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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4-25 (목) 16:40 4년전 1147  

본문) 요3:1-15, 겔11:14-20, 롬6:3-14 

 

지난 부활주일은 장애우 주일과 맞물리면서, 부활은 고난이나 각종 안팎의 장애란 큰 장벽을 넘어선 이들에게 부여되는 하늘의 선물이라는 점이 강조된 바 있었다. 예수의 부활 자체가 그의 십자가 고난의 열매였듯이 말이다. 거기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에 눈이 뜨게 되면서, 삶에 큰 변화를 받아 부활의 증인이 되는 소명(召命)도 주어짐도 보았다.

 

둘째 주일에 들어선 이번 주일에는 우리에게 어떤 부활 메시지가 주어질까? 한마디로,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부활이 주는 폭넓은 영적 지평(地平)이나 영역들을 전하고 또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방법(方法)들도 알려서, 우리를 부활신앙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한다. 즉 부활을 ‘몸이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이라는 육체적 단순 이해를 넘어, 부활에 대한 훨씬 더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이해를 가지고, 성숙한 부활신앙인(復活信仰人)으로 살도록 일깨우시려고 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이 전하려는 부활의 실재(實在)는 무엇인가? ‘거듭남’(Born Again)이다(요3:3,7). 이 거듭남은 유대인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모태(母胎)에 다시 들어갔다고 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에 의해 되어 지는 것이다. 이런 다시 남은 이전의 존재와는 확연히 구별된 새 인생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먹는 것, 생각하는 것, 찾는 것 등 모든 것에서 이전과는 달라진 존재로서, ‘새 차원(次元)의 인생살이’를 시작했음을 말한다. 

 

그런데 거듭남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은 그들만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들이 있다. 자신이 다른 차원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선 존재임을 보여 주기 시작한 것이다. 즉 지금까지 그의 삶을 지배해 왔던 ‘이 땅과 세상의 나라들’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그에게 들어선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3,5절). 그래서 주변을 놀랍게 하고 충격을 안겨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부활의 증인(證人)들’이라고 부른다! 

 

여러분, 주의 깊게 성경을 보시라.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순식간에 그 세계의 백성이 되면서, 전혀 다른 삶의 나라로 들어가 살기 시작하였다. 그 바람에,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와 함께 지냈어도 예수를 닮지 못했었는데-, 그 때 이후로는 예수를 닮고 예수로 살며 예수를 보여주는 예수 사람이 되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충격인가!

 

그런 존재의 대변화는 그가 예수의 부활로 ‘거듭남’의 사람이 되었음을 말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처음부터 그토록 외치셨던, ‘회개하라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까웠다’라는 그 나라가 부활의 주를 통하여 비로소 그에게 임하였음을 말한다. 그 때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한 마음, 한 뜻, 한 공동체의 가족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서의 제자들과의 삼년이란 세월은, 제자들이 그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수준의 사람들로 다시 나게 하시기 위한 인큐베이터 속의 생활이기도 했다. 마치 임산부에게 태아의 생산을 위한 시간이듯 했다. 주님의 갈보리 위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런 새로운 존재들이 지구촌에 탄생하도록 허용된 ‘신인류(新人類) 탄생’을 위한 은혜의 시간대이었다. 

 

하늘 아버지 역시 그런 아들의 아픔에 동참하셔서 세상이 아들에게 무참하게 가한 사망 늪 속에서 아들을 일으키셨고, 그의 존재를 영광스럽게 하시므로서 주님의 큰 뜻을 현실화시키셨다. 당신 안에서 세상의 변화와 구원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신인류(人類)’들의 탄생을 보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부활 절기에서, 부활 자체에 대한 놀라움에 빠지는 것 대신에, 그를 만난 이들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의 출발을 하게 하는 부활의 능력에 더 놀라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도 이런 차원에 들어가지 못하면, 영생은 나의 것이 되지 못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면 이제 거듭남을 가능하게 한 두 물줄기들을 확인해 보자. 주님은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밝히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3절), 또 들어갈 수 없다(5절)’고 하셨다. 즉 하늘의 선물인 물과 성령이 바로 나를 하나님 나라에게로 인도하면서, 나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쌍끌이 동력(動力)’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히신 것이다. 

