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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관리자 2019-07-31 (수) 10:11 4년전 1053  

본문) 벧전 2:11-17, 잠 8: 1-21, 마 6:19-24

 

무더위가 한창인 8월에 접어 들었다. 습도가 높아져서 견디기가 힘든 계절이다. 건강 유념하면서, 한 여름을 잘 이겨내자. 분명한 것은 모든 식물들에게는 이 여름이 성장과 성숙을 위해 다시없이 필요한 절기라는 점이다. 이 계절을 잘 보내야 가을을 맞이할 때 풍성한 열매들인 오곡백과(五穀百果)를 기대할 수 있어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보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늘 백성인 나에게는 이 계절 여름은 과연 어떤 유익을 제공해주는 때일까? 

 

마침 성령강림절기가 이 뜨거운 계절인 여름을 관통(貫通)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계절을 보내면서, 성령의 다양한 사역들을 맛보면서 크게 놀란다. 특히 내 안에 오신 성령이 내 존재와 그 역할에 어떤 영향을 주셨고, 또 주변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하셨는지를 알면 알수록 놀랍고 신비(神祕)하기도 하다. 내 미래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나를 새롭게 이끌어 주실 지를 기대하면 할수록, 내 가슴은 더욱 부풀기도 한다. 

 

성령의 다양한 역사들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재발견은 내 영혼의 속사람을 계속 성장시킨다. 이전의 나로부터 새로운 나로, 한걸음씩 나아가게 만든다.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그러나 언젠가 있을 어린 양 혼인잔치에서의 신부(新婦)로서의 내 모습에 대한 기대감도 설렘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이 성령과 함께 하는 여름은 나에게는 소중하며 기쁜 계절이다. 

 

무엇보다도 은사들 중심만의 성령 이해에서, 인간 자체의 가치와 인격 내지 품격을 고양(高陽)하는 성령의 다양한 역할들을 접하면서 더욱 반갑고 기쁘다. 그를 위하여 우리의 시각과 인식의 지평을 땅에서 하늘까지로, 기능뿐만이 아니라 인격까지도, 육체와 함께 영혼까지도, 순간만이 아니라 영원까지도 품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충분히 만나고 맛볼 수 있도록 드높여 주신 성령이심을 이 계절에 재발견하고 있음은 너무 황홀하고 감사하다. 

 

오늘은 강림 후 여덟 번째 주일이다. 성령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목회서신을 통하여, 이 땅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존재(存在)의 정체성’을 새롭게 일깨워 주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는 ‘거류민(alien)이요 나그네(stranger)’라 하셨다(11절). 이 말은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체질이나 기질에 맞지 아니하고 생경(生梗)한 낯선 존재’라는 점이다. 

 

이런 차원의 새 정체성의 부여는, 동시에 거기에 걸 맞는 메시지를 함께 준다. 즉 세상 현장과는 평생 거스려 살아야 된다는 점에서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환경과 상황에 대응(對應)하고 살아남기 위하여서는 보다 적절한 삶의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야함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거류민과 나그네의 삶에는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의 삶의 흐름을 피할 수 없다. 현지인(現地人)이나 원주민들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지혜와 명철도 필수적 요소이다. 

 

오늘의 세 본문들은 그런 생활에 적용할 지혜와 명철 등의 차원 높은 지혜문학의 내용들이 올라 와 있다. 그것은 그만큼, 이 말씀이 주어진 시대들도 어렵고 힘든 때였음을 말하기도 한다. 마치 요즈음 우리나라가 일본(日本)의 뜻하지 아니한 강력한 경제침략의 도전 앞에서, 이제는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차원의 응전으로 우리의 새로운 활로를 타개(打開)함으로서,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켜야하는 처지와 비슷하다. 그러면 이런 지혜와 명철을 남달리 소유하도록 강하게 요구 받은 구체적인 대상들은 누구였을까? 말씀들을 다시 들여다보자. 

 

서신서의 대상은 예수와 그의 복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박해(迫害) 받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잠언서는 유대인들이 분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여호와와 그 말씀의 귀중함을 잃고 세상 경제와 물질의 풍요 속에서 자신의 안정과 미래를 찾아 안주하려는 영적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이 주 대상이다. 동시에 떠돌이 생활하며 각 곳에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도 당연히 포함한다. 그리고 복음서는 예수를 만나서 낡은 종교인 유대교와 결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사는 새로운 인류로 선택된 제자들이 그 대상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마5:13-14)라는 예수의 말씀을 받은 모든 자들이다.

