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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신학교육주일

관리자 2019-02-07 (목) 18:49 5년전 1126  

본문) 막10:13-16, 신4:32-40, 고전3:18-23 

 

민속 명절인 설날을 보내면서 맞이한 첫 주일이다. 교회력에 따르면 주현절 여섯째 주일이며, 본 교단이 지키는 신학교육주일이기도 하다. 설을 보내면서 공히 한 살 더 먹었으니, 이전보다 더욱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그런 복이 독자들에게도 임하기를 소망한다. 

 

성숙함이란 무엇인가? 어른스러워짐이 성숙함인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나이는 먹은데, 그 마음은 보다 어린아이와 같아지고 있음에서 찾는 것도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유치해지는 모습(childish)이 아니라, 천진스러움(childlike)이 깊이지는 것이라면 어떨까 싶다. 노인들이 가장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손주들을 만날 때이다. 그것은 손주 자체에게서 얻는 감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손주에게서 체득되는 옛적의 자기의 아이의 모습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잃어버렸던 옛 것의 흔적을 손주와의 만남에서 맛보는 느낌이 그렇게 큰 것이다. 그렇다. 나이 드는 성인들이 오히려 아이스러움을 잊지 않고 누리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게 또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의외의 큰 지혜가 아닐까 싶다. 

 

아주 오랜 전, 들었던 아이슈타인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지인이 그를 찾아왔는데, 집에 없기에 ‘어디에 가셨냐’고 물었더니, 그가 있는 곳에 안내해 주더란다. 그곳은 바로 집 모퉁이 담벼락이었는데, 그곳에서 어느 동네 어린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있는(?) 그가 있었다. 한 동안 지켜보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그 아이의 친구가 되어서 그토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더라는 것이었다. 위대한 노학자의 망중한(忙中閑)치고는 너무도 놀라운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학문의 영감과 통찰력을 찾아내는 출구로 어린 아이와의 만남에서 얻고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아이들은 무슨 힘으로 사는 존재일까? 어른들이 만져 주는 힘으로 사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냥 만져 주는 것이 아니다. 격려와 애정과 사랑과 축복이 담겨진 만져 줌이다. 그런 손길이 많은 아이와 전혀 없는 아이가 같을 수는 없다. 만져 줌이 있는 아이는 마치 적절한 비를 받는 대지(大地)와도 같다. 하지만 손길이 메마른 곳은 가뭄을 타고 있는 대지와도 같다. 처음엔 별 차이가 없이 보일지라도, 얼마 후에는 큰 차이를 분명히 보일 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아이들은 자라는 식물 같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가 아닐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으로부터 매우 심한 책망을 당했다. 그것도 ‘별 것 아니라고 판단되는 한 일’ 때문이었다. 평소 쉽게 화를 내시거나 성질 사납게 자기들을 대하시는 분이 아니신 데도, 바로 그 일(?) 하나로 그들은 스승으로부터 진노(震怒)를 당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이었는가?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이 만져 주시도록 바라면서 데리고 왔었는데, 그의 제자들이 그런 자들을 꾸짖으며 쫓아 돌려보냈기 때문이었다(막10:14). 

 

사실 당시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 곁에 끼어드는 일은 당연히 제재를 당하는 것이 통례였다. 조장하는 부모들까지도 빈축을 받을 일로 여겼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입장이 아주 달랐고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그러한 통상적인 태도에도 더욱 거부감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어떤 연유였을까? 그것은 당신에게는 세상에 그 어떠한 대상들보다도 어린 아이들이야말로 당신의 만져 주심을 더 받아야만 될 대상이라고 판단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만져 주심-, 그게 뭐 그렇게 아이들에게 큰 것인가? 그렇다. 그게 두어 가지 점에서 아주 크고 중요했다!

 

첫째는 아이들이기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앞에서도 잠시 거론했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만져 주심을 받으면서 자라는 존재들이다. 아이들은 그 마음이 마치 깨끗한 도화지 같다. 누가 그리고 무엇을 그 마음과 영상에 그리느냐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작품이 가능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 반면에 아주 나쁜 사람들을 만나면 매우 형편없는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란 ‘가능성의 존재(Being of possibility)’이다.

