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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후(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7-16 (화) 15:56 4년전 1103  

본문) 계 2:8-11, 암 5:18-24, 막 13:1-13

 

한 여름에 들어섰고 장마기를 보내고 있지만, 마른장마라고 할 정도로 일기가 고르지 못하다. 여러분 모두가 더욱 건강에 유의하셔서, 이 힘든 계절을 잘 이겨내시기를 기원한다. 

 

교회력으로는 지금이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고 있어서, 매주일 강림하신 성령의 다양한 인도하심을 받고 지낸다. 그 중에 특히 절기 후반에 들어선 지금의 말씀들은, 성령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주어진 삶의 종말(終末) 기간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집중해서 안내해 주고 있다. 물론 이 내용에는 인류 최후의 궁극적인 면도 포함되지만, 공동체적인 것과 함께 개인적인 차원의 종말도 포함한다. 광범위하다. 이 때일수록 매우 필요한 것은, 진정 ‘건강한 종말론’이다. 

 

종말은 흔히 끝(end)을 상징하지만, 그러나 마지막은 아니다. 마지막 여정에 들어선 전 과정을 말한다고 봄이 좋다. 그 끝은 영생(永生)과 심판(審判)이다. 성서의 종말론은 그 끝을 향한 우리의 전 삶의 여정(旅情)을 다룬다. 우리 종말론의 실질적인 시작은 재림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품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이 기간을 어떤 종말론적 인식과 믿음을 가지고 보내며 기다리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 건강한 종말론이 왜 필요한가 하는 이유이다. 

 

사실 성서의 백성들인 이스라엘도 매우 종말론적 백성들이었다. 민족의 오랜 수난과 역경, 강대국 치하에서 당했던 수치와 모멸의 세월들을 보내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원한과 통한의 아픔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를 기다렸다. 예언자들은 일관되게 그 메시아를 약속하기도 하였다. 특히 저들은 헬라 제국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잔인무도(殘忍無道)한 유대교의 탄압을 경험하면서, 거기에 맞서며 대응하는 입장에 따라, 민족이 세 갈래로 나누어지기도 했다. 

 

복음서에 많이 등장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종말론적 입장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서로 분열된 것이다. 바리새파는 그 탄압에 맞서면서 저항하며 신앙을 지키려다가, 끌려가서 처형당하며 수난의 시련을 온몸으로 당한 그룹이었다. 사두개파는 정 반대였다. 박해자들에 동조하면서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권력의 단맛을 즐기며 살아온 그룹이었다. 수난과 시련이 없었다. 반면에 에세네파는 아예 현장을 떠나 은둔하면서 가난을 벗 삼아 오실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기도와 말씀연구와 묵상으로 고고하게 지냈다.  

 

예수의 오신 때는 바로 당신의 민족이 이렇게 세 분파로 갈가리 나누어진 때였다. 다양한 종말론이 백성들의 삶과 마음도 분리시켜 놓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의 국회인 산헤드린에도 지금의 우리 국회의 상황과 비숫 했다. 마치 뿌리가 다른 민주당과 한국당의 상극적 입장처럼, 서로 다른 출신들이 얽혀서 산헤드린을 이루고 있었다. 예수님은 어떤 입장이셨나? 사두개인은 아예 상종도 없으셨으나, 바리새인들과는 심한 논쟁도 하시면서도, 그러나 교제들은 이어가기도 하셨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 같은 의원들이 주님을 끝까지 돕기도 했다(요한복음). 

 

그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하는 믿음 여하에서 갈라졌다. 사두개인은 현실의 삶에서만 하나님 나라를 말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오시는 메시아와 그 나라를 찾았다. 그 점에서 바리새인은 자신들의 수난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인한 교만은 대단하였으나, 미래와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린 종말론 때문에, 그들은 예수와의 대화가 가능했었다. 그렇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어떤 종말론을 가지고 지내느냐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마치 지금의 조중동 신자들과 한겨레와 경향신문과 JTBC 시청자들과 차이 나듯이 차이를 드러낸다. 

 

가장 위협적인 것은, 기독교의 잘못된 종말론의 위력(威力)이다. 종말론은 그 자체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에 더욱 그렇다. 예컨대, 지금 피지에 가서 집단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신옥주 그룹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그들은 다시 오실 주님이 그 피난처로 남태평양의 피지란 나라로 지목하셨다는 목사의 주장에 따라서(피지의 ‘피’자가 피난처의 ‘피’자와 예수의 피와 같은 글자와 같다는 주장 따위 등), 수백 명의 교인들이 가산과 가계를 청산하고 그곳으로 집단 이민해서 살고 있다. 그는 배를 몰아 산으로 끌고 간 대표적인 사례이다. 

