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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성령강림주일. 총회선교주일

관리자 2019-06-05 (수) 11:38 4년전 1121  

본문) 행 2:1-13, 욜 2:23-32, 눅 11:5-13

 

성령강림(聖靈降臨)절기가 시작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말이다. 이 일은 10일 전에,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과 바톤 터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즉 제 1보혜사이셨던 예수님이 떠나시자, 이번에는 제2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다. 본래 성령께서는 그 자신이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면서 동시에 성자 예수님의 영이기도 하셨기에, 그의 강림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께서 이 역사와 인간 세상 속에서 행하셨던 구원 사역을 온 땅에 본격화하고자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탄도 둘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첫 성탄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었고, 다음 성탄은 예수의 구원사역을 계승하고 확대하며 지속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성령의 강림이다. 따라서 성령의 강림으로 비로소 빛을 보고 생명을 찾게 된 모든 이들에게 이 성령강림은 그의 거듭남(신생)의 날이기도 하다. 이 두 번의 메시아의 성탄을 통하여, 이 세상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 

 

첫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당신 안에 함께 하신 성부 하나님과 그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이 땅에서 일하셨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를 그의 짧은 33년간의 생애로 밖에 보여주실 수밖에 없으셨다. 팔레스틴의 좁은 영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상대하시는 대상도 유대 히브리 백성들이었다. 그러기에 세상 모두의 구원을 겨냥하고 계신 주님의 깊은 뜻과 열망은, 당신의 그런 제약된 구원사역을 무한하게 수행해 줄 보혜사 성령에게 길을 열어주시는 일이었다. 승천은 그래서 이루어졌다. 

 

둘째 성탄은 성부와 성자의 그런 뜻에 따라서 성령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셔서 이루어졌다. 이 성령강림은 몇 가지 차원에서, 이 인간 세상과 역사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 새 인류(人類)를 등장시켰다. 질적(質的) 차원이 다른 인간들이 이 세상에 집단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닮은 이들이 세계 처처에서 거듭나 탄생하면서 이루어졌다. 소망을 더 이상 땅에 두고 살지 아니하고, 하늘에 두고 사는 존재들이 탄생했다. 즉 육적(肉的) 인간상에서 영적(靈的) 인간상을 가진 무리들이 이 지구촌에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로 인하여 세상 역시, 질적으로 변화된 새 역사의 무대로 급변하게 된 것이다. 

 

2) 새 종교(宗敎)를 탄생시켰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敎會) 공동체가 이 지구촌에 탄생한 것이다. 복음과 사랑으로 하늘과 땅을 이어 줄 새 공동체가 출현하였다. 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기존의 유대교의 율법 위주의 틀을 벗어나면서, 당시 고등종교인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신학의 틀을 대거 흡수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사랑의 틀을 구축(構築)하면서, 세계 만민을 구원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3) 새 문화(文化)와 역사를 탄생시켰다. 강림하신 성령은 인간의 본능이 지배하는 짐승 같은 세상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숙한 사람들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면서, <정의.평화.생명>을 삶의 가치관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문화와 정신세계의 대변혁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천부(天賦)의 인권(人權)의 가치를 되찾게 하고, 온갖 막힌 담을 허물며, 모든 차별을 넘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며, 평화와 공생을 누리며, 그리고 공공의 유익을 도모하는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확립하였다. 지배와 누름이 아닌, 섬김과 돌봄이 주류가 되는 세상을 열어주었다. 보복이 아닌 용서의 힘으로, 세상에 희망을 주는 무리들을 등장시켰다. 

 

4) 과거(過去)중심이 아닌 미래(未來)중심의 시대를 열었다. 강림하신 성령은 그를 영접하는 모든 만민에게 예언(豫言)으로 장래 일을 말하고, 꿈(dream)을 꾸며, 이상(vision)을 품게 하면서, 주류 세력의 교체 등을 통한 인간의 낡을 틀을 깨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도록 당신의 백성들을 세우시고 추동하셨다. 그 바람에, 인류는 깨어 일하는 자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의 끝없는 창조력을 발휘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5) 평신도(平信徒) 시대를 열었다. 구약시대는 성령이 특정인에게만 임하였다. 왕, 예언자, 선지자, 사사 등의 특별한 위치의 사람들이 하나님 체험을 통하여 그 뜻을 세상에 전하였다. 하지만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사모하고 고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셨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계층차별 등의 장벽을 허물면서, 누구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하셨다. 각자의 재능은 존중하지만, 주의 일은 누구든 일할 수 있도록 개방해 주셨다.

