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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순교자기념- 제주4.3기념주일

관리자 2025-03-25 (화) 18:15 5일전 49  

본문) 마 23:13~28, 사30:8-18, 계3:1-6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이다. 불순한 일기 속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창조주의 솜씨를 드러내

는 대자연의 풍경은 오랫동안 겨울 위세에 눌렸던 우리를 무척 설레게 한다. 하지만 기후변화

에 따른 대형 산불로 인한 고통은 또 달리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이로 인하여 한순

간에 집과 삶의 터전을 화마(火魔)에게 빼앗겨 집단생활에 들어간 이재민(罹災民)들의 타는 가

슴을 생각하고, 그중에 산불 진화에 참여하다가 목숨까지 빼앗긴 네 명의 순직 공무원들도 생

각하면, 우리 삶의 환경들이 갈수록 불편해져 온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중에 오늘은 우리 총회가 제정한 제주4.3기념과 순교자(殉敎者) 기념주일을 함께 맞는다. 

매우 뜻깊은 주일인데, 이때 우리의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할까? 특히 요즈음의 한국 

교회들 모습을 생각하면, 순교자들이 목숨 걸고 지켜온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진리성이 크

게 훼손되고 파괴된 상황이라서, 오늘의 기념 주일은 더욱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해 준다. 


나는 오늘의 주제인 순교자와 제주4.3 학살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이 주제들 속에는 놀랍게도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 복을 받게 되면서 형성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두 차원의 주제들이, 매우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사건들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즉 둘이 가진 공통점은 조국 분단으로 인한 이념 대립과 체제 갈등으로 촉발된 점이라는 것이

며(-순교자 건은 다른 요인들도 포함될 수도 있다), 차이점은 순교는 목숨을 건 하나님 사랑에

나온 것이고, 저 4.3사건은 이념(理念) 때문에 이웃 사랑의 계명을 저버려서 나왔다는 점이다.


이를 위하여, 잠시 성서적 배경(背景)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우리 구원의 핵심적 틀

이 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창12:2-3에서 찾게 된다. 그곳에서 아

브라함은, 당신을 찾으신 여호와께서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서 이름을 창대하게 

하여 복이 되게 하겠다’는 축복의 말씀에 ‘아멘’하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절대적 관계로 들

어 선다. 그뿐 아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이 받은 그 복으로, 함께 복을 받도

록 하겠다’는 말씀에도 ‘아멘’하면서, 이웃 사랑의 장이라는 계약의 틀까지 마련됐다(갈3:8-9). 


이때부터 영생 구원을 받게 될 모든 사람은 이 복의 두 질서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행위에 동참하여야만 했다. 이를 위해 성경은 그 사랑이 ‘어느 정도의 사랑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서도 분명한 기준선을 제시해 주셨다. 곧 하나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야 했다(막12:30, 신6:5). 이웃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怨讐)까지도, 사랑해야 했다(마5:44, 롬12:18-21). 


덕분에 구원 메시지는 아주 간결해졌다! 누구든 이 질서를 따르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 하

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빌미로 이 계명과 언약(질서)을 무시하거나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게 

되었다. 예외는 없다! 이 점은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목숨을 걸고 교육하셨고 시범

하셨으며, 십자가에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도 입증해 주셨다. 지금의 우리 교회들과 계명들도 

바로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순명(殉名)하느냐 여부에 그 생명과 가치를 내걸

고 있다. 교회와 성도가 제 구실을 하느냐 여부도 바로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 꼭 기억하시라.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자 기념은 그들이 삶의 최후 순간에 이 하나님과 그의 

교회 사랑에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내어 바친 일들에 대한 추모요 기억이기에,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분명 순교자들은 오늘의 우리 교회를 존속하게 한 거룩한 밑거름들이다. 저들의 

목숨을 건 교회와 믿음이 오늘의 우리 교회를 존속하게 한 거룩한 불씨들이 된 것이다. 그런

데 그들 대부분은 북한 공산군 침략 앞에서 교회를 지키다 참변 당하거나, 납북되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공산 세력과 이념공세에 무릎을 꿇지 아니한 충절 인사들이

다. 그중에 더욱 주목할 순교자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1902~1950) 목사이다.


그는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 병자들을 돌보던 해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 당시, 

반란군인 안재선이 그를 친미, 예수쟁이란 이유로 그의 두 아들인 손동인과 동신을 총살하였

다. 그런데 손 목사는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이었던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되자, 그 

살인자를 용서해 달라고 요구하며, 그 사람을 자신의 아들을 삼겠다며 적극적인 구명 활동을 

해서, 결국 그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다. 곧 원수를 아예 자기 자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 바

람에 손 목사는 이념의 노예였던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여버린 것이다. 


그 후 손 목사 자신은 6.25 전쟁이 일어났어도 피난 가지 않고, 애양원의 나병환자들을 계속 

돌보다가 그곳에 쳐들어온 공산군에 의하여 1950년 9월13일에 체포당해, 여수 감옥에서 혹독

한 고문을 당하였고 유엔군이 참전으로 공산군이 퇴각할 때, 근처의 둔덕동 과수원에서 총살

되면서 결국 9월 29일 향년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 바람에 그는 진정한 성자가 됐다. 


