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23:1~12, 전9:11-18, 고후11:19-30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날씨는 봄 속의 겨울이다. 상당한 눈이 간밤에 온 나라를 덮기
도 하였기 때문이다. 일기 불순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불규칙적인 흐름이 계속 이어가
고 있음이 다소 불안스럽다. 그만큼 기온의 평상적 흐름이 이미 깨어졌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류는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해변에도 많은 걱정을 안겨 주고 있다. 평소에 잘 잡히
던 물고기가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수온의 상승으로 조개 양식업이 폐사(斃死)하기도 한다.
이런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삶의 모습은 우왕좌왕이 아니라, 중심 잡고 살아가는 일이다.
지금은 우리 인생의 중심 잡기가 가장 큰 과제인듯하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 살면서,
뜻하지 않게 갖게 된 직간접의 이름들 만해도 상당하다. 그것만 생각해도, 삶의 무게는 무척
버겁다. 개인 이름 외에도, 배우자의 아내와 남편이란 이름, 자녀들의 아빠와 엄마란 이름, 누
구의 자식과 조상이란 이름, 교회에서만도 따라붙은 숱한 이름들, 직장과 사회에서도 유의미
하게 안게 된 이름들도 많다. 문제는 이런 이름이 일단 자기에게 붙으면, 그것이 곧 자기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붙은 이름은 더욱 버겁고 중요하다.
그중에서 내가 예수를 만나 안겨 된 이름들도 적잖다. 하나님 자신을 상대로 한 이름은 자연
인 이름 이외에도, 그의 자녀, 그의 종, 그의 백성, 그의 사람 등등이다. 그로 인하여 붙게 된
세상과 교회와의 관계로 인한 이름도 많다. 목사, 목회자, 주의 종, 사역자, 설교자, 노회원,
노회장, 총회장, 기타 직분에 관련된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름값
이다. 한 사람이 탁월하면, 같은 이름 소유자들도 덩달아 즐겁다. 하지만 부정적인 인물이 되
면, 무척 괴롭다. 요즈음 한국교회 목사들이 큰 곤혹을 당한다. 전광훈이나 손현보와 같은 인
물들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연대감을 벗어나기 어렵기에 안게 된 홍역이기도 하다.
오늘 세 본문의 내용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범사에 핵심에 집중하여 살도록 이끈다.
변두리 인생이 아니라, 주인 인생이 되라 하신다. 과시나 위선적 인생이 아니라, 실무적 필요
한 인생이 되라고 하신다. 외형에 신경 쓰는 존재가 아니라 내실이 탄탄한 인물로 살라고 하
신다.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할이 중요한 것임을 명심하고 살라고 하신다. 입으로 말
하는 사람보다는 행위로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아울러 세상에서 잠깐 후면 시들어질 꽃과 같은 자들의 모습에 마음이 팔리지 말고, 모두에게
도 유익하고 길이길이 그 향기가 남아 있게 될 일들에 관심하며 할 일을 찾으라고 권하신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다시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지금 약
4,000년 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이름과 가치가 상상을 넘어선 무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껏 모든 믿는 자들의 어버이이며, 특히 장노년 세대에 들어선 이들의 어
른으로써,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지를 안내하는 영원한 가이드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그가 그런 독보적인 위치에 도달했을까?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로써, 범사
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군더더기가 없는 응답적 삶으로 우리에게 믿음의 스승이 되었기 때
문이다. 그는 복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을 향해서는 목숨을 건 사랑으로 응답하였고,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는 그가 받은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자들의 이웃 사람의 참 길잡이가 되었기
에 그렇다. 그래서 그의 진정한 자손이 되면, 누구나 하늘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서신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매우 특히 한 것을 자랑한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
하면서 받았던 각가지 특별한 내용들이다. 자기가 세상과 만민에게 이룬 것을 자랑하려는 것
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온갖 험악한 것들을 증언한다.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있다.
그는 그 내용들을 일일이 열거까지 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세
우려고 일하게 된 과정에서, 직접 당하며 얻어낸 각가지 수고와 고난과 염려거리들이었다. 이
는 실로 우리의 인생 최후에 주 앞에서 무엇을 자랑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 주는 것들이다.
1. 복음서 / 마23:1-12 / “ 너희 중에서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본문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위상에 있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로 시작된 그리스도인(교회 공동체)이 당시에 어떤 차이점를 보이고 있는지를 구별하여
밝혀 주고 있는 내용이다. 요약하면, 당시의 기존 종교인 유대교가 보여 준 리더십과 새 종교
로 나타난 기독교의 리더십의 차이가 무엇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모습들이다.
