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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어버이-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주일

관리자 2019-05-08 (수) 23:02 12일전 41  

본문) 요5:19-29, 사25:1-9, 고후4:7-18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이면서,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신 어버이들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주일이며, 국가적으로는 지난 39년 전에 있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회상하면서 그 날의 정신을 되새김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이 둘은 기쁨-감사와 슬픔-위로란 양극(兩極)의 감정이 교차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둘 모두는 예수 부활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서 하나로 묶어낼 수 있기에, 우리는 이제 말씀이 제공하는 깊은 생명의 샘물을 마시고자 한다. 

 

세 본문들이 주는 하늘의 향기(香氣)는 진정 신선하고 아름답다. 그 공통적 메시지가 바로 약하고 깨어지기 쉬한 존재들이 이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전혀 불안하거나 두렵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지혜를 풍성하게 안겨준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늘의 세 본문들에는 세상의 강자가 아닌 약자의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가득 채워져 있다. 

 

복음서에서는, 든든한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서 자신의 역량과 가능성을 마음껏 발산하며 사는 인간되신 아들 예수님의 충만함과 기쁨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살리고 부활하게하며 또 심판할 권세도 부여 받은 예수께서, 어떻게 행사하시는지를 의미 있게 전한다. 

 

구약 예언서에서는, 전능자의 강하고 따뜻한 품과 사랑으로 세상을 호령하던 억압자들로부터 자유해진 사회적 약자(弱者)들의 감사와 찬양이 가득하다. 특히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고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는 위로의 말씀이 눈길을 끈다(8절). 

 

서신서는 사도 바울의 뜨거운 신앙고백이다. 그는 ‘질그릇’(jars of clay)이라는 나약한 자신의 실존(實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최고. 최상의 생존 전략을 찾아낸 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환난과 사망의 권세의 위협 속에서도 그것에 전혀 붙잡혀 주저앉거나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승리의 모습을 옹골차게 간증한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따름으로써 당하는 위험과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攝理)란 그릇 속에 담아내는 것을 배웠으며, 자기 자신의 힘에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두는 것도 배웠음을 말한다(고후1:9,4:7,12:9참조). 그는 자신의 고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를 발견하면서, 특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자유를 부여하는 말씀과 창조적 권능을 금(金)그릇이나 석(石)그릇 같은 확실하고 단단한 데에 담아 두지 아니하시고, ‘한없이 약해서 한순간 깨어져 버리기 쉬한’ 질(흙)그릇 속에 담아 두시는 손길에 놀라고 감동한다. 그것은 베푸는 자나 받는 자 모두가 함께 영광과 기쁨을 공유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복음서를 다시 보자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은 그의 전체 복음서를 통하여,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과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위하여 얼마나 완벽하게 하나 되어 일하셨는지를 전하는 데에, 전력을 기우렸다.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권세들을 예수께서 어떻게 이 땅에서 사용하시는 지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증언한다. 

 

덧 불일 부분은, 우리가 믿는 구원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펼쳐진 부자간의 유별난 사랑과 그 방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23절 상). 이 부분은 가정의 달과 어버이 주일에 주시는 본문 말씀의 특별한 보너스이다. 그것은 되는 가정, 빛을 발하는 가족, 활동을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가족의 모델까지도 더불어 소개해 주신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본문 내용을 더 깊이 들여다보자. 

 

1)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전혀 차이나 다른 면이 없었다(19-20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 ①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依存)하며 복종(服從)하였다(19절).

    ②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하는 그런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의뢰(依賴)하셨다(20절). 

☞ 즉 완전한 의존과 복종 & 전적인 의뢰란 방식에 따라, 저들 부자는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를 보게 해 달라’고 요구하던 제자들에게,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주저 없이 주장하실 수 있었다(14:9참조). 

 

2)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하신, ‘그 보다 더 큰 일’이란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곧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復活)권과 당신에게 등진 자들에 대한 심판(審判)할 권세였다. 

   ① 아버지처럼, 아들도 당신이 원하는 자들을 종말에 살려서 부활시키신다(21절). 

       아버지께서는 당신 속에 있던 생명을 살리는 부활능력을 아들도 공유하게 하셨다(26절)

   ② 아버지가 가지신 최후의 심판하시는 일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22, 27절). 

