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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3-22 (금) 00:14 5년전 1047  

본문) 마23:1-12, 전9:11-18, 고후11:19-30 

 

만일 나의 인생살이에서 세상과 사람들 앞에 내놓을 자랑거리가 아무 것도 없다면, 내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 그래도 이것만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는 잘한다(낫다)는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내 삶은 과연 어떤 삶이 될까? 아마도, 그런 사람은 자신의 구차한 인생에 대한 극심한 열등감에 빠져서 삶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판단 때문에, 몸부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종교는 무엇을 하나? 구원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조물주는 과연 인간을 처음부터 편중되게 만들어, 서로 차별 당하며 담을 쌓고 살도록 만드셨을까? 절대 아니다! 지난주일(3.17) 증언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적 계명이 그 부자 청년에게만 아니라(막10:21참조)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내용으로 부여되는 것을 확인한 바 있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이미 조물주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나은 모습의 재능이나 상속이나 장기(長技)나 소유 등의 자랑할 만한 것들이 이미 부여되어 있음을 알리고, 그러기에 그것으로 서로 비교하여 시험 들지 말고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덜 가진 이들과 나누고 섬겨서, 하늘의 영원한 구원을 받아 누리도록 전하려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복음은, 말씀은, 그리고 그의 공의로운 사랑은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는가? 바로 우리 안에 우리도 모르게 저장(貯藏)되어 있는 그것들(내가 남보다 더 가진 것/나의 자랑과 장점들)을 찾아주고 지적(指摘)해주며 확인시켜주고 사용하게 하므로서, 그것으로 자아(自我)를 고양(高揚)시키며, 그것을 주신 조물주께 영광을 돌리고, 진정한 삶의 보람과 행복도 누리고 맛볼 수 있도록 일깨워주신다. 

 

현재 상영 중인 <증인>이란 영화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병든 부자 노인의 살인사건을 맡게 된 민변출신 변호사 순호(정우성)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증언해 줄만한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소녀 지우(김향기)를 만나면서, 천신만고의 우여곡절 끝에 그의 마음을 사서, 그녀를 법정의 증인으로 세운다. 지우는 비록 자폐가 심한 장애인이었으나, 그가 가진 탁월한 능력은 상대의 말하는 입술을 보면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정확히 재현해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지우의 최종적인 증언이 정확히 터지자, 대반전의 상황이 이루어지면서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고 공정한 판결이 떨어진다. 장애우 지우의 탁월한 역할이 세상의 더럽고 추악한 어두움을 물리치고 진실을 밝힌 빛이 된 것이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자랑거리나 인간적 장점이 어떻게 해야 진정한 빛을 보게 될 것이냐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랑거리들은 예수와 복음이라는 진리의 빛으로 조명(照明)받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만일 치밀하게 그런 것들이 말씀의 조명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내가 가진 바로 그것’이 욕망과 교만과 이기심의 도구가 되어 나타나서, 그 결과가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떨어지게 된다. 본래 내가 가진 자랑거리들은 ‘양날의 칼’과 같은데-, 그것이 내 인생을 행복으로 결론 나게 하려면, 우선 복음의 조명을 꼭 받아야 된다!  

 

참고로 말씀 드린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현장으로부터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세우시며 부르신 까닭도 모두 그들의 존재의 가치를 높이고 차원 높은 위대한 삶을 살게 하고자 함이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이끄신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성령께서 주의 교회를 세우시고 공동체를 모아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심도 모두 건강하고 온전한 천국 시민의 위치로 올려 세우고자 하심이었다. 결코 우리를 부려서 종의 자리에서 비천한 존재로 살기를 원하셔서가 아니었다. 

 

세 본문의 내용 전개의 방법도 모두 공통적이다. 첫 부분은 자랑하는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그 자랑에 따르는 문제들과 허점에 대한 예리한 지적들이 잇따른다. 세 번째는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안에 내재(內在)한 하나님의 그러한 선물들을 통하여 범죄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한 존재가 될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잘하여야 한다. 특히 오늘의 말씀들을 잘 배우고 익혀서,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자랑스러운 선물들을 소중히 누리며, 진정한 자랑거리가 되게 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복된 인생을 누리다가 종국에는 영생에 이르게 되어야만 하겠다.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 종교 사회에서 일하는 이들의 자랑거리가 무엇인가? 그들이 차지한 각종 지위와 지도자로서의 위치와 그들의 누리는 규모나 오랜 경륜에서 오는 권위들을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역할과 영향력이 막대하다. 하지만 본문은 바로 그들이 내려놓을 것과 채울 것을 동시에 전한다.  

