와 그의 후손들이 앞장서서 받지 못한 세상 만민들에게 전하고 나누어 주면서, 만민도 함께 그 복을 풍요롭게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창12:3). 이런 복들이 실제로 가능하려면, 첫 번째 복은 하나님만을 사랑해야만 가능하고, 두 번째 복은 이웃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만 복의 기능이 가능해 지게 되어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두 복들을 하나의 묶음인 패키지(package)로 주시면서, 이 둘을 결코 분리시키지 못하게 하셨다. 이 둘 중 하나만 택하는 순간, 둘 모두를 잃게 만드신 것이다. 취하려면 모두를 취해야하고, 거부하려면 모두를 거부해야하는 특성의 복이 바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 주셔서, 이 둘이 하나로 나타날 때에 비로소 복다운 복이 빛을 발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바로 이 복들이 긴밀히 얽힌 틀 속에서, 모세-예수-교회를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다.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의 역사는, 이 둘의 연합된 때와 분리된 때로 갈린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갈 때, 역사나 교회는 빛을 발했다. 하지만 분리할 때, 교회는 망가졌고 어둠이 승리했다. (☞ 이 점에 대하여서는, 본인의 총회실행위원회의 특별설교문<본 홈페이지 원장코너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오늘은 강림 후 아홉 째 주일인데, 오늘의 세 본문들도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온통 이웃 사랑의 계명과 실천을 위한 지침들로 가득하다. 성령의 뜨거운 관심사가 무엇인지가 재확인된다.  주님을 맞이하고 기다리는 종말(終末) 시대는 성도들의 몸가짐, 마음가짐에 의하여 결정될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장로교의 원조인 요한 칼뱅은 그의 방대한 저서인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성령론’에서 다루었다. 성령론의 핵심으로 성도들의 삶을 다룬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으로 증언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속 인간들과 똑같은 마음과 행동으로는 안 된다. 확실히 달라야 한다. 바로 그 점을 제시하기 위하여,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이 주어졌다. 말씀을 받기에 부담이 큰 것들도 있겠지만, 우리를 그 말씀의 지침에 맞추어가는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거기에 주님의 영광과 나와 이웃 모두의 복이 있다. 

 

이를 위하여, 오늘의 말씀 접근은 복음서의 나타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제시한 세 가지 행동지침들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틀에서 나머지 구약의 지침들과 교회 공동체를 향한 서신서의 지침들도 조명해 보려고 한다. 마침 이번 주일이 평화통일주일이어서, 평화통일(平和統一) 시대를 열어갈 우리들에게도 훌륭한 가이드(guide)가 될 말씀이 되리라 믿는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제자-교회 공동체)에게 다음과 같은 매우 획기적(劃期的)인 생활수칙을 제시하셨다. 당시로서는, 아니 지금으로서도, 일반인들이 범접(犯接)하기가 불가능한 정도의 탁월한 처세 지침들을 다음의 세 가지 차원으로 제시하셨다. 

 

1) 인간관계에서, ‘주고받기 식’의 세속적(世俗的)인 원리를 넘어서라고 요구하셨다(32-34절). 세속의 원리는 ‘주고받는 것’이다. 흔히 ‘Give & Take’ 방식이다. ‘주면 나도 주고, 안 주면 나도 안 준다’라는 통상적 방식이다.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해서 요즈음엔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통상적 인간관계 원리는 그래도 보편타당성은 없잖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 차원을 넘어서라고 요구하신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도 그 정도의 사랑은 하고 있고, 행동하고 있으며, 거래를 하고 있다‘는 연유 때문이다.- ‘죄인들도 그 만큼은 한다’(32,33,34절 하반부). 이 말씀은 종말시대를 극복하고 이겨가려는 하늘 백성들의 수준이, 세속적 죄인들 수준에 불과해서는, 하나님의 칭찬 받을 일은 전무할 뿐더러, 세상 안에서 할 일도 전혀 없으리라는 점을 일깨우시기 위함이다. 

 

주님의 지적들은 구체적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일(32절), 자기를 선대하는 자만 골라서 선대하는 일(33절), 자기에게 잘 해주리라 기대되는 사람만 꼭 집어서 잘해주는 일(34절)등을 지적하셨다. 이런 행위는 주관적 이해관계에 얽혀 자기를 넘지 못한 자들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생각해보자.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서 그런 조건으로 접근하셨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가능했을까?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이 요구에 순종해야한다

 

2) 우리의 행동이 세상 사람의 행동에 의존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처신할 것을 요구하셨다(35-36절). 이점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죄인들의 자녀들처럼 처신하거나 그들의 가치관에 맹목적으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신 것이다.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세상이 저러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가 답(答)이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하지만, 나는 내 하늘 아버지를 본받아 행(行)하겠다’가 답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을 선도하기를 원하셨다. 생명체의 머리와 두뇌(頭腦)가 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녀들이 세속의 저급한 자녀들에 끌려 다니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자녀된 이들은 우리 하늘 아버지의 자존심과 나의 자녀 됨의 긍지를 세우는 행위를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주님은 세 가지 행동 지침을 주셨다. 

 

① 먼저 하늘 아버지의 자비(慈悲)(사랑)로우심을 본받아, 자녀인 우리도 자비로워야한다(36절). 하나님의 품성의 특성은 바로 자비와 긍휼이다. 따라서 이웃에 무자비하거나 상대를 무시하며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저급한 행동들이다. 

 

② 원수(怨讐)에 대한 특별한 대응을 요구하셨다. 보복이 아니라 사랑하고 선대하는 일이다(35절). 대체로 사람이 살다보면, 원하지 않게 자기와 맞서는 사람들, 자기를 괴롭히거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이 생긴다. 대체로 이해관계가 얽혀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가 크고, 또 분노가 깊으며, 어느 때에는 보복도 하려고 한다. 

