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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2-14 (목) 13:30 5년전 1106  

본문) 눅9 : 57-62, 수1: 1-9, 고전10 : 1-13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순례자(巡禮者)의 삶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길을 좇고 그것도 평생 동안 그의 나라에 이르는 길에 주와 동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기쁨과 확신이 충만할 때에 주님의 나라로 직행하게 되는 경우라면, 그것은 큰 행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다. 주어진 생애는 어떻게 하든 감당해야만 하고, 예수 만나 시작되는 삶은 그 순간부터 그 분과의 동행을 이 세상 떠날 때까지 책임 있게 이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하고 제시하신 길이 생명의 길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길은 협착하고 좁아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적다는 점이다(마7:13-14). 결코 평안하고 여유로운 곳이 아니다. 그래서 비록 처음에는 선한 뜻을 가지고 그의 뒤를 좇기 시작한 이들도, 끝까지 계속하지 못하는 자들이 허다하다. 소위 도중 탈락자들이 많고, 낙오되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신앙 행보에서는 배교자와 배신자들이 유달리 많다. 

 

우리들도 나름대로의 신앙의 경력도 많고, 가족 차원의 오랜 믿음 생활도 해 온다. 가계 신앙 몇 대를 자랑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온전히 보전되고 있느냐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변절한 기독교의 인사들이 너무도 많다. 마치 옛날 독립 운동가들이 친일 인사로 변절한 모양 세처럼 말이다. 성직자들도 그렇고, 정치인도 그러하며, 유명 인사들도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충격과 안타까움을 준다.  

 

예컨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던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부터인가 변절되어 극우 인사가 되었다든지,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반민주운동에 앞장서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진보진영과 노동자들 위해 일하던 인사들이 언젠가부터 보수정권의 일원이 되어, 노동자탄압과 그들의 인권신장에 훼방(毁謗) 자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정반대의 진영과 입장에 서서 그곳의 대변인 노릇을 하게 했을까 여전히 궁금하다. 돈인가, 권력인가, 이념인가, 음행 등의 악행 때문인가? 어떤 힘이 그들을 그토록 주저앉게 만든 것인가!

 

나의 현재 상황부터 다시 점검해보아야 할 일이다. 변질은 한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오다가 때가 되면, 주어진 상황과 맞물리면서 급격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번 변질은 회복이 쉽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신천지 등의 이단에 발을 들여놓는 이들이 생각밖에 많은데, 그들의 빠져 나옴과 원상회복은 그 대가를 크게 치러야 하기에, 너무도 힘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수시로 나를 말씀과 기도로 점검하면서, 나의 적은 어긋남을 교정하고 수선해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고전(古典)인 존 번연(John_Bunyan)의 <천로역정>은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한 번 읽고 가도 좋은 신앙지침서가 될 것이다. 번연은 이 한 권의 책으로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신앙의 인물이다. 1678년 출판된 이 책은 기독교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신앙서적이 되었고,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함께 기독교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땜질, 놋쇠질이라 불리던 생업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았고, 그로 인해 평생 가난해서 어떠한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런 형편에서 나온 책이었는데도, 그의 책은 우리 기독교에 심대한 믿음의 영향력을 끼쳤다. 

 

1678년에 출간된 그의 책은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가는 한 순례자의 여행을 장엄한 서사시로 그려내고 있다. 그곳에는 고뇌와 회심, 전도와 박해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로 이어지는 번연 자신의 고달픈 생애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번연의 설교와 저술은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의 과정’에 대해서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결(聖潔)’도 그의 한결같은 주제이다. 

 

그의 책은 모두 작가의 꿈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다. 그 중, 제1부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처자를 버리고 등에 무거운 짐(죄)을 지고, 손에는 한 권의 책(성서)을 들고 고향인 ‘멸망의 도시’를 떠난다. 도중에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낙담의 늪’ ‘죽음의 계곡’ ‘허영의 거리’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하늘의 도시’에 당도하는 여정을 그리면서, 하늘 길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전하였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영적 주소를 찾는데 도움된다. 

