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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순교자기념주일

관리자 2019-03-27 (수) 14:20 2개월전 79  

본문) 마23:13-28, 사30:8-18, 계3:1-6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특사(特使)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행보가 예사롭지 아니하다. 그가 막상 세상 현장에 내려오셔서 그 내면을 살펴보니, 아버지께서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토하셨던, ‘참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그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 되신 예수님의 마음의 아픔은 컸다. 그러면 그가 보신 이 세상은 대체 어떤 곳이었고, 어느 정도였나? 

 

예수님 당시 거의 모든 전 영역이 비정상적이었다. 건강하고 신선한 것이 없었다. 비정상의 내용을 보면, 가짜들이 진짜를 누르며 주인 노릇하고 있었고, 형식과 외식이 내용과 실질을 누르고 판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비본질적이고 부분적인 것들이 본질과 전체를 장악해서, 큰소리치고 있었다. 껍데기와 가짜들(적패세력)의 천국이었다. 유대교와 그의 지도자들이 그랬고, 유다 정치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그랬으며, 심지어 교회들까지도 그랬다. 실로 최악이었다! 

 

그러기에, 그 어둠의 세력에게 짓밟힌 하늘 아버지의 세계를 되찾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나사렛 예수님이 어찌 한가로울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이번 예루살렘에 가시는 길은 마지막 길이었기에, 더욱 해야 할 시급한 일이 있었다. 당신의 일들을 계승(繼承)해야 할 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내야만 할 과제들에 대한 방향제시 만은 분명히 해두셔야만 했다. 즉 지속적으로 이 세상의 변화와 구원을 견인해나갈 특별한 로드맵(길잡이)과 같은 것이 필요했다. 

 

나는 매주간 예수께서 당시의 적패세력들과 목숨 걸고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현재의 우리나라가 적패청산에 힘쓰고 있는 모습과도 너무도 일치하고 있음에 놀란다. 현 정부는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취지로 일어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이다. 그러기에 공의와 정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바로 작동하는 건강한 나라와 백성 되게 해달라는 역사적 소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정부이다. 따라서 현 정부의 어깨는 무겁다. 이전 정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소명을 함께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묶은 과오(過誤)에 대한 회개(悔改)와 청산(淸算)이다. 이 일을 지금 못하면, 우리의 역사는 한발자국도 앞으로 못 간다. 야당에서는 ‘제발 적패청산 그만하고 민생(民生)부터 돌보라’라며 정부를 압박하는데, 그들의 요구대로 하게 되면 우리의 역사는 또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만다. 부패.친일.독재,불법,성접대,반통일,정경유착,뇌물,국민패가르기,국민무시 등등의 해방 후부터 수십 년 쌓은 적패 세력들이 아직도 국가요직들에서 저토록 큰 소리들을 치고 있는데-, 어찌 우리가 그들을 그대로 둔 체로, 새로운 역사에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둘째는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가치와 삶의 질을 마련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이다. 지금의 정부는 그런 점에서 다양한 새로운 실험들을 전개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특정 세력들이 아닌, 전 국민들 모두를 함께 잘 살게 해 줄 것인가? 소득주도 성장론은 대표적이다. 그리고 본 교회 최 장로께서 서울시와 함께, ‘청년 50만원 무상지원’ 제도를 실험해보면서, 이 시대 청년들의 자존심을 고양(高揚)시키고 삶의 여력을 주자고 제의한 일도 그 일환이다. 

 

하지만, 이런 미래를 향한 일은 국민 모두의 인내와 협력이 필요한 일이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기도도 많이 해야만 한다. 특히 우리가 힘과 지혜를 모아야만 이 역사적인 새 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은사와 지혜와 역량들을 하나님과 세상을 위하여 결집시키고 모아주어야만, 우리는 꿈의 새 세상과 통일한국을 선사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사순절기는 우리 내부와 외부에 쌓은 여러 적패청산에 집중하는 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회개와 근심과 변화를 목마르게 간구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부활의 새 아침이 열리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침 총회가 제정한 순교자(殉敎者)기념주일인데, 순교자들이 누군가? 바로 예수님의 그런 개혁과 새 시대를 열고자 하신 높은 뜻을 좇아 목숨을 희생하신 분들이 아닌가? 그 분들을 대하는 우리는 그 분들의 믿음과 정신을 계승하여야만 한다. 오늘 세 본문들은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시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보여주신 곳들이다. 