 

3) 큰 권한을 위임 받은 아들 예수께서, 과연 ‘누가 영생(永生)을 얻고 심판 없이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生命)의 자리에 옮겨진 대상들인지’를, 확실하게 천명해 주셨다(24절). 

☞ ① 당신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다(24절 상). 

       당신의 말씀 자체에는 듣는 자를 살리는 생명력이 부여되어 있었다(25절). 

       주님은 당신이 오셔서 말씀하신 때를, 매우 특별한 때로 선포하셨다(25절). 

       곧 ‘죽음에 빠진 자들(죽은 자)이, 말씀을 들으며 살아나게 될 때’로 규정하셨다. 

   ② 당신을 보내신 이, 곧 하늘 아버지를 믿는 자이다(24절, 하)

 

4) 그러면, 아들 예수에게 부여된 심판권은 과연 누구에게 행사(行事)되는가? (22,27절)

☞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음성을 듣지 않는 데서 일어난다. 즉 음성을 거부하며 사는 자이다. 

   그러기에 누구나 구원을 원하는 자는 예수와 그의 말씀 앞에 나와야 한다. 

 

5) 추가(追加)할 특별 고지(告知) 사항이 있다. 이미 무덤에 있는 자들에 관한 문제이다(28절). 

☞ 즉, 예수의 음성을 들을 기회조차 없이, 앞서 떠난 이들은 부활의 심판 앞에 어떻게 되나?  

☞ 그 심판의 지침(指針)은 이렇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9절)

☞ 그들도 누구나, 다시 일어나 역사적인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다. 다만, 그들에게 부여된 심판의 지침은 삶의 행위(行爲)의 내용(질)이 될 것이다. 곧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요즈음도 예수의 음성을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체, 떠나는 이들이 세계 처처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말씀은, 구원의 여지(餘地)와 지평을 보다 넓게 열어 놓은 것이어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게다가 우리 주변에는 예수 모르고 살았으나, 그의 의로운 마음으로 공동체나 이웃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이들도 적지 않다. 아벨처럼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도 엄청나다. 그러기에 이 구원의 추가 지침은 그들에게 분명히 빛이다! 

 

이 말씀은 믿음에 따른 구원만을 말하지 않고, 행위(行爲)에 의한 구원의 차원도 열어 두었다는 점이어서 큰 빛이 된다. 자신들의 삶의 행위의 중요함을 다시 성찰할 말씀도 되기에, 더욱 좋다. 또한 이 점은, 최근의 우리 현대사에 씻을 수 없이 아픔과 고통을 안겨 준 국가폭력에 의한 죽임을 당한 이들(4.3제주항쟁-4.19민주혁명-4.16세월호 참사-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을 포함)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론을 말하는 데에도, 큰 지침이 되리라 본다. 의롭게 살다 간 자들과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들을 위한, 위로와 선교(宣敎)에도 매우 좋은 지침이 되리라고 본다. 

 

예언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힘이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에, 오직 역사의 주이시며 그의 도움만을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여호와를 만난 자들의 찬양이 매우 뜨겁다. 

 

내용의 정황을 보아서는, 바벨론 포로기의 터널을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호와 감동이 이렇게 신앙 고백적으로 올라와 있다고 본다. B.C 587에 그들을 멸망시킨 바벨론이 바사(페르시아)제국의 황제 고레스에게 패망하면서, 이스라엘은 피한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제2의 출애굽을 하게 되어 역사적인 평화의 귀환(歸還)행렬에 올랐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 슬픔과 원통함의 늪에서 나와, 여호와께서 마련하신 기쁨과 환희의 대 축제(祝祭)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세계와 차원의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앞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죽음(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경험, 아니 일으키심을 받게 된 경험을 하였다(요5:21,25참조). 그것도 민족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부활시킨 주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심도 확인했다. 그를 의지하고 바라는 자들의 눈에서 슬픔과 절망의 가리개와 덮개를 제거해 주시고(7절), 눈물도 씻겨주시며,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기쁨과 생명의 옷을 입혀주시는 여호와를 만난 것이다(8절). 

