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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꽃주일. 교회교육주일

관리자 2019-05-01 (수) 22:56 19일전 34  

본문) 요 4:31-38, 왕상 3:5-14, 골 3:1-11

 

오늘은 가정의 달인 5월을 여는 첫 주일로서, 부활절 셋째 주일이면서, 한국교회로서는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매우 뜻 깊은 주일이다. 따라서 부활과 어린이, 가정과 부활의 두 관계에는 무슨 함수(函數)가 내제되어 있을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즉 ‘어린이나 우리의 가정이 예수 부활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 어떤 면에서 적합할까’가 우리의 출발상의 물음이 되겠다. 

 

게다가 오늘 주일은 우리 교단 총회가 제정한 교회교육(敎會敎育)주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의 관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우리의 자녀들과 가정들을 어떤 신앙과 교육적(敎育的)인 접근으로 부활 생명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누리며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로 세워갈 것이냐가 주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어린이는 누군가? 미래(未來)세대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잇는 상속(相續)세대이다. 가정은 그런 미래 세대를 생산하고 보전하여 역사에 상속시킬 소명을 부여 받은 인큐베이터이다. 부모는 그 생명의 역사를 잇게 하는 다리(Bridge)이다. 따라서 어린이들과 그를 품고 있는 부모는 살아있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부활의 영성을 풍부히 함축하고 있어야만 하겠다.  

 

어린이들은 아직 미숙하고 스스로 결정하기가 불가능한 세대이다. 우선 배우고 자라야만 한다. 그러려면 먼저 잘 받고 보고 들으며 성장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부모요 가정이다. 어느 가정과 부모에게서 자라느냐는 점이 그 어린이의 미래를 결정 짓게 되기 때문이다. 그 상호 관계는 실로 운명적(運命的)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부모를 잘 만나 행복하게 사는 아이들보다도 잘못 만나 불행하게 사는 어린이들의 탄식 소리가 가득하다. 그러기에 오늘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을 부활 생명이 약동하는 공동체로 세우느냐에 있다. 

 

가정을 예수 부활생명이 약동하는 공동체로 삼자는 것, 이것이 우리 가정의 목표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어린이 이전에, 부모 부터여야’ 한다. 보통 우리는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 고민한다. 그 고민의 대부분은, ‘내가 낳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둔다. 하지만 그보다 부모에게 더 필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해야, 이 귀한 아이의 성숙한 부모가 될 것인가’라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 솔로몬의 기도의 내용처럼 말이다!(왕상3:9절 참조) 

 

부모 역시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아이란 새 생명을 양육하기에는 역시 미숙한 존재이다. 어른으로서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내재적으로 부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부모 역시 여전히 돌봄과 성숙을 위한 지원을 ‘위(외부)로부터’ 받아야할 연약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가정이 생명체들이 약동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려면, 그 가족 일원 모두가 깨어 살아 있어야만 한다. 부모부터 먼저 성장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 그 각성 속에서 자녀들을 돕는 어른들이 되어야 한다. 그게 부활영성을 가진 가정 공동체로서의 핵심적인 기본 조건이다. 

 

오늘 이 세 본문 말씀들이 어떠한 내용으로 이어져 있는지 살펴보자. 

복음서는 성자 예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 자기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이 땅에다 미리 행하신 일들을 확인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매우 아름답게 소개한다. 즉 성부 아버지와 성자인 아드님께서 서로 손과 마음이 하나 되어, 이 세상 선교를 위해 뿌리고 심는 자와 거두는 자로 그 구원의 역사를 함께 펼치시는 모습을 깊이 전해 준 것이다. 

 

구약의 내용은 어떤가? 세상 떠난 아버지 다윗 왕이 행한 위대한 삶과 유적을 추억하며, 그가 남긴 거대한 나라와 백성을 다스려야하는 통치의 기업(企業)을 이어받은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께 자기의 어림과 부족함을 진솔하게 고백하면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선악(善惡)의 분별력(分別力)을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소개한다. 여기에서도 어린 세대가 건강한 성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분별력(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할 줄 아는)을 갖추어야 함을 보여준 것이다. 

