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7:11~19, 창28:10-22, 롬8:33-39
오늘은 부활절 일곱째 주일이면서, 절기 마지막 주일이다. 이때는 예수께서 하늘 본향에 오르셔서, 제자들만 남아 오직 그의 약속만 믿고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지내는 때였다. 제2의 예수, 곧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대망하며, 기도와 말씀을 의지하며 지내는 기간이다. 외로움을 믿음과 기대로 대치하면서, 미래의 거듭날 자신들을 준비하는 때였다. 그들은 어떤 자신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때를 보내고 있었을까? 기도할 수밖에 없었음이 옳다(행1:14)!
때마침 우리나라는 대통령 부재의 시기를 보낸다. 내일모레(6.3) 대선(大選)을 통하여 새 대통령을 맞이한다. 지난 7개월 동안 우리는 내란사태를 경험하면서, 악화된 정치 환경을 목도해왔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심각하게 극단적인 폭력 세력들로 인하여 내분화 되어 있는지도 확인하였다. 동시에 한 사람의 위정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확인한 터여서, 이번의 대선의 결과는 더욱 중요해졌다. 새로운 정치 환경의 등장이 정말 목마르다. 여전히 자기 이익 중심의 탐욕 세력을 맞이할 건가, 아니면 국민의 안위민복(安位民福)을 지향할 진정한 새 지도자를 맞이할 건가? 실로 오직 기도에 힘써야만 할 때가 지금이다.
기후도 완연한 여름이다. 지구촌에서는 끊임없이 기후 변화로 인한, 크고 작은 환경 재앙들이 잇따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정부의 원자력 위주의 에너지정책과 태양광 위주의 재생 에너지 탈피 정책으로 국내 제조업 중심의 산업이 힘을 잃게 되면서, 경제적으로나 국제 신뢰 관계에서나 심각한 퇴락의 길에 떨어져 있다.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서면, 과감히 낙후된 재생 에너지의 활성화를 도모하면서, 세상과 환경에 이바지하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이런 중에 오늘 우리는 또다시 세 본문 말씀을 받는다. 어떤 내용의 말씀인가? 전체적으로 보면, 삼위(三位) 이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돌보시고 지켜 주시며 끝까지 책임지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환경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을 받은 자들이 집중해서 소개된 모습이다. 모두가 세상의 박해와 억압과 위험의 압박을 받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부활의 능력을 발하는 존재들이 그 위상을 드러낸다.
복음서에서는 성자 예수께서 진리의 사람들로 세워놓으신 제자(弟子)들이 그 대상이다. 그는 제자들을 자신이 선택하셨다기보다는 하늘 아버지가 당신에게 맡겨주신 자들로 알고 책임져 돌보신 무리였다(요17:6). 구약에서는 족장(族長) 야곱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압도적인 사랑과 돌보심을 소개한다. 여기에서 야곱은 어떤 칭찬받을 만한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조상과의 약속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에 따른 배려가 더 크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야곱의 서원(공약)도 주목할 만하다. 서신서는 성령의 돌보시는 자들을 향한 돌봄과 사랑이 얼마나 완벽한지를 전한다. 이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며 교회들이기도 하다.