 

예수님에게 아이들이 중요한 까닭은 아이들의 무죄성(無罪性)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아이들은 모든 세대들 중에서 가장 열린 세대이고, 잘 받아드리는 세대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무엇을 들어도, 세상 풍파를 경험한 어른들처럼 자기 마음으로 세탁하여 듣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은 대체로 무경험 세대이고 거짓과 위선을 깊이 경험하지 아니한 세대이기에, 무엇이든 순수한 마음으로 받는다. 그게 그렇게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에게는 누굴 만나고, 무엇을 보고 들으며, 자라게 되는가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예수님에게는 당시의 암울한 거짓과 위선과 폭력과 왜곡의 시대 상황을 구원하려면, 그 가능성은 역시 나이든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현재의 어린 모습만 보면 절대 안 되는 존재이었다. 비록 현실의 아이들은 이등(二等) 시민으로 밀려나 있고, 또 어른들을 통하여 건강한 볼거리조차 구경할 수도 없는 빈곤한 현실이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한 출구는 역시 어린아이들이었다. 그게 예수님의 시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제자들이 스승의 그 깊은 시각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신 앞에 인도받아 온 아이들과 부모들을 향하여 앞장서 꾸짖으면서 밀어내고 있었으니-, 주님의 마음은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아팠다. 그래서 주님의 분노가 폭발(暴發)하였던 것이다(14절). 마치 마귀와 귀신에게 사납게 책망하시듯, 거칠게 당신의 제자들을 야단 치셨다. 차제에, 아이들을 향한 제자들의 의식구조에도 명백한 변화를 요구하시려는 마음도 담아서 그러하셨다. 사실 주님의 이 모습 때문에, 기독교는 ‘자라는 세대를 키우는 희망의 종교’로도 우뚝 설 수가 있었다-! 

 

또 하나는, 만져 주심의 주체가 바로 예수(JESUS)라는 점 때문이다! 아이를 만져도 누가 만지느냐가 중요하다. 요즈음 성폭력 시대에 대한 반발로 ‘미투(Me Too!)'운동이 강하게 일고 있다. 특히 어린 아이를 향한 성폭행 같은 거친 만짐은 정말 가증스럽다. 아이의 평생을 짓이겨 놓는 폭행 중에 폭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손길은 정 반대이다! 그의 손길은 천지와 인간의 본체를 창조하신 분의 거룩한 손길인 ’하이 터치(High Touch)'이기 때문이다. 

 

그 분의 손길은 우주 최고의 작가(作家)의 손길이다. 따라서 그의 손의 터치는 새 작품을 창작하는 손길이며, 생산의 손길이고, 새 세계로의 인도하는 손길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음성도 중요하지만, 그의 손길은 치유와 자신감과 긍지(矜持)를 불러 일으켜주는 최상의 격려(激勵)의 손길이다. 그의 손길을 받는다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자기 운명(運命)을 가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때 그곳에 나온 아이들은 일생일대 최고의 작가의 솜씨를 온몸으로 경험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려던 순간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분의 제자들에 의하여 봉쇄당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순간인가? 

 

그런 예기치 않은 상황에 놀란 자는 예수님 자신이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화들짝 긴급 진화에 나서셨다. 복음서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전한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해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6절). 밀려났던 아이들을 마치 미안해하시는 마음으로 다시 불러들여서, 하나하나 품에 안으시면서 만져 주셨다. 그 장면이 어찌 평범한 터치였겠는가? 당신의 꿈과 미래를 담은 하이 터치였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서 큰 인물들이 나왔을 것이다! 할렐루야!! 

 

마침, 오늘은 총회의 신학교육(神學敎育)주일이기도 하다. 오늘의 말씀에서 몇 가지 핵심적 주제가 보인다. 우리 어른들의 눈에 예수님이 가진,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중요성과 소중함의 안목이 있는가 하는 점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손길에 의하여 재창조 되고 미래를 위한 새 작품으로 등장되도록 돕는 선배 세대들이 되는 일이 너무도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자신도 주님의 만져 주심이 너무도 필요한 존재임을 시인하면서, 오직 주의 손길에 의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삶을 결단하는 일도 역시 중요하다. 