 

신약의 서신서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도 생명체인 만큼 건강하게 성장하여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교회 역시 솔로몬이 소망했던 취할 것과 버릴 것을 확실하게 하는 분별력을 반드시 구비해야만 했다. 이런 영적 훈련이 잘못되면, 그 때의 교회는 부활공동체나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을 발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구원의 저해(沮害) 세력들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은 신도 개인이나 교회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복음서를 다시 보자

 

본문은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유대인 일반이 택하여 오가는 길인 요단 계곡이 아닌, 외면하던 땅인 사마리아를 택하신 때에 발생한 일을 전한다(3-4절). 그곳을 택하신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주님은 옛 세겜 근처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는 약 1km 지점쯤에 이스라엘 조상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우물도 있어서, 주님은 한낮의 피곤한 여정도 푸실 겸 그 우물곁에 앉아 쉬셨다(5-6절).  

 

그런데, 뜻밖의 선교가 그곳에서 펼쳐졌다. 그곳의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다가 주님으로부터 ‘물을 좀 달라’라는 요청을 받으면서 몇 가지 대화의 문이 열리고 예수께서 오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자(7-26절 참조), 그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즉시 자기 동네로 들어가 그리스도 되신 예수를 전하면서(28-30절), 동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39-42절 참조). 오늘 본문은 그 여자가 동네로 급히 떠나 후, 제자들이 동네에 가 먹을 것을 사가져 와서(8절) 주님께 음식을 드리려는 과정에서, 주님과 나눈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내용을 보자. 

1) 동네에 가서 음식을 마련해 가져 온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糧食)이 있다’(33절)는 말씀이 문제가 되었다. 제자들이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34절)라는 오해에 빠지게 한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2) 이 때 주님은 이렇게 그 ‘문제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밝히셨다.-‘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34절). 또 이런 말씀을 이으셨다.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절).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6절)’

 

그 말씀에는 주님이 말씀하신 양식은 무엇이며, 왜 이 사마리아에 오셨는지 원인도 보여준다. 당신의 방문이 그들 선교(宣敎)에 있었음도 드러내셨다. 특히 이곳에서 당신을 만난 그 여인이 ‘예수가 곧 메시아이시다’란 말을 동네에 전하자, 동네 사람들이 곧장 예수께 나아와 영접하는 것을 보시면서, 그 때가 바로 추수의 때요 당신은 추수꾼으로 오셨음을 밝히셨다. 예수님이 방문이 그곳의 버림당한 목마른 영혼들을 잊지 않고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음 밝히신 것이다! 

 

그들이 누군가? 옛적의 북 왕국 이스라엘 10지파 출신들로서, 그들의 조상의 죄악으로 나라가 망하면서 아수르의 혼혈(混血)정책에 의해 ‘이방인 아닌 이방인’이 된 형제들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동족이었던 주변의 유대와 히브리족들로부터 철저히 배척을 당하며 ‘버림당한 족속’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여전히 그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그들의 회개와 구원에 대해서도 목이 마르셨던 것이었다. 예수의 행보는 바로 그 아버지의 뜻을 전하려 하셨다. 

 

3)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곳에 오시기 전에 이미, 하늘 아버지께서 이곳에다 구원의 씨앗들을 뿌려 놓으셨고, 그것이 이제 추수할 정도로 자랐기에, 그들이 예수를 영접했다고 보신 것이다. 결국 당신은 다만 때가 되어, 와서 거두고 있을 뿐임을 아신 것이다. 그러니, ‘뿌리는 자’ 하늘 아버지와 ‘거두는 자’인 아들 예수께서는 아름답게 펼쳐지는 구원 역사를 함께 즐거워하신 것이었다(36절).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부자(父子)간의 절묘한 역할분담과 협력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o Dei)가 그 사마리아 땅에서 놀랍게 결실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4) 우리는 이곳에서 성부와 성자의 뜻밖의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한다. 세상과 죄인 구원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 천지(天地)에서 입체적으로 협동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역사를 잇는 일은 핏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뜻과 가치의 대물림이 훨씬 중요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뿌리고 심는 앞선 세대로서의 부모가 있고, 그 뜻을 공유하여 동참하고 계승하여 거두고 베푸는 세대로서의 자식을 둔 가정은 얼마나 든든하고 축복 받은 가정이겠는가! 우리의 가정과 가족들도 이런 수준과 차원의 가족 관계가 구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감사하게도, 우리는 또 다른 멋진 가족사(家族史)에서 이를 닮은 좋은 모범을 만나게 된다. 

