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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총회목회자주일

관리자 2025-04-23 (수) 07:11 16일전 59  

본문) 요 3:1~15, 겔11:14-20, 롬6:3-14


오늘은 부활절 둘째 주일이다. 날씨는 매우 불규칙해도 기온은 급상승하였고 주변의 산천은 이미 녹색 단지가 되었다. 겨울의 흔적은 사라진 상태이고, 각가지 꽃들이 만개(滿開)하였다. 심지어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벌들이 있었는지-, 우리가 사는 위례 동네는 벌과 나비들의 수고로 나무의 열매들이 한창이다. 비록 지구촌 곳곳에서의 볼썽사나운 파괴와 깨어짐의 소음들도 많지만, 창조주의 화려한 솜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히 맛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이런 때 우리는 죽음을 이겨낸 부활 세상의 놀라운 모습들에 보다 깊게 접근하게 된다. 이는 이 세계를 충분히 맛보고 경험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겉보기를 넘어서 참맛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농부는 추수의 맛을 알기 때문에, 봄과 여름의 혹독한 수고의 시기를 버티며 일하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그만큼 부활 신앙은 모든 신앙 영역에서 최종 꼴인 열매와 같은 차원의 몫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활절기에 숱한 영적 열매와 그 세계에 더욱 눈이 떠야만 한다. 


사실 누군가에게 부활 신앙이 있고 없고는 눈으로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전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활 신앙 보유 여부는 그가 자신의 생명 가치를 누구에게 두고 살고 있고, 무엇을 향하여 자신의 생애를 헌신하며 살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판가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활 생명을 보유한 사람은 삶의 기준을 절대 자신의 이익 추구에 두지 않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두고 산다(7:7 참조). 즉 가슴과 영혼에 영원자를 모시지 못한 자는 결코 영원한 세상을 상속할 수 없고, 또 맛을 보며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부활 신앙과 생명의 가장 기본이 될 거듭남에 관한 말씀이 올라와 있다. 그 내용은 주님께서 당신을 방문한 니고데모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에서 나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절). 여기에서 물은 물세례를 받는 일이 분명하고, 성령은 보혜사(保惠師)를 받아 사는 일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물세례에 관련된 말씀은 바울의 로마사 말씀에서 그 내용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성령 세례에 관련된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의 말씀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겠다. 


대체로 우리는 물세례를 그리스도교의 입교인의 핵심적 절차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지만, 그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직결되어 있기에 중요한 것임을 깊이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이런 기회에 물세례 받은 내 몸과 영혼의 중요성에 새롭게 눈이 뜨도록 하자. 동시에 성령 세례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관하여서도 이해가 매우 부족한데, 그것도 역시 주신 말씀을 통해 확실히 이해하여, 내 안에 내주하시는 부활의 영인 성령의 역사에도 눈을 뜨자. 


1. 복음서 / 요3:1-15 /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의 예수님 방문은 여러 가지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바리새인들 일반은 대체로 나사렛 예수의 활동에 매우 의혹과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고, 그것도 그가 서기관 집단에 속한 일원이기도 한 니고데모가 예수를 직접 찾아뵙고, 자신이 가진 영생관을 놓고 진솔하게 질의하고 응답을 구한 모습은 일반 위선적인 바리새인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그의 방문이 당신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거나 논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히 탐구하고 확인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인지하시고, 그를 후대(厚待)하셨다. 그러면서 그의 질문을 활용하여, 당신이 평소 늘 강조해 오신 하나님의 나라에 사람들이 어떻게 다다를 수 있는지를 제대로 밝혀 주시고자 하셨다. 


1)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집단 중에서도 선생이며 지도자급인 서기관 그룹에 속한 자였다. 산헤드린 공회(公會)원의 일원으로써, 지금의 의회 의원급인 고위직의 인사였다. 그와 그의 동료들 대다수는 당시의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선생/랍비)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2절).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에 근거한 생각이었다(2:23 참조).


