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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6-03-17 (화) 22:38 1일전 14  

본문) 눅 23:39-43, 겔18:1-4, 21-32, 갈2:15-21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다. 지금 온 세계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전쟁 발발로 인하여 매우 불행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두 나라의 일방적 폭격에 의하여, 이란에서는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의 사망을 비롯하여 초등학교 어린이가 근 200여 명에 가까운 생명들이 몰살을 당하는 등, 지금까지만도 수천 명에 이르는 인명들이 살상되고 있다. 그러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이란이 적극적이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반격을 가하면서, 지금은 전세는 매우 복잡해졌다. 특히 세계 유류 물량이 가장 활발하게 소통되는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이란의 지뢰 설치로 인하여, 이 양 측의 전세 형성에도 커다란 변화를 안겨 주고 있다.


이런 중에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금방이라도 끝낼 것이라는 호언장담과는 달리, 동서방 동맹국들인 5개국(영국-프랑스-중국-한국-일본)에 이 호르무즈 해협의 지뢰 제거에 동참하라는 압력까지 넣고 있고, 그 일로 전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는 다섯 나라의 거부로 인하여, 지금의 전쟁은 또 다른 국면에 휘말려 들고 있다. 전쟁은 자기들이 일방적으로 일으켜 놓고, 상황이 자기들 뜻대로 안 되자 이제는 가까운 동맹국들의 동참을 요구하고 나왔다. 자칫 멀쩡한 나라들이 이런 무모한 전쟁에 휘말려 들 수 있는 순간이다. 실로 통탄할 일이다. 


특히 우리같이 남북이 분단되어 언제든 충돌이 가능한 나라의 처지에서, 이런 무모한 전쟁에 휘말리기 시작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안전함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잖아도 북한이 러시아의 용병으로 참여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는데, 우리 남한마저도 미국이 벌린 전쟁판에 휘말려 든다면, 과연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가련해지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 남북한이 세계 강대국들의 전쟁 연습에 볼모가 되고, 꼭두각시 노릇하는 나라가 되면, 그건 정말 안 된다! 우리는 결코 트럼프의 꼭두각시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민족사적 불행과 죄악에 빠져들 수도 있다. 부디 이재명 정부의 용기와 지혜로운 대응을 빈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의 말씀은 인간들 안에 내재한 죄(罪+악)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할 것인지에 관하여 지침을 준다. 특히 가족이나 공동체나 민족 안에 흐르는 죄악의 사슬을 어떻게 제대로 끊고, 전혀 새로운 삶으로 거듭난 존재와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지 가르침을 준다. 사람 중에는 조상의 죄를 숙명처럼 끌어안고 지내는 자들도 있고, 소수지만 그런 흐름과 전승을 단호히 끊어내고 전혀 새출발하는 자들도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어떠한가? 


구약 전승에 따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 중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하나 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본래 우상(偶像) 장사로써. 나무와 흙과 돌과 쇠붙이 같은 자원으로 짐승이나 천체의 흉상을 본뜬 상(像)을 만들고 팔아서, 사람들이 거기에 절하고 복을 빌며 그 상을 팔아 수익을 남기고 산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브람을 그런 아버지의 행위를 부당하게 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버지가 그에게 몇 일간 외출하면서 창고의 우상들을 잘 관리하도록 지시하고 떠났다. 그날 밤, 아브람은 몽둥이를 들고, 우상 창고로 들어가서 거의 모든 우상들의 목을 쳐서 불구들로 만들었다. 단 하나, 제일 덩치 큰 우상은 그대로 두되, 그의 손에 그 몽둥이를 들게 한 체 말이다. 아버지가 귀가한 후, 창고에 들어갔을 때 어땠을까? 폭격 맞은 난장판처럼 된 그곳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결국 아들 아브람을 찾아 추궁하기 시작했다. 


아브람은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떠나신 날 밤에, 창고에서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나서, 놀라 들어가 보았더니, 글쎄 저 큰 우상이 이미 저렇게 주변의 모든 상들을 때려 부쉈잖아요!’ 아들의 이 말을 들은 아비가 화를 냈다. ’아니, 저 우상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주변의 것들을 때려 부순단 말이야. 네가 저렇게 한 것 아니냐?‘ 그러자 아들 아브람이 즉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아무런 힘이 없는 우상을 사람들이 더 이상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지 말아요!‘. 


