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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환경주일

관리자 2019-05-31 (금) 12:04 4년전 1023  

본문) 요17:11-19, 창28:10-22, 롬8:33-39 

 

오늘은 금년 부활절기 마지막 주일인 일곱째 주일이면서, 다음 주일에 맞이할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주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가 특별히 지켜오는 환경주일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미세먼저의 공포가 급상승하면서, 환경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때이기도 하다. 

 

여름에도 성큼 들어섰다. 한낮의 기온은 이미 30도를 넘나들고 있다. 대낮의 나들이 자체에는 벌써 어려움을 느낄 정도이다. 어느 때보다도 빨리 온 더위가 반갑기보다는 왠지 공포와 함께 위협적인 느낌마저 든다. 이상(異常)기온에 의한, 지구촌의 몸살 앓이는 이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대륙 중부를 휩쓸고 있는 토네이도의 파괴력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지구의 양극(兩極)에 배치된 엄청난 양의 얼음덩이가 속속 녹으면서, 지구촌의 해수면 상승도 가파르게 치닫고 있다. 범람하는 쓰레기 덩어리들이 육지 오염은 물론, 바다 생태계(生態界)마저 뒤덮어 가서, 그 안에 사는 물고기들의 생명마저 위협하고 있다. 예측 불가한 지진과 화산활동들도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일본의 후꾸시마의 참사를 옆에서 지켜보고 사는 우리들의 처지도 풍전등화란 느낌도 든다. 우리 역시 원자력발전의 의존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부산(釜山)지역만만해도, 아름다운 해변 해운대와 광안리 주변에 초고층 아파트와 각종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정작 그들의 미래는 밝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곳 기장 쪽에서는 원전의 위협이, 바닷가에는 해수면 상승의 위협이 언제 현실화될 지도 모르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서 만난 친구의 한마디가 아프게 들려왔다. ‘앞으로 부산이 우리나라에게 가장 급속이 쇠락하는 도시가 될지 모르겠다-.’

 

최근에는 전남의 영광 원자력발전소에서 한빛 1호기 수동정지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어봉의 출력 제한치 5%를 3배나 초과한 18%까지 치솟고 냉각제 온도가 급상승하는 바람에, 해당 지역은 물론 온 국민이 초대형사고에 대한 공포로 식은 땀을 흘려야 했던 일도 발생하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곳이 터진다면 서해안과 호남 및 국가적 참상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환경은 꼭 자연과 세상 여건의 보이는 상황만을 두고 말할 것은 아니다. 인간들을 보호하고 감싸주는 내면적 환경도 그에 못잖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쟁 없는 평화의 세상, 인간의 각종 차별들을 극복해낸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 모든 생명들이 인간으로서 소중히 대접 받고 보호받을 생명력 넘치는 세상 등은 우리가 안으로 반드시 확보해야 될 정신적 영적 정치적 환경의 여건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험난한 시대에 창조주로부터 그의 택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 창조세계보전을 위한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그들의 가치관과는 다른 가치관을 소유하고 지내는 존재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정의.평화,생명>이란 하늘의 가치를 이 땅과 온 천지에 평생토록 구현하며 살도록 부름 받아 일하다가 가야하는 우리들의 정체성 때문이다. 세상과 인간, 이 두 영역의 건강한 환경 지킴이로 부름 받은 우리들의 정체성 확립이 시급하다. 

 

오늘 주일은 마침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스승과 이별하게 된 제자 그룹들 120명이 그들끼리 만의 독자적(獨自的)인 생존을 시작한 특별한 시기였다. 제1보혜사인 예수가 떠나시고, 제2보혜사인 성령이 오시기까지 그들만의 생활은 단 10여일에 불과하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그 짧은 시기는 매우 의미 있던 시기였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서, 지구촌에 교회(敎會) 공동체란 새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한 일종의 인큐베이터(Incubator)안의 생활을 감당해야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모인 그들에게는 집단적인 새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특별 영양이 공급되고 있었다. 먼저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흩어지지 않고 기쁨 속에서 함께 모였다. 주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도에 전념했다. 주님과 구약의 약속의 말씀들(아마도 요엘서의 예언들)을 듣고 나누며, 그 성취의 때를 대망(待望)하며 지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유다의 배신으로 인하여 발생한 빈자리(12사도의 빈자리)를 맛디아로 채우면서, 그 12사도의 틀을 갖추며 다음을 기다렸다. 어찌 보면, 그곳의 생활상은 미래 교회의 생명체의 예표(豫表)였고, 그 태아기(胎兒期)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행1:12-26 이하 참조)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갖춰진 그런 좋은 영적 환경은 갑작스럽게 형성되거나 제공된 것이 아니다. 그들만을 보면,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만으로도 금방 자기 살길을 찾아서 사방으로 흩어져버릴 허약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사도행전 1장의 모양대로, 그들은 예전과 달리 하나 되어 모였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한 믿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집단적으로는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그토록 놀랍게 반전(反轉)하게 됐을까? 