2) 예수께서는 방문한 니고데모의 영적 관심사를 미리 헤아리시고, 그가 관심하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일에 대하여 먼저 방법을 알리셨다. 곧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이는 니고데모를 비롯한 숱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문인, ’영생을 얻기 위해, 혹은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마10:17, 요6:28참조)라는 것에 대한 선제적인 답변을 미리 해 주신 것이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주도적으로 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다만 단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었다. 곧 ’거듭남‘(born again)인데, 이것은 ’위로부터‘를 말하는 것으로써,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게 하시는 재생(再生)임을 말씀하신 것이다(1:12, 요일3:9 참조). 


3) 니고데모는 거듭남이 어찌 가능한지를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물었다.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단 말이냐고 물을 정도였다(4절). 그래서 예수님은 본격적인 답변을 주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여기에서 제시된 거듭남을 견인할 영역이 등장한다. 곧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나라를 상속하게 될 때, 그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도 되고 들어가게도 됨을 말씀하셨다. 


4) 이는 존재의 질적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수순(手順)이기도 하다. 물세례를 통하여서는 세상에 속한 죄의 인간의 탈에서 벗어나(죽음)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자녀로 들어서게 되고, 성령 세례를 통하여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보혜사의 능력을 힘입어(거듭남/부활), 돌봄과 양육을 받아 이 세상의 삶이 육체 중심의 사람에서 영 중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구원받은 자로 살아감을 말한다. 이로써 그는 더 이상 땅의 일보다는 하늘의 일을 우선해서 살아가게 된다(12절). 


5) 이런 영적 사람으로의 거듭남은 완벽한 기적(奇蹟)이기에,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6-8절). 따라서 물과 성령을 통하여, 예수로 인해 옛 사람이 죽고 성령으로 인해 다시 살아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인간 밖인 위로부터 임한 가능성과 능력을 힘 입어 된 것임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변화된 자기를 이끌어 주시는 손길을 굳게 붙잡아야만 한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열어 주시고 보여 주시는 진리와 은혜의 세계를 눈으로 보고, 입으로 전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하늘 가족이 된 자)만이 결국 하늘에 올라가기 때문이다(13절). 


2. 구약 / 겔 11:14-20 /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본문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거나 세계 도처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밖의 관심이 예언자 에스겔에 의해서 전해진 놀라운 소식이다. 뜻밖의 관심이란, 포로 되어 끌려간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 때문에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섭리에 참여한 활동임을 밝힌 내용이기 때문이었고, 반면에 본국에 남아 있는 자들은 무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역시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는 포로 되었던 그들이 인과응보(因果應報)식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곧 포로 된 자들은 자기들의 죗값을 받았기에 그렇게 혹독하게 끌려간 것 아니겠느냐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망한 자‘, ’끝난 자‘, ’죽은 자‘, ’버림당한 자‘들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본토에 무사히 남은 자들은 무죄(無罪)하기에 그렇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14-15절). 


하지만 과연 그런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도 진정 그랬는가? 아니다. 정반대였다! 끌려간 자들 대부분은 바벨론 제국이 경계 대상으로 본 자들이었다. 그들을 그대로 본국에 두면, 가만히 있지 않고 저항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수하고 똑똑한 인물들로 간주 된 존재였다. 그렇기에 아예 그들을 포로로 데려가서, 자기들 밑에 두고 자기들 부하나 종으로 부리겠다고 해서 끌고 간 인물들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자.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신다면, 과연 누구를 택하실까? 본국에 남겨 둔 자들일까? 아니면 끌려간 자들일까? 


에스겔은 사로잡혀간 백성들을 가리켰다(16절). 그것을 입증할 내용이 바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모습에서 보여준 놀라운 모습들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철저한 여호와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능력으로 제국의 대왕과 온 나라를 뒤흔든 주역들이 되었다. 그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이심을 널리 알리게도 되었다. 포로 후기의 사건이지만, 에스더서도 바사 제국에 남아서 여호와 신앙의 능력을 입증하기도 하였다. 죽었던 민족의 부활(復活)의 역사도 바로 이 포로 된 이들을 통하여 확인된 사건들이었다(17절 참조)! 


