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문) 신32:7-14, 막8:1-9, 행14:8-18
오늘은 창조절 여섯째 주일이다. 창조주의 대 작품인 산천초목은 이미 초록 옷을 벗고 노랑 단풍 옷을 입으면서, 자신이 가진 마지막 아름다움의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다. 마침 이때는 개천절과 한글날 같은 공휴일도 있어서, 전후의 연휴(連休)와 함께 가을의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물결로 전국이 출렁댄다.
이런 때 주시는 세 본문 말씀은 무엇인가? 창조주께서 인간 모두에게 베푸신 은총의 선물들을 언급하면서도, 그중에 특히 여호와께서 당신의 기업(基業)으로 택하신 백성들에 관하여서도 언급하신다. 곧 말씀은 만백성을 향한 창조주의 보편적 은총을 거론하면서도, 그의 백성들을 향한 특별한 은총에 대해서는 더욱 치밀하게 증언한다. 이는 같은 인간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당신이 구별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과는 그 차이가 엄존함을 보여주는 경계(境界-boundaries)선을 두셨음을 말한다(신32:8, 시37:23 참조).
그 바람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형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창조주가 마련하신 경계선 밖에서 자기 방식으로 지내는 인간들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주의 경계선 안에서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인간들이다. 하나님과 그가 주신 말씀 안에 있느냐, 밖에 사느냐가 경계선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경계선은 인간을 이편저편으로 패 가름하려는 선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짓게 하는 생명선이며 구원선(線) 이기에 너무나도 중요하다.
최근 부산의 북항에 예상치 않은 바다 상어 한 마리가 나타나서 화제이다. ‘부캉이’이라는 바다 생물이 길 잃고 항구의 좁은 곳으로 밀려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인간에게도 위험하기도 한 공격형 상어라서 부산시에서는 그 상어를 속히 내보내려 하지만, 쉽게 나가지 않고 오히려 그곳을 즐기는 듯하는 바람에 골치는 앓는 형국이다. 그 바람에 숱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해 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곳은 그가 살 곳이 아니라 죽을 곳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간들 경우는 더욱 심하다. 타락한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품보다는 자신의 본능적 아성(牙城)인 바벨탑 쌓기를 선호한다. 저 미국의 트럼프처럼 자기 이름과 권력의 아성을 쌓으려고 질주한다. 이것은 인공지능인 AI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인간 존재와 현상과 미래를 대신할 또 다른 기계신(機械神)을 의지하고 섬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오늘의 현대인은 이미 인간 사회 전 영역에서 인간을 닮은 휴먼노이드(Human-oid)인 로봇을 지나, 아예 기계를 쫓아가고 그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게 된 인간들의 머시노이드(machin-oid) 시대에 접어들고 말았다. 이는 인간은 이미 자신이 만든 AI의 노예 수준에 진입했음을 말한다. 이는 인간 사회의 주역이 이미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 되었다는 말이다. (연세대 최영준 교수의 컬럼인 <휴머노이드 보다 위험한 머시노이드의 확산>이란 10.5일자 한겨례 컬럼).
이런 현상 때문에, 인공지능 창안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지금은 잠시 개발을 멈추고, 인간의 통제를 받는 기계가 되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아가는 실정에 이르렀지만, 그것도 때가 이미 지났다는 느낌이다.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라는 책을 쓴 마크 그레이엄은 그 점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 곧 ‘기계가 우리를 닮아갈수록 우리는 기계가 되어 간다’. 보다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의 물결에 우리 창조주를 믿고 선포하는 교회까지 휘말려 들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제시하고 해석해 주는 편한 말씀(?)들을 전하고 듣는 실정에 들어선 까닭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원 창조주의 말씀을 인간 머리에서 제조된 제2의 창조물인 인공지능으로 대처하거나 해석되는 것이 일상화되면, 그런 양식을 먹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혼들이 과연 하늘 세계의 시민 체질을 갖출 수 있을까? 순수 영성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머잖아 천국 입성할 때, 그곳에 부합된 존재로 인정받게 될 수 있을까? 매우 크게 우려된다!
