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3:1-8, 요3:31-36, 히4:1-13
오늘은 창조절 일곱째 주일이다. 아름다운 가을 날씨의 매력에도 한껏 즐기고 빠져들 수 있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산천초목도 오랜 세월 입고 있는 녹색 바지를 벗고, 어느덧 노랑 단풍의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자신의 비밀스러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자연의 대변화를 대하는 우리는 어떤가? 우리 역시 내면의 변화를 피할 수 없다.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의 삶을 성찰하면서, 반성도 하고 감사도 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할 때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최근엔 ‘균형(均衡)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대부분의 우리는 거의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살아왔고 치우쳐서 살아온 연고로, 훨씬 행복했어야만 할 우리의 삶이 즐거움이 아닌 피곤함에 빠져서 지내왔음을 새삼스럽게 발견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습은 누구의 탓일까, 남의 탓만 할 일이 아니다. 결국은 시야가 좁아져 균형감을 상실한 체, 양쪽이 아닌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살아온 자기 탓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몸의 구도도 생각해 보라. 사지백체 거의 모든 몸의 구조들을 창조주께서는 하나가 아닌 둘로 주셨다. 우(右)측과 좌(左)측의 지체가 서로의 시각과 판단력을 결집하여, 하나의 종합적이고 균형감 있는 통전적인 결정을 내리고 살라고 그렇게 양쪽을 함께 주신 것이다. 눈도 둘, 귀도 둘, 손과 발도 둘, 하나같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코도 둘이며, 두뇌도 좌우측 둘이다. 우리 내부의 내장 기능도 여전히 하나인 듯한 둘이다.
그러면서 생김새도 서로 비슷한 듯하지만, 살펴보면 각자이며 다르다. 특성이나 역할도 각자이다. 마치 다섯 손가락과 발가락처럼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 몸은 상대편이 자기와 다른 편에 있다고 해서, 서로 맞은 편의 지체를 향하여 긴장하거나 다투거나 싸우던가? 다르다고 배제하거나 외면하면서 아예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하던가?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면서, 자기만의 입장을 관철하고자 나만 외골수로 밀고 나아가던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다른 편을 소중히 알고, 함께 하려고 하며, 함께 종합적인 결론을 찾아서 전체를 하나 되게 하려고 서로 애쓴다. 이런 흐름에는 교만도, 자랑도, 다툼도, 외퉁수나 마이웨이도 없다. 포용과 ‘함께’와 ‘더불어’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다른 편 지체에 문제가 생기거나 고통이 생기면, 남은 지체는 함께 아파하고 고통하며, 함께 대책을 찾아 그 시련을 이겨내고자 총력을 다한다. 그래야 서로 산다고 본 까닭이다. 이 얼마나 멋진 동반관계인가!
그러기에 창조주 하나님은 이런 몸의 원리를 근간으로 하여,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삶도 그렇게 조화되기를 원하셨다. 서로 다른 좌우(左右)의 배치를 통하여 배제나 정죄의 구도가 아닌 이해와 협력과 조화를 이루면서, 보다 나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세상을 만들게 하려 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부르셔서 구원받게 될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도 엄중히 이렇게 명하셨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자신) 사랑하듯 하라’(마22:37-40 참조).
오늘은 마침 총회가 제정한 이단(異端) 경계 주일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 교회와 성도 주변에는 거짓되고 사악한 이단들이 많고, 또 그들로 인한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함께 주의하자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들이 정치계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잘못된 대통령을 선출하게 하는 등, 성도들의 신앙 전선을 크게 왜곡시키고 국민들의 교회를 향한 불신도 증폭시키는 바람에, 이런 경계는 매우 적절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거짓된 이단 세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앞에서 거론된 편중과 치우침이 대체로 그들의 주소이다. 그래서 진리의 객관성을 상실하고, 극단화된 사적 주장을 교리화하여 그 추종자들의 삶을 노예로 만들어 놓는 특성을 가진다. 이런 흐름은 공개적 이단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존 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사유화를 강화한 목사들 가운데에서도 이단성 시비가 발생할 정도로 타락한 경향도 크다. 그러기에 이 기회에 우리는 이단일 수 있는 요소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여 대처함이 좋겠다.