 

그 원인은 솔직히 인간들 자체의 각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과 생명을 되살려내시고 또 당신의 구원의 새 역사를 열어 주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개입(介入)과 그 중심  인물들과 세력들의 돌보심 내지 세워주심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 시대의 결정판으로서, 성령의 시대를 열려는 하나님의 확실한 행동 때문이라고 본다. 오늘 세 본문의 말씀들을 바로 그런 측면에서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복음서를 다시 보자

 

요한복음 17장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이다. 공관복음서의 주님의 마지막 기도와는 차이가 큰 기도가 소개되어 있다. 공관서에서는 주님이 자신의 수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 간구하셨다면, 본 요한복음의 기도는 온통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집중하였다. 당신의 수난과 잠시 있게 될 이별의 과정에,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움에 빠져서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지거나 자체 분열에 의하여, 제자 공동체의 붕괴 가능성을 충분히 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제자단이 무너진다는 것은 당신의 지상 사역의 완전한 실패(失敗)를 말하는 것이다.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상상할 수 없는 최악(最惡)의 순간일 것이다. 이를 위해 주님은 마지막 시간들을 온통 제자들의 양육과 그들의 하나 됨과 신앙 키우기에 전념(專念)하셨었다(특히 요한14장 이하부터-). 특히 그들의 마음과 시선이, 이 땅에서 당신의 떠나심을 통하여 앞으로 열릴 새로운 미래 즉 영생(永生)에 접하는 미래의 세계를 소개하시고, 그 믿음으로 무장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하셨다. 

 

17장의 기도는 그 제자교육의 마감에서 나온 내용이다. 주님의 제자교육의 대미(大尾)를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 이 교육을 받은 당신의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부탁드리는 기도로 마친 것이다. 그 주님 기도의 요점은 ‘제자들의 보전(保全)’에 있었는데, 이제 그 점을 확인해 본다. 

 

1) 예수님의 제자 염려는 매우 깊었다. 당신과는 달리, 세상에 남아서 당신의 삶을 이어갈 제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위협하는 매우 큰 취약성은 그들의 허약(虛弱)함이었다. 당신의 떠남으로 저들이 흩어지거나 서로 의견이 갈라져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못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인 당신이 하나였듯이, 저들도 서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하셨다(11절).

 

2) 주님은 그 제자들이 자기에게는 어떤 존재들인지로 아버지께 알려드리면서, 그들을 특별 부탁드렸다. 주님은 그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로 간주하셨다, 그래서 한 명의 멸망의 자식(가룟 유다)이외에는 당신이 굳게 보전해 지켜내셨음을 말씀드렸다. 그러니, 이제 아버지께 가는 당신의 기쁨까지도, 제자들이 공유(公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드렸다(12-13절). 

 

3) 남겨진 그들도 앞으로 당신처럼 악의 세상에 적나라하게 노출(露出)되어, 당신을 미워한 세상이 ‘그들도 당신에 속한 자’라는 판단으로 제자들을 격렬하게 미워하고 배척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런 공세들로부터도 그들을 보전해달라고 요청드렸다(14절). 

 

4) 보전의 내용도 말씀드렸다. 그 방법은 유혹에 넘어가 악(惡)에 빠지지 않게 되는 일과 함께, 당신이 주신 진리(말씀)를 거룩하게 지켜냄으로써 제자들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속한 자들임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보전되게 해달라는 기도하셨다(15-19절). 

 

예수님의 이 마지막 기도의 힘이 그 후에 어떻게 응답되었는지를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예측대로 세상의 총공격을 받았으나, 더욱 담대하게 견디어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뜨겁게 증거했다. 예수께서 꿈꾸시던 그 세계를 활짝 열어가는 주역이 되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런 당신의 백성(제자)을 지켜내시는 열심은 아버지 하나님과 닮은 모습이기도 했다. 구약의 도망자 야곱을 노숙 현장에까지 내려가시는 파격으로, 그를 돌보셨기 때문이다.  