그렇다면 어찌할까?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우리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래도 그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지켜내며 씨름해야 할 얍복 나루터가 있지 않을까? 그것은 가능 상의 새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 말씀의 틀 안에서 고수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게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이라도 괜찮다. 인간들과 조상들이 오랫동안 고수해 왔던 믿음의 전통과 전달 방식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오늘의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의 백성을 향해 <네 조상에게 물으라>라는 권고가 가슴에 크게 와닿는다.
- ”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신32:7)
이런 모세의 지적은 가나안에서의 신 물질문명 속에서 얻게 된 풍요와 편리함에 녹아들면서, 하나님의 손길과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후배 세대들을 염려하며 준 경고요 권면이다. 그렇다고 그의 명령에는 새것에 대한 단절과 절연을 담지는 않았다. 과거와 전통과 역사와 단절된 새것에 대한 접근의 위험을 피하라고 말한 것이다. 조상들과 역사의 생명을 존속하게 한 소중한 영성들의 바탕에서, 새로운 물결과의 적용의 지혜를 찾으라는 권면일 뿐이다.
그렇다. 우리도 인공지능의 새 물결을 외면만 할 순 없다. 과제는 거기에만 몰입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그간의 아름답고 생명을 담은 영적 선물들을 외면하고 살아가려는 모습이다. 다시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조상들과 선조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전승해 준 눈물과 땀과 목숨을 건 치열한 기도와 숙고와 묵상과 대화와 토론과 협력과 설득과 공생의 마음과 연대의 정신과 기다림에서 나오는 그 샘물을, 계속해서 마시려는 노력을 견지하자. 그 눈과 시각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이기(利器)들을 복음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보자.
1. 구약 / 신32:7-14 / ”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
본문은 이스라엘 총회에 전달된 모세의 노래의 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모세는 그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자기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족속으로 성별 받았는지를 집중해서 알리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굳게 지켜낼 것을 촉구했다. 모세가 본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 그곳의 새로운 종교 문화와 생활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숱한 혼란과 시험들에 시달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실 농업 중심의 가나안은 이미 바알 신을 뿌리 깊게 숭상해 왔고, 경작에서 얻은 소출에 의한 부와 불평등의 문화 등으로 지금까지의 유목민 생활에 젖어서 들어 온 유대인들을 흔들기에 큰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모세는 이스라엘의 정체성 확립에 필요한 요소들을 제시하기에 힘썼다. 그것은 그런 농경문화의 새것을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이 보유해 온 하나님을 향한 창조신앙 안에서의 발전적인 삶의 종교와 문화의 전통을 구축해 갈 것을 제시하려 했다.
1) 먼저 그들의 여호와를 향했던 신앙이 튼튼하게 전승되고 발전되기를 원했다(7절). 그러려면 그들이 부모를 비롯한 조상들에게 물어야 했다. 조상들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했고, 지속해 왔으며, 그렇게 해서 받았던 축복과 은혜가 무엇인지를 상세히 질문해야만 했다. 그래야 신앙의 전승이 조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부-부친-나로 이어진 삼대(三代) 신앙 형성은 그 핵심적 요인이었다(신6:2 참조).
2)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과 인종과 자손들 각자에게 차이를 알게 하는 경계(境界)를 주신 일을 알아야 했다(8절). 혈통도 다르고, 연대로 차이 나며, 거주의 경계도 한정하시면서 자신의 고유성을 보전하고 계승하게 하신 일이다(행17:26 참조). 사실 서로 다름은 약함과 좁음과 불편을 내재한 것이지만, 그러기에 그 해결책으로 조물주 하나님을 찾도록 유도하셨다(17:27절).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이름과 사랑 안에서 함께 나누고 협력하며 살아가게 하셨다. 이것은 또 다른 바벨탑 문명에 빠지지 않게 하는 묘책이었다.
3) 그중에서도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기업이요 몫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친(嚫)아버지가 되셔서, 몸소 돌보아 주시는 자들이 된 것이다(9절). 그들의 출애굽도, 광야 40년 생활도, 가나안 입주도 모두 하나님의 직접 개입하시는 은혜로 성취된 선물들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세상 일반 인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개입과 주도로 새 세계를 선사 받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먼저 눈동자 같이 지키심을 받았다(10절). 독수리의 새끼 돌봄같이 보호받았다(11절). 다른 신이 개입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받았다(12절). 그의 드높이시는 은혜를 받았고, 밭의 소산을 먹게 하셨으며, 반석에서의 꿀과 기름을 빨게 하시고(13절), 우양(牛羊)의 젖과 기름과 아름다운 밀과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다(14절).