그렇다. 자기 조상에게 흐르는 죄성과 잘못된 인생살이를 거부하고 끊어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아브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택하고 불러내어 전 인류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다!! 생각해 보자. 우리의 의식구조와 영성을 부정적으로 옭조이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나는 잘못된 혈통만 탓하면서, 현재의 모순의 굴레를 숙명처럼 끌어안고 있지나 아니한가? 나는 문화적 환경이나 완고한 교리들에 발이 묶여서, 체념 속에 살아오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도 되는가? 


하나님은 과연 누구를 기뻐하실까? 어떤 존재에게 희망하며 축복하고 싶어 하실까? 물론 연약하고 의지가 허약한 존재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분명하다. 하지만 축복하시고 데리고 일하고 싶어 하시는 사람은 아주 다르다. 곧 자신을 성찰하면서, 덧씌워진 굴레와 모순에 저항도 하고 거부도 하면서, 보다 나은 존재와 생명과 환경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강한 의지(意志)의 사람을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시며 축복하신다. 


특히 죄 처리에 관해서는 하나님은 강제 대신에, ’너 스스로 돌이키고 살라‘하신다(겔18:32 참조). 조상 탓, 친구 탓, 환경 탓, 여건 탓하는, ’탓의 굴레와 멍에‘를 힘써 넘어서려고 몸부림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적극 함께하시고 붙들어 주신다.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시인하고 겸손히 회개하며 도움을 청하는 자를 꼭 붙들어 주신다. 가슴과 입술에 원망이나 저주나 불만을 채우고 사는 영혼에게는 하나님이 미래를 안겨 주시지 못하신다. 지금 나는 어떤 존재인가? 


1. 복음서 / 눅23:39-43 /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분문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7언(言) 중에 한 말씀이다. 그것도 형사범 혐의(criminal-누가)로 체포되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게 된 동행자 중의 하나로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복을 받게 된 사건으로서 더욱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세상 인간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어서 더욱 특별하다. 


여기서 두 명 중 한 사람에게만, 주께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을 것이다‘라며 구원을 안겨주신 부분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그것은 구원과 영생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과 부족함을 알고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며 구하는 영혼에게만 제공되는 것임을 확인해 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최후의 순간에 주님을 향해 열어 보인 마음의 차이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자 :


1) 행악자 중 하나는 함께 매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며 비방했다(39절).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예수께서 메시야시다‘라는 소문은 듣고 알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메시아가 지금처럼 지옥 같은 고통의 십자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와 같은 인간과 함께 허무하게 매달려 죽어간다는 현실을 대하면서, 그는 아주 큰 실망과 좌절과 분노를 느낀 듯하다. 그 바람에 자포자기에서 나온 절망감에서 그런 언사를 표명했다고 본다. 자기 언사가 얼마나 예수에 대한 신성모독 죄임을 전혀 모르고 말이다.


2) 그 바람에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유실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고 만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왜 발생했는지와 그 십자가에 눈이 뜬 자는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그는 그 기회를 그토록 어리석게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그 순간은, 죽는 일보다도 더욱 안타깝고 비극적인 순간이 되고 만다. 


3) 다른 행악자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앞의 동료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우선 그는 동료의 예수를 향한 조롱과 비난에 분노했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이 자기들의 죽음과는 전혀 차원이 다름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이런 죽음이 마땅하다고 보았지만, 예수께서 자기들과 같이 이런 죽임을 당하는 일에는 전혀 동의하지 못했다(40-41절). 이것은 그가 평소의 예수, 곧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民衆)들을 돌보고 사랑하며 구원의 손길을 따뜻하게 펼쳐오신 예수의 삶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자신은 그런 자리에 함께하지 못함에 매우 송구스러운 마음까지도 품고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다만 이런 존귀한 자, 거룩한 자가, 격(格)에 맞지 않게 자기들과 같은 죄인처럼 취급당하며 십자가에 죽게 됨을 미안스러워했다. 


4) 특히 그는 예수의 선포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고 보인다. 자신은 그 나라에 대한 충분한 인식은 두지 못했으나, 그러나 예수의 증언에서 보면, 그 나라는 분명히 존재하였고 그 나라를 전달받은 자들의 삶은 분명히 지금의 자기들과 같은 육신과 정욕과 다툼의 세상살이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과는 아주 차원이 다르게 살아가고 있음도 그는 알았음이 분명했다. 이점은 그에게서만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신선한 영적 통찰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제 삶의 마지막 골목에서, 자신이 들어가기를 염원해 왔던 그 <예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뜨겁게 고백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42절). 


