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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5-11-04 (화) 21:38 5시간전 3  

본문) 삼하1:17~27, 요15:12-17, 계14:13-15:4 


오늘은 창조절 열 번째 주일이다. 날씨도 급강하하여 완연한 늦가을 내음을 진하게 풍긴다. 짧은 단풍철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분주해 질 듯하다. 이런 때, 우리는 지난 주간에 경주에서 개최된 아팩(APEC) 정상회의에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 이재명 대통령을 호스트로 세우셔서, 세계 정상들과 20여개국 지도자들이 모인 대규모 국제모임을 성숙하게 치러 내게 된 일을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중국이란 양 대국의 지도자들을 맞이하면서, 그들과의 회담을 통하여 우리의 국익을 지켜내면서도 상호 기분 좋게 회담을 진행하며, 우리가 가진 내부 역량을 총동원하여 그들 손님에게 대한민국의 다양하고 성숙한 모습을 널리 전파하게 된 일이 매우 자랑스럽다. 그중 미.중 양 대국 사이에서 눈치 보는 지도자들의 시선을 우리 대한민국이 취한 중도적이며 양방 상호 이익을 견지하려는 균형적 입장을 주목하게 하면서, 그들의 처신에 지혜를 안겨 준 우리 대통령의 모습에 대견함을 금할 수 없다. 다윗을 들어 쓰시는 그 손길을 보았다. 


지혜로운 지도자의 처신과 언행은 그 시대를 건지기도 하고, 나라의 명운을 결정짓게도 한다. 지난주 우리 말씀목회연구원 전국대회에서 주제 발표를 했는데, 그 중,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가운데 성자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에게 전하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의 말씀이 새삼 감동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말씀임을 재발견하였다. 그러면 대체 그 말씀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큰 은혜와 도전이 되었나? 


율법주의자들은 이 대목에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부분을 주목한다. ‘이번만 용서할 터이니, 다시 이런 짓하면 안 된다‘라는 위협성과 선심성의 경고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정작 무게를 두신 대목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부분이다. 진정한 생사화복의 권세를 장악하고 계신 그분이, 범법자인 그녀에게 ’자신의 정죄권과 심판권 행사 자제를 선언하신 것이기에, 우리는 그의 말씀이 진정한 복음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힘없는 자의 공갈이 아니라, 실력자의 관용의 큰 품이 상대를 더욱 각성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우리는, 다윗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는 주(主)이시다’는 증언을 들었다. 우리 역시 그의 증언에 ‘아멘’하며, 예수를 내 삶의 구세주로 영접하며 그를 의지하며 따라 살기로 재다짐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우리들의 영적 수준(水準)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 세상이나 불신자와는 분명히 달라야 하지 않을까? 특히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더욱 확실한 차이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종말에 창조주의 심판 앞에 멸망 당할 세상과 똑같아서야, 어찌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 뭔가 그들과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생명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바로 그 점을 제시한다. 평범한 듯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아주 차별되는 그 모습 말이다. 소위 작은 차별이 영원을 가르는 것이 될 그것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보여줄 넓이와 품이다.


1. 구 약 / 삼하 1:17-27 /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본문은 다윗이 유다 왕이 되기 직전의 사건을 전한 기사로서, 일명 <활의 노래>라고 알려진 슬픔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에게 슬픔을 안겨 준 사건은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두 주인공인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다른 왕자들인 아비나답과 말기수아와 함께 블레셋과의 대전투에서 처참하게 전사한 일이었다. 일종에 ‘왕족의 몰살’이 발생한 일이었다. 이에 충격과 슬픔에 빠진 지도자 다윗은 두 가지 긴급조치를 취하면서 위기에 대처하였다. 


첫째는 사울을 자기 칼로 죽인 아말렉인을 즉시 처형한 일이다. 비록 사경(死境)에 빠진 왕이 고통 속에서 자기를 ‘편히 죽게 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칼로 죽이고 그의 유품까지 거두어 다윗 편에 건네준 인물이긴 하였지만(1:5-10참조), 그럼에도 그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까닭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는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강고한 믿음을 견지해 온 다윗이었기 때문이다(삼상24:10,26:9 참조), 바로 그 모습을 주께 보여 드린 것이다! 