오늘의 세 본문에서 보면,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의 경계선을 구분해 볼 수 있는 기준점을 만나게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목회자의 소명(召命) 문제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일은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부름과 명령을 좇는 하명(下命)인 소명을 받은 이들에 의하여 수행된다. 내 판단이나 자원(自願)이나 능력을 바탕으로 한 참여만으로는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특히 악령에 붙잡혀서 뛰어든 경우는 더더욱 안된다. 신학교는 바로 그런 영역을 점검하고, 해당자를 훈련 시켜서 현장으로 파송하는 기관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복음서는 나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제자 관계가 어떤지를 묻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파송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오신 말씀들이 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파송자에게 주시기도 하신다. 동시에 창조주 아버지로부터 온 세상 만물과 만민의 운명을 그 손에 넘겨받기도 하셨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믿음과 순종 여하에 따라서, 인간의 운명과 미래가 결정되게 하셨다. 이단엔 그 중심에 예수가 없고, 대신 교주나 특정 사이비 세력가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아주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서신서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질서나 말씀에 대하여, 내가 두려움 속에서 믿고 순종하며 지키고 사는지 여부를 묻는다. 이단은 여기에서도 자기 교리, 자기 해석을 제시하며 오도한다. 안식에 대한 이해는 가장 대표적인 점검 사항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말씀 준행 여부를 성령으로 지켜보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1. 구약 / 출3:1-8 / “ 여호와께서 --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명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매우 역사적인 장면이다. 그때의 그는 어느덧 80세요,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던 늙은 목동(牧童)이었다. 그 장소는 하나님의 산으로 불리던 호렙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떨기나무에 불꽃이 붙었으나 타지는 아니한 기이(奇異)한 현상에 관심하며 접근하다가, 그곳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다(1-3절).
1) 모세가 떨기나무 속에 현현(顯現)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 순간이었다(4-5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접근해 오는 그를 먼저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여호와는 이제는 그에게 당신을 알려야 될 때가 되었음을 그렇게 드러내신 것이다. 사실 모세란 이름에는 ‘건져냄’이란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2) 그를 부르신 여호와는 그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곳인지부터 알리셨다. ‘거룩한 땅’이어서, 그가 신은 신을 벗어야 할 곳이었다(5절). 성속(聖俗)의 구별을 잊고 살아온 모세에게는 큰 충격과 함께, 속된 몸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 시간이었다. 이 지점이 바로 소명 받은 자의 첫 경험의 장이었다. 거룩하신 이에게 나아갈 자들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임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3) 하나님의 당신 소개가 시작되었다(6절). 당신은 그의 조상의 하나님으로서, 그들 조상과 역사를 이끌어오신 역사(歷史)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셨다. 그러기에 모세에게는 이 여호와가 낯선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이셨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자기 민족의 주요 목자이신 하나님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간 인간인 자신이 그 하나님을 뵙는다는 사실에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4)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취지와 목적을 통보하셨다. 그것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노예살이로 고통을 당하며 살아온 이스라엘을 이제 출(出)애굽 시켜서, 당신이 준비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셨다. 그것은 당신이 그들의 오랜 세월의 고통스런 내력들을 지켜보신 까닭이었다. 곧 여호와는 그동안 친히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도 알았기에(7절), 이제는 당신이 친히 내려가 그들을 건져내고, 그 땅을 벗어나 당신이 준비하신 새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셨다(8절). 바로 모세를 앞세워서 하시겠다는 것이다.
