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13:16-30, 애3:55-66, 롬7:14-25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이다.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의 자리에 들어서기 위하여 예수께서 힘겨운 40일의 예루살렘을 향한 행보를 취하신 기간이다.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를 바라보며(요1:29), 그의 말씀과 행보에 자신을 드리는 믿음의 행보를 취하게 된다. 계절로는 추위를 극복하고 따뜻한 봄을 여는 때이기도 하다. 꽃과 새순으로 고달팠던 인생의 지지기를 펴는 희망의 절기이기도 하다.
때마침,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행보가 지금까지의 정권의 폐쇄적인 유형과는 달리, 각종 국정회의를 온 국민이 시청할 수 있도록 공개(公開)하기 시작했고, 특히 가진 자 위주의 부동산 중심의 왜곡된 부의 논리에 대한 적극적인 수정 작업을 펼치는 바람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나라의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느 정권과는 차별된 당당함이 더욱 자랑스럽다. 민주적이고 공개적이며 다수의 국민중심적인 국정 운영이 우리의 시야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긴장해야 한다. 그동안의 오랜 세월을 장악해 온 어둠의 세력의 역습이나 준동이 새 정부의 성공을 저지하려고 전력을 다하여 흔들어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야당인 국민의 힘과 여전히 반발하고 있는 <윤 어게인>이란 극우세력들의 저항들이 호시탐탐 판을 뒤집어 놓으려고 총력을 기울일 터이기 때문이다. 회개할 줄 모르고, 건강한 대안을 낼 줄도 모르며, 오직 상대방의 실수와 분열의 낙수만을 바라는 그들을 여전히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러면 사순절 첫 주일의 세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본문들은 하나님의 역사와 구원의 새 시대를 무너뜨리려는 어둠의 세력과 배신의 세력들(사탄)을 주목하게 한다. 그것도 멀리서 있는 세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어서, 공동체를 파괴하고 함께 사는 무리들을 망하게 하며, 우리의 영혼까지도 잘못된 믿음으로 구원을 저지하게 세력들을 주목하게 한다. 그 어둠과 파괴의 세력들은 대체 누구인가?
복음서를 보면, 사탄의 전략은 치밀하다. 항상 내부의 균열을 노린다. 곧 자기들의 공격에 문고리를 터줄 내부의 조력자들 찾는 일을 중시한다. 그래서 내부가 혼란에 빠지면서 서로 싸우고 다투면서 분열로 무너지게 하는 일을 일삼는다. 나라도, 교회도, 가정도, 단체도 모두 그렇게 작업한다. 그래서 후회하게 하고, 서로 원망하게 하며, 나중에는 비관하여 서로 망하여 죽게 만든다. 그런 사탄의 손길이 지금, 예수 공동체인 제자단 속에 침투하여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탄의 공세와 침투에 제자단은 이제 어떻게 반응할까? 하지만 확실한 것이 보인다. 그곳은 비록 나약한 제자단은 있어도, 그 사탄을 이길 전능자이신 예수님이 계셨다. 곧 사탄이 제자들 중의 한 명을 자기 휘하에 두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를 통한 제자들 사이의 분열이나 해체나 고립되는 일들까지는 성공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 사탄의 간계한 생각과 그의 유혹에 빠져든 한 제자의 내부 활동 영역을 처음부터 다른 제자들에게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차단하셨기 때문이다(21-27절 참조). 그리고 모든 피해는 오롯이 예수 자신에게만 돌리는 것으로 끝내게 하셨기 때문이다(28-29절 참조).
예수께서 끌어안으신 피해도 아예 모든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놓을 계기로 삼으셨었기에, 사탄과 그의 휘하에 들어간 제자의 배신행위는 결국 예수의 뜻과 계획을 실현하는 일에 이바지하는 도구로만 이용된 셈이 되었다. 그 바람에 지난 주일에 보았던 하늘에서 발생했던 사탄의 일차 패배가(계12:7-12) 이곳 지상에서의 2차 패배로까지 이어지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구약의 애가(哀歌)서는 선지자 예레미야 공동체가 부른 슬픈 노래로 알려졌다. 선지자는 불의와 배신으로 여호와를 진노하게 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멸망을 선포하게 되자, 그는 당시의 모든 권력자와 종교인들과 어용 세력들로부터 ‘배신자’요 ‘선동가’(요즈음의 ‘빨갱이’등)라는 집단적인 여론의 린치를 당하게 되면서, 왕궁의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결국은 그의 예언대로 되었고, 온 나라와 백성들은 최악의 참변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에게 가해진 마음의 고통은 회복이 불가했다. 선지자도 잘못된 여론과 왜곡된 편견 등의 고통도 컸고, 그 가해자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늪에서 장탄식을 면치 못하면서 오랜 세월 시련을 당하며 살아야만 했다.