인간 차원에서는 그의 행위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게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일이라면 그는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다윗은 몇 차례 자기를 쫓았던 사울 왕을 손쉽게 처단할 수 있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처리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하신다’는 입장에서 해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다윗은 사울에게 큰 고통과 고단함을 계속 당했었다. 결국 그 모든 행위와 중심을 보신 하나님께서 사울 왕가를 한순간에 정리하신 것이다. 


둘째는 고인들을 향한 태도 표명이다. 그는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존중심에서 온 백성과 함께 왕과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형제였던 요나단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게 하는 조처를 하였다. 저녁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했다(12절). 그리고 활의 노래를 작시(作詩)하여 역사적인 야셀의 책에 기록될 차원의 노래로 만들어 국민 노래(歌)가 되게 하였다(17-18절). 


주목되는 대목은 전사한 사울과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칭송(稱頌)이다. 이것은 다윗이 상대를 공적 차원에서 그들을 인정하고 칭송한 것이다. 개인적인 입장만 보면, 사울은 그의 원수였고, 그의 아들인 요나단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울에 대한 예의에 철저했다. 비참했던 그들의 전사를 크게 슬퍼하며, 그 소식을 상대 적들에게까지 감추고 싶어 하였다(19-21절). 


반면에 고인들을 향한 다윗의 칭송은 뜨거웠다. 전사한 사울 왕 부자의 사망이 결국 자신들의 전쟁에서의 승리의 칼과 활이 되어 돌아왔다고 평가하면서, 그들의 순직의 의미와 가치를 희생적 밑거름으로 높였다(22절). 그리고 그 부자의 동시적인 전사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관계로 승화시키면서(23절), 특히 왕 사울의 용맹함과 그의 생전 치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24절). 특히 의형제인 요나단을 위한 애통함은 더욱 절절했는데, 다윗에 대한 그의 사랑은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 추억하였다(25-26절, 삼상18:3-4 참조).


이런 다윗의 조가(弔歌)에서 돋보이는 점은, 원수와 같았던 사울을 향한 다윗의 극진한 자세다. 대부분의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또 불편한 이들의 불행에는 외면이나 저주로 대처하고 만다. 하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거룩한 손길인 기름 부음을 받았던 왕 사울임을 기억하면서, 그의 장례에서까지도 최상위 수준으로 우대하여 모신 것이다. 


이런 그의 처신은 분명히 정치적(政治的)인 입장이 아니라 신앙적(信仰的) 입장 때문이었다. 바로 다윗의 그 점이 우리의 이웃 사랑, 특히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본다. 그리고 그의 그런 사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네 원수를 사랑하라’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접근할 수 있는 전거를 확실히 제공해 준다. 


2. 복음서 / 요15:12-17 / “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본문은 우리의 이웃 사랑이 그 어떤 장애에도 넘어서서 가능하다는 점을 전해준 내용이다. 예수님은 유대교에 의하여 무너진 이웃(형제) 사랑의 복원을 위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Love each other)는 계명을 부여하신다. 


평소 예수님은 새 계명을 부여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율법을 통하여 제시된 계명들을 확인시키고 실천하도록 격려하신 편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떠나실 때가 임박하자,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당신 이후의 시대를 감당하도록 필요한 절대 요인(要因)들을 계명(誡命-command)으로 부여하셨다. 계명이란 무엇인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명령이다! 지키려면 자기 목숨도 걸어야 할 가치를 보유한 것이다. 


그 바람에 ‘서로 사랑하라’(12,17절)고 부여하신 새 계명 준수 여부가, 이제 그의 제자 됨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명확한 지표(指標)가 되었다. 제자들을 하나로 결속시킬 열쇠도 되었다. 그 계명의 준수로 하나 된 제자공동체와 교회 공동체 속에, 주님은 당신이 함께 계실 것임도 약속하셨다. 그밖에도 이 계명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하여서도 주님은 명백히 언급해 주셨다. 이 부분을 경청해 보자. 