 

구약을 다시 보자

 

본문은 우리 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즉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어떻게 세상에서 ‘지혜와 영예의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소개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때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1) 여호와께서 친히 꿈을 통하여 솔로몬을 방문하셨다. 이유는 솔로몬이 평소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좇아 행한 왕으로서, 최근에 기브온 산당에서 마련된 제단에서 여호와께 일천 번제를 드린 것에 대한 응답 차원이었다. 그래서 솔로몬을 찾으신 여호와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3-5절) 

 

2) 그러자 솔로몬은 세 가지 차원 내용들을 담아 여호와께 청원(請願)을 드렸다(6-9절 참조). 

①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히 주 앞에서 행하여 주의 큰 은혜를 입었음을 기억하며     자신도 그런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음을 고백했다.

② 여호와의 그 큰 은혜로, 이제 그의 아들인 자신이 이제 다윗의 계승자가 되게 하셨다. 

③ 하지만 자신은 어리다. 저 셀 수 없이 많은 수효의 주의 백성들을 제대로 재판(통치)할 수     없다. 그러니 자기에게 듣는 마음을 주사 선악을 분별(分別)하게 해 달라. 

 

여기서 ‘듣는 마음’은 우선은 율법과 계명들에 담긴 여호와의 말씀의 가르침을 말한다고 본다(신6:4참조). 그러면서도, 재판 현장에 임하는 자들의 증언에 담긴 상황파악을 정확하게 하게 해달라는 뜻도 담겼다고 보인다. 바로 온전한 분별력을 요구 하였다! 주께서 크게 감동하셨다. 그가 왕으로서 우선 필요한 것들(장수,부,원수제거 등)도 많았을 터인데, 그런 것은 구하지 아니하고 바른 정치를 위한 분별할 지혜를 구했기 때문이다(10-14절, 마6:33참조). 그 바람에 그는 구하지 아니한 것들까지도(부귀.영화.장수.영예 등)받은, 소위 ‘대박 응답’을 받게 되었다. 

 

3) 다시금 주목(注目)하자. 가장 건강한 부모와 자식이 모인 가정은 어떤 가정인지를-! 그 중에서 부모의 자식교육에서 가장 핵심이 될 요인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자녀들이 인간으로서, 매사에 분별력을 가지고, ‘옳다’(yes)와 ‘아니다’(no)는 분명하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마5:37절 참조). 그것을 잘못하면 삶의 기반은 금방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 정의롭고 공의로운 분별력은 책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절실하다. 물론 부모들에게도 잘 갖추어 있어야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솔로몬은 세상에 다시없는 존귀한 존재’(12절)가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전신(全身)인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가정이나 부모나 스승 못지않게, 신도들이 세상살이에서 제대로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들로 살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들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장 필요한 행동 수칙들이 제시되었다. 탁월한 영적 분별력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함을 강조되었다. 구할 것들과 버릴 것들로 구분했는데, 전반주(1-4절)에서는 구할 것이, 후반부(5-9절)에서는 버릴 것이 제시되었다. 

 

1) 취(取)할 것으로서, ‘위의 것’을 찾는 일이다(1-2절). 위의 것을 찾게 되면 삶의 변화가 따르면서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존재가 가능하다. 특히 신도의 변화된 새 삶은 현재 감추어져 있고 주님과의 교제에 매여 있다가 마지막에 그들 실상이 들어날 것이기에, 그들은 항상 위의 것을 찾는 행보를 취하고 살아야 한다(3-4절). 

 

2) 버릴 것으로서 ‘땅의 지체를 죽이는 일이다(5-9절). 끊어내고 죽여야 할 것들은 이것이다. 음란-부정-사욕-악한 정욕-탐심(우상숭배)들과, 분함-노여움-악의-비방-부끄러운 말-서로 거짓말들이 바로 그 버려야만할 구체적인 땅의 것들이다. 그런 것에 내 영혼과 양심이 붙들려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면서, 내 삶은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이미 물과 성령으로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知識)에까지도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다(10절). 이제는 존재와 가치도 달라졌고 수준도 달라졌다. 거기에 걸맞게 사는 길만이 남아 있다. 어떤 경우에도 옛 사람의 모습과 행위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표는 다만 만유이시고 만유 안에 계신 그리스도뿐이다. 그분 안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고 모두가 새로이 지음 받은 자유로운 존재들일 뿐이다(11절). 다시는 죄의 종의 멍에를 매지 말자. 이 정체성의 분별력을 탁월하게 발휘하여, 영원한 생명을 기업으로 받는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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