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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5) -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 해외선교주일

관리자 2019-01-30 (수) 18:26 5년전 1223  

본문) 눅12:49-59, 렘23:23-32, 계8:1-5 

 

오늘은 주현절 다섯째 주일이면서도 해외선교(海外宣敎)주일이기도 하다. 국내외 수많은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이 이 세상의 변화에 얼마나 크게 이바지했는가를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는 때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기여도는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다. 그들로 인해 시작된 복음 사역과 교육과 의료 활동의 열매들은 지금 국내 최대의 대학교와 병원들을 건립하였고, 거기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재들과 치유 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다. 당시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우리 땅에 왔을까? 그 마음을 잠시 엿볼 선교사 언더우드의 기도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다. 잠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고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 손으로 서 있는 것 같아오나 ----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 인터넷에서 발췌 >

 

사실 그렇다. 그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새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먼저 그 가슴에 뭔가 불이나 열정 같은 것에 붙잡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마음과 영혼에 거룩한 에너지가 작동되지 않거나 영혼에 신령한 충격이 없었으면, 그런 험한 자리에 들어설 수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비록 시인 안도현이 말했던 ‘연탄재’와 같이 자신을 태워 산화(散華)될지라도, 생명을 바쳐 뛰어들 수 있는 현장이 곧 선교의 장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시인의 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를 올린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더냐?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연탄재로 쓸쓸히 남는 게 두려워 연탄 한 장되지 못하는 우리가 어디더냐 연탄재 함부로 발로차지 마라’

 

하지만, 선교사는 원래 혼자가 아니다. 파송(派送)자가 있고, 후원(後援)자도 함께 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인류 최고의 완벽한 선교사는 누굴까? 선지자 요나가 대표적인 후보이긴 하지만-, 그는 아니다.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장본인이시다! 그는 절대 혼자 단독이 아니었다. 파송하신 하늘 아버지가 보내서 오신 분이었다. 그러면 그의 후원자는 누구였는가? 바로 보혜사 성령이셨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선교의 파송과 후원을 도맡아서, 시행하신 주체들이였다! 삼위일체를 통한 세상 선교는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눈으로 오늘의 말씀들을 보면, 이 세 분, 삼위께서 한 마음으로 잘못된 세상을 갱신하고 구원하시려는 뜻과 행동을 드러내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 분들의 가슴에는 이 세상을 갱신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불을 품고 계셨음이 확인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 불이 진노와 분열과 파괴의 불로도 보였지만, 궁극적인 마음은 사랑의 불이요 새로운 창조와 구원을 견인하기 위한 제련사(製鍊士)의 불이었다. 예수를 보내시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보내신 그 하늘의 불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슴에 처음부터 훨훨 타고 있었음을 본다. 

 

세 본문 모두가 불(火)을 말한다. 그것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슴에 타오르는 불에 대하여 말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가슴에 불이 있고, 그 불을 세상과 인간들 속에 던지는 방화(放火)를 서슴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은 그 증언 자체가 놀랍다. 무슨 사연에서 그렇게까지 과격한(?) 언행까지 서슴지 아니하신 걸까? 그리고 그 불을 받고 안 받고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복음서에서는 성자 예수께서 세상(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했다(49절). 마치 방화범(放火犯)과 같은 언행이다. 구약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성부 여호와께서도 불을 말씀하셨다. 당신의 말씀이 ‘불같지 아니하냐’고 되묻는 내용이었다(29절).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에 있는 인간들에게서 당신의 말씀이 무시당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 분노의 표출이다. 계시록에서도 하늘 제단에 오른 불이 언급되고 있다(5절). 성도들의 기도의 불인 듯한데, 성령께서 그것으로 포악한 세상을 심판하고 판을 바꿀 기세가 담겨 있다. 주님도 불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셨던 모양 세이다. 바로 그 불이 지금 나에게는 있는가가 궁금하다. 