 

복음서를 더 깊이 보자 

 

복음서는 당시 유대교의 지도층인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확실한 적패 대상으로 삼고 있다(13,15,16,23절)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잘못된 교육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막고 있었고, 자기들을 따르는 자들을 자기들보다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제조업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향한 심판 없이는 그 밑에서 짓눌려 살아온 숱한 대중들을 구원해낼 수 없음을 아신 주님이, 그들을 향하여 그토록 결별을 각오한 ‘막말 저주들’을 쏟아내신 것이다. 소위 ‘7화(禍) 선언’이라 불리는 예수의 저주 선언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더 들여다보자. 최소 네 가지 큰 죄악의 덩어리들이 드러났다. 

 

1) 저들은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문에 못 들어가도록 막고 있었다. 자기들은 물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13절).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그들이 눈먼 목자를 만나서 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인간들의 눈과 마음을 속이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그 바람에 그들은 자신들은 물론 자기에게 배우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하나님께는 버림당하게 되는 완전 ‘빈 껍데기 신자’가 되게 한 것이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2) 저들은 자기 제자들을 자기들보다 더 악한 ‘지옥(地獄)의 자식’이 되게 했다. 그들은 본래 열심과 집중력과 교육열에도 뛰어 난 자들이었다.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닐 정도’였기 때문이다(15절,중).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좋은 은사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기들을 위한 하수인들을 만들어 내었다. 게중에 가장 비극적인 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비난하고 대적하게 하는 일에 그들의 앞잡이로 뛰게 된 일이다. 그 바람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지옥의 자식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온 것이다(15절). 

 

3) 본질보다는 비(非)본질에 열중했다. 핵심을 못보고 지엽적인 것에 흥분했다. 큰 것은 못보고 작고 지엽적인 것에 집중했다. 밑의 법으로 위의 법을 거스르는 잘못된 어리석음 속에 빠져 살았다. 즉 하나님을 두려운 줄 모르고 특히 제물과 헌금에만 민감했다(16-22절). 진짜 ‘눈먼 인도자’들의 전형이다! 

 

4) 말씀의 부분적인 요절이나 구절에는 민감하지만, 그 말씀이 뜻하는 의미와 내용에는 무지했다. 신앙은 있으나 신학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그들 신앙은 자기 이익과 욕망중심으로 탈선하고야 말았다. 하나님 사랑의 면모는 있어도, 인간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은 없었다. 그 바람에 물질의 십일조만 드리면 구원 받을 사람처럼 가르치지만,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정의, 자비, 신뢰성과 같은 더 중요한 이웃 사랑과 섬김의 요소들은 아예 없었다. 그 바람에, 그들의 신앙은 불구의 신앙이 되고 말았다(23절). 신앙이 공공성을 상실하면, 그것은 죽은 신앙일 뿐이다. 

 

예언서를 다시 보자

 

이사야서는 당시 타락한 국가 지도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그것에 맹종하는 어리석은 유다 백성들을 적패대상으로 본다. 여기에서도 여호와께서는 당신에 대한 그들의 배신(背信)에 크게 분노하신다. 그들은 나라가 아수르 제국의 위협에 시달리자, 사절단을 보내 전혀 도움이 되지도 못할 애굽에게 매달렸다(30:1-7참조). 그때 그들은 마치 하나님과는 원수진 듯한 행보를 보이며, 철저히 외면했다. 왜 아수르에게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도 없었고, 오직 무능하기 짝이 없는 바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여호와를 찾으라’고 권고해도 막무가내였다. 

 

유다의 여호와에 대한 경멸행위는 마치 부모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식의 모습과 흡사했다. 여호와께서도 그런 그들의 반역하는 모습들을 서판(書板)과 책에 기록하여, 후대들에게 영원한 증거가 되게 하라고 선지자에게 명하셨을 정도였다(8절). 그들에게 붙여질 내용은, ‘반역하는 백성’, ‘거짓말하는 자손’, ‘주의 율법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자손’이었다(9절). 그 어긋난 모습을 다시 보자.

1)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들로서 여호와를 경멸하였다 - ‘환상을 보지 마라, 바른 것도 보이지 마라, 듣기 좋은 말만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정도를 버리라, 바른 길에서 벗어나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에게서 떠나시게 하라-(10-11절).  

 

2)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업신여기며,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잃는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신다. 마치 붕괴될 성벽과 같이, 깨어져 산산조각 날 항아리처럼, 그들이 사라질 것을 선고하셨다(12-14절). 그러면서도, 그들에 미련을 가지신 여호와께서는 최후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회개하라. 마음을 편안히 하라. 고요히 여호와를 신뢰하고 지내라. 힘과 구원을 얻으리라’(15절)

 

3) 그런데도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발악(發惡)이었다! 완전히 관계를 끊고 등을 돌린 자와 같은 절교의 선언을 했다! 여호와께서도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하였다(16,상 절). ‘그러지 않겠다. 차라리 (더 날센) 말을 타고 도망하겠다’. 자기 과대평가로, 거만을 떨며 주께 맞섰다-!  