반면에 본국에 남은 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행복했고 편안했나? 아니다. 그 정반대였다. 마치 무지랭이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진짜 버림당한 자들의 취급을 당하여 기나긴 세월을 탄식과 조롱과 주변의 침략과 무시를 당하면서, 포로들이 돌아올 때까지 온갖 수모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런 그들의 실상을 담은 곳이 바로 예레미야 애가(哀歌)가 아닌가-! 이게 바로 포로기에 펼쳐진 하나님의 손길이었고,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였다. 


에스겔이 밝힌 포로 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마음과 계획이 그랬다(18-20절). 모두가 당신의 영인 성령(聖靈)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이루어 놓으실, 기이한 은혜의 역사들이다. 


1) 하나님은 여러 나라와 이방인 사회로 끌려가고 흩어진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의 성소(聖所)가 되셔서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16절). 이는 구조적 성소라기보다는 현장과 삶에서의 예배하는 곳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고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고하신 내용이다.


2) 그들은 반드시 본국에 귀환할 대상들임을 확증해서 예고하셨다(17절). 그래서 조상들이 정착했던 바로 그 땅, 이스라엘의 계승자가 될 것을 약속하여 주셨다.


3)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옛 조상들처럼 우상 숭배하거나 신상 건립을 통한 배신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여호와께서 그들 마음에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새 마음과 새 영을 품고 살게 되면서 그동안의 돌같이 굳은 마음과 생각을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주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여호와의 참 백성이 되고, 여호와는 그들의 참 하나님이 되시게 되리라 언약하셨다(18-20절, 36:26, 롬8:2-16). 


3. 서신서 / 롬6:3-14 /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본문은 물세례와 그 의미에 대한 바울의 증언을 담고 있다. 아울러 물세례 받은 자들의 자의식(自意識)은 어떠해야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1) 세례 중에 예수의 이름으로 받게 되는 물세례는 영적으로 예수와 합하는 예식이다. 예수의 무엇과 합한다는가? 먼저는 그의 죽으심과 합한다(3절). 그가 죄인인 나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죽으신 일을 내가 받아들이게 되는 행위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으로 나의 죄의 몸도 함께 죽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다(6절). 죄에서 벗어나 의(義)롭다 하심을 얻었다(7절). 그러기에 물세례 받은 날은 내 옛사람의 장례일이기도 하다(4절).


2) 그 과정에서 나는 또한 더욱 신령한 변화에 들어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살리심으로 이끄셨던 하나님의 영광의 새 생명에 주와 함께 세례자로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4절.하). 이 점을 바울은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聯合)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는 또한 그의 부활(復活)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된다(5, 8절). 


3) 그런데 이렇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일은, 또다시 죽거나 사망이 다시 그를 지배하는 일이 없다는 분명한 특징을 가진다(9-10절). 그것은 예수의 죽음이 죄에 대한 단호한 죽으심이었고, 그의 부활 역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으면서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우리는 자신의 변화된 영적 신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품고 살아야 한다. 곧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서는 살아 있는 자다’라는 확고한 영적 정체성(正體性)을 보유하고 살아야 한다. 


4) 그럼에도 명심할 일이 있다. 확고한 정체성 보유가 곧 나를 안전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귀가 욥을 시험하듯, 나의 정체성이 진정 틀림없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점령한 고지를 지키기 위한 방어전(防禦戰)이 있음을 잊지 않는 일이다. 무엇을 지켜내야 할까? 우리 몸을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12,14절). 이를 위하여 특히 몸이 사욕에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12절). 지체가 불의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우리 자신과 지체를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며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한다(13절). 


o 우리는 누군가? 이미 물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자이다. 이 점을 깊이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이제는 보전된 이 몸을 거룩하게 지켜내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밤낮 깨어 살아야 할 이유이다. 말씀과 기도로, 겸손과 온유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이 생명이 다 할 때까지 그 행보를 감당해 내야 한다. 개인은 약하지만, 서로를 격려하고 연대하면서, 주의 도우심을 받아,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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