 

사실 우리가 세상과 인간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묵상해본다면, 그 분의 가슴엔 평화로운 마음보다는, 일종의 ‘열불’이 들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 인간들이 하나님의 그 엄청난 사랑과 기대를 받았으면서도, 행동과 그 열매는 철저히 배신자의 추태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그래도 우리가 크게 감사한 대목은 바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이다. 우리의 그런 행동이 오로지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나온 결과로 아시고, 무한한 인내와 용서와 자비로 우리에게 재생(再生)의 기회를 주고 싶어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선언한 이유이다(요일4:7-8).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시려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선교사(宣敎師)로 파송하셨다! 아들의 직업도, 뜯어고치고 세우고 만들어내는 목수(木手)로 보내셨다. 그때 그의 눈에는 앞에서 들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처럼 한없이 막막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보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어둠과 모순의 현장으로 들어 오셨다. 오늘 세 본문의 내용은 그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담고 있다. 

 

복음서를 보자

 

성자 예수의 성육신하신 이유가 명백하다. 불을 던지러 오신 것이다! 화평이 아닌 분쟁의 불을 던지러 오셨다. 그것도 가족들까지도 분쟁하게 하려고 오셨다(49-53절). 표현상으로만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폭력배요 방화범이 분명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그런 혁명적 선언의 내용의 의도가 무엇인가? 

당시 유대교의 잘못된 위선 종교의 행태들에 대한 부정(否定)이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영향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 늪에 빠져서 함께 죽어가고 있는 모든 부조리한 세력들에 대한 통렬한 심판이다. 마치 ‘이 성전을 헐라’(요2:19)고 강력히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폭탄선언을 하셨던 그 맥락의 말씀이다. 당신에게서 시작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인간 시대를 열기 위하여, 기존의 허망한 세력들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낡은 것을 허물지 못하면, 새 것은 건축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거짓 평화가 붕괴되지 못하면, 참 평화는 없다. 깨어지는 아픔 없이는 새로운 건축의 감격도 없잖은가! 

 

2) 선교사 예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상황이 쉽게 열리지 않는 데에서 매우 답답해 하셨다(50절). 당신은 이미 몸 바쳐 죽음을 각오하신 터인데도-, 상황의 변화는 녹녹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기득권은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는 제자들은 물론 당신을 좇는 주변의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가슴에 붙은 불이 그들에게 옮겨 붙지 아니함에 더욱 안타까움이 크셨다(49절). 앞에서 보았던 선교사 언더우드의 그 답답하고 막막한 심정을 예수님에게서도 엿보게 한다. 

 

3) 그러기에 주님의 마음은 안타깝고 답답한 만큼 매우 긴박했다. 외식(外飾)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분별(分別)하지 못하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지 못하는 둔한 심령들을 매섭게 책망하셨다(54-57절). 특히 당신이 이 지상 사역에 매진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깨우치는 일이 좋은 열매로 나타나야만 하는데-, 그래서 강조하신 말씀이 이것이었다. 

 

4)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58-59절). 무슨 말씀인가? 새 시대를 몰고 오신 예수를 분별하여 그와 그의 말씀과 화해하여 그 세계의 사람이 되라. 그렇지 못하면, 철저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임을 통고하셨다. 

 

예레미야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성부인 여호와 하나님의 맹렬한 분노의 불이 보인다. 바로 그 시대 거짓 예언자들을 향해서였다. 그들은 마치 이런저런 사연을 내세우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알고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처럼 내세우면서, 그로 인하여 백성들을 오도(誤導)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에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들은 어찌 그 때만의 일인가? 오늘 우리나라에도 소위 한기총에 회장으로 피선된 자가 ‘문 대통령이 간첩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도 거짓 선지자(지도자)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분노의 불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더욱 맹렬할 것으로 보인다. 주의 분노의 불은 누굴 겨냥할까? 