 

무슨 생각이 드는가? 이것이 우리 교회가 종말론을 제대로 가르쳐야할 절대적 이유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절기 마지막 주일까지 계속 성서의 올바른 종말론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대로 된 종말론은 우리의 삶을 매우 건강하게 만든다. 이단들의 거짓 증언을 거부하게 만든다. 의와 선을 따르게 하고, 불의와 거짓을 미워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게 한다. 길고 지루할 수 있는 기다림을 잘 참고 견디며, 끝까지 승리하게 만들어준다.  

 

오늘은 종말론의 보편적 인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복음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시작하면서, 그런 원리 차원에서 매우 모범적인 사례가 된 서신서의 서머나 교회의 이야기와 매우 부정적인 사례가 된 구약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우리의 것을 찾고자 한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님의 당시 제도권의 대표적인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막11:15-17참조). 당장 허물어도 될 대상이었다. 겉치레만 대단했지, 내용은 빈곤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희망은 그 안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작은 자들에게 있었다(12:41-44절참조). 주님의 그런 근심과 비판에 심각성을 느낀 제자들은 결국 스승을 상대로, 예루살렘 성전(헤롯 성전)과 자신들의 미래를 놓고, 질의응답식 종말론적 대화를 나눴다. 전반적 흐름은 아주 비관적(悲觀的)이었다. 다만 그것을 알고 잘 대비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1) 한 제자의 첫 질문은, ‘이 돌들(성전의)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떻게 될까요’(1절)였다. 

☞ 주님의 대답은 완전 파괴였다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절). 

☞ 주님의 이 예언은 그 후 A.D 70년에 로마정권에 의하여, 무참하게 파괴당하면서 실현되었다. 4년간의 로마와 치룬 유다전쟁의 결말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이 ‘통곡의 벽’으로 존재한다

 

2) 장소를 감람산으로 옮긴 후, 핵심 제자들인 베드로-야고보-요한-안드레가 질문했다. 

-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이 모든 일이 발생할 때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3-4절). 

☞ 주님은 발생할 일들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교회들)의 주의와 조심을 강하게 요구하셨다.  

   그들이 주님과 복음 때문에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외롭고 고립된 생활에 빠져들 것을 예고하셨다(5-13절.상). 복음의 확장기에 제자들의 처지가 어떠할 지를 엿보기에 충분하다-!

 

- ① 거짓 예수(메시아)들의 출현이 계속되면서 발생할 미혹하는 일들에 대비하라(5-6절). 

  ② 잇따른 난리(亂離)들에 따른 흉흉한 소문들, 민족 간의 전쟁들, 지진과 기근으로 인한 천재 재난들이 잇따를 것이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재난 의 시작이니-, 대비하라(7-8절). 

  ③ 제자들과 성도들의 수난시대도 올 것이다. ‘체포당하고 구타와 고문을 당하며 왕들 앞에서까지 심문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무슨 말할 지는 염려 말라. 그 때에는 성령(聖靈)께서 너희가 할 말을 하게 하실 것이다’(9절,11절). 그래서 복음이 만국에 퍼지리라(10절).  

  ④ 가족들도 믿음과 영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서로를 죽이는 데에 내어주게도 된다(12절).  

  ⑤ 제자들(교회 성도들)까지도 예수 이름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13절,상). 

 

3) 다만, 그런 난관을 순복하며 극복해 낸 제자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약속은 이것이었다-! 

- ‘끝까지 견디는 자(죽음/순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하. 요15:18-21참조)

☞ 이 말씀은 지난 주일의 눅17:10에 주신 말씀을 다시 상기(想起)하게 하는 말씀이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주님의 이런 예비적 단계의 지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복음의 대중화시대로 인하여 공개적인 수난이나 순교 수준의 어려움이 없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복음과 주의 이름을 받드는 종의 자세가 형편없이 무너져 있다. 풍요의 신을 쫓으며 생명의 주을 잃은 연고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 교회는 소아시아 7교회들 중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가장 칭찬을 받았던 교회였다. 그들은 당시 가장 아시아에서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이며 신들의 공원이었던 서머나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고 환란도 집중적을 받으며 견디어낸 공동체였다. 그것은 모두가 절제와 고난을 신앙의 핵심 가치로 가르친 교회의 종말론의 가르침을 좇았던 연고였다. 그러기에 서머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차원 높은 평가를 받았다-‘실상은 네가 부요(富饒)한 자니라’(9절). 

