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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7-23 (화) 11:19 4년전 1135  

본문) 계 19:1-10, 미 4:1-4, 마25:31-46

 

성경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기다림은 아주 기이(奇異)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현재의 삶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까지도 그 기다림의 약속이 만남으로 성취될 때까지 계속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끝남’이란 개념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이어짐’이라는 차원에서 맞이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이 무슨 능력이 있기에, 그런 사후의 기다림이 가능하단 말인가? 답은 여기에 있다. 그게 가능한 것은 인간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시 오리라’고 약속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만일 그 분이 부활이나 승천이나 영생하지 못하셨다면, 이 모든 것이 다 헛것이었을 터이지만, 그 분이 죽음 너머에 살아계시기에, 그 기다림에 대한 신앙 역시, 우리를 그 나라 그 땅에까지 나아가게 한 것이다(요14:3,행1:11,서신서 대부분들 참조). 

 

그 분과 그 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줄이, 곧 우리에게는 생명과 구원의 줄이 되며, 우리를 그 영원자 앞에 세워준다. 그러기에 이제 점검하자. 그 기다림의 믿음과 소망의 줄이 지금의 나를 굳게 붙잡아주고 있는가! 만일 이 재림(再臨) 신앙이 아직 내 영혼 속에 확고히 자리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일 수 없다. 그런 불신앙인에게는 아직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자신을 건너가게 할 구원의 다리가 허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증언들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란다. 이 성령이 주신 기다림의 신앙인 재림신앙과 종말신앙들이 이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떻게 펼쳐져 왔는지를-! 지난 2,000년 기독교를 이 땅의 구원의 종교로 존재하게 하였고, 세상을 보다 거룩하게 하였으며,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을 제공하면서, 이 어둠의 세상의 구원과 변화와 성숙을 위하여 줄곧 헌신하게 한 동력을 제공했다. 

 

즉 성령 받아서 그 나라를 고대하고 사모하는 영혼들은, 모두가 그분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하여 부여된 이 세상살이에서도 변화와 구원의 소명자로 선(善)한 행실을 수행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그랬다. 무엇보다도 그 분과의 최후의 만남이 저주가 아닌 축복의 순간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이 땅의 모든 삶을 거기에 맞추어 조율(調律)하며 살았다. 그런 측면에서 성령 받은 이들은 생애를 함부로 살 수 없는 이들이다.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만날 때를 대비하듯 산다. 바로 예수 정신을 담은 건강한 종말론적(終末論的)생애를 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만날 주님과의 최후의 만남 자체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 예컨대, 언제 그를 만날까? 어떤 모습으로 그 분을 뵙게 될까? 어떤 자리가 그 만남의 무대가 될까? 혹 그 날과 그 때의 주인공들은 과연 어떤 예복(유니폼)을 입고, 등장할 것인가? 그리고 과연 그 최후의 무대에 참여할 자격자의 조건은 어떤 것이 될까 하는 등등의 생각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그 최후의 무대에 과연 나라는 존재도 있게 될 것인가-, 등등이다. 이런 우리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으로, 오늘의 메시지의 가이드를 맡은 요한계시록이 매우 중요한 통찰(洞察)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펼쳐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Wedding Supper of the Lamb)에 관한 증언이다(계19:7-9참조). 

 

이 혼인 잔치 이야기가 왜 중요한가? 바로 그곳이 우리가 처음부터 사망의 영역까지도 뚫으면서 대망해왔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고 확인되는 그 역사적인 최후의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토록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 메시아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를, 우리가 그의 신부(新婦)가 되어, 신랑(新郞)으로 맞이하는 혼인식(婚姻式)의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혼인은 본래 하나님이 기획하시고 허락하신 것이었다. 남자의 독처(獨處)를 기쁘게 보지 아니하신 하나님이, 여자를 친히 만들어 그의 배우자가 되게 하시면서, 비로소 서로가 하나 되고 온전한 인간이 되어 살게 하신 창조 질서였다. 그 바람에, 인간은 서로의 짝을 만나야 비로소 ‘하나’가 되고, 온전한 균형을 갖춘 존재가 되면서, 또 다른 차원의 새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결혼은 자기 것만이 아니라 배우자의 것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서로의 것과 우리의 것을 창출하는 융합과 종합의 인간으로 변화되어 나아가게 한다. 그러면서, 건강한 새 가족. 새 가계. 새 공동체를 창출하며 살아가게 한다. 참 신비스런 창조물이 분명하다.  

