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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장애인주일

관리자 2025-04-15 (화) 22:45 23일전 77  

본문) 막 15:42~16:8, 욥19:23-27, 고전15:1-11 


오늘은 부활(復活)주일이다. 예수께서 사망(死亡)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날이다.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기독교는 이 세상의 그 모든 종교들 중에서 완전 독보적 구원 종교로서의 위치를 독점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어떤 종교도 인간을 가장 두려워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준 종교는 없었는데, 예수께서 이루어낸 이 완전한 부활로 인하여, 인간은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영역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이 예수의 부활 사실에 근거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면, 변화(變化)한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되고, 거기에 맞추고자 하는 변화된 의식과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그가 부활 신앙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그가 구원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가 결정된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다 목숨을 걸지 않는다. 주어진 것, 필요한 것, 좋아하는 것들을 선호하고 이용하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그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거나 목숨을 걸거나 애착하지 않고 산다. 이 세상 삶을 나그네 인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고, 자신들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돌아갈 본향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대비한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벧전1:17). 그런 점에서 육적 인생이 아니라 영적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활 신앙은 기독교가 가진 다양한 신앙의 메뉴 중에서 가장 핵심이다. 창조 신앙, 언약 신앙, 대속 신앙, 성육 신앙, 선택 신앙, 구속 신앙, 첫 열매 신앙, 고난 신앙, 승천 신앙, 재림 신앙, 종말 신앙, 영생 신앙 등등의 성격을 가진 신앙들이 즐비하게 많으나, 바로 이 죽음을 극복한 부활 신앙이 없으면, 그 모든 신앙들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신앙의 기반은 바로 이 부활 신앙 위에 확고히 섰느냐 여부이다. 


이를 위해 이번 부활절기를 맞이한 우리는 내 신앙이 분명한 부활 신앙 위에 있는지를 재확인하고, 그 신앙의 힘을 받아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피며, 또 다가오는 어떤 삶을 대비하여야 할 것인지도 준비하여야 하겠다. 동시에 부활 신앙 자체의 중요성 때문에, 그런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시험 또한 강력한 것도 기억해야 한다. ‘죽은 자가 정말 다시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라는 의문과 의심은 항상 제기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정 부활은 실재인가? 가상현실(假想現實)은 아닌가? 하나님은 부활이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무조건 부활을 믿으라고 우격다짐하신 것은 아닌가? 죽음을 끝나는 것으로 규정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고 살아나는 사실성을 담지한 부활은 분명한 것인가? 


본질적으로 참 신앙은 이성과 상식의 틀 속에 결코 갇혀 있지 않다. 물론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의 영역들을 포괄(包括)하고 있지만, 본질상 신앙은 영원자요 창조주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자연히 우리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이나 감성이나 판단에 구애됨이 없이 넘나들게도 한다. 그러기에 전능자는 인간의 생(生)의 영역도 지배하지만 사(死)의 영역도 그의 것이다. 없는 것도 있게 하시지만 있는 것도 없게 하신다. 낳게도 하시지만 죽게도 하신다. 정반대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죽게도 하시지만 당연히 또한 살게도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바로 하나님의 전능성과 영원성을 확인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건(事件)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생사(生死)란 한계를 넘어서 우리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이 진정 누구신지를 생생히 보여주신 최대의 계시(啓示)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절대 인간의 사건이 아님을 시인해야 한다. 인간에게 생존의 또 다른 방식이 있음을 알리고 깨닫게 하시며 누리게 하시려고 기적과 신비로 베푸신 일이 바로 예수 부활 사건이다. 


오늘의 세 본문은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제반 부활에 대한 낯섬과 몰이해와 불신앙을 해소시키고, 예수 부활의 사실성과 현실성을 제대로 이해시키며, 올바른 부활 신앙을 갖도록 고취한다. 그러기에 오늘의 말씀 이해의 순서는 바울의 부활장(復활章)으로 불리는 고전 15장에서의 부활에 관련한 사도 바울의 증언을 먼저 들여다보려 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의 주도적인 계시 활동을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인물로서, 자신이 왜 부활의 열렬한 증인이 되었는지를 뜨겁게 소개한다. 


복음서에서 마가는 두 사건을 입체적으로 증언한다. 15장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최후의 죽음의 실재가 어떠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고, 16장에서는 그렇게 죽어 매장되었던 예수께서 사흘 후 새벽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셨는지를 증언하여 준다. 그와 함께 첫 부활 사건이 그 현장을 체험한 자들에게는 어떤 반응과 대응의 자세를 갖게 해 주었는지도 말해준다. 