2. 복음서 / 막8:1-9 / ” 그 무렵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니 먹을 것이 없도다 “
본 복음서는 성자 예수께서 당신 앞에 나온 자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시는지를 잘 보여준 내용이다. 그곳엔 대략 4,000여 명이나 모였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즐겨 듣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그들은 귀가할 줄 모른 채 지냈다. 그 사이 그들에게는 먹을거리들이 바닥났다. 문제는 그냥 서둘러 귀가 시킨다고 해도, 원근 각지에서 몰려온 그들은 가는 길에 이미 기진할 정도였기에, 주님은 그 점을 우려하며 해결책을 찾으셨다.
이에 해결하려는 방향이 둘로 나왔다. 먼저 제자들은 현실의 한계부터 제기했다(4절). ‘이 광야 어디에서 떡을 얻어 이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였다. 그 말에는 그러기에 지금은 해결책이 없음과 각자도생의 길을 강조하려 했다. 하지만 주님은 해결할 가능성(可能性)에다 집중하셨다. 그래서 찾으셨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5절). 그래서 해결의 실마리로 찾아낸 자료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였다(5,7절).
이를 받으신 주께서는 있는 그것들 가지고 축사(축복)하신 후에, 제자들로 하여금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기적의 급식>이 제공되는 순간이었다. 결과는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나 거둔 일이었다(6-9절 참조). 이를 통하여 주께서는 당신 앞에 나온 자들, 곧 당신을 만나 새롭게 창조함을 받게 된 이들을 굶주리지 않도록 육체적으로 영적으로나 영양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심을 확실히 보여주셨다.
아울러 굶주림을 비롯해 각종 문제의 해결자는, 주님이 취하신 입장처럼, 먼저 고통하는 상대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우선 찾아서 해결해 보려는 자들을 통하여 그 길이 열린다는 점도 알려 주셨다. 즉 인간의 머리로 인한 판단보다는 고통하는 이웃을 향한 긍휼(불쌍히 여김)의 마음을 품고, 자비의 하나님이 도우실 줄 믿고 기도하며 접근하면, 기적을 맛보게 됨을 알려 주셨다.
3. 서신서 / 행14:8-18 / ”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는데 ---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
루스드라에서의 사도 바울의 앉은뱅이 치유 사건 역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향한 성령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신 사건이다. 그 장애인에게는 언젠가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믿음의 행보가 있었다. 그게 결국 그 자신을 살려 내게 한 생명선이었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선교하고 있는 바울은 그 장애인의 영혼에 담긴 살아 있는 믿음의 영성(靈性)을 보면서, 그 영혼을 향한 하나님이 사랑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래서 ‘네 발로 일어 서라’며 명령했다.
이런 특별한 은혜는 창조주를 향한 믿음이 마치 건물의 정점에 매달린 피뢰침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인에게는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결실기도 주셔서 음식과 기쁨으로 자기 생명들을 보전하게 하시는 보편적 은혜는 여전히 내려주시기 때문이다(16-17절). 다만, 그 론 보편적 은혜만으로는 이 세상살이에는 무난하겠지만, 그 너머로 이어지는 영원한 세상에서 누리게 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구원의 축복에까지는 이를 수는 없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o 우리는 창조주로부터 지음받고 보냄을 받은 소중한 존재임을 언제나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나의 뜻과 의지를 앞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신 뜻과 인도하심을 겸손이 받드는 삶이어야만 한다. 우리 주변에는 거짓 우상과 신들의 도전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선상에 있음을 명심하면서, 우리의 보호를 위하여 신앙 조상들과 선배들과의 연대와 협력을 강화시키며 살아가야 한다. 바벨탑 문명의 한계를 알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사와 능력의 극대화와 나눔을 지향하여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영혼과 삶을 파괴하고 해체하려는 어둠의 권세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하고 저항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