 

그러면 물은 무엇이고 성령은 어떤 영이기에, 우리에게 그런 놀라운 동력들이 되는 것인가? 그 점에서 남은 두 본문들의 역할은 크다. 총론적인 복음서의 두 부분을 구체화하려고, 남은 두 본문들이 각론의 역할을 맡고 있음이다. 먼저 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서신서가 밝히고 있고, 성령의 부분에 대해서는 에스겔서가 맡아서, 물과 성령이 거듭남의 요인들임을 알려준다. 

 

먼저 복음서를 다시 보자

 

이 거듭남에 대한 대화가 본격화된 것은 바리새인이면서 경건한 유대의 원로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요3:1,19:39-40참조). 그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평소 하나님의 나라를 겸손히 사모하던 사람으로서(막15:43참조), 나사렛 예수께서 행하시는 여러 표적들을 눈여겨 지켜보면서(요2:23 이하),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이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조용한 밤에 예수를 찾아뵈었던 것이다(2절). 

 

예수님으로서는, ‘그 나라를 맞이할 준비는 되었으나 아직은 그 세계를 전혀 모르고 사는’ 한 열린 영혼을 만나신 것이었다. 그것도 바리새인 중에 그런 신앙의 인물을 만난 일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당신에 대한 그의 소감을 들은 주님은, 즉시 그의 관심사에 대한 본론적 접근을 하셨다.-‘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1) 주님은 니고데모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은 인물인 점을 감안(勘案)하시면서, 단도직입으로 그 거듭남의 방법을 그렇게 제시하신 것이었다(3절). ‘거듭남’의 의미에는 ‘위로부터’라는 뜻을 담은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특히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삶의 문제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들을 받아야만 해결되는 세계가 있음을 알리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하지만 거듭남에 대한 이해가 오직 육체적 방정식뿐만 있고, 받아 해결되는 것에는 한없이 낯설며 오직 자기 노력에 따른 행위로서만 그 무엇인가를 얻게 되리라고 판단하며 살아온 니고데모로서는, 예수님의 그런 ‘위로부터 주어진 것은 꼭 받아야 된다’는 말씀은 더욱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4절). 노년에 든 그에게 ‘거듭 남’의 과제는 불가해(不可解) 자체였다. 

 

3) 그를 깨우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거듭남의 방법(方法)과 수단(手段)들’이 그에게 통보(通報)되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그러면서 그에게 단호하게 한 마디 건내셨다- ‘육은 육을 낳고, 성령은 영을 낳는다(6절), 너는 거듭나야만 한다’라는 말씀으로 속마음을 전하셨다(7절, You must be born again!). 

 

주님의 그런 말씀은 그의 무지와 몰이해를 책망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를 살리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그가 더 나이 들기 전에, 그것도 당신을 만난 이 기회에-, 주님은 그가 정말 ‘거듭나야만 된다’고 보셨다. 그것은 그가 보유한 세상적 부요함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늘로부터 내리는 성령을 받아서, 그의 제자가 되어 거듭난 생애를 제대로 살게 하려 하셨기에 그랬다. 

 

☞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지목(指目)하신 거듭남을 위한, 소위 ‘위로부터 주어진 하늘의 선물들인 물과 성령’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피는 것은 필요하다. 주께서 말씀하신 첫째 요인(要因)인 물은 무엇인가? 이 첫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바울 서신인 로마서의 증언에 귀를 기우리고 도움을 받아야만 하겠다. 

 

이 물은 바로 물세례(洗禮-Baptism)를 말한다! 보통 물세례는 내가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의 백성으로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입교식에서 받는다. 여러분은 세례가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미리 내려주신 생명의 통로라는 생각을 해보셨는가? 그러면 그게 어찌 나의 거듭남의 핵심요인이 될까? 그것은 세례가 바로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그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이다. 즉 세례를 통하여 내가 예수와 연합(聯合)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갈3:27절 참조). 

 

물 세례로 나는 예수의 죽으심에 영입되어, 죄에 대하여 죽게 되는 경험을 한다(롬6:3-4상). 그런데 어디 죽음에만 영입된 것인가? 아니다. 그의 죽음을 이기신 부활(復活)의 영역에까지도 함께 영입된다! 그 바람에, 나도 죄로부터 자유해진 새 존재의 현실에로도 영입되었다! 의롭다함까지 얻게 되었다(5-7절). 이는 물세례가 준 신비요 놀라운 은혜(恩惠)이다! 위로부터 받은 충격적 은혜의 선물이다! 바울이 선언한 내용을 주목하라. ‘너희는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다!’(14절). 