 

그렇다. 낯선 곳의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려면 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유(保有)해야만 한다. 그들보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수준의 처신(處身)도 필요하다. 현지인 보다는 수준 높은 도덕과 행동과 문화인의 처신을 통하여, 그곳 현지인에게는 자기들의 부담이 아닌 도움이 되고 필요한 좋은 이웃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현지 주인 세력들과의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다. 그들과 똑같거나 못 미치면 부담 세력으로 간주되어, 쫓겨나고 밀려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깨우침이, 지금의 탁월한 성서의 백성인 유대인을 생산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인다. 그들이 나라 없이 온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도 수천 년을 강인하게 살아남게 할 수 있던 것은, 걸 맞는 놀라운 존재 비법이 그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여호와 신앙과 이웃과 더불어 살게 하는 지혜문학이다. 이는 그들이 여호와 신앙이라는 수직적(垂直的) 보화와 지혜와 명철이라는 수평적(水平的) 보물, 즉 영과 육 모두를 살릴 수 있고, 하나님과 이웃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두 개의 축복의 열쇠 모두 일찍부터 보유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것이 그들을 제도적 국가의 보호가 없어도, 그토록 수천 년을 살아내게 하였다. 

 

세상의 그 어떤 종족이 일찍부터 이 둘을 함께 보유하고 있었던가? 정말 놀라운 복을 받았던 그들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은, 그들을 환란과 떠돌이 생활에서도 꺽이지 않고 살아내게 한 그 말씀들, 곧 이 신앙과 생활 모두에 해답이 될 지침(指針)들을 담고 있다. 즉 세상 일반과는 분명히 다르면서도 그러나 거기에 순종하면 누구나, 영혼 구원과 함께 세상의 풍요도 향유할 수 있는 계명(誡命)들을 추슬러서 전하려고 한다. 

 

서선서에 담긴 지침들이다 

1)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여기에서 육체의 정욕의 실체는 잠8:13에서 찾을 수 있다. -‘교만, 거만, 악한 행실(음행, 부정행위등), 패역한 입’등이다. 악(잠8:7)과 굽은 것과 패역한 것(잠8:8)도 포함된다. 세상인은 이러한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산다. 본능과 욕구에 자연스럽게 순복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후 영생의 삶을 추구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그런 욕구를 거부(拒否)하며 산다. 즉 자기 육체를 죄악의 무대로 제공하는 삶이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육체를 미워하거나 하대(下待)할 대상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귀중한 지체이기에 보호하고 더러움에서 지켜내기 위함 때문에 그렇다. 특히 육체는 영혼을 담아낼 그릇이기에, 더욱 존귀히 여겨야 하고 깨끗이 보전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더욱 깨끗이 보전되어야만 한다. 

 

2) 행실(行實)을 선(善)하게 가지라(2:12상). 이 말씀은 지난 주일에 받았던 계19:8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참여하게 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의 말씀에 이어진 것이다. 선하고 착한 행실이 왜 요청되는가? 선교(宣敎) 때문이다. 곧 우리의 얕보고 비방하는 모든 공격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함이다(12절.하). 이 행실의 선함은 정직과 진리와 의를 통하여 나타나고 전달된다(잠8:6-8참조). 거짓과 가짜와 불의로는 절대 선한 행실을 맛볼 수 없다. 

 

3) 주(主)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제도와 통치자에게 순복하라(13-15절 참조). 이 지시는 분별이 필요하다. 이 요구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지배 체제를 전제로 한 권면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권력을 불법으로 찬탈하고 하늘이 준 공권력을 오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이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힘을 남용하는 거짓과 폭력 세력들을 염두에 둔 권면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는 물론, 잠언의 지혜자도 이런 점에서 세상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대행하는 자의 위치에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벧전2:14). 특히 잠언 현자는 세상의 왕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잘 대행하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지혜와 명철을 주셨다고 밝히고 있다(잠8:14-16참조). 이런 뜻을 제대로 좇는 위정자를 둔 국민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4) 부여된 자유(自由)는 하나님의 종처럼 겸손히 사용하라(16절). 부끄러운 짓에 사용하지 말라. 자유는 ‘양날의 검’과 같다. 자신을 위해서만 쓰면 자신과 이웃을 해치는 도구가 되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데에 쓰면, 그를 높이고 영화롭게 하여 주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예수의 십자가 피로 얻어낸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의롭고 선하게 사용하라고 강력히 권하신다. 사도는 그 구체적인 방법들을 네 가지로 권한다.  