이렇듯 그는 나병환자를 사랑으로 돌보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으로 끌어안아 

양자를 삼은 이웃 사랑의 진정한 실천자가 되었고, 공산군에게 피살을 당하기까지 목장과 교

회를 굳게 지키다가 목숨을 바친, 하나님 사랑의 참 실천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결국 손

목사님은, 이념이나 사상 등으로 한없이 높아진 분단의 장벽까지도 하나님 사랑의 힘으로 넘

어서기가 충분히 가능함을, 후대의 모든 신앙인에게 각인시켜 준 복음의 참 사도가 되셨다.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는 손양원 목사의 이런 정신을 한국교회가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

고 비판한다. 기억은 하되, 실천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같은 시대에 이런 손양원과

는 달리, 물 건너 제주에서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 그것도 같은 기독교도들과 같은 분단 이

념 문제로 인하여, 발생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원이 같은 일이었나, 전혀 다른 일이었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게 바로 제주 4.3 민중 대학살 사건이었다. 해방 직후 1948년부터 몇 

년 동안, 그곳에 진압차 들어간 우리 기독교인 중심인 서북청년단에 의하여 3-6만명에 이르는 

제주 양민들이 대학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반공 이념(理念)에 사로잡혀서, 

힘없는 양민들을 아주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다. 기독교도들이 사랑의 힘이 아닌, 폭력과 학

살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연세대 정종훈 교수는, 그때 그곳의 역사를 흑(黑)역사라 증언한다. 


(1946년 월남한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 대학부와 청년부 소속 회원들을 주축으로 극우 반공

단체인 서북청년단을 결성하게 했다. 이 단체는 북한에서 재산을 몰수당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당해 월남한 기독교인 청년들이, 반공(反共)주의를 표방하며 좌익 세력과 대립했고, 이후 

한국 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중 제주 4.3에서 무고한 시

민들에게 가한 그들의 폭력과 잔학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그들의 폭력적이고 잔학한 행위를 묵인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함으로 기독

교의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저버렸다. 그 후 그 행위를 회개하지 않고, 자기 내부에 똬리를 

튼 이런 반공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고, 신앙공동체로서의 본질을 잃으면서 

오히려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 오히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산실까지 되었다).


이웃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을 완전히 외면하고, 회개하지 못한 체, 오로

지 반공 이념을 교회의 최고 교리로 올려 세운 한국 보수교회가, 요즈음 들어, 더욱 무자비하

고 거듭나지 못한 폭력적 옛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바로 예수께서 매우 거 

칠게 야단치셨던 유대교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보였던 그 위선적 고압적인 모습들을 보여준

다. 주님은 저들 덩치 큰 예배당의 위용을 어떻게 보실까? 회칠한 무덤(whitewashed tombs)

으로 보실까, 아름답다고 하실까? 주님은 겉보다는 속을 중요하게 보시기 때문이다(23:27). 


회칠한 무덤 이야기의 근원을 본다. 유대인은 유월절 시기에 수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오는데, 그때 유대교는 죽은 자들의 무덤의 더러움을 덮으려고 정기적으로 희게 회칠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의 영적 내면이 바로 그 회칠한 무덤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신 것이다. 겉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나, 안은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28절).


요즈음 사이비가 되고, 반기독교 세력의 선봉이 된 극우 전광훈 입에서 툭하고 나오는 상대를 

향한 거친 발언을 보라. ‘빨갱이’,‘종북’,‘좌파’,‘북한으로 보내라’. 그는 실로 예수와는 아무 상

관 없는 반(反)예수. 반(反)복음의 선봉이 되었다. 어리석은 광신도의 앞잡이가 됐다. 그에게는 

나라가 두 쪽 나고, 평화와 화해가 없어도 상관없다. 자기 이익만 채워지면 무어든 매달린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의 내용은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무리의 허상에 집중한다. 복음서에

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들이 예수님에 의하여 신랄하게 탄핵당하고 있고, 구약 이사야에

서는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씀과 경고에 아예 귀를 꽉 틀어막고 살면서 온갖 불의

와 범죄에 빠져 지냈던 백성들의 죄악상들이 폭로되었으며, 계시록에서는 사데교회가 왜 살았

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인지를 지적받고 있는 내용이 올라와 있다. 그 죄악상들

에는 대략 공통점들이 있기에, 이제 몇 가지 내용들을 정리해서 살펴보겠다. 


1. 복음서는 백성(신도)이 조심해야 할 영적 지도자들이 누구인지를 전해 준다. 그 대상은 당

시의 신학자 그룹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예수님은 무려 6번이나 그들을 지목하시면서 

그들의 문제점을 특성 중심으로 신랄하게 공격하신다(13,15,16,23,25,27절). 