로마서의 바울의 증언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상황과 한계를 고발한다. 그들은 큰 구원의 법인 복음 대신에, 작은 법인 율법을 추종하면서 구원의 길을 쫓는 자들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본인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아 안의 육신의 힘에서 나오는 죄악의 현실과 악의 역사에 이끌려 살게 되면서 고생한다. 그 대안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요 그의 성령과의 꾸준한 동행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이 항상 드러나 살도록, 그리고 죄의 법을 섬기려는 육신을 이기며 살게 하는 것이 우리가 극복해 내야 할 길임을 일깨운다.
1. 복음서 / 요13:16-30 / “ 사탄이 조각을 받은 유다에게 들어간 지라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
실로 역사적인 순간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하면서 세상을 장악해 온 사탄과의 최후의 일전을 펼치시게 된 장면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예수와 사탄의 대 지략 싸움도 볼만하고, 그 싸움에서 제자들이 휘말려 들지 않도록 예수께서 방어망을 완벽하게 쳐서 남은 제자들의 미래를 지켜내시는 예수님의 지혜도 돋보인다. 사탄은 목표는 예수의 처형과 제자단의 몰락에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들은 모두 허사였다.
1) 성찬 예전 후, 임박한 당신을 향한 체포와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신 예수께서, 자기들끼리만 남게 될 제자들에게 다가올 어떠한 외로움이나 고난과 시련에도 이 말씀만 생각하면 반드시 극복해 낼 차원의 메시지 하나를 제시하셨다(16-17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福)이 있으리라’(16절).
무슨 말씀인가? 홀로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명히 극심한 고생과 환란을 당할 터인데, 그때마다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을 생각하면, 자신이 받고 있는 고난들을 무거운 것이 아니라 아주 가벼운 것들이 되어 그 고비를 견디게 하는 일종의 면역주사와 같은 처방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결국 주님은 제자들의 예상되는 고난을 미리 보시면서, 그것에 도피가 아니라 대면하되 기쁘고 영광스럽게 극복해 낼 특약(特藥)을 처방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빌립보 감옥에서의 바울과 실라의 대응과 그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행16:25 이하 참조).
2) 그러면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근거 삼아. 제자단 내부에서 배신자가 일어났음을 밝히셨다(18-19절). 시41:9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시41:9)는 내용을 인용하셨다. 실로 폭탄 발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 자신들도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할 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 점을 헤아리신 예수께서는 비록 한 명의 배신자가 등장했다 해도, 남은 모든 제자들에 대한 신뢰와 권위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안심의 말씀도 덧붙여 주셨다(20절).
3) 정작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분은 예수 자신이셨다. 그 배신자가 당신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고, 그곳도 제자단의 경리 책임까지 맡은 자(29절)인 그가 당신을 끝까지 좇지 못하고 자기 길을 완고하게 고집하다가(신31:27 참조) 사탄의 종이 되어 당신을 죽음에 자리에로 인도하는 자가 되었으니, 스승으로서의 그 괴로움과 충격이 크셨기 때문이었다(21절). 결국, 예수님은 당신의 입으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토하셨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4)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서로 의심하면서도,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비록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입을 통하여, ‘주여 누구입니까’(25절)라고 물었으나, 예수님은 구체적인 대상을 호명하지 않는 대신,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다’라고 하시면서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26절). 그러면서 유다에게 한 말씀하셨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며 그의 행동을 허락하셨다. 그 조각을 받는 순간은 예수의 허락이 떨어진 수간인데, 사탄이 유다의 속에 들어가면서 유다의 행동을 이끌기 시작하였다(30절).
5) 제자들은 여전히 유다의 배신을 알아채지 못한 채, 그가 모임의 회계로서 명절에 쓸 물건을 사고자 함이거나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기 위해서 나간 행위로 간주할 정도였다(29절).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가 당신을 파는 행위를 주저 없이 진행하도록 압박하셨다. 즉 당신에게 임박한 수난 사건을 전혀 피하려 하지 않은 체, 스스로 모든 행동과 역사를 주도하고 계셨다.
6) 성경은 그때가 밤이었다고 말한다(30절,하). 이는 어둠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함몰시키고자 작업을 본격화한 시각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빛과 생명의 세력의 본체로 오신 메시아 예수를 향한 어둠과 사망과 저주 세력의 마지막 총공격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놀랍게도 피해자이신 예수는 배신한 제자 유다를 미끼로 세상 권세를 쥔 사탄을 잡고자 자신을 죽음의 세력인 사탄 속으로 들어가셨다. 과연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가!