 

그런데 성경은 또 다른 차원의 혼인관계를 소개한다.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와 그가 지상에 세우고 떠나신 교회 공동체의 관계를, 예비적 결혼의 관계에 들어가 있는 신랑과 신부로 표현한다. 예수님의 비유들 중에도, 혼인잔치의 비유라든지(마22:1-), 10처녀 비유(마25장-)들 등을 통하여 천국을 어느 임금이 마련한 혼인잔치의 현장으로 미리 예표(豫表)하셨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그 혼인 잔치에 참여할 그리스도와 약혼(約婚)된 당사자로서 간주하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정된 우리가 하늘에 이미 오르신 신랑 예수님을 기다리는 모습은 과연 어떠해야 할까? 생각하고 상상해보라. 나의 약혼자가 저 멀리 있고, 또 그를 만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과 몸가짐을 하여야 하겠는가? 바울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충성의 고백이 기억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고난(苦難)을 내 육체(肉體)에 채우노라’(골1:24). 그는 진정 하늘의 신랑을 사랑하고 기다릴 줄 아는 깨어있던 신부였다. 신랑의 마음을 헤아리며, 신랑을 깊이 사랑하는 줄 아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오늘 세 본문은 최후의 그 날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linen)라는 예복을 입고(8절) 하늘의 영원한 주인이시고 우리의 신랑 되신 어린 양의 신부가 되어, 그 무대에 오르게 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내용들이다. 즉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이들과 그 자격을 언급한다 

 

서신서인 계시록을 보자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잔인무도에게 탄압하고 짓밟은 바벨론 제국(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한 하늘의 환성(歡聲)이 담겨있다. 그 내용은 계18:20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도래와 구원사의 완성의 길이 활짝 열린 것에 대한 하늘의 감사예배의 형식을 담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증언은 천국에서는 현재였으나, 세상에서는 아직 미래의 일이었다) 

 

이 예식은 두 가지 차원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참되고 의로운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찬양이고(1-6절), 또 하나는 세상에서 그 잔혹한 시련과 박해를 견디어내면서 끝까지 이겨낸 순교의 영혼들을 어린 양의 신부로 반가이 맞이하는 예식으로 진행되었다(7-9절 참조)

 

1) 하늘에서 펼쳐진 승리의 찬양 무대는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행위에 대한 찬양과 응답으로 이어졌다. 음행(淫行)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제국)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으로부터 갚으신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 우심’을 찬양하였다(2절). 그런 찬양은 하늘의 허다한 무리와 24장로와 네 생물을 비롯한 음성들을 통하여,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음이 고백되면서, 네 차례의 ‘할렐루야’란 화답(和答)으로 이어졌다(1,3,4,6절). 

 

2) 어린 양께서 그의 아내를 맞이하는 혼인잔치에 대한 기쁨과 영광의 무대가 이어졌다. 그의 아내는 바로 이 세상에서의 모든 환란과 박해의 시련을 이겨낸 교회와 성도들이었다(7-8절). 그들은 보좌에 계신 이로부터 이미, ‘빛나고 깨끗한 예복인 세마포’를 하사(下賜)받아서 혼인식에 신부(=며느리)의 자격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의 세마포는 그냥 옷이 아니었고, 그의 변화된 몸의 상징과 함께 그의 지상의 삶이 불의나 거짓이나 배신이 아닌, 언제나 ‘옳은 행실’을 선택하며 살아온 존재이었음을 입증하는 투명(透明) 옷이었다(8절)-! 

☞ 이 부분은 매우 놀랍고 의미심장하다. 그 날의 예복은 그 날 그곳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이 땅의 내 삶의 내용으로 이미 결정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3)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혼인 잔치의 참관자가 되는 복을 받은 요한 장로는 그를 안내하던 천사로부터 ‘이 내용을 기록(記錄)하여 세상에 전하라’는 명(命)을 받는다(9절). 이 기록이 전달되는 시기의 세상은, 아직은 악의 세력들에 의하여 의의 선한 세력들이 탄압받는 시기이기에, 이런 놀라운 기록은 그들 고난자들에게는 감동과 희망을 주는 예언의 말씀이 되어, 고난과 박해를 이겨낼 큰 위로와 인내할 능력을 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9-10절 참조). 

 

☞ 이 특별한 천사의 지시(指示)는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고투하는 당신의 ‘남은 자들’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큰 가를 확인해 준다. 결국 참관자에게 하늘 방문을 허용하고, 그 앞에서 미래에 되어 질 천국 혼인잔치를 그에게 참관케 하신 것 모두도, 이 땅의 시련을 겪고 있는 교회들이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선한 싸움을 감당케 하려는 하나님의 큰 배려였던 것이다!