 

6) ‘만유(All)의 주’를 향한 예배(禮拜)의 시대를 열었다. 성령은 그를 영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늘과 땅을 함께 품게 하셨다. 그 동안의 종교가 신도들에게 땅과 육체의 환경에만 집중하게 하였다면,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본향을 열어서 보여주시면서, 인간의 영성을 세속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고, 하늘과 땅, 영과 육 모두를 지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유의 주’로 경배하게 하였다. 인간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무리들로 성별하셨다. 

 

7) 선교(宣敎)의 시대를 열었다. 성령은 우리 속사람에 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오셔서, 모든 일에 연약하고 미련한 우리를 도우시고 세워주시는 도우미가 되셨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듣게 하시고, 이해하고 분별하며 결단하게 하시며, 기억하고 회상하며, 용서하고 치유하며, 서로 다른 이들과 하나 되게 하셔서, 삶을 풍요롭고 위대하게 하신다. 특히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전하게 하신다. 선교하고 전도할 수밖에 없게 하신다. 

 

지금까지 성령강림이 우리 인류에게 안겨 주신 넘치는 선물들을 몇 가지 열거해 보았다. 성령시대의 개막은 분명히 우리 부족한 인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며 기쁨이다. 이제는 이 절기를 축제의 시기로 맞이해야 한다. 그 놀라운 선물들을 풍성히 받아 누려야 한다. 그 엄청난 성령의 자원들을 그림의 떡이 되게 할 수는 없잖은가? 

 

교회 생활해도 성령 없이 생활하는 이들도 적잖다. 불행한 일이다. 성령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영이 아니다. 안 받으면, 내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충만히 받으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나와 함께, 나를 통하여 일하심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아신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셨다. 함께 공유하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이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메시아 예수의 성탄은 차디 찬 구유에서 맞이하였다면, 오순절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맞이한 성령 성탄은 기도로 기다리고 사모하는 이들이 맞이한 것이었다(행1:12-26참조). 개인이 아닌 집단이 맞이한 성탄이었다! 인간 메시아가 아니라, 거룩한 영으로 오신 메시아를 맞이했다. 예수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오셨으나, 성령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며 폭풍 같은 바람과 뜨거운 불같은 입김, 거룩한 호흡 등의 놀랍고 기이한 모습으로 각 사람 위에 강림해 오셨다. 

 

아기 예수는 말씀이 없고 오히려 하늘과 땅의 천사와 내방객의 축하 속에 이루어졌다면, 성령이 강림하실 때는 그 받은 이들이 거룩한 영에 붙들려, 자기 안에서 품어 나오는 ‘다른 언어(言語들=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날의 온 예루살렘은 온통 그들로 인하여, 놀라고 당황스러움으로 ‘뒤집어 진 날’이었다(6-8,11-12절 참조). 실로 ’하늘세계의 참 맛‘을 땅에서 흠뻑 맛본 날이기도 했다! 새 시대 새 인류의 탄생을 그렇게 경축(慶祝)하였다고 보인다. 

 

1) 성령은 언어를 통하여 당신의 오신 목적을 분명히 드러내 주셨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듣도록 택한 대상(對象)에 있다. 누구인가? 바로 ‘경건한 유대인’(God-fearing Jews)-즉, 디아수포라 교포(僑胞)들이었다(5절). 그들은 본토인인 히브리인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이들이다. 고국의 패망과 시련을 등지면서, 매우 오랜 세월을 외국 타지(他地)에서 생활해 온 자들이었다. 

 

그들의 출생지들은 대략 15-16개국을 넘어서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 광범위하게 펴져 있었다(9-11절 참조). 그러면서 그들은 고국에의 그리움과 회복을 누구보다도 갈망하였고, 이 모든 숙원(宿願)해결은 오실 메시아에게 있음을 굳게 믿고 살아온 이들이었다. 그 중 적잖은 이들이 여생을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메시아의 오심을 보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런 이들이 지금 오순절 축제에 참여하다가 강림하신 성령의 일차적인 상대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은 준비된 이들을 불러 당신의 일들을 맡기시는 분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 경건한 교포들이 본토인인 히브리인보다 더 준비된 부분이 무엇인가? 첫째는 그들은 이미 세계인들이기에, 언어에 문제가 없었다. 즉각 이방지역에 투입해도 선교 활동을 기대할 수 있었다. 둘째는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없었다. 오히려 친화적이어서,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하기에 용이했다. 셋째는 말씀(율법)이 있고, 믿음이 투철했다. 전할 내용이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실로 교포들의 그런 장점들은 선교하기에 탁월한 조건들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아는 일이다. 성령은 이 일을 위하여, 그들을 불러 세우셨고, 사도를 통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가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가르쳤다. 유럽, 중동지역, 아프리카 지역선교가 그래서 활짝 열린 것이다!  