1. 복음서 / 요17:11-19 /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
본문은 하늘의 본향으로 떠나게 되신 성자 예수께서, 남겨 둔 당신의 제자들을 하늘 아버지께 부탁드리는 간절한 기도문이다. 구구절절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겨 있는 내용들이다. 사실 남겨진 제자들의 사정은 녹록지 않다. 그의 보호자이셨던 주님이 떠나셨다는 문제 이외에도, 그들의 허약한 결속력도 문제였고, 그들이 상대할 세상은 자기와 다른 그들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악이 지배하는 그런 상황에 맞서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제자들은 누구였나? 단순한 스승과 제자 관계 차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지난 3년간 그들을 택하여 데리고 사시면서, 그들을 제자로 양육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육성시키며, 특히 장차 당신의 부활과 승천과 본향 이후에는 이 세상 구원을 책임져 줄 주역들이 바로 제자들임을 깊이 염두에 두셨던 자들이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사실상 ‘제2의 예수들’이었다. 그들이 보여 줄 모습은 당연히 예수 사역에 대한 총체적 평가로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이 지상에서의 구원 사역을 위하여 주신 사람들로 간주하셨다(17:2,6,9 참조). 제자들 자신도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주님은 그렇게 아셨고, 그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제자들이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지시하셨다(마6:6, 눅11:2). 유독, 사랑을 받은 친구로 살아왔으면서도 성경 사례에 따라, 끝내 멸망의 길에 들어선 가룟 유다의 아픔이 있긴 했지만(12절, 시41:8, 55:12-14 참조), 남은 열한 명 전원은 당신이 지켜내셨음을 고하셨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드러난, 당신의 제자 보전을 위한 중요한 시도들 몇 가지는 이러했다 :
1)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됨과 같이(요10:30 참조), 제자들 서로도 하나 되어 살도록 지도하셨다(11절). 주님은 그 숱한 표적과 능력과 말씀도 모두 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고 배워서, 당신이 그렇게 하고 계셨음을 알리셨다(5:19,30 참조).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보증하고 참됨을 증언하셨다(8:16). 심지어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의 모습도 하나님과의 뜻의 결합 관계에서 나온 것임도 알리셨다(10:14-15절). 이렇게 삶과 죽음까지도 하나가 되어 행동하심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게 하였다(17:21-23). 그런 영광의 하나 됨과 기쁨이 이제 제자들에게도 탄탄히 이어지길 기도하셨다. 이를 위해 주님은 제자 간의 서로 사랑하는 일을 새 계명으로까지 부여해 주셨다(15:12-14).
2)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다(14-15절).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만이 그들을 악과 불의로 가득한 세상과의 명백한 차별화(差別化)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악에게 빠지지 않고 승리의 생활을 할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16:33).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만이 진리요(17:11), 영생(永生)을 안겨주시기 때문이었다(12:50, 17:3-5 참조).
3) 제자들을 그 거친 세상에 보내셨다(18-19절). 예수께서는 온실에서만의 제자들을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거친 세상 현장에 파송(派送)하셔서 악과 거짓의 실체를 알고, 맞서 싸우며, 씨름하며 극복하며 이겨내는 경험도 하게 하셨다. 그래서 싸움에서의 승리할 진정한 무기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아버지의 말씀임도 확인하게 하셨다.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다져진 거룩(sanctify)성을 지닌 전사(戰士)만이, 영생을 상속할 무리가 될 것임을 분명히 알게 하셨다.
2. 구약 / 창28:10-22 / ”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인류사에서 최초로 혈족과 가계 중심의 하나님의 백성 계보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하나님 백성의 DNA가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백성이 된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된 자이다. 마태복음은 이 점을 매우 중시하면서, 아브라함의 계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1장). 그의 후손에는 다윗 왕도 들어있고, 심지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도 포함되어 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이 그의 구원과 축복과 영생까지도 우선적(優先的)으로 보증해 준 특별한 계열의 인물군(人物群)이 된 것이다.
본문은 그의 손자인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구별을 받았는지를 잘 설명해 주는 곳이다. 그는 지금 쌍둥이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하고자 외갓집 하란으로 피신하러 가는 중이었다. 이는 야곱이 엄마 리브가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張子)의 축복을 가로챈 일로 형의 보복을 당할 처지에 이르자, 그 화를 피하고자 피신 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루스(벧엘)라는 곳에 이르러 노숙(露宿)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날 꿈에 여호와께서 그런 그를 특별히 찾아 주신 것이다. 그런 만남은 외롭고 고단한 야곱에게는 천금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여호와는 왜 장자인 에서가 아닌 야곱의 손을 들어주신 걸까? 왜 피해자인 에서가 아닌 가해자인 야곱이었을까? 왜 속은 자가 아닌 속인 자의 손을 들어주신 걸까? 하나님의 이런 선택은 그런 이분법적인 질문으로서는 답을 얻기 쉽지 않다. 다만 그의 조상 아브라함을 향한 여호와의 약속과 축복은, 어떤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전제 조건과도 얽혀 있지 않음이 확실하다(13-14절 참조). 하지만 여운(餘韻)이나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가 보실 때, 그 두 형제 중에서 가계와 혈족에게 주실 여호와의 축복을 형이 잇기가 마땅한지, 동생이 합당한지를 그 부모를 통하여 지켜보실 때, 그 답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서는 신앙 전통과 유업 잇기에 자유분방하였으나, 야곱은 진중했고 수용적이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장자의 신분을 가볍게 여겼으나, 야곱은 간절했고 취하려 했다(25:34). 부모를 통해 내리시는 여호와의 축복을 자기가 받기를 열망했다(26:34-27:13,46-28:5 참조). 그러니 주시는 분의 입장에서는 과연 누구를 더 좋게 보실까? 누가 당신의 것을 더 소중히 감당할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동생 야곱을 조상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조상의 계보자로 세우고자 하셨다(13-14절). 조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당신의 소중한 축복이 야곱을 통하여 세상 모든 족속에게 펴지게 하셨다. 그를 위해, 당신이 그와 함께 있고, 어디든 지키시며, 다시 귀향하여 당신의 약속을 모두 성취하기까지 그와 동행하시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15절). 얼마나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인가! 평생 언제 어디에서든지, 무슨 환란과 역경을 만나도 전혀 두렵지 않고, 염려 없이 견디어 낼 수 있는-, 엄청난 큰 힘을 충전 받는 순간이었다(16-19절)!