5) 구원과 영생을 열망하는 한 영혼의 뜨거운 고백이 십자가의 고통으로 힘겨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었다. 앞사람이 당신을 비난해도 침묵만 하시던 예수께서, 뒷사람의 간곡한 요청에는 즉각 응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43절)며 그가 바라던 나라에 함께 살게 하시겠다며 화답(和答)하셨기 때문이다. 


2. 예언서 / 겔18:1-4, 21-32 / “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


본문은 범죄에 대한 집단책임론에 빠져서, 조상 탓하고 민족 탓하면서 자신의 문제와 허물에 대하여 소극적인 대응을 하던 포로기 유대인들의 잘못을 하나님이 매우 신랄하게 지적한 내용이다. 곧 그들 유대인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에 그 아들의 이가 시리다‘라는 속담에 빠져들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각성과 회개와 갱신에 자리로 앞서 나서지 못하며, 지리멸렬한 인생살이를 하는 행태를 책망하신 것이다. 

☞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犯罪)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4절)


선지자는 그런 퇴행적(退行的)인 속담에 기대어 사는 내용에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부당하게 다루시고 있다는 불만도 내재하고 있음을 알고, 더욱 날카롭게 그 속담의 함정에서 백성들이 빠져나올 것을 촉구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원칙(原則)을 제시해 준다. 


1) 본래부터 구원받을 의인이 따로 있고, 멸망 당할 악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지금 –Here & Now>과 그가 지금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사느냐>가 절대 중요하다(21-27절). 이런 기준 앞에서, 과거에는 잘했으나 지금 변절했다면 그는 실격자일 뿐이다. 반면에 과거에는 잘못했으나, 지금은 회개하고 바르게 살고 있다면, 그는 합격자이다. 복음서에서 보여준 두 명의 강도의 차이와 결과의 사례가 그 점을 입증해 준다.


2) 구원을 막는 죄악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에는, 하나님은 절대 개입하시지 않는다. 전적으로 인간 본인 스스로가 깨닫고 뛰어들어 해결해 내야 할 자기 몫이다(28-31절). 그 점에서도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탓해봐야 전혀 소용없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몫은 그런 행위에 당사자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두고 심판하실 뿐이다(30절). 다만 주님은 어떤 죽을 죄인도 죽게 되는 일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각자는 어떻게 스스로 노력해야 되는가? 

☞ ‘스스로 헤아리고(회개하고), 그 행한 죄악에서 돌이켜 떠나야 한다’(28, 30절). ‘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31절). 

   ‘스스로 돌이켜 살고자 해야 한다’(32절). 


3. 서신서 / 갈2:15-21 / ” 사람이 의(義)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고 함을 얻을 육체가 없노라 “


율법과 복음은 성서를 떠받치는 양대 축(軸)이다. 성격상 율법은 의인과 완전을 추구하기에, 그에 미치지 못한 자에게는 그 결국 심판과 정죄만 따른다. 사실 율법에 의한 구원을 바라는 자들은 허공을 치는 사람과 같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고, 누구도 그 법이 내린 정죄에서 자유하지 못하다(16절). 반 예수인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이 그 율법 종교의 기둥이었다. 


반면에 예수로 시작된 복음은 인간의 약함과 부족을 직시하면서, 그런 존재들이 의롭고 온전한 자리로 나아갈수록 돕는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돕는 제1 보혜사(교사,변호사,치료자 등)셨다. 실제로 예수는 죄인을 돕고 살리는 자로 살다 가셨다. 그래서 그는 세상 모든 죄인의 구세주가 되셨다. 그리고도 주님은 부족한 인간들을 내면에서도 계속 돕고자 제2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도우셨다(19-20절). 


교회에는 율법적 교회와 복음적 교회가 있다. 전자는 법과 심판을 쫓게 하지만, 후자는 사랑과 용서를 의지하게 한다. 율법적 교회는 질식하게 하지만, 복음적 교회는 피어나게 한다. 율법주의자였다가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서 교회의 사도가 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율법적 교회가 아닌 예수를 사랑하는 복음적 교회로 세우고자 치열하게 씨름했다. 그게 예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21절). 


o 우리는 오늘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알고 은혜를 구한 행악자의 모습에서, 우리 교회가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고, 또 내 구원의 길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배우고 확인했다. 예수님에게 더욱 더 매달리자. 내 삶의 모든 형편과 사정이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누굴 탓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믿고 더욱 붙들자. 그는 원래 부족하고 없고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를 찾아, 당신의 것으로 채워서 세우려고 하시는 분이시기에, 더욱 그에게 나아가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以上)의 존재로 세움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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