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8:12-18, 25-27, 삼하12:1-13, 행3:11-21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계절은 봄을 활짝 여는 3월의 첫 주일이다. 날씨도 겨울 추위를 벗어난 느낌이다. 이런 때 우리는 3.1절 독립 만세 제107주년 기념일도 함께 맞이한다. 실로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주일을 맞이한다.
이럴 때, 우리나라는 뜻밖에도 듣기에 놀라운 소식 하나를 접하였다.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이번에 금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 대상으로 추천되는 놀라운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결과는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이는 세계 정치학계의 거두들 몇 명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난 12.3 친위 구테타를 통한 내란의 혼란 앞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폭력적 방법으로 그 어둠의 세력들에게 저항하고 제압하면서, 그 민주주의를 끝내 지켜내고 꽃피우면서, 세계인에게 규범이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들이 우리를 보는 시각에는 우리도 미처 보지 못하고 살아온 체, 우리 안의 형성된 삶의 놀라운 특징들을 드러낸 사례들이 많다. 곧 한국민은 시련과 억압을 만나면 만날수록 거기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것도 권력층이나 부자들이 망쳐놓은 나라의 위기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힘없던 백성들이 일어나서, 서로 하나로 뭉치고 더 결집해져서, 그로 인하여 이전보다 더욱 강한 민족으로 성숙하여지는 모습으로 세계사의 전범(典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굵직한 실례들로 그 학자들은 우리 백성들의 다음과 같은 역사적 행동들을 주목했다. 곧 임진왜란 시의 민병(民兵)들로 인한 국난 극복들, 고종 말기에 왜병 통치에 인내천(人乃天) 동학혁명 정신으로 저항한 민중들, 왜정 치하에 항거하며 봉기한 백성들의 기미 3.1 독립만세운동, 3.15부정선거에 저항한 백성들, 박정희 군부독재와 탄압에 저항한 민중들, 5.18 광주민주화운동, IMF로 위기에 빠진 나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자발적인 백성들의 금 모으기 운동, 태안 앞바다 기름띠 제거에 앞장선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 위기에서의 백성들의 서로를 향한 헌신들, 그리고 이번에 12.3 윤석열의 친위쿠데타에 온몸으로 치열하게 맞서서 지극히 평화롭게 민주주의를 사수해 낸 모습들 등등이다.
바로 이런 놀라운 민족적 저력이 있기에, 지난번 노벨 문학수상자인 한강이 그 유명한 증언을 하지 않았던가!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리고, 과거(옛날)가 현재(지금)를 구원한다’라고 말이다. 옳은 말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내란의 대안 세력으로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그런 위대함을 주목하며, 그 뜻을 담아서 국민주권정부를 제창하면서, 지금 국정을 놀랍게 펼쳐가고 있다. 그 바람에 지금 우리나라는 순간의 혼란을 극복하고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국방, 환경 등 실로 각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는 나라로 세계에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벽해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고, 더럽고 추하며,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분열 되어있는 모습들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잔존(殘存) 세력들이 더 이상 우리의 간판이 아니라, 공이 사보다 우선하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며, 백성이 권력층보다 더 성숙한 사회로 진입한 나라를 이루어내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증언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마침 우리는 삼일절을 맞이하며 세 본문 말씀을 대하게 된다. 우리에게 삼일절은 어떤 날인가? 요즈음 국민들의 내란 극복을 ‘빛의 혁명(革命)’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우리 민족사에 참 빛의 혁명을 이룬 날은 바로 이 삼일절 독립 만세 운동이다. 그 선언문에서도 밝힌 대로, 이 독립 만세 운동은 단순히 일제의 지배에 대한 항거 차원만이 아니라, 왕과 권력자들이 망쳐놓고 빼앗긴 나라와 주권을 이제는 온 백성이 앞장서 다시 찾겠다고 직접 나선 최초의 대규모 자주 자립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우리’를 살려내는 최초의 운동이었다! 우리 민족의 DNA에 ‘민’을 심고, ‘우리’를 심으며,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얼을 심은 때였다!
이 만세 운동에 우리 기독교가 앞장선 일은 진정 길이 기억할 일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극우 기독교 세력으로 변절 된 일들은 크게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저들은 삼일 정신에 담긴 복음과 생명과 정의의 정신을 크게 훼손한 범죄자들요 배신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따로 없다. 배신자 체질을 씻어내지 못한 자들이 문제이다. 그는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요13:16)을 깨닫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다.