☞ 여기가 모세가 소명 받은 현장이다. 80년 개인적 삶의 멍에를 벗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새 여정에 오르게 되었다. 자신에게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멍에지만, 오직 그를 부르신 윗분의 능력에 힘입어, 모세는 이제 소명자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2. 복음서 / 요3:31-36 /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본문은 ‘그 집단이 이단이냐 아니냐’를 확실히 구분 짓게 하는 구체적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곧 본문에는 그 집단이 오로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곳이냐, 아니면 그 그리스도 대신에 특정 교주나 개인적 지도자를 추앙하며 그의 말과 지시를 더 추종하고 있는 곳인지를 묻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 부활 이후에 교회 시대가 열린 때에도, 주변에는 영지주의자들을 비롯한 부활의 예수를 완전한 구원의 주로 고백하는 일에 의혹을 가진 자들도 적잖았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그런 이단자들의 의혹을 방어하면서, 왜 예수가 온 세상 만물의 진정한 구주이시며, 그를 믿는 일이 왜 구원에 절대적 인지를 일깨워 주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예수께서 참 구세주이심을 여러 각도에서 증언해 주었다.
1) 예수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이셨다. 곧 ‘하늘로부터 오신 이’였다. 그러기에 그는 만물(萬物) 위에 계셔서, 만물을 그 손안에 두고 다스리신 분이셨다(31, 35절). 게다가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증언인 말씀을 받고 오신 분이기에, 그는 세상에다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신 분이었다. 그는 또 하나님의 성령도 한량없이 받아오신 분이셨다(33-34절). 실로 아버지의 전적인 사랑을 듬뿍 받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35절, 3:16절 참조).
2) 그러기에 인간이 그의 말씀을 받는 방법은 달라야만 했다. 인간끼리 나누는 방식일 수 없다. 그의 증언은 제한된 인식과 지식을 가진 인간 차원의 수준으로는 이해하고 깨닫기에 미급(未及)할 수밖에 없기에, 그와의 소통하는 데에도 새 방법이 필요하다. 요한이 전한 새 방법은 바로 그를 향한 믿음과 순종이다. 곧 오신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고(요14:6), 믿음과 순종으로 그 앞에서 모세처럼 신을 벗고 엎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와 선물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영원한 생명(生命)이다(36절). 그러기에 이 예수가 분명히 내 삶에 계셔야만, 나는 진정한 진리의 사람이요, 구원받은 존재가 된다.
3. 서신서 / 히4:1-13 / “ 그런즉 안식할 때가 — 남아 있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창조주께서 최후의 작품으로 완성하셨던 안식(安息-rest)을 상기시키면서, 우리 모두가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역설한다. 그 속에는 <하나님 나라>(복음서)와 <생명>(요한)의 내용을 포괄한 영역이기 때문이고, 모든 성도의 대망을 총괄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1) 먼저 복음을 받고서도 이 안식에 못 들어갈 자들이 있음을 경고한다(1-6절).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들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음으로 받지 아니한 자들이다. 그래서 증언이나 설교가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하는 체 교회 생활하는 자들이다. 완고한 마음으로 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은 결국 하늘 안식에 영접받지 못할 자들이다(6-8절)
2) 그러면서 본문은 남은 자들 모두에게 촉구한다. 아직은 안식할 때가 남아 있으니, 그 안식에 들어가길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말씀에 거스르지 말고 순종하며 살라고 권한다(9-11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면서, 모든 것을 드러내실 것이기에, 더욱 두려움으로 받은 말씀을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서 살라는 것이다(11-12절).
o 오늘은 이단 경계주일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가장 좋지 못한 자세가 무엇일까?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의심하고 제대로 받지 못하며,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하며 사는 태도일 것이다. 그런 행동이 바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세를 취한다는 점은 질이 아주 좋지 못하다. 그런 사람일수록 거의 세상과 이단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이다. 절대 조심하자.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자. 하나님 앞에서 나는 소명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고 있는 지도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그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 확인할 수 있다. 신앙 자세 확립에도 철저하자. 믿음과 순종으로 그 말씀 앞에 응답하는 일에 보다 온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