그러면 예수님에 의하여 지적된 것들로서,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그들의 교우들에게 보여주었던 지도력은 무엇이었나? (2-7절 참조)
1) 그들의 자리는 모세의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였다(2절). 그래서 당시의 교우들에게는 거의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이 전하고 가르치는 말은 괜찮았다. 하지
만 그들은 전하기만 했지, 자신들은 그 내용대로 행하지 아니했다. 실천 현장에는 그 목자들
은 없었고 양들만 모여 있었다. 그 바람에 그들 공동체는 ‘말씀 따로 행동 따로’ 도는 모순이
드러났다. 목자 없이 양들만 들판에다 몰아넣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신 주님
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하셨다. ‘그들의 말은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3
절). 한마디로 모범과 모델이 되어 주는 십자가 없는, 말과 입술만 앞세운 허세(虛勢)들이었다.
2) 그러면서 주님은 그들 리더십의 맹점과 잘못된 점을 이렇게 평가하셨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들은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4절).
그러면서 그들의 위선적 행태와 그들이 보여준 겉치레 중심의 태도들을 상세히 지적하셨다.
-‘ 자기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여 옷 술을 길게 하
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선생)라 칭함
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5-7절). 이런 종교의 얼굴과 가슴 때문에, 그곳엔 생명력이 사라졌다.
3)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인이나 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참 신앙인이요 교회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처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셨다. (8-12절 참조).
첫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애쓰거나 그들의 나를 향해 높여 주는 표현(칭호)들에 신경 쓰지
말라. 우리의 진정한 선생이나 랍비는 오직 주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모두 다 하나요 똑같은 배우는 자들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도자라 칭함받는 것도
경계하여야 한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8, 10절 참조).
둘째, 아버지라 부를 분도 여호와 하나님 오직 한 분 뿐이시다. 물론 나를 낳으신 육신의 부
모님은 계시지만, 그럼에도 진정한 아버지는 나를 계획하시고 존재하게 하시며 이 세상에 당
신의 깊은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의 육신의 부모님을 앞세워 이렇게 보내주신 여호와 하나님
뿐이심을 명심하고, 그를 전심전력하여 아버지로 섬기며 받들어야 한다(8절).
4) 결론은 인위적이고 조작하는 형태의 삶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다. 곧 스스로 높아지려는 행
위나 스스로 큰 자가 되려는 행위는 절대 우리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물론 큰 자가 되고, 높
은 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주변 이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일 때
이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얻게 된 것이야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온유와 겸
손으로 자신을 낮추면서 이미 모든 사람으로부터 큰 자가 되고 높아진 자가 된 예수님은, 스
스로를 높이면서 모두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다가 모두의 낮아진 사람이 되어 버린 유대 지도
자들과는, 아주 확실히 비교 우위에 있는 분이 되어 계셨다(17-18절, 마11:28-29 참조).
2. 구약 / 전9:11-18 /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들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
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전도서 지혜자는 모든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재앙의 날이 닥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마치
물고기가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처럼,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
연히 임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비록 그때와 그날은 언제인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때는 피할 수 없이 닥쳐온다는 점을 지적한다(12절). 이는 피조물에 안게 된 숙명과 같다!
그런 공통적인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특별하고도 자랑스러운 은사나 능력
과 자랑거리들로 인하여 한때 온 세상의 주목을 받고 특출한 인생살이를 하게 됨에도 불구하
고, 그들의 최후는 결국 모두와 전부의 승자가 되는 것만은 아님을 지적한다(11절).
예컨대 빠른 경주자들, 용사들, 지혜자들, 명철자들, 지식인들이라고 모두가 안심 지대에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앞길이 보장된 것도 없다. 이런 점에서 스타이면서도 꾸준하게 한 시
대를 주름잡듯 인기나 권위를 누리며 사는 인물은 거의 없다. 물론 극소수의 꾸준함을 견지하
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인생에 몰려온 급격한 부침(浮沈)의 화살을 피하지 못한 체,
인생의 허망함에 빠지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감스러워도 이런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자는 바로 자신의 꽃 피는 시절을 살리고, 더불어 꽃이 떨어지는 시절까지
도 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 특히 후자에 대한 무방비는 인생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고 말 것
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반면에 이때 지혜로운 것은 비록 인생이 화려하지 못하고 지극
히 평범해도, 그때를 즐길 줄 알고 감사할 줄 알면서 주변과 더불어 탄탄히 사는 삶을 견지하
며 지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이들은 부침의 충격이 경미(輕微)하기에, 삶의 상실감이나 불행
감도 훨씬 가볍게 넘어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가난한 지혜자’의 소리나(15절)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들’이 우매(愚
昧) 무식(無識)한 자가 발하는 큰 소리보다도 훨씬 더 낫다는 지혜자의 권고를 경청해 둘 필
요가 있다(17절). 특히 요즈음의 우리나라 현실에서처럼, 무지몽매한 권력자의 무책임한 비상
계엄령(호령) 때문에 온 나라가 밤잠을 자지 못하고 생존의 기반마저 무너져 고통을 당하게
된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경고가 우리에게 가슴에 주는 울림이 더욱 큼을 발견하게 된다.
