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4:1~14, 왕하2:1-15, 엡4:1-16
오늘은 부활절 여섯째 주일이다. 완연한 여름이 임박했다. 그리고 보면, 우리 대한민국은 참 복 받은 나라이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덥고 춥고 따뜻하고 시원함을 연중에 3개월 차이로 골고루 경험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온 세계가 품고 있고, 인간들이 다양하게 경험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다양한 감정들을 우리는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계절이 주는 다양성을 삶으로 풍성히 체험하며 살아온 민족이기에, 장점들이 참 많다!
지금 우리 한국의 힘이 온 세계에 빛을 발하는 것은 문화의 힘이다. 다양한 인간의 감정과 느낌에 골고루 공감하고 반응해 주는 힘이 K-culture라는 능력으로 힘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음식이 요즈음 세계인의 밥상을 점령하는 까닭도 그것이다. 매우 다양하고 섬세한 맛을 풍기는 음식문화가 그 빛을 발한 까닭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도 그 일환이기도 하다. 이는 세계인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적 감수성에 우리 한국인이 유달리 예민하게 대응할 힘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는 대체로 자신의 것만을 주장하고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웃과 타인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공유하는 일을 힘들어한다. 이런 모습은 사회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의 질서에 철저히 반하는 일이다. 반드시 이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될 수 있고, 더불어 사는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풍성한 인생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하고, 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국인은 체질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능과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우리 내부도 극단적인 양극화와 이념적 대립으로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갈등과 분열이 깊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민족이 가진 체질적 능력과 경향성을 보면, 우리는 분명히 온 세상의 중재인(仲裁人)으로 살아가기에 매우 적합한 역량을 가진 족속이 분명하다. 소위 ‘그가 들어가면 분리된 서로가 하나가 된다’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런 능력 보유자가 본래 모퉁이 머릿돌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시던가! 하지만 그런 그가 시련을 당한 것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한편에 경도(傾倒)된 삶을 살아온 자들의 잘못된 편견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주의자’, 더 심하면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으로 그를 정죄하고 들었다.
교회의 존재 이유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분열된 세상과 인간들의 통합과 연합을 도모하며 서로 사랑하게 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교회가 먼저 사회적 이념의 노예가 되어, 어느 한쪽의 대변자가 되고 어느 한편의 정죄자가 되어 있으면, 그것은 매우 그릇된 신앙인의 자리에 서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의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도 당선이 유력한 모 야당 후보는 분열된 국민의 통합을 외치고 있음이 매우 다행이다. 모두의 삶을 위해, 이념과 대립을 넘어선 조화와 통합을 이루어내자고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호소하는 일이 그래도 다행스럽다.
부디 그가 외치는 새로운 대한민국이 시작되면, 국민 통합을 물론 국제적 통합의 기틀까지도 이루게 되기를 소망한다. 미국이나 일본과의 연대는 소중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이방국과도 좋은 관계 유지도 절실하다. 무엇보다도 허물어진 우리의 동족 북한과의 관계 복원도 반드시 긴장과 대립이 아닌 공존과 평화의 관계로 재구축이 되게 해야만 한다. 전쟁의 기운만은 완전히 사라지게 해야만 한다. 평화가 곧 경제요 축복이요 생명이기에 그렇다.
마침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도시. 농어촌교회 선교주일이다. 이는 인구 소멸로 무너져가는 농어촌교회를 도시교회가 생각하고 돌보자는 취지에서 설정된 주일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가 섬기던 교회에는 개척 때부터 이런 취지를 공감하면서, 특별한 행보를 취하여 왔다. 초기에는 농촌교회와의 농산물 먹거리 소모하는 일과 절기에 서로 교류하는 일들을 취하였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정착시킨 일은 교회 공간의 일부에다가 장학숙(獎學塾)을 마련하여 서울에 유학한 농어촌교회의 목회자 자녀들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이 일은 어느덧 40여 년이나 되어서, 지금도 교회 한 층의 공간에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다행히 그동안 적잖은 학생들이 도움을 받아, 수년간 무사히 서울 유학을 마치고 현장으로 나아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교회는 농어촌교회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기에, 이렇게라도 농촌교회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일이 지극히 마땅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웃 서울 몇몇 교회가 이런 장학숙 제도를 취하면서, 함께 사역하고 있어서 매우 기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오늘 우리는 세 본문 말씀을 받는다. 특히 금주 목요일인 29일은 승천일이 들어 있기에, 세계교회는 오늘을 예수 승천(昇天) 주일로도 지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승천은 분명히 떠나심이요 오르심이지만, 그러나 단순한 이별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머잖아 곧 다시 만날 것이라는 점과, 또한 그 다시 만남이 있기까지의 이어짐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매우 각별한 주의(主意)들을 주셨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세 본문은 다 성령 역사를 전한다.
복음서에 따르면,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롭게 당부하신 내용들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품고 지내는 일이었다(11-12절), 그럴 때,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도 행하게 되고, 그보다 더 큰 일까지도 하게 된다. 또 하나는 제자들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신 이름으로 항상 기도로 구하며 사는 것이다(13-14절). 그럴 때, 주님이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이 구한 것들을 모두 행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 주님의 승천은 단절로 이어지는 떠남이나 이별이 아니라, 서로는 여전히 성령 안에서 하나로 굳게 연대(連帶)된 공생과 공존의 존재로 새로운 영적 차원의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13절, 행1:4-8 참조). 바로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또 주님의 오르심을 경험한 제자들 일행은 그 후 어떻게 되었나(행1:9-11참조)?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기대감 속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오로지 기도에 힘쓰게 되었다(행1:12-14절).