구약의 욥기가 부활절의 또 다른 증언서로 등장했는데, 매우 흥미롭다. 이는 고난의 욥이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 줄 대속자(代贖者)를 찾는 중에 영적으로 보게 된 부활의 주에 관한 모습이어서, 우리의 부활 세계에 관련된 시야를 크게 넓혀 준다. 


1. 서신서 / 고전15:1-11 / ”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 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자기 삶의 대변혁이 바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행9장 참조). 자기는 본래 예수의 교회를 박해(迫害)하던 자였는데, 이토록 교회의 사도(使徒)라는 영광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허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바리새인인 자기가 믿어왔던 인과응보(因果應報) 논리에 의한 것이라면 절대 불가한 일이었으나, 오직 용서와 자비와 긍휼의 주이신 예수에게서만 가능한 은혜의 선물이었음을 간증한 것이다(8-10절). 그러면 사도란 누구인가? 


기본적으로 사도는 예수의 부름으로 그와 삶을 함께 한 자로서, 그의 생애과 죽음과 부활의 전 과정을 증언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 조건에 전혀 걸맞지 못한 자였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그 유다의 빈자리의 몫에, 당신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성도들을 박해하던 사울을 직접 찾아와 택하시고 고치셔서, 그에게 사도란 멍에를 부여하신 것이다(행9:15). 파격(破格)치곤 압도적이었다! 후에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인 자기를 불러 세우신 주님의 뜻은, 후에 믿게 되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本)이 되게 하심이었다고 고백했다(딤전1:12-17 참조). 그리고 그렇게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은(報恩)하고자, 그는 기존의 사도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수고하며 살았다고 간증하였다(9-10절). 


이토록 교회의 사도인 바울의 배후에는 전적인 부활의 주님이 계셨다. 그러기에 그가 증언한 예수 부활과 그 능력과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는,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수와 그의 부활을 선포하고 전하는 일임을 분명히 한다. 동시에 믿는 자는 그런 예수와 부활의 소식 가운데에 들어와서 믿고 사는 자들이다(1-2절). 그는 이 소식을 아주 원색적이고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한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자기가 전한 예수와 그의 부활 소식을 굳게 붙들고 제대로 믿으면, 그 사람은 구원(救援)을 받으리라고 선언한다. 그의 구원론이 부활 예수의 신앙 위에 있음을 선명히 밝힌 것이다. 그 선포의 확실한 근거(根據)들로 바울은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을 제시했다. 


2) 첫째는 예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말씀대로) 앞서 예고하신 바에 따라 이루어진, 예언 성취의 사건들이었다는 점이다(3-4절). 이 점은 예수께서 생전에 자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련된 예고들을 세 차례나 하신 일들을 근거로 했고(막8:31, 9:31, 10:32 참조), 부활하신 후에는 제자들을 만나서 당신의 고난과 부활이 구약 예언서에 이미 있던 바대로 성취(成就)된 것임도 밝혀 주신 일임도 지적했다(눅24:44-46, 사52:13 이하, 호6:2, 슥9:9, 12:10, 13:7, 시2:7, 16:8-11,22편, 69:8-9,21, 110편 등등 참조). 


3) 둘째는 부활하신 당사자 예수께서 당신의 사람들에게 친히 찾아와 살아난 당신을 보여주셨다는 점을 증언한다. 그것도 특정 몇몇 제자들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찾으셔서 다시 살아나신 당신을 보여주셨다는 점이다(5-8절). 그것이 세상으로 하여금 그의 부활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한 확실한 증거들이었다. ‘보이셨다’는 표현을 계속 열거하였는데, 이는 곧 예수 부활은 입증할 증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게바(베드로)와 제자들이 최초의 사람이고(5절), 500여 형제들에게도 일시에 보이셨으며, 당신의 동생인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에게도 보이셨고,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자기에게까지 보여주셨다고 증언한다(7-8절). 


4) 그렇다면,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증언들과 증인들을 둔 예수의 부활은 왜 일어났고 당사자이신 예수께서는 왜 당신의 살아난 모습을 그토록 수많은 자들에게 보여주셨는가? 바로 죽어도 사는 부활 세계가 있음과, 그 길을 안내하실 분이 바로 예수이심을 세상 모든 자들에게 알리고 전하여,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도 예수와 함께 부활 생명을 상속(구원)받게 하고자 함이다(요11:25-27 참조). 그러기에 부활의 복음을 믿는 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2. 복음서 / ”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


