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상 8:12~30, 마12:1-8, 고전3:10-17
오늘은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이다. 전국의 산야는 지금 금수강산의 자태를 드러내는 단풍의 아름다움으로 절정을 이룬 듯하다. 그만큼 삼천리 방방곡곡이 온통 형형색색 조물주께서 허락하신 색깔을 한껏 드러내면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전국 산야에는 그 자태의 아름다움에 취한 상추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다만 다가온 추운 겨울에 앞서서,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을 뿐이다.
우리 인생도 그런 걸 아닐까 싶다. ‘다가온 황혼(黃昏) 인생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라는 감탄사를 발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자신도 모를 것이다. 다만 겸손히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좇아 최선의 불꽃을 태워야만 그 빛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나는 진정 무엇을 붙들고 살아오고 있으며,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가를 다시 물어봐야 할 시점이다. 더 굳어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그리고 아직은 변화의 유연성(柔軟性)이 남아 있을 때, 그러야만 한다. 그래야 나도 부끄럽지 아니한 조상의 반열에 설 수 있으리라.
오늘은 한국교회가 한 해의 삶의 농사를 결산하며 땀 흘려 수고한 삶과 거기에서 거두어낸 열매들을 생각하며, 이런 모든 과정과 은혜를 허락하신 조물주 여호와께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이다. 물론 요즈음은 교회마다 이 절기를 꼭 11월 셋째 주일로 고정하지는 않는다. 교회의 형편에 따라 10월에도 지키고, 오늘처럼 전통적인 날자에도 지킨다. 그런 유연함은 전혀 문제 될 것 없다. 다만 감사하는 정신과 자체, 거기에 따른 반성과 회개,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미래의 삶을 향한 계획과 다짐이 과연 있느냐와 무엇이냐가 과제일 뿐이다.
이날에 우리는 마침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감사(感謝)에 대한 새로운 방향(方向)과 과제에 관련된 은혜와 메시지를 받게 된다. 아울러 세 본문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와 무엇으로부터 여호와의 빛과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인지를 삼위일체적으로 접근하여 알게 한다. 구약은 여호와가 계신 성전을 향한 기도에서, 복음서는 예수 자신의 말씀에서,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성령이 함께하시는 교회 공동체에서 찾는다.
1. 구약 / 왕상8:12-30 / “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 ”
구약 분문은 왕 솔로몬이 10월 초의 초막절(추수절)에 성전 건축을 끝낸 후(레23:39참조), 11개월 후에(6:38) 남쪽의 다윗성에서부터 언약궤(이스라엘의 기본법인 모세의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이 담긴 궤)를 새 성전으로 모셔 오면서 행해진, 성전 봉헌식(奉獻式) 장면이다(8:9, 20-21 참조). 이때에는 광야 시절의 성막인 회막까지도 성전 안으로 옮겨왔다(출40장 참조).
이때 솔로몬의 최고 관심사는 이제부터 여호와가 그의 말씀을 모신 법궤를 둔 지성소가 있는 이 성전에 함께 계셔서, 이곳을 당신의 거처로 삼아주시는 일이었다(12-13절). 그러기에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至聖所)에는 오직 자신만의 거룩한 빛을 가지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곳 또한 그 어떠한 인간도 범접할 수 없도록 창문이 아예 없도록 특수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때 봉헌식에서의 연설과 기도는 물론 왕 솔로몬이 주도했다.
솔로몬 연설의 특징은 자신의 수고나 업적에 관련된 내용은 전혀 없이, 오로지 선친 다윗에게 말씀하신 일인 성전 건축과 봉헌을 자신에게 이토록 허락해 주신 여호와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었다(15절). 그러면서 자신의 선친(先親)인 다윗 왕의 유업을 이어받아서 자신의 이런 성전 봉헌이 이루어졌음을 뜨겁게 고백하면서, 그러기에 이제 여호와께서는 선친인 다윗과의 맺은 그의 후손들에 의한 왕위 계승을 비롯한 그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곡한 요청 기도를 여호와 하나님께 올리고 있었다(16-20, 25-26절).
