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55:1-5, 눅10:38-11:4, 요일1:1-7
오늘은 창조절 다섯째 주일이다. 추석 명절도 지났고, 본격적인 단풍의 계절이 도래하고 있다. 창조 세계의 변화무쌍함을 통한 기묘함과 아름다움은 언제나 그 피조물인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 계절은 또한 한 해의 농사와 씨 뿌림의 열매를 수확하는 계절이기도 해서, 여러모로 우리 삶에 풍요로움도 맛보게 한다. 하지만 이때인 가을걷이엔 즐거움만 있지 않다. 그 열매와 결과에 따른 반성과 회개, 그리고 새해맞이에 대한 성찰과 준비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10월 첫 주일이면서 셰계 교회와 함께하는 성만찬(聖晩餐) 주일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살과 피란 거룩한 음식으로 받게 되는 전례(典禮)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면서, 그 성찬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영적 의미를 다시금 되새김하는 주일을 맞이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 성례전을 통하여 온 세계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하나된 지체들이란 결속도 도모하려 한다. 비록 우리 안의 예식상 작은 차이가 있음에도 말이다.
이와 함께 우리 교단은 이 주일을 군(軍)선교 주일로도 지킨다. 분단된 조국의 신성한 국방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군 장병의 정신과 사기, 그리고 장병들의 하나 된 결속과 신앙생활을 위해 헌신하는 군 선교사들인 군목(軍牧)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 군이 더욱 건강하게 제모습을 갖추게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모두 이런 주제에 부합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를 위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은 삼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로 거저 주신 사랑과 축복을 제대로 받아 누리고 살기 위하여, ‘와서 당신의 말씀을 들으라’는 지침을 구체적으로 요구하시고 있다(사55:2, 눅10:39-42, 요일1:3-5 참조). 이는 들음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疏通) 관계를 아주 분명하게 해 주는 절대적 매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창조주께서는 우리 인간에서 사지백체(四肢百體)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주시면서도, 우리에게 외부로부터 온갖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두 귀를 붙여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속 귀’인 가슴(양심)까지도 얹혀 주셨다. 이 두 종류의 귀가 작동하기에, 우리 인간은 듣고 말하며 주고받으며 사는 사회적 생명체가 된 것이다. 물론 이 귀들, 겉 귀와 속 귀는 분명히 기능상의 차이가 엄연하다.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신체적 양 귀는 대체로 늙어 어두워질 때까지 평생 작용한다. 그래서 매사에 듣고 판단하면서 살게 한다. 반면에 속 귀인 가슴(양심)은 조물주 하나님과 접촉이 이루어져야 작동이 된다. 아무나 들을 수도 없다. 창조주의 은혜를 입어야 비로소 작동된다(사55:3). 그 작동하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다.
아주 빠른 사람은 세례 요한처럼, 모태(母胎)에서부터 조물주의 음성을 듣고 반응한다(눅1:39-44). 어린아이 시절부터 들은 이는 사무엘이었다(삼상3장). 사도 바울은 장성해서였다(행9장).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은 75세 때부터 듣기 시작했다(창12:5). 출애굽의 주인공인 모세는 120세에 주의 음성을 듣기 시작했다(출3장). 이렇듯,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당신이 필요로 하시는 때에 부르셔서, 그의 음성을 듣고 일하게 하시며 그의 뜻을 펼치신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직간접적으로 이런 듣기 체험을 다양하게 한 이들이다. 그런 체험적 신앙으로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주님을 시인하며, 그의 말씀을 전파하며 살아가는 삶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장 일관되게 형성된 자세가 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하며 관심하고 사는 모습’이다. 이때 이들의 말씀 듣기는 단순히 육체적 귀로만의 섭취가 아니다. 이미 열려 있는 영적 귀인 영혼과 양심인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바로 들은 그 말씀으로 울고 웃는다. 슬퍼하고 기뻐한다. 죽고 산다.