 

4) 그런 대응을 보신 여호와는 결국, 두 가지 차원으로 그 상황을 정리하셨다(16.하-18절). 

① 저들의 ‘처참(悽慘)한 운명’을 선고하셨다 - 그들에게는 압도적인 적군의 짓밟힘 앞에서 망하고 흩어져서, 그들이 살았던 곳에는 외로운 깃발만 남아, 그들의 흔적만을 전할 것이다. 그 결과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아수르에 짓밟혀, 흔적(사마리아인)만 남긴 족속이 된 것이었다. 

 

② 구원(救援)의 길까지 막아 놓지는 않으셨다. 누구에게든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풀 기를 원하시는 당신을 믿고 찾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기회를 부여하신 것이다(18절). 결코 당신은 인간들에게 당한 상처대로 대응하지 아니하셨다-! 

 

서신서를 깊이 보자

 

소아시아 7교회 중에 사데(Sardis) 교회(敎會)가 그 적패 대상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평하신 결정적인 한마디는, ‘살아 있다는 평판은 있으나, 내용은 죽은 교회’였다(1절). 그러기에 교회는 어서 깨어나야만 하였고(2절), 회개해야만 했던 교회였다(3절). 

 

사데는 본래 남다른 장점이 있었다. 그곳은 금화(金貨)의 생산지여서, 지역 경제가 부유했다. 그 바람에 부와 철학, 법률과 예술, 모직과 금은 세공 산업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처음엔 그런 모든 축복이 그곳의 토속신인 아데미 여신의 은혜라 여겼으나, 복음이 들어온 이래, 많은 충돌이 발생하면서 순교자(殉敎者)들이 나올 정도(4절)가 된 곳이었다. 마침, 오늘 주일은 본 교단이 순교자기념주일로 지키는 데, 우리는 이 영광의 흔적이 사데에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왜 사데가 주님의 경고를 받게 되었나? 거의 대부분의 교우들이 순교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세속의 부요를 즐기고 누리는 데에 몸과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일부 순수한 이들을 제외하곤, 많은 이들이 돈과 쾌락(성적 타락)과 권력놀이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관심은 두 가지였다. 그 남은 바 아직 순수한 이들을 타락의 유혹에서 보호해내는 일이고(2,4-5절), 타락한 자들은 어서 회개하고 돌이켜 돌아오게 하는 일이었다. 

 

사데 교회의 변절과 그 위기의 실상을 접하면서, 우리는 지금의 한국교회와 우리의 영적 상황을 다시 보게 된다. 마치 우리 한국교회의 현재의 일그러진 모습을 말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어떻게 보면, ‘아직은 폭 망한 것은 아닌 듯’하지만, 그러나 세속의 풍요와 이전의 전통(傳統)자랑 수준에 머물면서, 한발도 주님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허약한 우리의 영혼들, 그리고 성적(性的) 타락과 세속의 향락이 주는 쾌감에 젖어 자기부정을 못하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계속 외면해가서 나태와 안일에 빠져든, 우리 영적 취약성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렇다

 

한국기독교역사이래, 지금처럼 교회가 부끄럽고, 목사인 것이 부끄럽고, 한국교회의 신자인 것이 부끄러운 시대가 없었다. 3.1정신을 선도한 그때의 교회 정신에 비하면 정말 부끄럽다. 한국교회가 적패대상이 된 것도 부끄럽다. 극우 태극기부대를 양산하고 극우 정당과 한 통속이 된 한국교회가 정말 부끄럽다. 살아 있다는 이름은 남았으나, 사실은 죽은 교회여서 부끄럽다. 

 

주의 심판을 대비하자. 지금은 십자가 신학이 다시 필요한 때이다. 주님의 불같은 호령과 책망을 다시 들어야 한다. 이 사순절에 시인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호소대로, 어서 껍데기 인생에서 벗어나자. 겉치레와 자기중심의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나아가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건강한 두 핵심 축을 어서 구축하여, 우리의 하늘 구원을 펼쳐 나아가자. 예수 냄새가 가득한 신자, 교회, 세상을 이루는 일에 앞장서자. 

 

우리의 목표는 천상의 영광이 서려 있는 흰 옷을 입는 자이지, 죽은 자의 상징인 검은 옷을 입을 자가 아니다(5절). 이를 위하여, 우리의 교회는 세상의 클럽이나 동호회 같이 친교단체 수준에 머물면 안 된다. 그보다는 매주일, 매번 모일수록,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맞대고 뵐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인간 자랑이나 냄새가 아닌 예수 자랑과 예수와 만남이 가장 큰 자랑이요 기쁨이 되게 해야만 한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을 때-, 깨어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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