 

첫째는 뭇 사람을 공경(恭敬)하는 일이다(17절,상). 이것은 바울이 일찍이 요구했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라는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한다. 상대를 차별 없이 존경심으로 갖고 대하는 마음과 자세를 요구한 것이다. 둘째는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다(17절.중). 이는 마음만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과 상대의 필요를 헤아려 제공하는 행동까지 포함한다. 셋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다(17절,중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모든 경건의 기초이다. 코람 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의 영성만 살아있으면, 그의 삶은 절대 함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왕을 존대하는 일’이다(17절.하). 왕과의 화합은 이 땅의 삶에 유익을 준다.

 

잠언에 나타난 지침들이다

5) 그리스도인들은 만민을 공개적으로 초청하면서 자신을 내어 주고 있는 지혜와 명철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1-4절).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자신이 어리석은 자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5절). 지혜와 명철은 그 자체 안에 선(善)한 것, 정직(正直), 진리(眞理), 의(義)를 담고 있다. 그러기에 그런 지혜와 명철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자연히 선한 것, 정직한 것, 진리와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된다(6-9절). 그런데 이것들은 자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찾고자 힘쓰는 자에게 문을 열어준다(17절). 열고 들어온 자에게는 세상살이에서 매우 필요한 재물(財物)과 곳간을 채울 소유(所有)라는 선물들을 안겨 주기도 한다(21절).  

 

이러한 지혜의 가치와 무게는 세상의 최고의 보화들인 은, 금(정금), 진주, 부귀, 재물보다도 우위(優位)에 있다(10-12,18-19절). 그 안에는 명철을 주소로 삼아 참 지식과 근신, 계략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 등을 갖도록 하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보화들보다도 우월한 것이다(12-14절). 지혜는 그런 능력을 보유하였기에, 세상 위정자들은 공의와 의로운 재판을 하기 위하여 이 지혜를 필수 조언자(助言者)로 곁에 두어, 다스리고 재판하고 있다(14-16절). 

 

복음서에 나타난 지침들이다

6)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백성 된 이들은 언제나 세상 물질적 가치관이 아니라 영적(靈的) 가치관에 따라 삶의 모든 것들을 판단하며 선택하고 살아간다(22-23절). 눈앞의 사안에 대한 유익무익(有益無益)이나 손익계산을 논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비추어보면서 주어진 것들을 점검해 보고 평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영적 시각이 소중한 것은 그게 바로 세상을 이기게 하며, 자신을 영생의 세계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엄중히 다루어야 되는 일은 바로 재물(財物)관리이다. 세상인들처럼, 우리는 장래의 소망을 재물에다 두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두고 사는 사람이다. 이 일을 통하여 나는 두 주인이 아닌, 오직 한 분 주인인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고 있음을 밝힌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의 보물을 땅이 아닌 하늘에 쌓아 두라고 명하신다(19-20절). 이유가 분명하다. 그 좋은 재물 때문에, 몸과 마음이 늘 불편하기 때문이다.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과 도둑이 밀고 들어와 빼앗아가는 일들이 발생하지만, 하늘에 쌓아두면 그런 부작용들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발을 뻗고 잘지라도, 부자는 편히 자지 못 한다’는 말도 있잖은가? 주님은 물질로 인해 우리의 소중한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21절)라는 주님의 지적은 정곡(正鵠)을 찌른 말씀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본능적으로 내 물질과 소유가 있는 곳에 붙들려 있다. 최근 훈민정음 해례본(주석서) 중의 상주본을 소유한 사람이 국가를 상대로 엄청난 돈을 요구하면서, 그것을 자기만 아는 곳에 숨겨놓는 모습을 보았다. 얼마나 불안하게 지낼까 싶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게 보물의 힘이다.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그 방법이 무엇일까? 

 

재물 소유의 철학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 헌신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게 하지 말라. 저 부자청년처럼, 가진 것 때문에 예수를 떠나가던 사람이 되면 안 된다(눅18:23-참조). 대신, 소유물이나 부를 가지고 세상에다 자기 삶의 보장과 편안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내려놓고, 오히려 내 재물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살아가는 섬김의 자세를 흔들림 없이 보여 드리면 된다(24절). 

 

결론이다

오늘의 일곱 가지 말씀들은 모두 위태로운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데, 우리를 보다 반석위에 세워줄 지침들이다. 이제 이 지침들을 간결한 잠언(箴言)들로 우리 가슴에 받아서 실천해보자. 함께 소리 높여 복창해보자 - ‘육체는 깨끗하게, 행실은 선하게, 자유는 의롭게, 지혜는 공의롭게, 시각은 드높게, 마음은 주님께, 재물은 하늘에’. 하늘과 땅의 은혜가 차고 넘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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