솔로몬이 기억하는 아버지 다윗은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자신이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다(17절), 하지만 여호와는 그 건축을 다윗보다는 그의 아들이 하도록 조정하셨고(19절),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아들인 솔로몬 자신이 다윗의 왕위를 어어 받아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이렇게 성전을 건축하며, 여호와와의 언약궤를 위하여 한 처소까지도 설치했음을 고하였다(20-21절). 이렇듯 솔로몬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고, 그 부친의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자기가 이어받게 된 일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그 기쁨과 감사를 온 백성과 함께 누린 것이다. 신앙의 유산이 아름답게 계승되는 일을 위해, 감사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한가!
그러면서 솔로몬은 이렇게 봉헌된 예루살렘 성전의 미래 용도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드러낸다. 곧 앞으로 이 성전이 어떻게 자신과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의 거룩하신 뜻이 전달되고 펼쳐지도록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뜨거운 간구(懇求)를 여호와께 올린다. 그것은 이 귀한 성전이 자기와 온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드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는 연결의 매체가 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중 특히 주목할 내용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죄용서의 축복을 기도의 응답으로 받게 해 달라는 요청이다.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容恕)함을 받는 복까지 이어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27-30절 참조). 둘째는 이 성전을 향(向)한 기도와 간구가 처처에서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보살펴달라는 요청이다. 그중에는 혹 적국에 끌려갈 경우라도, 그곳에서 온 마음과 뜻을 모아 이 성전을 향해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그들의 허물과 죄를 사하시고 긍휼(矜恤)을 베풀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44-50절 참조).
이런 솔로몬의 기도는 추후 그들 후손들의 영적 생활에 깊고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의 다니엘과 페르시아 생활에서의 에스더 그룹들의 기도의 역사였다. 다니엘은 하루에도 3번씩 조국 이스라엘 성전을 향한 기도와 감사 생활에 전념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승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단6:10). 에스더 역시 밤낮 삼 일을 금식하며, 자기와 동족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에4:17). 그뿐 아니다. 지금도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연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마음의 방향을 자신이 섬기는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하여 기도하게 하는 자세를 갖게 해주었다!
2. 복음서 / 마12:1-8 /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慈悲)를 원하고 제사(祭祀)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定罪)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
분문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들여 의지하고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하여서는 진정 누구를 찾아야 할 것인지를 밝혀준 예수님의 말씀이다. 구약에서의 왕 솔로몬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간구했다(왕상8:30).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고, 또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시는 이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사(赦)함 받기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선언하고 나오셨기 때문이다(5-8절 참조).
예수님의 이러한 자신에 대한 존귀성과 전권을 드러내시는 선언들은 실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담한 말씀들이다. 같은 마12장에서의 ‘당신이 성전보다 더 큰 이시다’(6절), ‘당신(인자)은 안식일의 주인이다’(8절)라는 말씀들은 아예 당신을 ‘요나보다 더 큰 이’(41절)라는 말씀이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42절)라고 선언하신 것보다 훨씬 능가하는 자기 계시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말씀의 선포는 진정한 권위는 건물이나 제도보다는 사람과 사랑에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이런 자기 선언의 배경은 당시의 유대교 핵심 세력인 바리새인들이 힘없고 배고픈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지 못하고, 사소한 일들을 놓고도 사정없이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분노하시면서 그 대척점에 있는 자신이야말로 그들과는 달리, ‘모든 힘 없고 연약한 이들의 희망이요 피난처’요, ‘자비를 제사보다 더 원하시는 분’(호6:6)임을 선명히 밝혀주시고자 그렇게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그 어떠한 종교나 성전의 권위보다도, 연약한 자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훨씬 더 하나님에게 합당한 일임을 그때 명백히 밝혀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제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공격한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다. 선교여행하던 제자들이 배곯아서 길가의 밀밭에 있는 이삭을 잘라 먹었는데, 바로 그 점을 놓고 바리새인들이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安息日)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면서 스승인 예수께 즉각 정죄하며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었다(1-2절). 그들에게는 배곯은 자의 고통보다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율법상의 금지법을 더욱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일이 비단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가해진 일이 아님을 이미 충분히 아셨다.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에게 무차별로 가해지는 무자비한 정죄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이 일에 본격적으로 대응하셨다. 차제에 하나님이 보다 원하시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포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법이 문제가 아니라, 법 집행자들의 오만과 무자비가 더 문제임을 지적하고 나오셨다.