2. 구약 / 애 3:55-66 / “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이르시되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
본문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하고, 선지자 자신은 모든 백성들의 오해와 공격을 통하여 투옥되게 된 상황 속에서, 오직 자신을 이끄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이다. 사실 예레미야는 줄기차게 유대 왕국이 바벨론에 항복할 것과 그들의 지배를 저항하지 말고 받아 들이라‘는 요구를 온 나라와 위정자들에게 선포하였다. 그 이유는 부패하고 우상숭배로 타락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 피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선지자는 나라에게는 역적(逆賊) 같은 존재로 인식되면서, 투옥당하고 온갖 세상의 비난과 모멸을 다 당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너무 큰 고통을 당했다. ‘눈물의 선지자’란 별칭을 그래서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게, ‘나라가 살 길’이라면서 선포를 굽히지 않았다. 그 고통과 심판의 터널을 지나야 비로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투옥당한 선지자가 할 일이란 여호와께 탄식과 부르짖는 기도뿐이었다(55-56절).
마치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였고, 십자가상에서의 부르짖음과 같았다(마15:34 참조). 그러자 그가 여호와로부터 하나의 응답을 받았다. 그에게 가까이 오신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주셨다(57절). 예언자는 그 말씀을 이렇게 풀이했다.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58절). 선지자의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최후로 토하신 말씀인 ‘다 이루었다’(요19:30)를 회상하게 하는 내용과 비견(比肩) 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박해와 조롱과 모해와 원통함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공의로운 여호와께서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해 주시고 저주와 함께 진로도 쏟아서 그들을 멸해달라고 탄원한다. 실제로 선지자의 이 기도는 성취되기도 했다. 그 공격자들은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곧 바로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수에 대한 응징의 몫은 하나님께 넘긴 것이다.
3. 서신서 / 롬 7:14-25 / “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본문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밝힌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 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영을 거스리는 육체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데에는 기여할 수 있을 뿐, 그 육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 본연의 죄성(罪性)과 거스림까지는 손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구원을 바라는 인간은 율법이 아닌 예수의 십자가 복음에서 나오는 자비와 긍휼의 복음에 의지해야만 한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 이 대조적인 삶의 극명한 차이를 설명한다.
1)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율법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그를 통한 구원까지도 기대하지만, 그 개체인 ‘나’란 존재를 보면 율법을 쫓아 사는 삶의 위험성을 금세 알게 된다. 즉 내 육체는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내 육신이 이미 죄(罪) 아래 팔린 까닭이다(14-15절). 이 말은 내 안의 육신에는 이미 선한 것이 없어서, 마음의 소원과는 달리 몸의 선행이 나오지 못해 율법의 통제와 심판만을 받게 된다(17-20절).
2) 사도의 가르침을 붙잡자.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속사람과는 달리, 내 지체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고 저항하게 하는 악과 죄의 법이 공존하고 있다(21-23절).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아예 마귀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불신자와는 달리, 무척 곤고(困苦)한 존재들이다. 그런 사망의 몸에서 자신을 건져야 할 존재인 까닭이다(24절). 그것도 한평생 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먼저 육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십자가에서 베풀어주신 자비와 긍휼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더 신뢰하며 붙들어야 한다(25절). 곧 내 노력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은혜로 받을 구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o 사람 중에는 밤을 여는 사람들이 있고, 낮을 여는 이들도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확연하게 가를까? 결국 자기 육체의 욕망을 어떻게 다스렸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육체의 소욕을 꺾고 승리한 사람은 선과 의를 추구하면서 세상에 빛의 자녀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만, 육체의 소욕에 굴복한 사람은 어둠과 밤의 세상 사람이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곤고한 자들이다. 마음의 전쟁터를 누구에게 내어주느냐를 놓고 늘 나름대로 씨름하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나 선지자 예레미야나 사도 바울 모두가 그 씨름을 치른 이들이다. 우리도 그렇고, 나도 그러하다. 이 사순절에 내 속을 다시 점검하자. 내 안의 전쟁터는 지금 누가 무엇이 장악하고 있는가? 예수와 말씀인가, 내 욕망과 만족인가? 그 결론에 따라서 나는 가룟 유다도 될 수 있고, 예레미야나 바울도 될 수 있다. 사순절을 맞이한 우리들은 이런 싸움에서 확실히 승리한 이들이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