 

1) 서머나 교회는 그의 신앙의 절개와 순수성 때문에, 환란과 풍요의 도시이자 로마황제숭배 종교의 위력이 대단했던 서머나 지역으로부터 가장 미움과 견제와 배척을 당하였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대서사 시인인 호머를 배출한 도시였지만, 영적인 시련은 늘 폭풍이었다. 

 

2) 그들에게는 두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큰 자산이었다. 첫째는 익나티우스 시리아 감독의 큰 영향이다. 그는 자신이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야할 하나님의 밀알이며, 그때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선언을 할 정도의 확고한 순교자의 믿음을 가진 이였다. 그런 그가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서머나교회에 매우 큰 영적 도전과 감동을 끼친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마18:4절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겨 천국의 큰 자로 인정받았던 그 아이였다‘고 한다. 

 

둘째는 그의 영향을 받았던 그곳의 감독인 폴리캅이었다. 폴리캅은 노년에 체포되자 그의 구명운동을 하던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런 말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사람으로 유명하다. ‘나는 86년 동안 그 분을 섬겨왔는데,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 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욕할 수가 있겠습니까’라면서, ‘자신을 순교자의 반열에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 받아주심을 감사합니다’라 고했다. 

 

3) 그들 기독교 신앙인들을 비난하며 고발하던 대표적인 집단은 뜻밖에도 그곳에 정착해 있던 유대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진정 ‘사탄의 회당’이었다(9절). 그들은 교회를 매우 악독하게 핍박했고 로마 당국에 고발했으며 죽게 만들었다. 특히 한때 창녀(娼女)였다가 네로의 황후가 된 유대인 여자 포피아가 기독교인들을 중상 모략하여 그리스도인 수천 명을 죽게 한 일은 유명한 역사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4) 그들을 기다리는 미래는 어떠하였나? 고난과 체포당함과 투옥 등이 예정되어 있었다. 성경은 결코 환상 빛 미래를 말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진솔하게 각오할 것을 요구하였다(10절). 그러기에 비상한 대비와 준비가 필요했다. 어떤 요청들이 있었는가? 

 

첫째는 두려워말아야 한다. 갑자기 당할 일이 아니라, 온 세상의 복음의 씨앗을 확산시키는데 그들과 그들의 고난들이 생명의 밑거름으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위로와 상급은 모두 하나님께서 지불해 주실 터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둘째는 죽도록 충성(忠誠)해야 했다. 흔들리지 말고 견디어 내야만 했다. 그래야 승리자에게 최후에 부여될, ‘생명의 면류관(冕旒冠)’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둘째 사망을 면하면서, 영생을 상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서머나 교회의 영성을 주목해야 한다. 사탄의 유혹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구약을 보자


선지자 아모스는 주전 800-750년에 남왕국 유다 출신으로서 북왕국 이스라엘에 파송되어 활략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북왕국은 여로보암 2세가 나라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번성케 하여 겉보기에는 한창 번성하던 때였다. 그 좋은 때에 아모스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여러 환상들을 근거 삼아(7-9장), 배부르고 자신감에 차 있는 사회와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아주 강한 적군이 쳐들어와 그들을 사로잡아 갈 것이라고 매우 불길하고 도전적인 선포를 했다. 한 세대 뒤(주전 722년)에 밀어닥칠 앗수르 제국의 침임을 미리 예고한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서도 예배자로서의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통렬하게 지적한 내용이다. 이기적인 종말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형제처럼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그저 겉으로만 따르는 체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 될 것뿐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21-24절). 

 

그런 모순된 종말론적 신앙 때문에, 그들은 그 종말의 때가 그들을 구원하고 건져내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날벼락을 당하며 하나님의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날이 되리라고 통보하였다. 하나님을 결코 오해하지 말라는 요구였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의 섬기지 말라는 요구였다. 그 보다는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를 물 같이 흐르게 해야 할 일이 절대 필요한 종말론적 신앙임을 제시하였다(24절). 건강한 종말론에는 나만의 것은 없다. 우리 모두의 것들만 있다! 

 

결론이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이시다. 하나님사랑과 인간사랑은 마땅히 핵심적 가치이어야만 한다. 이제 서머나 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인 절제와 고난을 배우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대 결핍했던 이웃을 향한 정의와 공의의 실천에도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자. 어둠이 오기 전, 더욱 그리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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