 

1) 그들은 자기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아주 ‘가까이’ 모셨기에,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무리들이었다(7:1-11,막9:38 참조).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서 아주 멀리 계실 뿐더러, 당신의 뜻대로 처리하실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주 은밀한 언행(言行)도 꿰뚫어 보시는 분임을 모르고 있다(24절 참조). 우리도 혹 자신이 몇 가지 일들(직분, 영적 사역 등)로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한다고 자부하면서, 그 분의 뜻과는 상관없는 오만과 착각에 빠져 지내고 있지는 아니한지 늘 두려워해야한다. 

 

2)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 대신에 자기들의 개인적 영적 체험이나 꿈 이야기나 조그만 기적 담(談)을 내세워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곡해하고 의도를 축소내지 훼손하는 짓을 하는 거짓 예언자들이었다(25-27절 참조). 이런 류(類)의 거짓 영적 지도자들이 기독교안에도 많이 있다. 특히 은사들을 중시하는 모임들, 은사집회 등일수록 이런 변칙적인 사례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정상적인 의식과 건강한 생활을 왜곡, 위축시키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3) 선교사나 증언자들은 언제나 명심해야만 한다. 주님의 말씀은 성실함으로 전해야만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대체(代替)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음을 믿어야 한다. 말씀 그 자체 내용으로 진실과 생명이 있음을 입증하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종종 인문학적 자료나 다양한 예화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 내지 대처하려는 움직임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 특히 세상의 가짜 뉴스나 범람하는 스마트 폰의 유혹들과 허위 정보에도 경계해야 한다. 그 무엇으로도 말씀을 맞서려할 때, 불같은 말씀이 방망이처럼 날아들 것이기 때문이다(28-29절 참조). 

 

4) 결국 누가 여호와로부터 배제를 당할 것인가? 말씀의 후반부에는 ‘내가 치리라’라는 강경한 경고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30-32절 참조). 말씀을 서로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인 양 도둑질하는 자들, 자기 꿈이나 교훈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려고 하는 자들, 거짓 꿈과 환상으로 주의 백성들을 미혹하려는 자들을 경계하자! 그런 자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짓 종들이며, 백성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자들일 뿐이다. 이것 역시 지금의 한국교회 강단의 무너진 질서를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계시록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말씀의 배경은 로마의 포악한 탄압에 맞서서, 고난 받는 이 땅의 기도자들이 이 땅에 어서 속히 종말(終末)의 그 날이 임하도록 기도한 일에 대한(계6:10참조), 하늘의 긴박한 응답의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의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의 탄원(歎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 응답으로 심판의 불도 내리신다. 세상 종말까지도 성도들의 기도에 좌우되어 하늘에서 결정됨을 예고한 대목이다(창18:22-32참조).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마지막 인을 떼면서, 전 세계적으로 고요함이 있은 후, 짧은 서막이 먼저 펼쳐진다(2-6절). 

2) 한 천사가 하늘 제단 곁에 서서 금(金) 향로(香爐)로 많은 향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지상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올린 기도(祈禱)의 향(香)이었다(3절). 

3) 천사의 손에 의하여 성도의 기도의 향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갔는데, 천사 하나가 그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아서, 땅(지상)에 쏟았다(4-5.상). 

4) 그러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났다. 세상에 새로운 세계가 임하는 순간이었다(5.하)

 

결론은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 선교사였다. 그 불이 붙은 곳에는 옛 것은 지나고 새 것이 들어선다. 그 거룩한 불이 우리 가슴에도 옮겨 붙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심장으로 주의 때를 분별하며 참된 주의 일을 하게 된다. 주님과 함께 우리도 선교의 동역자로 삶을 불태울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불이 없으면, 우리는 거짓과 위선에 빠져 든다. 한갓 이용자일 뿐이다. 이제는 말씀 사랑의 불, 기도드리는 불, 복음을 전하는 불이 옮겨 붙은 자로 살아가자. 그래서 하나님의 크고 작은 일들을 능동적으로 감당하는 백성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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