마침 세 본문에는 하나님을 향한 배신자의 모습을 보였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룟 유다와는 다른 차원의 배신자들이다. 곧 복음서에서는 시몬 베드로이며, 구약에서는 다윗이고, 서신서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조한 이스라엘 백성이다. 모두가 치명적인 부끄러움을 경험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런 부끄러운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회개의 자리에 옮겨와서, 그 저주의 늪에서 해방받았다. 실로 바로 우리에게도 열린 자리이기도 하다.
1. 복음서 / 요18:12-18, 25-27 / “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
본문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의 스승을 향한 배신의 순간을 담아낸 기사 내용이다. 그것도 스승 예수께서 체포되어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 끌려 들어가시자, 자기도 그 뒤를 쫓아서 그곳에 들어간 현장에서 순식간에 무려 세 번이나 ‘자기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며 잇따라 부정하였는데-, 베드로 자신도 어이없이 허물어진 자신의 그런 추하고 무기력한 모습에 괴로움과 부끄러움에 휩싸여서 진한 눈물(통곡)을 흘리게 되기에 이르렀다(눅22:60-62).
그것도 얼마 전 예수 앞에서 자신이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며 큰소리쳤을 때(13:37-38 참조) 예수께서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예고를 하셨었는데, 그때가 지금 순식간에 몰아닥친 것이었다. 곧 그 체포당한 예수님이 세 번이나 부정하는 자기를 돌이켜 보셨고, 때맞춰 닭까지 울어대는 일이 잇따르자(눅22:61, 27절), 그가 깊은 자책감에 빠져들면서 관정 밖에 나가서 통곡(痛哭)하였던 것이다.
1) 첫 번째 부인은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며 물었을 때였다. 당황한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했다(17절). 그래서 출입은 허용될 수 있었다.
2) 두 번째 부인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베드로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며 물었을 때였다. 이때 베드로가 ‘나는 아니다’(25절)라며 또 부인하고 말았다.
3) 세 번째 부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를 잘린 바 있었던 자의 친족이라는 자가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26절)라며 말을 걸어왔을 때였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때도 즉각 ‘나는 아니다’라며 부인했다. 때맞춰서 베드로의 기억을 일깨울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27절, 13:37-38 참조).
4)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두 핵심적 제자들을 배신자로 만난다. 바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이다. 가룟 유다는 재정 담당자였고, 베드로는 수제자였는데, 묘하게도 이 둘은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서 배신과 부인의 행위를 통하여 스승 예수께 쓴맛을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이 두 사람의 결말은 아주 판이했다. 유다는 자살로 목숨을 끊었으나, 베드로는 용서받고 수제자의 영광을 누렸다. 대체 무엇이 이 둘을 그토록 갈라지게 했을까?
5) 유다의 배신은 자기주장이나 입장이 예수의 것보다도 더 강했기 때문이다(요13:16-30-전주 참조). 소신범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자비와 섬김이란 스승의 선교 방식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육신적인 힘과 돈과 권력의 힘을 더욱 선호했다. 스승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못한 제자가 된 것이다. 반면에 베드로는 순전히 자기가 약해서 스승을 모른다고 했다. 예수가 틀려서가 아니라, 죽음이 두려워서 부인했다. 그러기에 통곡도 회개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굴 배제하고 누굴 용납하실까? 자기주장과 확신에 강한 유다일까, 아니면 자기 부족과 연약함에 떨고 있는 베드로일까?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을 틈이 없는 유다일까, 긍휼과 자비를 힘입을 수 있는 베드로일까? 바로 그 지점에서 베드로가 되살아났다! 그에게는 자신의 연약함을 채워줄 주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었다.
6) 우리 신앙 공동체에도 이런 두 형태의 배신자들이 있다. 유다처럼, 항상 자기중심이고 예수의 말씀도 참고하며 사는 이들이다. 신앙이나 말씀보다 자기 지식이나 권력이나 물질의 힘을 더 신뢰하며 산다. 이런 이들에게 구원은 없다! 반면에 베드로와 같은 배신자들도 많다. 비겁하고 나약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항상 예수를 시인하고 신뢰한다. 종종 유혹과 협박에 굴복하지만, 그러나 회개할 줄 알고 눈물로 자신의 약함을 고한다. 주의 긍휼을 받을 줄 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응답하신다. 자만(교만) 때문인지 연약함 때문인지를 구별하신다.