그러기에 이런 삶의 문화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말씀 듣는 일이 절대 중요하다. 주일 성수를 통하여, 각종 집회와 모임을 통하여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제일 의로 알고 순종하며 사는 일을 생명의 양식으로 취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 양식을 제공할 요리사가 우리 강단 사역을 맡은 목회자이다. 이것이 우리 강단 사역이 반드시 건강하고 영양가가 높아야만 할 이유이다. 혹, 설교자 자신이 영혼의 소리를 듣지 못한 주역이라면, 그건 정말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곳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촌극(寸劇)이 펼쳐지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오늘 세 본문 중,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갈 무리를 초청하신다. 그러면서 그들의 영혼을 살리시는 확실한 은혜를 주시고자, 다윗의 후예 중 한 사람을 보내실 것이니, 그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친다. 복음서는 그렇게 해서 오신 주의 말씀을 듣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밝혀주시면서, 동시에 그 과정에서 기도가 아주 필수 요인임도 알려주신다. 요한 서신서는 그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밝혀주면서, 동시에 그와의 사귐이 지속되려면 우리의 삶의 대응에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도 안내해 준다.
1. 예언서 / 사55:1-5 /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
여호와의 위탁(委託)을 받은 예언자 이사야는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에게 머잖아 닥쳐올 아주 알찬 삶을 선포한다.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오랜 세월 그리움과 슬픔에 목말라했던 그들 백성을 위하여 마련하신 풍성한 잔칫상에로의 초대인데, 이는 마치 예전에 그들 조상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소산을 먹이겠다고 하신 내용을 연상케 한다(출3:7-8 참조). 실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언약으로 초대받는 그 백성을 향한 말씀이다.
다만 그곳의 참여자들은 그 잔칫상에서 세속적인 거래인 은을 이용한 물질 거래 형식이 아닌, 돈 없어도 먹고 값없어도 포도주와 젖을 풍성하게 먹게 되는 하늘의 신령한 방식의 신비(神祕)로운 식탁에 참여한다. 그때의 식탁에 오르는 양식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며, 그곳에 모인 자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게 되고, 오랜 목마름도 해소한다. 실로 ‘좋은 것을 먹는 자리’이고, 존재가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 시간이다(1-2절). 이는 사실 머잖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맛보게 될 성만찬의 전조(前兆)가 아니겠는가!
1) 여기에 참여할 자의 필수 요건은 단 하나다! 바로 열린 귀를 가지고 참여하여 초청자인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를 열고 듣는 일이다(3절). 이때의 귀는 가슴의 귀다. 그러면 된다. 그 후의 모든 일은 모두 초청자가 해결해 주신다. 그때 받게 될 가장 결정적인 선물은 초청자와 맺게 되는 영원한 약속(언약)으로써 듣는 자의 영혼(soul)이 살아나는 구원의 은혜이다.
2) 그러면서 여호와는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로,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겠다고 하신다. 그것도 대왕 다윗의 후예 중 한 사람이 여호와께서 세우신 증인이 되어,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활동하리라고 공언하셨다(3-4절). 그렇다면, 이런 다윗의 후사로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영혼을 살리는 권세를 대행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가 과연 누구일까?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셨음이 분명하다(마1:1-17 참조).
3) 그가 말씀을 전할 때에는 아주 놀라운 일이 발생할 것도 예언하셨다.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르시는데, 그 음성을 들은 그 알지 못하던 나라들이 그에게로 달려올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그를 세우고 보내신 분의 영광이 그와 함께한 까닭이다(5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 땅과 온 땅에서 그렇게 펼쳐질 것을 사전에 예고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다음의 복음서의 내용에서 그 예언의 성취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2. 복음서 / 눅10:38-11:4 / ”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사실 주의 말씀은 아무나 쉽게 듣지 못한다. 겉 귀가 아니라 속 귀가 열린 자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그의 가슴이 열려야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를 향하여 두 자매가 보여준 대조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언니 마르다는 대담하고 용기가 있으며 매우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주의 인정을 받을 만큼의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도 매우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수 앞에서 보여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모든 일이 주빈(主賓)인 예수의 의도와 취향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기의 취향과 솜씨를 드러내며 그것으로 상대를 기쁘게 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결국 문제는 예수 없는 자기 것만 풍성한 것이 과연 예수 공동체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 점에서 동생인 마리아는 언니와는 아주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접하는 일에 분주한 언니와는 달리, 그는 처음부터 예수의 발치에 자리 잡았다. 주의 말씀 듣기에 전념을 한 것이다(39절). 예수께서는 그런 모습을 기뻐하셨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언니 마르다의 마음을 아주 상하게 하였다. 참지 못할 정도가 되자, 언니는 끝내 그런 동생이 철부지의 모습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상대로 하여, 무례한 요구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동생에 대한 원망이 이제는 주빈인 예수에게로 까지 미친 것이다. 그 순간의 마르다에게는 예수가 더 철부지같이 보였다. 자신에게 한마디 들어도 마땅한 존재였다! 그 바람에 그 자리는 본의 아니게 매우 황망한 자리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이쪽저쪽을 모두 헤아리신 예수께서 한 마디 하셨다. 바로 창조주의 질서 잡기 이셨다(창1:2 참조). 그 내용들은 두 가지였다.