 

대체로 원수는 삶에서 부딪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멀리 있는 이가 아니라, 가까운 이들이 대부분이다. 가족들이 원수 된 경우는 허다하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발생한다. 사회무대에서도 생긴다. 민족 차원도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대응이요 마음가짐이다. 우선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내 잘못 여부를 살펴야 한다. 혹 발견되면, 그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필요한 보상을 하면 좋다. 하지만 문제는 그 차원에서 해결이 안 될 때이다. 어떻게 대응해야 바람직한가? 

 

우선은 내 스스로가 원수를 심판(審判)하려는 행동을 멈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를 조건 없이 선대(善待)하면서, 둘 사이의 문제에 대한 판단을 공의(公義)로우신 하늘 아버지에게 맡겨야 한다. 나의 하나님은 그의 주님도 되신다는 믿음으로 그래야 한다. 그 때, 그 분이 둘 사이의 문제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 이 고비를 인내하며 잘 넘기면, 믿음은 크게 성장한다. 

 

③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고 기꺼이 주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신다(37-38절). 

☞ 부정적 경고들이 두 가지 있다-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 긍정적 경고들도 두 가지 있다- ‘용서하라’, ‘주라’(35절도 참조). 

☞ 이 지침을 주신 까닭이 무엇인가? 종말 심판 때는 물론 현세에서도, 내가 이웃들에게 대응한 그 모습들이 나를 향한 심판과 평가들의 자료가 되어, 내 운명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음부터 이웃 사랑의 모델로 택하셨던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이주한 그들 스스로는 지울 수 없는 ‘이웃 사랑을 향한 계명들’로 고지하신 내용들이다. 주변에 숱한 토착 우상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차원 높은 윤리적 규범을 제시하여, 여호와가 모든 인간과 창조물을 사랑하는 참 신임을 확인시키고자 하신 뜻도 담겨 있다. 이런 지침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1) 이웃 사랑은 사회적 약자(弱者)들에 대한 배려(配慮)에서 시작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거류민(居留民)인 나그네들을 배려하여(9-10절), 곡식을 추수할 때, 밭모퉁이까지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 열매도 다 따지 말고,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아야 한다. 

 

2) 도둑질, 속이기, 거짓말, 거짓 맹세, 억압, 착취, 품삯 지체(遲滯) 등으로 약자들 괴롭히면 안 된다. 품꾼의 품삯은 그날 가족들의 부양할 목숨이 걸린 것이기에 즉시 지불되어야 한다. 

 

3) 귀머거리를 향한 저주나, 맹인 앞의 장애물로 그들을 괴롭히면 여호와에 대한 불경이다(14)

4) 재판은 빈부귀천(貧富貴賤)의 차별 없이 오직 공의(公義)로 실시해야한다(15절). 

  가짜 뉴스나 허위 비방하는 일과, 이웃의 희생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해서도 안 된다(16). 

5) 문제 이웃은 침착하게 바로잡아주어야 하지만, 그 이유로 자신이 죄를 떠맡으면 안된다(17)

 

6) 원수 갚지 말라(세 본문 공히).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18절). ☞ 평화통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북한 동포를 원수로 생각하느냐 내 동포(혈족)으로 생각하느냐는 점은 매우 중요한 기초적 시각이 된다. 본래 원수는 배척의 대상이지만, 동포는 포용의 대상인 까닭이다

7) 창조질서에 위배된 종(種)이 다른 것과의 교배(交配)나 혼합을 도모하지 말라(19절). 

 

서신서를 보자

로마 교회에 서신을 보낸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이웃 사랑에서 지켜야할 두 차원, 즉 교회 내부에서의 교제 수칙들(9-13절)과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 수칙들(14-21절)을 정리하여 전해 준다. 그 기본 사상은 모두 이타적(利他的)인 이웃 사랑의 실천과 구현에 있다. 

 

1)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불신이 흐르면 교회는 마귀의 놀이터가 된다. 신도들은 항상 거짓과 악한 것을 미워하고 착하고 선한 것을 택하며 살아야 한다(9절). 

2) 사랑하고 존경하되, 서로 먼저 하여야 한다. 선한 것일수록 주도권을 행사는 것이 좋다(10)

3) 주님을 섬기는 데에는, 부지런하고 게을러서는 안 된다. 열심을 품고 섬겨야만 한다(11절). 

4) 소망과 인내와 기도의 사람이 되라. 성도의 필요를 공급하고 손대접도 힘써야 한다(12-13)

 

5) 박해자에게는 저주 대신에 축복을(14), 행악자에게는 보복 대신에 선행을(17), 원수에게는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을 베풀면서(19),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21). 

6) 이웃과의 마음의 공감대(共感帶)를 유지하라. 교만이나 자만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된다(16).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和睦)하라.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18절). 

 

결론이다 

이웃 사랑은 단순히 도덕적 인간, 윤리적 인간을 위한 지침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인 방안이다. 하나님의 최고 사랑의 대상은 바로 인간이며 이웃들이며 또한 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웃 사랑은 생각밖에 간단치 않다. 경우의 수가 많아서, 모든 상황에 다 적절히 맞추어 사랑을 실천하기가 여의치 못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사랑과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하나로 가려는 세력과 분리시키려는 세력의 대결에 있다. 교회도 그렇고, 나라들도 그렇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표는 아브라함이 패키지로 받은 이 복들을 하나로 묶어내어, 하나님과 인간 사랑을 함께 실천하는 세상과 교회 만들기에 있다. 힘을 내자. 지혜를 모으자. 성령께서 이 거룩한 씨름을 잘 감당하려는 이들과 함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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