 

그러기에 이제가 정말 중요하다. 물세례로 주와 연합된 이들은, 주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주와 함께 죄에서 자유해진 새로운 형태(부활)의 삶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물세례 받은 자들은 이제 어떤 삶을 대비해야 하는가? 다시 옛 것(죄의 지배아래)으로 돌아가면 안 되잖은가!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의 놀랍게 변화된 새로운 정체성(正體性)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 점을 바울이 확고히 제시했는데, 함께 숙지해보자

 

11절-‘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절-‘죄가 너희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몸의 사욕(私慾)에(을) 순종하지 말라(거부하라)’

13절-‘너희 몸의 지체가 불의(不義)의 무기(武器)가 되도록 죄에 내주지 말고, 

      너희를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께 드리되, 너희 지체를 의(義)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물세례를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는 자들’이다. 내 수고는 전혀 없이도, 나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나게 된 자가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받은 물세례의 의미를 살리고, 예수와의 연합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먼저 우리 몸이 죄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몸과 마음을 엄격하게 통제해야만 한다. 내 소중한 지체가 죄와 마귀의 하수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생명과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 그러면 거듭남을 위하여, 값없이 위로부터 받아야 될 두 번째 요인인 성령은 어떤 영인가? 그 점에 대한 답변은 오늘의 예언서인 에스겔 선지자의 증언을 청종하며 배워야만 하겠다. 

 

본문은 바벨론 포로 된 이들의 해묵은 문제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여호와의 사랑의 개입으로서만 해결되리라고 선포한 내용이다. 그들은 지금 범죄로 인해 여호와의 징벌을 받으면서도,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과 흩어진 디아스포라 사이에 예루살렘 영토의 소유권에 대한 갈등으로 분란에 빠져 있었다(15절). 그것은 나중에 흩어진 자들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운 통합된 이스라엘을 꿈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외면한 처사였다(16-18절).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할 방법이 바로 그들 마음속에 새 영(new Spirit) 부어주시는 것이었다. 그 영의 능력으로, 흩어진 백성들이 한 마음을 품게 되고, 돌 같이 완악한 마음이 아니라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품게 되게 하셔서, 주의 규례에 순종하게 됨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일에서 였다(19-20절). 이 예언은 평화롭게 귀환하여 하나로 복원된 이스라엘로, 그 후엔 오순절 새 교회 공동체의 출현으로 실현됐다! 

 

성령은 인간이 못 미치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기도하다. 그가 임하시면, 사람은 그를 교사로, 상담자로, 보호자로, 가이드로, 지도자로 모시는 은혜를 받는다. 그의 생각과 마음이 우리에게 와서, 감히 하나님만이 생각하실 차원을 담아주시게 한다.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가? 그런 분이 성령이었기에,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그런 명령을 하셨었다! 어찌 니고데모만이겠는가? 이 말씀을 받는 우리 자신들도 성령 받아 거듭남을 이뤄야만 하겠다. 

 

4) 니고데모는 자기와 같은 고령자가 ‘인생의 새 출발로서의 거듭남’을 꿈꾸고 시도한다는 것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진 듯하다(9절). 그 바람에 그는 주님의 질책을 듣는다(10절). 부활의 영인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입은 자의 삶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삶이 가능한데-,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고, 죄인들도 의인되게 하고, 지옥을 천국으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그 안에 있는데-, 자기 스스로 장벽을 쳐서 성령을 외면하여, 결국은 아무 것도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려는 그런 모습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시면서, 주님은 엄중하게 질책하신 것이다(10-12절 참조) 

그런 영향일까? 그 후의 니고데모는 십자가에 죽임당한 예수 시신을 위한 값비싼 향유를 드리면서, 주님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과 헌신을 드린 자임을 공개하기도 하였다(요19:39참조). 

 

이제 내가 지금 부활 생명을 살고 있는 지를 점검해보자. 세상을 넘어설 하나님의 나라가 내안에 역동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거듭난 사람인가? 부활의 주 예수님에게는 어떤 장애도 있을 수 없었다. 본래가 영원자이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좁디좁은 시간대에다 당신을 맞추어 사셨던 주님의 관심사는 대체 무엇이었겠는가? 그런 세상의 제약의 현실에서도 당신에게서 비추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빛을 보게 된 사람들을, 자유와 해방과 평화의 자리로 구원해내시려는 데에 있었다. 당신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 그 선물을 안겨주시려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13-15절). 물과 성령으로 나의 거듭남을 확실히 이루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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