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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야야 할까 / 제주4.3기념주일, 고난주간,

관리자 2026-03-25 (수) 07:51 17시간전 14  

본문) 요 19:17-22, 삼하7:1-17, 계19:11-16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자,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신 종려주일이다. 따라서 그를 믿는 우리는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맞이하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몸과 마음이 그 예수님께로 집중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다. 깊은 기도, 묵상과 회개의 시간을 갖고 부활절을 맞도록 대비해야겠다. 


때마침 우리 총회는 이 주일을 제주 4.3기념주일로 지킨다. 이는 해방 후 남북 총선에 대한 이견(異見)으로 이념 논쟁에 빠져든 제주에서,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보수우익 계열의 인사들에 의하여 수만 명의 지역민이 무차별 살상되었던 참혹한 일을 추억(追憶)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당시 북에서 신앙 탄압을 피하여 남하한 서북기독교 청년단원들이 제주의 그 이념 현장에 깊이 개입하여 그곳 양민 대량 학살을 주도했던 치욕적인 일을 회개(悔改)하고자 한다. 


문제는 그때의 이념 투쟁이,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회개와 반성의 시간이 없이 흘려보낸 까닭에, 지금의 한국교회는 아예 <반공 제일주의>가 신앙화되어 기독교의 정체성인 <원수 사랑> 교리보다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이념(理念) 우선주의의 포로가 되어 복음 우선주의를 짓밟고 있는 실정이 되었으니, 이 어찌 한국교회가 세상에다 십자가의 은혜와 구원의 복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율법이 된 이념을 극복하는 일이 큰 과제가 되었다. 


이런 중에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을 상대로 큰 전쟁을 벌리고 있다. 들여다보면, 그러면 절대 싸워서는 안 될 대상들끼리의 싸움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에게 누군가? 조상 아브라함의 출생지이고, 자기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면케 해 준 바사 제국의 고레스 대왕의 땅이다. 에스더 왕후의 부림절을 안겨 준 곳이며, 느헤미야 에스라 활동을 밑받침해 준 고마운 곳이다. 그런 은혜를 입은 곳을 어찌 한참 후손 된 이스라엘과 미국이 그토록 무모한 짓들을 하는가? 


더더욱 크리스쳔 국가를 자임하는 미국이 그토록 잔인한 폭력 국가로 이란을 몰아세우면 안 된다. 평화의 주되신 예수께서 이런 모습을 과연 어떻게 보실까 생각해야 한다. 칼과 검을 쥐었다고, 세상의 주인인 듯 행세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온 세상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슬픔과 분노를 외면하면 안 된다. 그의 임박한 심판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절박한 시점에 맞이하는 종려주일이요 고난주간이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지혜롭게 처신하고 있다. 저들은 우리를 전쟁 속에 끌어들이려고 애쓰고 있지만, 지혜롭게 대처하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자리는 모퉁잇 머리돌 자리임을 명심하자. 어느 한 편에 서는 위치가 아니라, 모두를 모으고 조화하며 화해와 협력으로 서로 하나 되게 하는 그 모퉁잇돌 예수의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이다. 전체를 아우를 자리가 한국 것이다.


때마침 우리나라 사극 영화인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가 우리나라는 물론, 시청하는 온 세계인들을 울리고 있다. 단종과 그와 함께 산 남자 엄흥도가 죽은 지, 570년이 지난 지금에 그들에 관한 영화 한 편으로 다시 살아나, 진짜 누가 산 자인지, 누가 참된 인간인지, 누가 실패자인지를 온 세계에 가슴과 눈물로 일깨워 주고 있다. 그들의 무덤과 마지막 인생의 흔적을 보고자 하여, 숱한 세계인이 지금 우리의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순례를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의 독기를 참회와 후회의 눈물로 빼내게 하는 절묘한 묘안을 우리가 제공하고 있다.


대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독기와 어리석음을 어떻게 씻어낼 수 있을까? 세계교회는 오늘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에로의 왕(王)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로 맞이한다. 이때 그의 백성 된 우리는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로 보여주신 제반 행적들을 묵상하며 그의 행렬에 참여한다. 주님이 그때 보여주신 굵직한 행보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메시지와 교훈으로 아로새겨져 있지 아니한가!


여기에서 우리가 곰곰이 살펴 볼 대목이 있다. 예수께서는 왜 그런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일련의 과정들을 피하지 아니하시고, 그토록 큰 고통과 죽음까지도 겪어야 할 힘겨운 과정을 몸으로 부딪치고 감당해 가셨느냐는 점이다. 왜 세상 영웅호걸처럼, 불의와 악의 세력을 향해 가차 없이 진압하는 방법은 끝내 외면하셨느냐는 점이다. 왜 그렇게 세상과 다른 길을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셨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분명한 선택 원인을 알아야 한다. 