 

구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여곡절 끝에 형의 축복을 가로챈 후유증으로, 부모의 권유에 따라 외갓집인 하란으로 피신 길에 오른 청년 야곱에게는 자기 미래에 대한 예측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여서, 모든 것이 낯설고 불안하며 두려웠다. ‘과연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하지만 그걸 보신 여호와가 야곱을 찾으셨다. 그의 불안을 씻고 보다 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준비하신 세계로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 하나님의 개입과 결과를 함께 살펴보자. 

 

1) 하나님의 개입(介入)방법은 ‘꿈을 통한 계시’였다(12절). 내용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야곱이 있는 곳인 땅을 잇는 사닥다리 계시였다! 사닥다리는 매우 상징적이다. 함께 할 수 없는 양쪽을 잇는 가교 역할이기도 하고, 그 이음을 위해서는 매 단계들을 직접 밟고 왕래를 해야만 되는 특성을 함께 보여 준다. 건너뜀은 위험하다. 이것은 사실 야곱의 일생을 압축하는 계시이기도 했다! 

2) 여호와께서도, 마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다양한 내용으로 설득하셨듯(요14:1-14참조), 야곱에게 당신이 그의 앞날을 어떻게 축복하시며, 그를 위하여 당신이 야곱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해주시리라는 것을 분명히 약속하셨다(13-15절). 이 계시와 약속은 야곱으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불안을 씻고 앞으로의 생애를 비전(vision)을 갖고 새 출발하기에 결정적인 지렛대가 되었다. 그 내용을 세부적으로 확인해보자. 

 

☞ 신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게 하시려고, 당신이 야곱의 조상들의 여호와임을 밝힌다(13절).

☞ 구체적인 복의 내용을 제시하시고 약속하신다. 

그가 누어있는 땅을 주실 것이고, 자손들은 땅의 띠끌 처럼 많아져서 온 세상에 편만하겠고, 그 바람에 땅의 모든 족속은 그와 그의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 예고하셨다(14절). 

물론, 그를 이끌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도 예고하셨다(15절,중)

☞ 이를 위해 당신이 그와 함께 할 것이고 지키시며 떠나지 않으시리라 확약을 하셨다(15절). 

 

이 계시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에 감동한 야곱은 그 언약의 성취를 놓고, 돌베개를 기둥삼아 기름을 부으며 제단을 쌓으면서, 자신이 평생에 여호와께 지킬 서약(誓約)을 세 가지나 드리면서 재확인 작업을 한다(16-22절 참조). 그 체험으로 야곱은 이전의 사람이 아닌 새 사람으로 출발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두려움과 불안을 씻고 흔들리지 않는 비전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타향에서의 숱한 역경들을 극복하며 나중에 12지파의 조상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흔들리는 세상에 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흔들릴 수 없는 영생의 비전이 주님의 확고한 말씀과 진리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주어진 말씀과 비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있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좇으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의 그 어떠한 공세나 유혹에서도 자유하고 승리하게 될 터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세상과 어둠의 권세들을 향한 승리의 외침과 고백은 바로 우리의 것들이어야만 하겠다!

 

서신서를 다시 보자

 

사울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돌보심과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며 살던 사도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이나 족장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언약들이 자기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이미 충만하게 성취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그 믿음을 전한다

 

1) 바울은 여호와의 택하신 자들에게 부여하신 신령한 특권과 보전되는 은혜는 그 누구나 무엇으로도 감히 정죄하거나 단절시킬 수 없음을 단호히 선언한다(33-34절). ‘누가 –하리요’가 앞부분에서 세 번이나 되묻는 형식을 취하면서, 바울의 주님께 구별되어 있는 위치를 전한다. 

 

2) 그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붙들려 사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세상의 위협적이고 압도적인 세력들로서도 그리스도와 맺은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이렇게 설파한다(35,39절). 

그게 무엇들인가?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35절), 그리고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그 어떤 피조물들이다(38절). 

그런 극복의 힘은 주님이 오늘 요17장처럼,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며(34절,하), 그의 십자가의 사랑의 피로 맺은 혈족과 같은 관계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36절). ‘넉넉히 이긴다’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의 보전하시는 은혜 안에 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이다. 제자들이나 야곱이나 사도 바울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우리에게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예수를 닮은 작은 그리스도로 태어나기 위함이고, 동시에 이 땅에서 진리와 거룩함으로 생명의 하나님을 증거 하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주님은 지금도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주의 말씀을 믿고 굳게 불들자. 그래서 이전부터 더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거듭나는 사람들이 되자. 주의 은혜가 함께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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