 

그를 위해서는 의식 변화와 각성이 절실하다. 먼저 내 삶의 태도가 더욱 겸손해져야 하겠다. 내 자신을 언제나 저 어린 아이의 마음과 태도와 같이 주님의 만져 주심을 구하고 사모하는 모습으로 주 앞에 내어놓자. 이를 위하여, 세 본문 말씀을 통하여 더욱 내 모습을 일깨우자.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우리는 이 본문을 단순히 아이들에 대한 주님의 인식이해 차원으로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마치 주님으로부터 야단을 맞는 제자들의 심정이 되어야-, 은혜가 되어 나를 살리고 주변의 어린 아이들도 살리는 역량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14절).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간주하느냐’라는 시각(視覺) 조정이 필요하다. 비록 어린 아이에 비하여 인생의 연륜이 붙고 삶의 경험도 상대적으로 많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조물주 앞에서는 어른이 아닌 한없이 부족한 어린 아이에 불과하기에, 그 분의 만져 주심이 간절히 필요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는 일이다. 그 마음이 왜 중요한가? 바로 그런 겸손함과 낮아짐의 심령 위에 그 분의 만져 주심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못하는 자가 되어, 결국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15절).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보다 더욱 요긴한 부분은, 나를 만져 주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시각과 믿음이다. 그 점에서 나머지 말씀들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다. 

 

신명기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본문은 가나안 이주(移住)를 앞둔 출애굽 백성들을 향한 주의 종 모세의 강력한 설교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이 왜 다른 신이 아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겨야만 하는 지를 보다 자세히 밝히면서, 동시에 그의 손이 베풀어 주시는 복들을 그들과 후손들이 어떤 방법으로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방안들도 제시한 내용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하이 터치’(High Touch)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이 보인다. 

1) 창조 이래, 가장 큰 하나님의 하이 터치가 애굽에서 오랫동안 종(終)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는데(32절), 그것은 그들이 불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모세의 호렙산, 시내산 계시) 죽지 않고 생존한 백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는 점에서 나타났다(33,36절). 죽음 대신에 오히려 그 터치를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을 받는 백성임을 알게 하셨고, 세상에서 오직 여호와만이 진짜 살아계신 유일한 신(神)임을 알게 하셨다(35,37,39절). 

 

2) 하나님의 두 번째 하이 터치는 당신의 강한 손과 편 팔과 온갖 두려운 일을 동원하시면서, 애굽의 포악자 바로가 보는 앞에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에게로 이끌어내어 출(出)애굽 하게 하시고, 40년의 광야생활 이후에는 여러 강대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던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로 무사히 이주(移住)하게 하셔서 그 땅의 새 백성으로 살게 하신 일로 나타났다(34, 38절). 

 

3) 따라서 이러한 놀랍고 강력한 하나님의 하이 터치를 받은 이스라엘에게는 소명(召命)이 있다. 여호와의 손길이 자신들에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도록, 어린 아이와 같이(childlike) 처신하는 일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주신 규례와 명령을 엄히 지키며 사는 일이다(40절). 그래서 그들이 후손들과 함께 하늘의 복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그 땅에서 영원토록 오래 살아야 했다.

 

서신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교회 공동체 가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있는 자신들의 처지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시는 말씀들이다. 고린도교인들은 자기 자랑과 주장이 대단했다. 선호도나 기호(嗜好)도 확실한 자들이었다. 희랍인 특유의 지혜와 지식도 탁월함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건강한 신앙으로 여과(濾過)되지 못하자, 교회에는 큰 장애들이 되고야 말았다. 

 

성령의 교회 안에서는 자기 주장, 이익, 능력, 지혜, 자랑을 하려는 순간, 그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자가 되고 신앙에는 걸림돌이 된다. 교회는 근본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영광과 뜻을 구한다. 그러기에 주 앞에서 가장 필요한 마음과 태도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접고,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시인하며 어린 아이와 같이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모습이다. 그럴 때 그는 주님의 하이 터치를 경험하게 되면서, 자신이 주님께 구한 것 그 이상의 세계를 얻게 된다.

 

1)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어리석은 것은 하나님을 자기나 세상에 모든 형편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신처럼 여기는 일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어리석은 자로 취급받게 된다(18-20절).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라는 마음으로, 마치 어린 아이 된 자처럼 겸손함과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보이면, 그는 하나님의 높여(만져) 주심을 받는다. 

 

2)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 자랑도 절대 금물(禁物)이다. 인간들 모두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과 장래 것 모두는, 다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만을 높이면 된다(21-23절)

 

결론은 이렇다

 

주님과 그의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시며 삶의 지표이다. 하늘 아버지에게는 어린 아이처럼, 세상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답게 겸손하고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자신에게는 언제나 배움과 은혜가 필요하여 주님의 거룩한 ‘하이 터치’가 필요한 사람처럼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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