승리도 승리 나름이다. 상대를 이기고도 지는 일이 많다. 지고도 이기는 길도 많다. 물리적인 폭력과 압력의 힘은 크게 보인다. 쉽게 갈 수 있고 빨리 끝낼 수 있게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승리는 확실한 승리를 담보하지 못한다. 반면에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힘은 약하게 보인다. 무한한 인내가 있어야 하고 피와 땀과 눈물이란 밑거름이 투입되어야만 한다. 열매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 바로 그 모습이다. 십자가가 바로 그곳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택하신 목표도 분명하다. 세상에 대한 완전한 승리였다(요16:33).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것이 바로 갈보리 십자가였다. 그것도 순간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창조하시려고 십자가를 택하신 것이다. 착각하지 말자. 예수에게서의 십자가는 피하지 못해 지신 멍에가 아니라, 역사의 주도자로서 스스로 걸머진 자주적 결단이었다(17절)! 십자가로 예수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보지 아니한 승리의 길을 열어주려고 하셨다-!


1. 복음서 / 요19:17-22 / ”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왕의 새 차원의 품격(品格)을 치밀하게 전한다(막15:21 참조). 그 대표적인 사례는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신 일(13장), 자기가 지실 십자가를 남에게가 아니라 친히 걸머지고 가신 모습이다(17절). 왕으로서의 주의 품격은 그의 자주성에서 더욱 빛났다. 진정한 버림과 취함의 권세가 자기에게 있음과, 때를 아시고 앞날을 내다보시는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행사하셨다(10:17-18, 14:30-31, 18:4 참조). 


놀랍게도, 로마 총독 빌라도가 마지막 가시는 예수님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자기가 살펴본 예수는 분명히 무죄였는데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이토록 십자가형(刑)을 받게 된 일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재판장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를 만나서 긴장하고 두려움을 느낀 이유가 있다. 자기는 세상 정치인으로서 언제나 쉽고 단호한 짧은 길을 선택해 왔으나, 예수는 생사의 위기 앞에서도 어렵고 긴 호흡으로 진실의 어려운 길을 견지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전율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항간의 소문이, 결국 실재임을 확인한 것이다(요19:7-8 참조). 그도 어느덧 ‘예수는 메시아요 신의 아들이다’는 소문에 묵시적(黙示的) 동의자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원한 승리와 분명한 진실을 취하려고 그 십자가란 위협 앞에서도, 당당히 자기의 소중한 목숨을 거는 영원한 정치인이자 인류의 완전 새로운 첫 인간인 메시아를 그가 대면한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받았던 빌라도에게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예수가 걸머지려는 그 십자가의 길을 열어 드리는 일이었다(19:16)! 그리고 하나 더 있다. 그 예수가 죽기 전, 그가 온 세상의 진정한 메시아요 왕이심임을 선포(宣布) 받고 공인(公認) 받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 일까지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최후의 작업이 바로 예수가 매신 십자가 명패에다가 그의 신분을 확실하게 밝혀주는 일이었다. 그것만은 꼭 하고 싶었다. 마지막 가는 이 낯설지만 신선하며 놀랍기 그지없는 이 대왕(大王)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보았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명패에 써 매다는 일도 가볍지 않았다. 예수를 고발한 무리들이 총력을 다하여 반대하고 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각오했다! ‘예수 제거’라는 그들의 정치적 욕망을 이미 들어 준 상태에서 나온 최후의 조치인 명패 고지(告知)는, 떠나시는 예수를 향한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보여줄 결정적인 기회가 되리라고 보았다. 그게 그가 공격자들에게 ‘내가 쓸 것을 썼다’(22절)고 단호히 선언한 이유였다. 


그는 예수 십자가의 명패에다, <예수 유대인의 왕>(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이란 이름을 고수했다. 그 일로 그는 예수의 십자가 무대를 왕(메시아)의 역사적인 취임식장이 되게 했다! 그것도 당시 사용 중이던 삼 개국 언어들인 히브리어(유대 지방의 언어), 로마어(공용어), 그리고 그리스어(통신과 교역의 언어)가 총동원되었다(20절). 그 명패 내용은 유달리 길었지만, 그 영적 의미는 컸다. 예수는 로마 권력이 인정하는 유대인의 왕(구원자)임을 온 세계인에게 선포된 것이다. 결국 이 명패는 죄인 빌라도가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에게 바친 최후의 헌정사(獻呈辭)였고, 인류사에서 <왕 예수의 시대>를 개막하는 역사적인 대 선포(宣布)였다! 그 선포로 인하여, 인류는 ‘죽음 넘어있는 생명’을 맛보기 시작했다!