1) 주님은 우선 서로 사랑할 근거로 ‘당신이 제자들에게 베푼 그 사랑’을 제시하셨다(12절). 이것은 예전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19:19,갈5:14)란 기존의 계명보다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네 몸처럼’이란 말은 분명히 우리가 내 몸을 지극히 아끼고 돌본다는 차원을 담고는 있으나, 실제로는 자기 몸 사랑도 이해가 부족하고, 또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 사랑과 인간 사랑의 차원은 전혀 애매하지 않다. 너무도 분명하다. 죄인과 버림당한 자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주어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신 바로 그 절대 헌신의 사랑(아가페)이기 때문이다. 특히 죄인과 원수까지도 포용하고 용서하는 희생을 담고 있는 사랑이어서, 신. 불신을 떠나 누구도 그 예수의 계명에서 피할 수 없게 하는 힘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2) 주님은 특히 ‘가장 큰 사랑’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사랑이라고 언급하셨다(13절).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여 주신 사랑에는 당시 세상 안에서 입지가 한없이 좁아지고 곤경에 처한 당신의 제자들을 살려내시려는 ‘가장 깊은 친구 사랑’이 담겨 있었다. 이 사랑에 대한 각성은 부활과 승천 이후에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될 부분이었다. 이는 마치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의 헌신과 희생의 차원과 같았다. 요나단의 죽음은 결국 - 자신의 의도 여부를 떠나서 - 그때 곤경에 처한 친구 다윗에게 왕의 길을 활짝 여는 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 그러면서 주님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당신의 친구라고 밝히시면서(14절),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당신의 친구가 될 영광과 기회도 부여하셨다. 예수의 친구가 되는 일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신과 인간의 친구 관계의 예표는 이미 모세가 여호와와 친밀하게 대화하는 모습에서 확인된 바가 있다(출33:11 참조). 


4) 내가 ‘전능자의 친구냐, 종이냐’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운명이 걸린 차원의 문제이다. 종은 주인의 행위에서 배제되지만, 친구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알고 나누며 산다(15-16절 참조). 이제는 우리가 결단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쫓고 행하여, 주의 친구로 살 건가, 종으로 살 건가? 


3. 서신서 / 계14:13-15:4 /  “ 지금 후로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최후에 위로를 받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자들이 누구인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신앙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사랑하기에, 서로 사랑하다가 세상의 미움을 받아 죽임당한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로서 복이 있다’고 영원한 선고를 받은 이들이다. 이들의 선행과 믿음이 심판대에 선 그들을 절절히 변호해 주고 있었다(14:13). 


1) 세상 권력과 제국의 압박 등의 짐승들의 미혹에 저항하여 죽임을 당함으로서(13:13-17) 천상의 위로를 받고 완전히 의인된 이들도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기리는 천상의 찬양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14:1,15:1-4 참조). 죽은 자, 곧 순교자들을 향한 위로와 축복의 음성이 먼저 들렸다(14:13).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러자 성령의 화답이 이어졌다. ‘그렇다. 그들의 수고가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2) 그러면서 세상을 향한 심판을 수행할 하늘의 천사들이 예리한 낫으로 무장하여, 불의한 횡포에 대한 심판을 이미 개시한 내용도 보여주었다(14:14-20절). 여기에서 천육백 스다디온이란 숫자는 세상의 폭을 상징하는 숫자이며, 1스다디움은 192m를 대신한 길이를 말한다. 


3) 또 15장의 일곱 천사와 일곱 재앙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최후 진노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그때에 짐승과 각종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으로 승리해 낸 자들이 나타나, 유리 바닷가에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런 주의 행하심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양하였다. 그들의 찬양은 오직 주만 거룩하시며, 주의 의로우신 일이니, 만국은 그 앞에서 경배하게 되리라고 외치고 있었다(15:1-5 참조).


4) 이런 하늘 찬양대의 모습은 이 세상의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한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과 선한 일에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한 주의 백성들에게 부여될 영원한 미래를 예표(豫表)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현재 우리의 신앙의 각성과 함께 큰 희망도 안겨 주는 내용이 된다. 


o 이제 우리에게도 영원자 하나님 앞에서 설 그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답해야 한다. ‘그날을 어떻게 맞을 건가?’ 이런 혼란의 시절일수록, 우리가 꼭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영적 과제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과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강화하는 일이다. 물론 서로 사랑 못할 이유는 산더미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한두 가지 이유만이라도 해야 할 이유를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과는 확실히 구별된 차원 높은 삶을 살고 있음을 확증해야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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