2. 구약 / 삼하 12:1-15 / “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또 다른 배신자요 죄인을 만난다. 바로 왕 다윗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은혜와 영광을 크게 입은 사람이다.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서 광야에서 오로지 양무리들을 치던 소박한 목동(牧童)이었던 그가, 지금은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어 온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고 탁월한 면이 많았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적장 골리앗과 맞설 줄도 알았고, 주의 기름 부으신 자라고 해서, 자기를 추적했던 선왕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몇 번의 기회도, 스스로 포기한 신앙인이었다. 시와 노래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 줄 알았고, 나라의 분열을 통합으로 이끌 줄도 아는 역량 있는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 아주 허무한 시험(?)에 빠져서, 뜻밖의 깊은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자아(自我)속에 내재한 육정의 욕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 시험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롬7:14- ). 밤에 나신(裸身)으로 목욕하던 한 여인 밧세바를 보고 육정을 뿌리치지 못하면서, 그의 믿음의 삶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는 망나니짓을 계속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권력의 횡포도 부렸다. 불륜으로 임신까지 하자, 그것을 은폐하려고 전선에 나가 있었던 그의 남편인 우리아를 암몬과의 전장 최전선에 내보내어 전사하게 하였다(11:24). 그 후에 그 여자를 자기 후처로 데려와 아이도 낳고 살기 시작했다. 실로 더러운 권력의 속성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끝판왕으로 보여준 다윗이었다(7-9절).
그런데 다윗의 그런 어긋난 모습에 결코 참을 수 없었던 이가 있었다. 그의 주인이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그의 종인 선지자 나단을 그에게 보내셔서, 질책하시고 심판을 내리셨다. 요지(要旨)는 이것이었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은혜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그토록 나를 업신여기고 이런 죄를 범했느냐’(7, 9-12절). 그 책망에 대한 대응에 다윗의 운명이 걸렸다.
다윗이 어떻게 대응했나? 유다처럼인가, 베드로처럼인가? 그 순간 그는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나이다‘(13절, 시51편 참조).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범죄와 부족을 자백했다. 처벌 감수하고자 했다. 그게 바로 다윗이었다. 이 일로 인해 숱한 부끄러움이 그의 노년을 덮쳐왔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역사에 버림당하지 않고 사랑받는 인물일 수 있었다. 요즈음의 극우세력처럼, 잘못 인정을 거부하는 <윤 어게인>과는 달랐다.
3. 서신서 / 행 3:11-21 / “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리하였으니,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하나님을 향한 또 다른 범죄 집단이 보인다. 바로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나사렛 예수가 신성 모독죄를 범하고, 자기 율법 종교를 파괴하고, 나라를 거덜 낼 주범이라면서 그를 증오하며 죽이려 할 때, 예수가 진짜 그럴 인물인 줄만 알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며 함께 힘을 모아주었던 무리들이었다. 그 바람에 공범이 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대혼란에 빠져서 사도들에게 나아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해야 구원을 받겠느냐’라며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행2:37). 실로 대변화였다. 두 가지 요인들 때문이었다.
첫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자가, 성전 앞에서, 벌떡 일어나 걸면서, 완전히 회복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기들이 죽였던 나사렛 예수가 그토록 저주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불쌍한 앉은뱅이를 회복시킨 것은 오직 메시아만이 할 일이었는데, 자기들은 그걸 모르고 그 예수를 미워하며 죽였으니-, 이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도들의 강력한 증언에 의하면, 자신들이 죽였던 그 예수, 자기들 앞에서 다시 부활하신 그 예수가, 바로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하며 기다려왔던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증언 앞에서는, 실로 진퇴양난의 난감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출구는 사도들의 증언이었다! ‘너희와 너희 관리 모두가 알지 못해서 그런 죄악을 저질렀으니, 이제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함을 받으라’(17-20절). 이 얼마나 반가운 복음인가! 정말 몰라서 지은 죄, 알지 못하여 지은 죄는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는 그들 모두를 회개와 예수 앞으로 불러 모으면서, 결국 예루살렘의 원시교회, 곧 세계교회의 모태(母胎)를 탄생시켰다. 복음으로 거듭난 이들이 모이는 교회가 시작되었다.
o 배신의 시대를 끝내고 믿음과 신뢰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우리 주변엔 친구와 이웃과의 관계를 망가뜨린 일들이 산적해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 개인은 물론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까지 삶의 질을 격하시키고 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며 등 돌리며 사는 일도 회개해야만 한다.
자신의 부족과 나약함을 시인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구하자. 부족하고 약해서 넘어지는 것은 치명적 죄가 아니다. 붙들어 주실 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베드로처럼 회개할 수 있어야 하고, 다윗처럼 자신의 과오를 시인할 수 있어야 하며, 예루살렘 주민처럼 자신의 미숙한 분별력을 탓하며 주의 용서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한다. 명심하자. 하나님은 완전한 자보다는, 회개한 배신자들을 더욱 들어 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