 

그들의 이 민족적 부활체험이 중요한 것은, 이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가슴 속에 부활신앙이 뿌리를 내렸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부활주일에 만난 욥의 부활신앙이 개인 차원의 불씨였다면(욥19:25-27참조), 이번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귀환 체험은 집단 차원의 부활의 불씨였다고 보인다. 그 바람에 그들에게는 그 때부터 ‘부활과 심판은 분명히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런 부활 신앙은 그들 이스라엘에게는 모두의 소중한 꿈과 희망이었고, 자신들에게 가해 오는 모든 국난(國難)과 시련(試鍊)들을 능히 이겨내고 견디어낼 영적 동력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오셔서 그토록 메시아를 고대하며 살던 민중들에게, 당신을 ‘부활과 생명(구원)의 주’로 선포하신 일(요11:25-26참조)은 당시에도 큰 충격(거부하는 자들)과 기쁨(영접하는 자들)을 안겨 준 선포가 분명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역사가 어디 그때뿐이겠는가? 온 세상과 역사가 다 그의 것이고 그의 섭리와 통치아래 있는 것이 분명하기에, 그의 구원과 심판의 손길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마침 이번 주일은 지난 39년 전에 광주에서 발생한 5.18민주화운동의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그들의 통탄스러운 억울한 죽음들은 아벨의 피의 호소가 되어,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 나타나도록 견인(牽引)하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의인의 행위, 선한 행위로서 역사의 심판 무대에서 생명의 부활체로 지금도 역동하고 있다(요5:29참조).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문재인 정부도 들어설 수 없었다. 그들은 4.16 세월호 사건과 함께, 민주주의와 조국의 평화통일을 견인할 확실한 살림의 주제를 제공한 제물들이 되었다. 동시에 반통일세력과 반민주주의 세력들과 부패세력들을 강력하게 심판하는 동력으로도 살아,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서신서를 다시 보자

 

누구보다도 부활신앙에 굳게 선 바울 사도의 교회 공동체들을 향한 뜨거운 권면이 담겨 있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그야말로 만신창이(滿身瘡痍)였다. 얻어맞고, 갇히고, 굶주리고, 쫓겨 다니고, 비방을 당하고, 이단 취급당하고, ‘사탄의 가시’같은 흉악한 질병(疾病)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살았다’기보다는, 차라리 ‘죽은 자의 모양으로’ 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삶의 내용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산다’(10절). 

 

하지만, 놀랍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런 억압과 박해와 핍박에 굴복된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안에서 ‘되살아나는 새로운 생명의 모습들’이었다. 즉 예수의 부활하신 생명의 모습이 자신 안에서 뜨겁게 살아나고 있는 것을 놀랍게 보았다. 그 부활체의 모습의 특성을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다. 상황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끌어가는 삶을 말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4:8-9절).

 

그는 자신이 그런 모습에 대한 원인을 스스로 분석하면서, 그 요인이 마치 질그릇 같은 자기의 몸과 영혼이라는 연약한 그릇(하드웨어)속에,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신 부활하신 예수의 영과 그의 영생의 복음이 핵심 콘텐츠(소프트웨어)로 담겨져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7절). 그 바람에, 바울은 스스로 체험했다. 부활의 은혜가 자기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니, 자기는 그 어떠한 세상의 가해(加害)에도 낙심(落心)이란 있을 수 없고, 오히려 겉 사람(육체,나이 등)에 상관없이 자신의 속사람(주의 고난과 부활의 몸을 지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선언하였다!(16절). 

 

그러면서 바울은 교회 가족들인 우리에게 호소한다. 예수나 자신의 그런 고난과 죽음을 짊어진 삶은 모두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는 점이다. 우리를 마지막 심판 날에 다시 살리기 위함 때문이다고 강조했다(12-15절 참조). 따라서 이 증언을 받는 우리의 선택은 무언가? 

 

우리의 삶의 시선(視線)을 겉 사람에게 두지 않고 속사람에게 맞추어 사는 일이다(16절). 하늘과 영생의 가치를 위해, 성실히 사는 일이다. 마음을 잠깐이면 사라질 보이는 시련이나 환란에가 아니라,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두고 살자. 그리고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함과 그 나라에 두고 살자(16-18절). 그렇다. 이것을 못 보면 심판뿐이다! 하지만 보는 것이 달라지면, 삶의 질과 내용도 달라진다. 부활의 참 능력과 그 축복의 열매를 향유하는 것도 당연히 뒤따라 올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 효도하는 좋은 자녀가 되는 길도, 물론 이 자리에 들어서야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 우리 함께 419장으로 주님을 찬양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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