이제 자기 앞에 무슨 시련과 역경이 밀려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제는 어떤 염려나 두려움도 사라졌다. 겁낼 것이나 미리 걱정할 것도 없어졌다. 참으로 신비한 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전능자를 만난 야곱으로서는 이제 가슴에서 치솟는 가슴 응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받게 될 놀라운 축복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야곱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자기 다짐을 약속으로 올렸다. 생을 건 뜨거운 서원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21—22절).
먼저는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것이며, 가계(家系)의 하나님으로 섬길 것을 약속했다(21,하). 또 머리 두고 잠잤던 돌기둥으로 여호와의 집을 세우겠다고 약속드렸다(22,상). 여호와를 경배하는 성전 중심의 삶을 살 것도 약속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주신 모든 소득의 십일조(十一條-Tenth)도 받치며 살겠다고 약속했다. 이 모든 약속은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실천할 맹세이기도 했다. 붙들려 사는 삶만이 가능했다. 조상 야곱의 이런 서약은 그 후 그의 신앙 후손들에게로 물 흐르듯 전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3. 서신서 / 롬 8:33-39 / ”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발하리요 — 누가 정죄하리요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본문은 성령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인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바울의 증언으로 밝힌 내용이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늘 간구하는 분이시다(롬8:26-27). 마치 앞에서 본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뜨겁게 돌보고 지켜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처럼, 성령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형제자매들을 무한하게 사랑하고 돌보고 계심을 알린다.
이런 증거는 바울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을 통하여 만났고, 주님의 깊은 사랑과 용서의 넓은 품을 경험한 바 있어서(행9장 참조),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그가 직접 체험한 성령의 강력한 은혜와 능력의 힘은, 마치 야곱이 벧엘에서 여호와를 만나서 얻게 된 감격과 새 힘이 그 후의 20년 타향살이의 온갖 역경을 견디어 내게 한 것처럼, 바울에게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만난 그 어떠한 역경과 환란들을 끝까지 믿고 견디며 이겨낸 심오한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그의 압도적인 사랑과 돌봄의 후원을 받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향하여 뜨겁게 외친다. 먼저는 그들의 후견자가 되는 크고 절대적인 능력자들부터 집중해서 소개한다. 먼저는 그들을 의(義)롭다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33절). 그다음은 십자가에서 사망 권세를 꺾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신 후에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님이시다(34절). 그리고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주님의 사랑이 지금도 여전히 공급되고 있음이다(35-39절).
이토록 거대하고 강력한 영적 방어막(防禦幕)이 그들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기에, 바울은 이렇게 뜨겁게 외친다. - ‘누가 능히 택(擇)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3-35절) 바울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7-39절). 부디 부활 신앙 속에 거하는 모든 이들의 승전가이길 빈다.
o 금주 내일모레(6.3)는 제21대 새 대통령을 맞이하는 주간이다. 이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운명과도 직결된 역사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바라기는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에게 지혜와 슬기를 주셔서, 보다 지혜롭고 보다 현명한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를 즐겁게 맞이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이전의 묵은 상처를 씻어내고, 세계 제6대 강대국(최근 미국의 어느 보고서의 평가)에 걸 맞는 우리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주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과 같고, 노숙의 고통 속에서도 여호와의 특별한 동행과 돌보심을 받았던 야곱과 같고, 온갖 시련과 역경도 뚫어내고 극복하여 성령의 든든한 방어막을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이 선출되어, 이 시련의 나라를 든든히 세워주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