 

우리도 고민해야 한다. 나의 천로역정은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겁 없이(?) 찬송은 하고 있지만, 과연 지금 이대로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지는 점검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날과 그 시가 도적같이 나에게 임할 터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우리의 영적 환경은 번연의 시대보다 훨씬 더 열악하다. 예수 믿는 일에 예전처럼 노골적인 탄압이나 억압도 없지만, 그러나 주변의 숱한 유혹들에 취약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나의 영적 수준을 감안하면, 지금이 번연 시대보다도 훨씬 더 위험천만하다. 

 

혹 지금의 나는 번연이 짚었던, ‘허영(虛榮)의 도시’에서 푹 빠져들어 있는지는 아니한 지, 아니면 ‘낙담(落膽)의 늪’에 빠져 살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죽음의 계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생사를 고민하며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보다 깊이 성찰해 보아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런 것들은 우리 신앙인들이 변절로 빠지기 쉬운 함정들로서, ‘말세에 내가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18:8)라는 주님의 탄식을 듣게 하는 곳들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이 외에도, 보다 위험천만한 모습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되지도 못하고 된 것처럼 행세하는 모습이다. 즉 구원을 못 받았는데도, 마치 구원 받은 자처럼 자기만족에 취해 사는 사람이다. 바울의 오늘 지적한 것처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말씀을 듣게 된 사람이 아닌가가 가장 두렵다. 그런 바울의 질책에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세 본문 말씀들을 다시 보자. 모두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가짐과 거기에 담긴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대안들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당시에, 예수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주님은 매우 신중하셨다. 가벼운 마음이나 태도를 엄히 경계하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 경우의 사람들에게 해당되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큰 경각심을 주는 말씀들이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기에 걸맞은 품격과 의지와 각오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확인해보자. 

 

1) 한 사람이 예수께 말씀드렸다. ‘주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습니다’(57절). 이 사람은 누구였나? 마침 유사 본문인 마8:19-22절에는 그가 제자단 밖에 있던 인물로서, 당시에 서기관이었던 인물이었다. 당시의 서기관은 율법교사로서 요즈음의 신학교수의 위치에 있는 고위직 사람이다. 그러기에 사회적으로 존경과 신분보장과 안정된 삶을 누리던 사람이었다. 그런 자가 예수를 어디든 따르겠다고 자청하는 발언을 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 사역과 그 제자 공동체에도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 분명하였다.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하셨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58절)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다. 매우 냉정한 반응이었다. 세상에 부족한 것이 없게 산 그가 예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여 어디든 따르겠다고 말했는지는 모르나, 주님은 그의 마음과 기대를 헤아리신 듯-, 그에게 ‘나는 당신의 세상적인 보호막을 해 줄 것이 전혀 없는 자’임을 명백하게 밝히셨다. 그에게서 자칫 제2의 가룟 유다와 같이 될 수 있음을 보시고 미리 방어를 하신 듯하다. 우리도 그렇다. 만약 예수에게서 세상의 풍요나 부요를 기대하고 따른다면, 우리도 역시 예수에게 실망할 것이고 그에게는 적합하지 못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2) 제 2의 사람에게 주님은 직접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그는 마침 집안 부친의 상(喪)을 당한 자였다(59.상). 그러기에 그는 주님에게 말씀드렸다. ‘나로 먼저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59.하). 순종은 순종이되, 조건부 순종이었다. 그러자 주님은 물러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셨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고 요구하셨다. 율법에서도 허용된 최고 차원의 대응을 부여하셨다. 

 

놀라운 사례였다. 아마도 주님에게 그는 매우 기대감을 준 인물로 보인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를 율법 일반이 허용하고 유대교에서도 최고의 선행으로 간주하던 부친상을 치루는 자의 수준이 아니라, 그 예외자, 곧 제사장이나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에게만 특별히 허용되던 ‘부친상을 맡지 않아도 될 인물’로 자신을 간주하며, 주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만 참여할 것을 그에게 명하신 것이다(레21:11,민6:6-7참조). 그렇다. 주의 복음을 위해 특명 받은 이들에게는 높은 자의식(自意識)과 거기에 걸맞은 단호한 행동을 요구받는다는 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3) 제 3의 사람은 스스로 조건부 따름을 주님에게 요구한 경우이다. ‘따르긴 따르지만, 나로 먼저 가족에게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61절). 주님의 반응은 단호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다’(62절).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허락 받은 후, 스승을 따른 전례는 옛날 엘리사가 엘리야의 허락으로 부모 작별 후 엘리야를 좇은 사례가 있기에, 예수의 답변이 과연 어떨지 궁금한 순간이기도 했다(왕상19:20-21참조). 