 

① 당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주도하는 유대교 종교 사회에는 자칭 타칭의 지도자들이 많았다. 선생(랍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아버지(율법교사의 존칭어)로 부리는 사람들, 지도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일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을 매우 당연시하며, 교만하여 자기 과시하려는 경향에 깊이 빠져 살고 있었다(7-10절 참조).  

 

그들의 행실의 특징은 그들의 행동 모두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 차고 다니거나, 옷 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일들도 그랬다. 잔치에서뿐 아니라 회당에서도 윗자리를 즐겼다(5-6절). 그 뿐 아니다. 그들은 가르치기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다. 즉 남의 어깨에는 무서운 짐을 지우면서도 자신은 그 짐을 나르는데,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들이 그들이었다(3-4절). 유대교를 죽은 종교로 만든 것이다. 

 

☞ 이런 타락한 현상 때문에, 당시엔 새로운 랍비 운동이 유대 땅 곳곳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그들 랍비는 부유층이나 제사장 계급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다양한 직업군(職業群)에서 발생했다. 대장장이-재단사-농부-나무꾼-목수 등의 일반인들이 새 랍비 운동을 일으켰다. 저들 교육의 특징은 성경지식을 전수하는 일보다는 말씀대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들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의 가르침을 계승할 제자 양성이었는데, 제자들에게 자신의 인품과 삶을 보여주는 것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았다고 한다. 

                                                                                         <랍비 예수, 제자도를 말한다/ 로이스 티어베르그 저 /국제훈련원>

 

② 예수 역시 새 차원의 랍비로서, 하나님의 율법 종교를 살림의 종교가 되게 하시려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택하신 제자들에게 엄히 그 대안(代案)이 될 만한 말씀들을 주셨다(1절).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가르침은 받되, 말씀은 꼭 실천(實踐)하는 사람이 되라. 

 그러나 그들의 언행의 불일치의 행실은 절대 본받지는 말아라(3절). 

-선생이란 호칭을 즐기지 마라. 대신 항상 배우는 학생(學生)의 입장에서 살아라(8절). 

-너희에게 아버지란 존경어도 합당치 않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9절). 

-지도자란 호칭도 경계하라. 너희의 참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10절). 

 그리스도야말로, 스스로를 섬기는 자(버림, 낮아짐, 내어줌, 섬김, 희생)로 자신을 내세우신 분으로서 만민의 구주가 되셨다(빌2:5-11참조).  

 

③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공동체(교회)에서 진정 누가 으뜸가는 존재이며, 필요한 존재인가? 

모두를 섬기는 사람이다(11절). 섬기는 폭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은 크고 위대한 사람이며, 자기를 낮추는 사람일수록, 그 공동체에서는 높아질 사람이 되리라(11-12절). 이 사람의 마음의 관심은 자기 욕구를 충족하려는 것이 아닐, 항상 공동체의 참된 축복을 열망하는 데 있다.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2) 세상 안에서와 육체(肉體)를 가진 이들이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을 소개한다. 여기에서 지혜자는 그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조심하며 내려 놓아야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① 세상은 능력(能力) 위주의 현장이다. 누구든지 능력 있으면 행복해하고 또 그를 부러워한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보다 더 갖고 누리고 앞서며 강하고 탁월한 존재들은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오늘의 지혜자(전도자)도 그런 현실을 꿰뚫고 보았다. 빠른 자, 용사(힘센 자), 지혜자, 총명한 자, 지식인 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그룹들임을 잘 보고 있었다(11절).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임이 분명하다. 

 

② 하지만, 지혜자는 그들에게도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다양한 종류의 불행한 때와 재난의 때가 있는 것과, 그 때에는 그들도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 있었는지도 보았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늙고 병들 때가 그렇다. 실직, 사업실패, 환경재난, 교통사고, 예기치 못한 시험과 유혹에 빠져듬, 가정 파탄, 강한 적대자의 등장과 그로 인한 피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때에는 그들이 자랑하던 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함께 본 것이다. 