구약의 말씀에서는 제자 엘리사가 하늘로 떠나실 스승 엘리야의 성령의 역사를 자신이 이어받기를 애타게 매달린다. 그러자 마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처럼, 스승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당신의 승천 모습을 지켜보면 되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실제로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모습을 직시하며 외친다(12절). 그리고 스승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수거하며, 그때부터 그는 성령의 권능을 갑절로 행사하는 자가 된다.
서신서에서는 앞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어짐과 하나 됨의 역사를 보여 주신 성령께서, 지금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 지를 매우 섬세하게 일러 준다. 그래서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면서 하나 되게 살도록 각자에게 감당할 분량대로의 선물이 주어졌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뜻을 설명하신다. 여기에서는 오르심과 내리심이 하나님의 섭리와 충만을 드러내는 하나임도 밝힌다.
1. 복음서 / 요14:1-14 /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본문은 이 세상을 떠나실 예수께서 남게 될 제자들에게 유달리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또 나를 믿으라’고 강조하신 내용이 눈에 띈다(1절). 이것은 그만큼 제자들이 당신의 떠나심으로 공허에 빠질 것을 우려하시면서, 당신의 떠남이 결코 서로의 이별이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차원에서 공고해진 관계(關係) 속에서의 하나가 될 것임을 확신하며 받아들이게 하시고자 함이었다. 그런 실재를 전하고자, 주님은 당신이 그들을 위한 하늘의 처소가 예비 되면,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당신 계신 곳에서 함께 있겠다고 굳게 약속하셨다(2-3절).
하지만 주님의 그런 말씀에 소화를 시키지 못한 제자 도마와 빌립의 질문들이 이어졌고, 그에 대한 주님의 답변도 잇따랐다(5-10절). 도마는 그 아버지께 가는 길을 알기를 원했고, 빌립은 아예 하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 바람에 주님은 우리 모두가 함께 궁금해할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해 주셨다.
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➁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서 나를 믿으라“(9-11절)
결국 아버지와 당신은 완전한 하나이시기에, 당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임을 알고 믿으라는 요구를 거듭거듭 하셨다(6-7, 9-10절). 이런 믿음 강조 끝에, 주님은 제자들이 그 신앙을 따름으로 인하여 일어날 매우 놀라운 결과물 하나를 소개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서 감이라”(12절). 이는 믿음이 주는 엄청난 능력을 밝히신 놀라운 증언이었다! 그뿐 아니다!
주님은 당신과의 임재와 동행을 확인해 줄 또 다른 실재(實在)를 소개하셨다. 바로 당신의 이름으로 올리는 기도(祈禱)였다! 그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주님이 행하시리라 약속하셨다(13-14절). 이 말씀 또한 참으로 놀라운 증언이다! 필요와 기도는 제자가 맡고, 그 응답과 실현은 주님께서 직접 맡으시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기도하는 자와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것 아닌가! 결국 믿음과 기도, 이 두 가지가 주님이 우리의 삶에 ‘임마누엘’(God with us) 하실 결정적인 발판들이다!
2. 구약 / 왕하 2:1-15 / “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구나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
본문에는 스승이신 엘리야가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오를 것이 예견되자, 그 제자인 엘리사가 매우 급한 마음으로 스승에게 매달리며 그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모습이 올라와 있다. 그의 요구에는 매우 절박함이 담겨 있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스승 엘리야가 보여 주었던 성령의 역사를 자기가 갑절로 받아 내는 일이었다(9절). 그것은 엘리야의 영성의 힘이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바알 우상세력과 맞서고, 여호와의 종교를 보전할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 엘리사는 그 스승의 힘을 자기라도 전승해야만 나라와 야웨 신앙을 보전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스승에게 그 성령 역사를 자기에게로 전수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엘리야는 조건 하나를 제시한다.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리라’(10절). 그 바람에 엘리사는 스승의 승천이 하늘에서 보낸 불수레와 불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국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취하게 되면서, 그의 소망대로 갑절의 능력을 행사하는 권능의 선지자가 된다(11-15절).
2) 그의 간절한 믿음과 간구(외침)가(9,12절)가 이스라엘 신앙의 생명력을 단절이 아닌 계승과 발전으로 이어가게 하였다. 스승의 성령의 역사가 나라와 신앙을 살렸다는 확실한 믿음과 그러기에 자기에게라도 그 갑절의 능력을 달라고 외치고 매달린 그 간구가, 결국 그 후의 시대와 모두를 구원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두 가지, 곧 믿음과 기도의 열매와 동일하다. 이런 방식의 구원과 생명의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믿음과 기도가 여전히 하늘 역사를 현재화하여 주기 때문이다. 교회 현장에서는 그런 모습이 어떻게 펼쳐질까?
3. 서신서 / 엡4:1-16 /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1)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거기에 합당하게 힘써 지킬 일이 있다. 겸손, 온유, 인내, 서로 용납,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1-3절, 마11:29 참조).
2)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같이,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주님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이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4-6절).
3)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에 따라 은혜를 주셨다. 그런데 내려오셨던 그 분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셨다(7-10절). 그러면서 그가 어떤 이는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전도자로,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곧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교회를 내적 일치와 성숙으로 이루려 하심이다(11-13절).
4)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로 있어선 안 된다. 그보다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면에서 자라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장성하고 충만해야 한다(13-15절). 그에게 연결된 몸의 지체가 될 때, 각 부분인 우리는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하게 되고, 각 마디도 영양을 받게 되며,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된다(16절).
O 우리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들을 힘써 지켜야 한다. 도시와 농어촌 모두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승천하셔서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한다. 굳센 믿음과 기도는 주님과 우리가 동행하고 함께 일하며 살아갈 생명줄이다. 특히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님이 세워주신 소명의 몫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자. 그날에 다시 오실 주님 맞이를 성숙히 대비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