왕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취임식은 이번 사순절 여정의 하이라이트이다. 우리는 왕의 취임을 통하여 죽어서 왕이 되시고 그 왕권도 공고히 행사하게 되는,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취임의 특별 무대를 보게 된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없이도, 그를 메시아로 시인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오직 그가 십자가 그 고난의 장에서 참 왕이심을 확증하셨기에, 예수는 전 인류의 영원한 왕이 되실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중요하다! 


당신의 십자가 행사의 뒤처리를 그렇게 빌라도에게 맡기셨던 왕 예수께서는 그 이후부터는 그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문을 열려는 행보를 통하여, 연약한 이 땅의 인간들에게 아직 보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시고자 더욱 앞장서셨다. 그것은 세상 권세자나 지혜자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고, 오직 하늘과 땅 전체의 왕으로서 이쪽과 저쪽 모두를 다 보고 계신 당신만이 가능한 행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떤 것들이었나? 


곧 거짓 넘어있는 진리, 가짜 넘어있는 진짜, 죽음 넘어있는 생명, 폭력 넘어있는 평화, 슬픔 넘어있는 기쁨, 억울함 넘어있는 보상과 기쁨, 수고에 따른 위로, 어둠 뒤에 있는 밝은 빛, 죄악 다음의 심판, 일시적인 것 넘어있는 영원한 것, 육체에 쌓여 있는 영적 세계, 순간 뒤에 올 영생-등, 이런 절대적 영역이 확실히 있음을 온 세상에 생생히 알리고 믿게 하고 누리게 하며 살게 하시려고 전력을 다하셨다. 


2. 구약 / 삼하7:1-17 / ”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 왕(마1:1)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존재로의 축복을 받았는지를 자세히 알려준 내용이다. 그때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법궤를 모실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아시고,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이었다(8-16절). 이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윗에게 언약하신 내용이 결국 나중에 후손인 나사렛 예수님에게 온전히 반영(성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왕 예수의 정체를 확인해 주신 것이다: 


1)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주를 따르고 섬기는 양무리)의 주권자가 되신다(8절). 

2) 어떤 원수도 멸하시는 능력자로서, 그 이름이 위대(偉大)하게 되신다(9절). 

3) 여호와가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신다(11절). 이는 그의 교회를 세우게 하시는 일이다. 

4) 그의 백성들을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신다(12절). 견고한 나라를 이루신다. 

5) 그의 나라가 영존하고, 여호와가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신다(13, 16절). 

6) 하나님은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하나님에게 아들이 된다(14절). 유일한 아들이시다. 


3. 서신서 / 계19:11-16 / ”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 이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본문은 하늘 보좌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位相)을 엿보게 하는 증언들이다. 그에게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부여되어 있었는데, 이는 로마의 황제와 같은 인간 지배자에게가 아니라, 오직 하늘의 주요 영원자이신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이름이다. 특히 그 주님은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어린 양으로서(13절, 요1:29, 5:12 참조), 그곳 천국에서는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하셨다. 이제 곧 뵙게 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하고 소중한 이름들을 미리 알아두자.


1) 공의로 심판하려는 통치자와 심판자의 위치에서, 충신(Faithful)과 진실(True)이라는 이름으로서 계셨다(11절). 그의 백성인 우리도 충성과 진실로 살아야 함을 일깨워 준 이름이다.

2) 주님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엔 많은 면류관이 있는데, 거기에도 이름표(a name written)가 있었으나, 오직 주님 자신만 아시는 그런 이름이었다(12절). 사랑(아가폐)으로 본다!

3) 또 피 뿌린 옷에도 붙은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는 로고스였다(13절,요1:1참조). 그 안에 빛과 생명이 있어서, 만물이 여기에서 창조되었음을 알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4) 그 옷과 그 다리에도 쓰여진 이름이 있었는데, 바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였다(16절). 이는 세상 모든 피조물과 만물이 모두 그의 발아래 엎드려 경배해야 함을 일깨운 이름이다. 


o 이제 사순절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구세주 예수의 본체를 규정하는 각가지 소중한 이름들을 확인하였다.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진리의 나라를 건설하신 예수님의 백성들이다. 그는 우리의 유일한 왕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철저히 그의 백성으로 충성하고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하늘나라에서 확인된 주님의 다양한 이름들은 지식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영역을 좇아서 흔들림 없이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님을 닮는 일이 최상의 목표이다. 옷깃을 여미고 부활의 주로 오실 주님을 뜨겁게 영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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