 

지혜자라도 가난한 자들은 주변의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에 그 지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기도 한다(13-16절). 어리석고 미련한 통치자의 압력에 밀리는 사례도 많다(17절). 그리고 지혜자 자신의 잘못 생각이나 엉터리 판단에 따라, 그 자신의 지혜가 빛을 바래기도 한다(18절). 

 

③ 그러면 어떤 시각과 믿음으로 대처해야할까? 육체적인 자랑 거리들이 자기 안에 있음을 감사는 하되, 믿지는 말아야한다. 은사나 재능을 과신(過信)해서는 절대 안 된다. 다만 그런 일로 하나님과 부족한 이웃들을 섬길 길을 찾으라. 부자 청년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보다 온전한 것은 인간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이루어짐을 믿어야한다. 비우고 내려놓고 베풀고 관용하는 삶을 선택하면서, 종말론적 대응력을 강화시켜가야만 된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3) 기독교 신앙의 영역에서나 교회 현장에서도, 인간의 자랑은 그치지 않는다. 자기 자랑이나 장점을 앞세우며 상대를 짓밟거나 얕잡아보면서, 공동체 안에 갈등을 조장하며 분열하게 한다. 본 서신서는 그런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에 대처(對處)해낼 지혜가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사도 바울은 일종의 ‘진흙탕 싸움’에 뛰어 들었다. 마음으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싸움판에 일전불사(一戰不辭)의 심정으로 뛰어 든 것이다. 그것은 소위 ‘인간 자랑을 하는 싸움판’에 그가 발을 디딘 것이다. 까닭은 거짓 교사들과 유대교도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유혹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양육해온 ‘바울의 사도로서의 모든 것’을 의심(疑心)하고 불신(不信)하게 만든 일이 발생하여, 거기에 휘둘린 신도들이 시험에 들어 교회에 위기가 빠져들자, 그 일에 대하여 피해자인 바울 사도가 너무도 심한 마음고생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가만있지 않았다. 총력 방어전을 전개하였다. 장문의 반박 및 해명의 편지를 쓰고, 측근인 디도를 파송하여 그들을 설득하였으며, 금식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도록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교인들을 흔들었던 거짓 교사들의 자기 자랑 실체는 무엇이었나? 

 

① 모두가 사도로서의 정통성(正統性)의 요인이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디아수포라 출신이자 비 제자그룹이었던 바울에게는 다른 사도들에 비하여 약점같이 비칠 수 있는 부분들이 없지 않았는데, 바로 그런 부분을 파고들면서, 신도들로 하여금 그 교회의 초대 목회자인 사도 바울을 무시하고 불신하게 한 것이다. 그 점이 왜 위험한가? 바울이 전한 예수와 그 복음 자체까지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적대자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뽐내려했나? 

 

정통성을 가진 사도라면,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요인(要因)들을 꼭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22-23절). 팔레스틴 지역 출신과 가문을 가진 히브리사람 이어야한다.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인 이스라엘 사람 이어야한다. 약속의 상속자인 아브라함의 자손 이어야한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일꾼 이어야한다. 이런 부분에서 결격사유가 있으면, 사도일 수 없다고 했다. 

 

② 바울의 대응은 ‘나도 역시 그렇다’였다(22-23절). 하지만, 바울은 그런 외적인 요건들만으로 대응을 끝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들 적대자들이 결코 답할 수 없는 개인적 자랑거리들을 추가하며 비난자들에게 반격하였다(23.하-28절). 바울 스스로는 그것을 ‘자신의 약점(弱點)들’이라고 칭하는 것들이었는데,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예수와 그의 복음과 교회들을 위하여 누가 더 수고하고 고생을 했느냐’는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누가 더 섬기고 희생하는 종과 섬기는 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는지’를 되물은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일꾼들의 자랑은 지위나 말로만 답하려 말고, 직접 실천하는 자여야 한다는 앞선 예수의 가르침을(마23:3) 구체적으로 되새겨주는 증언이었기에, 매우 중요했다. 

 

③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지도력은 출신이나 지위나 지식 자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말씀과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실력이 인정받아야 된다. 그것이 절대 우선적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자랑은 과연 누가 예수와 그의 복음과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더 수고하였고 섬겼으며 희생했느냐를 놓고 나올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입증할 참된 조건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람은 인간의 시신에 끌려서 일하면 절대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인정을 제대로 받는 일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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