1) 예수님은 마르다의 봉사로 인한 염려와 수고는 긍정적으로 보셨다(41절). 공동체 모임에는 그런 봉사(코이노니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아의 <말씀 듣기 우선>이란 선택은 그 어느 것보다 우선해야 할 <좋은 것>으로서, 공동체 안에서는 그 무엇에게서부터도 빼앗겨서는 안 되는 절대 중요한 몫임을 확실하게 하셨다(42절). 이는 곧 말씀 듣기가 선행되지 못한 곳에서는 예수 공동체인 교회가 온존(溫存)할 수 없음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는 나침판이 없는 배의 항해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말씀 듣기에 교회가 우선해야 할 이유다.
2) 말씀 듣기에서 하늘 아버지를 향한 기도(祈禱)의 역할도 절대적임을 알려 주셨다(11:1 참조). 흔히 우리는 기도를 말하는 차원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기도는 듣는 일이기도 하다. 내 영혼이 하늘 아버지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뜻을 헤아리고, 그의 음성에 내 가슴을 열어서 듣고자 하는 영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도가 살지 못하면, 말씀 듣기는 활성화되지 못한다. 기도해야 하늘 아버지와의 사귐이 이루어지고, 그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도 맛보게 되며, 내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내 영혼과 가슴이 깨어나는 활력을 강하게 체험하게 된다.
3) 예수님의 습관을 따라 하신 기도 생활(22:39-41)은 제자들의 기도 훈련에도 절대적 길잡이였다. 그러기에 제자들도 주님을 통하여 기도를 배우려 하였고, 주의 기도가 그래서 나왔다.
3. 서신서 / 요일1:1-7 / ”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본문에서 저자인 요한은 자신이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인 로고스(말씀)였던 분으로써 이 세상에 오신 이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심을 밝히면서, 자신은 그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사귐을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1-3절). 여기에서 자신은 영원한 생명으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인간 세상에 오신 그에게서, 직접 들었고 보았으며 손으로 만진 바를 통하여 사귐을 갖고 또 유지하고 있음을 밝힌다.
여기에서 그는 예수에게서 들은 바를 교회에 꼭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었다. 곧 하나님은 완전한 빛이시다는 것이다. 어둠이 없으신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서 어둠에 행하거나 거짓을 말하며 진리를 거스르는 행태를 보임은 그가 여전히 어둠의 자식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일이란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을 들으며 사귐을 가진 자는, 반드시 빛 가운데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그 아들 되신 예수의 피가 그를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5-7절). 이런 영적 준비가 바로 성만찬의 필수 요소이며, 성만찬을 받을 자의 조건이다.
o 오늘은 세계성만찬 주일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그 거룩한 식탁의 초대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인했고, 그 참석 받을 우리도 그분의 계획된 존재들임도 알았다. 그 식탁의 주 양식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까지 지으신 창조주의 말씀이다. 그러기에 구별된 사람들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일을 집중해야 한다. 듣되 가슴으로, 양심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기도도 살아 있어야 한다. 선한 행실로 빛의 자녀 된 모습이 나타나야 하며, 영원한 언약 속에서 구원받은 생명체로 생존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