그 실례가 바로, 왕의 탄압을 피해 도피 생활하면서 배고팠던 다윗을 받아들인 그들의 오랜 선배인 놉 제사장인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베푼 자비와 친절의 실례였다(삼상21:1-6절 참조). 거기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은 당신이 먹을 수 있던 진설병의 떡, 곧 거룩한 떡 중에 묵은 떡을 고단했던 다윗에게 제공하면서 그와 그의 배후에 있던 부하들의 허기를 채우는 일을 돕기도 했다(4-5절). 그때 사울 왕에게 쫓기는 다윗의 상황에서 보면, 그 자비가 제사장 자신에게도 자칫 엄청난 위기를 안겨 줄 수 있었음에도 선택한 용감한 행동이었기에, 제사장의 자비와 친절은 진정한 종교가 과연 약자들에게 어떠해야 하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 훌륭한 사례였다.
결국 이 복음서의 메시지는 약한 자와 힘없는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상실한 종교와 성직자는 결코 예수와 상관없는 집단이며 조직체라는 것을 온 천하에 밝히 공포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과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바로 예수를 찾고 의지할 것도 온 천하에 고하신 내용이다. 동시에 정죄의 칼을 내려놓고, 대신 아히멜렉의 반열에 서서 주의 일을 할 것을 모든 당신의 종들에게 강력하게 명령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연상되는 실재가 있다. 성남에서 변호사였던 이재명이 초기에 극한 시련에 빠져, 피난처를 찾을 때, 그를 용납한 곳이 그 시대의 놉 제사장 아히멜렉이었던 이해학 목사의 주민교회 지하 공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불의한 세력과 맞서고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한 제대로 된 정치가가 필요함을 절감하면서, 결국 정치인으로서 입문하게 된다. 대선 선거일 전날에 그가 기자회견 하며 마지막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한 곳도 바로 주민교회 그 현장이었다. 지금의 이재명 대통령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3. 서신서 / 고전3:10-17 /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교회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던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이 제대로 된 구원 신앙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진정 어떠한 영적 기반이 마련되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정리하여서 전해주고자 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영적 기반(基盤) 구축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내 신앙의 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있어야 한다(10-11절). 이 부분은 바로 앞의 복음서에서 확인했다. 따라서 만일 예수의 삶과 말씀을 좇지 아니한 기반이라면, 거기에서 나온 그 어떠한 수고와 시도도 모두 ‘다른 터’에 불과하며(11절), 그 공적(功績)들이 불타게 될 때는 그저 해(害)를 받게 될 뿐이다(15절).
둘째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며,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바로 내 안에 계시다’라는 정체성에 투철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성령 시대와 복음의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개개인이 어떤 특정 조직이나 제도나 위인에게 매여 살 수 없고, 매사에 자기 자신이 예수의 말씀과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응답하고 결단하며 살아야만 하는 입장임을 감안해서 제시한 메시지이다.
그렇다. 우리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 중심 신앙인일 수 없다. 어떤 특정인을 신앙 교주로 삼아 추종하며 살 수도 없다. 그러기에 어떤 특정한 성전이나 인물이나 위인들 중심에 매이지 않고, 바로 성령 받은 자기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성전임을 자각하고, 거기에 걸맞게 거룩하게 처신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16-17절).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는 말씀을 이루며 살아가면 된다(마5:13-14 참조).
o 찬송가 510장을 다시 불어 보아야 할 때이다. ‘너의 등불 돋우어라 거친 바다 비춰라. 빛을 찾아 헤매는 이 생명선에 건져라.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3절).
우리의 시선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 두어야 하지만, 그곳은 하나님께 가족과 함께 나와서 감사하며 기도하는 곳임을 명심하고, 기도에 전적으로 힘쓰자.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노상 지켜보시며 함께 하시며 돌보아 주신다. 그와 함께 생활의 기본은 반드시 예수와 그의 말씀 기반 위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임을 명심하는 일이다. 그래서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힘써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내 자신부터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