본문은 나사렛 예수의 부활에 앞서서, 그의 죽음이 가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완전한 것이었음을 먼저 확인해 준다. 본문의 앞부분은 죽은 자 예수의 시신(屍身) 처리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의 매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생중계하듯, 알려준다. 그의 죽음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는데, 오전 9시에 매달렸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단 6시간 만이 운명하신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짧은 시간에 돌아가셨음을 보여준다. 공회원 요셉의 시신 인도 요청을 받고난(43절) 총독 빌라도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면서, 이상히 여길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일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안식일 맞이에 지장을 줄 것 같으면, 아직 죽지 않고 시달리는 자들의 다리를 꺾어서 아예 죽이는 사례들이 많았는데(요19:31-33참조), 예수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이 먼저 사망하셨기 때문이었다. 다만 최종으로 확인하고자, 한 군인이 옆구리에 창으로 찔러 피와 물을 쏟으시는 일만 있었다(요19:34). 


아리마대 사람인 공회원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정중히 받아 모시고, 바위 속에 파둔 새 무덤 안에 매장(埋葬)하고, 그 입구는 돌로 문을 만들어 놓는다(46절). 그 무덤은 아마 자신을 위해 일찍이 준비해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련의 예수 매장 행위는 두 마리아들(막달라 & 요세의 어머니)이 지켜보고 있기도 했다(47절). 


본문 후반부인 16장 내용은 매장된 나사렛 예수에게 제 삼 일 후,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지를 전한 내용이다. 그곳에 향품을 들고 찾아간 이들은 세 명의 여인이었다. 그들은 큰 돌 문 때문에 걱정을 하면서도 무덤을 찾았다. 그곳에 도착한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걱정했던 그 큰 돌이 누군가에 의하여 이미 굴러져 있었던 일이었다(1-4절). 


놀라움 속에서 무덤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찾는 예수는 안 계시고, 대신 흰옷 입은 천사를 만나면서 더 놀란다(5절). 기겁한 여인들을 진정시킨 천사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에 대하여 소식을 전한다. 그는 살아나셨고, 죽음에서 일어나 빈 무덤을 남기시고 큰 돌 문을 여시고 갈릴리로 먼저 가셨으니, 이런 사실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전해서, 그들도 그곳에서 예수를 뵙도록 하라고 명하였다(6-7절). 부활하신 날 아침은 이렇게 충격과 놀람과 떨림과 무서움으로 가득하면서 열렸다. 사망 권세를 제압하신 이가 만민의 구주로 등장하셨기 때문이다.


3. 구약 / 욥 19:23-27 / ” 내가 알기로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자신의 억울함과 그에 따른 고난을 해결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욥의 탄원 속에는, 뜻밖에도 인간에서의 기대가 아닌 오직 자신의 진심과 본심을 헤아려서 풀어주실 유일한 하늘의 대속자(代贖者-히, 고엘)에 대한 강한 신뢰와 의지하는 믿음이 담겨 있다. 물론 1차적으로는 이 땅에서의 자신의 결백에 대한 공증을 받아 내는 것이지만(25절), 그렇지 못하다면 사후(死後)에라도 신령한 몸을 입고 하나님을 뵙게 되리라며 고백한다(26-27절, 고전15:44 참조). 


욥의 이런 증언에는 당시의 소박한 내세관을 넘어 확실한 부활 신앙의 기본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모범과 감동을 안겨 준다. 이 죽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정의와 위로와 기쁨을 안겨 줄 영원자의 세상까지 미리 보면서 자신의 억울한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모습은, 그는 이미 그에게 씌워진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 이런 확고한 부활 신앙 속에 살면, 그는 이미 세상을 이긴 자이다. 


o 오늘은 마침 한국교회가 장애인주일로 지키고 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차별 없이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에 우리 모두 크게 노력해야 하겠다. 동시에 장애란 신체장애만 장애가 아님도 알아야 한다. 정신 장애, 의식 장애, 그리고 영적 장애인도 훨씬 더 많고, 그들의 행위는 더욱 무섭고 위험하기도 하다. 자신의 가슴이 답답하다고 막 떠나려는 비행기의 문을 열어젖혀서 위험천만한 행위를 하는 정신 장애, 균형 있는 생각과 판단력을 못하고 자신과 다르면 좌파나 빨갱이라며 몽땅 수거 대상으로 몰아가려던 윤석열과 같은 의식 장애,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보지 못하고 오직 육체적 물질적 시각과 판단만을 좇아 살고 있는 영적 장애인 모두도 위험한 장애인들이다.


사실 이들은 우리의 선교 대상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 자신부터 먼저 부활 신앙의 확고한 고지에 올라서야 한다. 그래야 도울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디 이 절기 통해 새 힘을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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