1) 그들은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다(13,15,23,25,27절). 사실 본래 그들은 눈먼 맹인들이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보는 눈이 없이, 하나님에 관하여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었

다. 곧 보거나 알지도 못한 체, 마치 본 양 행세하고 말하려 하기에, 그들은 결국 거짓과 외식

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음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떨까? 참담했다!  


2) 천국 문을 앞장서 닫고 있어서,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한다(13절). 

힘써 전도해서 얻은 교인들을 자기보다 더 심한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15절). 크신 하나님

을 못 보기에, 눈에 보이는 작고 지엽적인 것들에만 집착하여 응답하는 자가 되게 한다. 그  

바람에 본질과 본체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반이 허약한 신앙인이 

된다(16-23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다 감당해야 할 사람이 못되게 한다. 곧 물질 바침에는 

민감하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란 영성은 너무 빈곤하기에, 뿌리 깊은 나무가 되지 못한다. 


3) 그 바람에 그들은 신자들도 겉치레 중심의 외식주의자가 되게 하고, 자기 속에 담겨진 탐

욕과 방탕의 큰 쓰레기만 생산하게 하였다. 사람들에게만 신경 쓰게 하고, 하나님에게 인정받

는 일에는 무지했다. 회칠한 무덤 같은 지도자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쓰레기 신자들이었다.


4) 지금 한국교회 일각에는 신형 서기관과 바리새인 지도자들이 우매한 성도들을 흥분시킨다. 

부산의 손현보는 온통 설교를 ‘이재명 죽어야 하고 망해야 한다’는 데에 집중한다. 장신대 교

수 김철홍은 윤석열을 예수 버금가는 인물이라고 떠들고 있다. 은퇴교수 소기천은 이재명 암

살이 성공하길 빈다며 축복한다. 한경직의 후예인 갈보리교회 박조준 원로는 지금의 싸움을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싸움이라면서, 교인들을 진영 대립 속에 몰고 있다. 참 큰 일이다! 


2. 예언서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말씀을 경멸하며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회중들을 견책한다. 

1) 본문은 유다 왕국이 바벨론 제국에 멸망 당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은 이미 여

호와께는 마음과 귀를 막아놓았고, 주변 제국의 허망한 우상 신들에 빠져 살고 있었고, 제국 

사대주의에 몰입해 있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음성에는 알레르기를 일으킬 정도로 부정적이

었고 업신여기고 있었다. 자기들 듣기에 좋은 말만 해 주는 선지자만 따르고 원했다(9-12절). 


2) 이에 여호와는 그런 그들에게 결국 멸망을 선고하신다. 그들의 멸망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

이다(13절).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같이 가차 없이 무너진다(14절). 하나님을 피해서 멀리 

도망가도 허사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과대망상에 빠져봐야 다 망하고 너희 남은 자들은 

마치 산꼭대기의 깃대나 산마루의 기치와 같게 외톨이 신세가 될 것이리라 하셨다(16-17절). 


3) 그래도 하나님은 그런 죄인들에게 살길은 항상 열어 놓으셨다. 곧 그들이 기다리는 여호와

께로 돌아가는 일이다. 돌아와 잠잠하여 신뢰를 얻게 되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새 힘

을 주실 것이다(15절). 결국 정의의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내리기 때문이다(18절). 


3. 계시록에서 주님은 자기 부족을 모르고,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교회는 ‘산 교회가 아니라 

죽은 교회라 선고하신다. 

1) 소아시아 7교회 중에서 사데교회는 가장 걱정이 없는 교회였다. 이웃 교회들처럼, 박해도 

없었고, 재정 부족도 없었으며, 사이비에 시달리지도 아니 하였다. 그래서 자기만족과 행복에 

깊이 젖어있던 교회였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

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1절). 주인이 내린 청천벽력의 책망이었다! 


2) 무엇이 문제였나? 부자 도시와 풍요에 취하여, 성도임에도 방탕과 쾌락 추구로 악명이 높

은 도시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적 타락에 젖어 사는 자들에 편승한 일 때문이다(2절). 그러

기에 그들은 다시 주의 말씀에 마음과 귀를 열어야만 한다. 나태와 타락을 회개해야 된다(3절

). 그래서 그들 중에 깨끗한 믿음을 유지하는 이들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래서 흰 옷을 입어

야하고, 그 이름이 하늘 생명책이 오르도록 해야 한다(4-5절). 무기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O 다시 우리의 선 자리, 앉은 자리를 확인하자. 교회는 이념이 아닌 사랑을 붙잡아야 한다. 

동족의 대립이 아닌 화해를 선택해야 한다. 제국의 쫓기보다는 절대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

다. 그런 점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손양원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건 

가, 아니면 저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막고 사는 타락한 지도자와 무리들의 자리에서 함께 망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시간은 여유롭지 않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서 의로운 자 중심의 

역사를 이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힘차게 살아가야만 한다. 힘들고 혼란해도 

구원의 길을 선택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큰 승리와 기쁨을 안겨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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