지혜는 확실히 무기(武器)보다 낫다(18절). 무기를 앞세우면, 대립과 긴장으로 편 가름이 형성
되어 모두를 힘들게 하지만, 지혜를 발휘하면 서로의 갈등을 해소하면서 화해와 평화의 마당
을 이루게 되어 모두를 활발하게 살린다. 하지만 오늘의 지혜자는 여기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
지 않고 경고한다. 죄인 곧 실수를 불러오는 한 사람이, 오랫동안 쌓아온 많은 선을 일시에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실로 참 지혜가 실수 없이 발휘되도록 겸손의 기도가 꾸준히 요청된다.
3. 서신서 / 고후11:19-30 / “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
분문은 바울의 서신중에 ‘어리석은 자의 연설’(고후11:22-12:10참조) 부분의 일부이다. 본래
하나님의 종에게 금기(禁忌)하는 일은 자신의 자랑을 외부에 늘어놓은 일이다. 하나님의 종으
로서 당연한 일을 인간의 위로나 평판을 구할 목적으로 자랑처럼 늘어놓은 일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어리석은 일임을 알지만, 자신의 자랑거리를 내어놓으면서 상대방
설득에 나선다. 그 내용은 주님과 복음과 교회들을 위해 당한 수고와 고난에 집중되어 있다.
까닭은 자신의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일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1) 먼저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의 가벼운 처신들을 힐난한다. 그의 대적자들이 바울에 대하여
비판과 공격을 가한 일들에 대하여, 교우들이 그게 사실인 양 기쁘게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
모습 때문이었다. 적대자들은 바울에게서 사도권의 문제, 언변의 문제, 자비량 선교의 문제 등
을 놓고, 등뒤에서 교우들로 하여금 바울을 불신하며 등지게 하고자 시도하였는데, 그게 적잖
은 부정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어서, 바울이 서신을 통하여 엄히 질책하였다(19-20절 참조).
2) 먼저 바울은 자신이 보유한 사도로서의 탄탄한 몇 가지 기반들을 상기시킨다. 팔레스틴 출
신 가문인 히브리인임과,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이스라엘인임과, 약속의 상속자이기도 한 아
브라함의 자손임과,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고난과 수고의 표지로서의 그리스도인이란 점에서
자신은 그 어떤 주의 일꾼들보다도 지극히 합당한 자임을 역설한다(21-22절 참조).
그중에서 그는 유독 자신이 예수와 그의 복음과 교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당한 시련과 고난
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인 사례들을 세세히 열거하며 소개한다. 실로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그의 생생한 수난사였다. 이 점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 더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자리에
서 살아왔음을 알린 것이다(23-27절 참조). 이 증언은 또한 우리가 무엇으로 자신이 진정한
예수의 사람인지를 입증하고자 할 때, 내놓아야 할 핵심적인 자료임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한
것들이다. 그렇다. 천국은 입술의 증언만은 부족하다. 행위의 증표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3) 끝으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
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
타지 아니하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라’(28-30절). 바울은 모두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언제나 목자의 심정을 품고,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기로서는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로 삼고 있음을 그렇게 겸손히 고백하였다.
O 그렇다. 핵심은 내가 어떤 자리에 앉았느냐 어떤 위치에 섰느냐가 아니다. 껍데기로 대답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내 마음과 관심의 핵심을 드러냄이 중요하다. 행위로 나의 진정성을 보
여 주어야 한다. 곧 내가 예수 말씀의 자리에 서서 살아오고 있느냐, 내가 예수의 십자가 고
난과 시련을 걸머진 삶을 이어받아 살아왔느냐에 있다. 나에게 예수의 사람이라는 흔적(痕迹)
이 새겨져 있느냐에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을 이번의 사순절 주님과 함께하는 행진에서 우리는
확실히 확보해 두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