 

하지만 주님은 62절의 답변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 사역이 그런 인간적 관례에 매일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하셨다. 즉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이들은 인간사에서 최첨단의 구원 사역을 수행하는 하늘의 전사(戰士)들이기에, 그 사역 중인 자는 그 어떤 세상일로도 좌지우지(左之右之)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주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맡은 사역의 가치가 그 중요성과 헌신성이라는 차원에서 최상위에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임해야만 한다. 즉 그 무엇도 자신이 부여 받은 복음의 가치와 대치할만한 것은 없다는 믿음으로 임해야만 한다.

 

구약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에서 만난 예수님의 둘째 인물을 향한 당부의 차원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보인다. 모세의 사후, 평생 그의 수종자(보좌관)로 일해 왔던 여호수아가 그의 후계자(後繼者)가 된다. 하지만 그는 두렵고 부족함에 번민이 깊었다. 그 점을 헤아리신 여호와가 친히 그를 온전한 지도자로 세우시는 일에 앞장서신다. 그를 바르게 세우는 일은 여호수아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일이었고 온 민족과 역사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두 가지 측면으로 여호수아를 지원하셨다. 

 

1) 무조건적(無條件的)인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원의 약속들을 주셨다(3-6절) :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내가 그들 이스라엘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2절).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곳이 너희 영토가 되리라(3-4절)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   을 것이다. 내가 너를 떠나거나 버리지 아니하리라(5절). 강하고 담대 하라(6절.상). 

 

2) 조건(條件)을 제시하시며 그걸 지킬 때, 지원과 축복을 약속하신 내용들도 있었다(7-9절).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 형통하리라(7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그 기록대로 다 지켜 행하면, 네   가 형통하리라(8절)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 가든지 여호와가 함께 하시리라(9절). 

 

서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한 고민이 매우 컸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충만히 받고도, 강한 자기주장과 패거리 문화 등으로 그리스도인다움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절)며 강력하게 경고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그것은 옛날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도강(渡江)이라는 물세례(洗禮)와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성만찬(聖晩餐)을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영광스럽게 받기까지 하고서도(1-4절), 결국은 그들 다수가 자신들이 범한 불신과 원망과 죄악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 끝내 못 들어가지도 못한 체 멸망당했던 일이었다(5절). 그 사례를 제시하며, 그들도 자칫 그 조상들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잔을 받고서도, 자신들의 죄악으로 구원의 자리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1) 조상들이 광야에서 저지른 배신적 행위들은 무엇이었나? 악을 즐겨 행했다(민11:4참조). 우상 숭배에도 빠졌다(7절). 음행에 빠졌다(민25:1,9참조). 주를 시험했다(민21:4-6참조). 원망하였다(민14:35-36,16:1-2,41-50참조). 사실 이런 일들은 말세의 신앙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기에, 우리는 자신을 성찰할 거울로 보아야 한다. 

 

2) 바울은 세례와 성만찬이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을 보장하지 못함도 지적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도 아직은 목표점에 이른 것이 아님도 알리고자 했다. 우리는 다만 넘어질까 조심해야만 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신의 스스로의 가능성이나 능력에 기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신실성(信實性)만에 만 의존하고 살아가면 된다(잠3:5-8참조). 

 

결론은 이렇다

 

내 믿음의 여정을 점검하자. 구원의 확신이 아직 있다면, 그 근거가 어디에 둔 것인지도 냉철하게 살펴보자. 사탄과 세상의 각종 유혹의 칼날은 언제나 나를 겨냥한다. 내가 무너지는 일은 여러모로 불행하다. 나를 다시 살려내자. 두려움과 근신으로 살자. 주의 거룩한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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