☞ 동시에, 이 계시록은 어린 양의 잔치에 신부가 될 자격자들에 대한 메시지도 강렬하게 전했다. ‘옳은 행실’을 하는 성도들이 그 대상이 됨을 확인해 준 것이다. 남은 두 본문들을 보자

 

구약을 보자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민족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찾아야 할 곳을 이미 내정(內定)하셨음을 밝히신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이 세상에 어떠한 질적 변화를 만들어낼 것인지에 관하여서도 놀랍게 예고하셨다. (이 내용은 이사야서2:1-5과 일치한다) 

 

1) 우선은 구원 받을 자들이 찾게 될 생명의 젖줄의 공급처에 대한 계시(啓示)이다. 어디인가? 바로 시온이며 예루살렘이다! 시온과 예루살렘은 따로가 아니라 한 곳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왜 끝 날에 세계 만민이 찾게 될 피난처가 된다는 것인가? 바로 여호와의 율법(律法)과 복음(福音)이 그곳을 통하여 온 세계로 흘러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2절). 

☞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택하시고,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세계 만민이 복을 받을 것임을 약속하신 바에 따른 것인데(창12장-참조), 그 복이 바로 세계인들이 모두 유대인 출신인 모세와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율법(律法)과 복음(福音)을 받게 되므로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기에 그렇게 예고했다고 본다. 그 예언은 적중(的中)됐다. 지금의 세계 만민들은 모세가 전한 율법과 예수가 주신 복음을 생명의 젖줄로 먹고 살고 있잖은가! 

 

2) 율법과 복음을 먹고 사는 자들은 필연 주의 평화(shalom)실현을 향함을 예고한다(3-4절). 왜냐? 이 말씀들은 많은 민족 사이의 일을 심판하고 특히 강한 이방인을 판결하면서, 서로의 분쟁을 끝내고 평화와 공존의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신다. 그때 예고된 평화의 모습은 이렇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다.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 결국,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화해와 평화의 세상을 위해 일하는 이들이 어린 양의 신부로서 하늘의 세마포를 입게 되는 영광에 참여할 주인공이 되리라는 점을 말씀하고 있다. 

 

복음서를 보자

 

다시 오실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불러 모아 각각 그 행위대로 심판을 하실 때에, 그 때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하리라고 예고하신 내용이다. 심판을 피할 예외자는 절대 없다. 따라서 문제는 그때 과연 누가,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되어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누가 왼편에 밀려서 영벌(永罰)에 당하게 될 것이냐는 점이다(31-33,46절 참조). 주님은 그 답을 전혀 의외의 차원에서 제시하신다. 실로 식은땀이 흐르게 하는 놀라운 심판의 기준이기도 하다. 

 

1) 양과 염소는 낮엔 함께 풀을 뜯어도, 밤에는 꼭 갈라진다. 염소의 따뜻한 잠자리 때문이다. 

 

2) 하나님 사랑에만 매몰되어, 이웃 사랑-특히 궁핍과 곤경에 빠진 이웃(인간)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심판 때에, 여지없이 왼편으로 걸러낼 것이다(41-45절). 

 

☞ 대표적 고난자들의 실상(6가지) - 주리는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 등이다-이들 도움은 곧 예수를 돕는 일로 간주하신다(35-35절). 아니, 당신은 지금, 저 하늘에만이 아니라 고통하는 이들과 현존(現存)하고 계심을 드러낸 말씀이다. 

☞ 즉, 그리스도는 언제나 낮은 자들과 연대(連帶)하시는 분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40,45절)는 세계 처처에서 고난당하는 선교사들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러나 신. 불신에 매인 말씀으로만 보면 안 된다-온 세계인이 심판 대상임! 

 

3) 이 인자(人子)는 고난을 당하는 모든 개개인들(집단포함)에게 깊은 관심을 기우리신다. 

 

4) 고난당하는 자들을 향하여, 눈과 마음과 몸을 열어놓고 살아가느냐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 실천적인 조치가 없는 이론적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식의 안이한 대처는 답이 아니다

 

5) 심판에는, 그런 현실 앞에 내가 아무 것도 행하지 아니한 ‘무행위’가 그 대상이 된다(45절). 

☞ 결국, 어린 양의 신부의 길은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이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생활화하고 인격화해서, 내가 꾸준히 그리스도의 가족이요 그를 기다리는 신부임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결론이다

 

지금의 종말시대는 우리에게는 주어진 기회이다. 바로 지금이 영원한 영광의 그 날에 하늘에 오르신 어린 양과 영생하게 될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 기간이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나태하지 말자. 힘써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흔들리지 말고 오직 선한 일에 힘쓰며 살아가자. 말씀에 따른 평화시대 실현을 위하여, 고통 하는 이웃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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