 

2) 그들을 부르신 방법도 구체적이었다. 전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낳고 생존해왔던 현지의 언어들을 말하게 하셔서, 각 곳에서 몰려온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잘 들을 수밖에 없도록 말씀하셨다(6-8절). 그들은 두 번 놀랐다. 말하는 이들이 무식하고 천한 갈릴리인들이었다는 데에 신기해하며 놀랐다(7절). 그리고 그 전한 내용이 ‘하나님의 큰 일(wonders)’이라는 데에 더욱 놀랐다(11절). 이 미증유의 영적 충격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새 메시아를 향하게 하였다! 

 

예언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오순절 성령강림이 갑자기 된 일이 아니라, 오래 전 선지자 요엘의 예언한대로 실현되었음을 밝히는 구약의 근거이다. 당시의 유대는 포로기 이후의 상태로서,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그래서 제사장을 필두로 그들은 철저하게 회개하였다(2:15-17절 참조). 그러자 여호와는 그들에게 ‘큰 일을 행하심’을 전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시며 새 보증의 약속들을 주셨다. 예전에 빼앗겼던 것들에 배상은 물론, 외부 침공으로 인한 수치도 사라지고, 풍요의 삶을 약속하셨다(21-27절 참조). 하지만, 예언의 압권은 만민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리라는 예고였다. 

 

1) 때가 오면, 당신의 영을 부어주실 것인데, 그 대상은 온 세상 만민(모든 육체들)이었다(28절.상). 정말 대단한 파격(破格)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유대를 넘고, 또 소수중심의 영역을 넘어 온 세계와 만백성들에게 부어진다는 것은 당시엔 대단히 충격적 뉴스였다. 게다가 그 성령 강림은 모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차별 없이 임할 터인데, 그 때의 표징들은 모두 예언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보게 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28-29절.하) 이것은 성령인들이 모두 미래의 영역들을 주도하면서 열어갈 주역이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2) 주변에서는 전쟁과 파괴의 참상이 전개되고 예상치 못한 자연재앙이 휘몰아칠지라도, 성령 받은 이들은 주님의 보호 아래, 계속 기이한 일들을 펼쳐갈 것을 전했다(30-31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스라엘 여호와의 신앙에 합류하는 모든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되는 시대가 임함을 예고하였다. 그래서 피할 자, 남은 자,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자가 존재할 것이다(32절). 후에 초대교회는 만민이란 내용을 예수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로 전했다(행2:39). 

 

복음서는 어떻게 보아야하나

본문은 성령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박(切迫)하게 필요한 분인지를 일깨우고, 동시에 누가 그런 성령을 받게 될 것인지를 전한다. 우리는 지금 성령강림절과 예수 재림 사이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다. 이때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13절 참조)! 성령 없이는 그 기간을 극복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령 보유를 절실히 요구하셨다.


1) 성령(세 떡 덩어리)을 어느 정도까지 구할 것인가? 보편적 상식과 이성적 접근을 넘어서라도 해결을 해야 할 일이다(5-7절 참조). 배고픈 자기 친구의 늦은 밤 방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미 잠자리에든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 무례하게 보이는 모습(?)도 아랑곳하지 아니할 정도로, 성령 받기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해결해야할 과제임을 말씀하셨다. 

 

2) 성령받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되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요구하셨다(9-11절). 기다리고 간구하는 삶은 모든 경건한 신앙인의 공통된 영성이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120문도들의 그 간절한 기다림, 오실 메시아를 고대해온 경건한 유대인 교포들, 요엘시대의 뜨거웠던 참회와 회복을 구했던 그 노력들, 그리고 온갖 무례에도 불구하고 배고픈 벗(이웃)을 채워주려고 발 벋고 나선 비유의 주인공처럼, 우리도 그렇게 구하도록 요구받는다. 

 

3) 비유 속에 ‘떡 세 덩이’는 성령과도 연결된다고 보인다(5절,13절 참조). 아니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성자-성령의 존재를 말한다고 보인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만 받는 게 아니잖은가? 성령 받는 순간, 성부와 성자도 함께 영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론이다

성령의 계절이 열렸다. 성령의 강림은 인류와 나의 결정적인 축복의 사건이다. 따라서 부디 성령을 개념으로나 이론만으로 상대하지 말라. 성령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임을 고백하면서, 그만큼 살기 위하여 매달려 구하여 얻어내자. 내 안에 강림하신 성령을 체험하자는 것이다.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영생의 문까지 열리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마스터 키(Master-Key)같은 소중하고 존귀한 성령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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