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10:17~31, 전5:10-20, 약1:2-11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봄기운이 완연하여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추위의 미련도 거
세다. 그러니 부디 몸 관리 유념하셔서, 모두 다 건강히 이 환절기를 이겨내시길 빈다.
지난 주일에는 남원제일교회(장효수목사 시무)의 초청으로 주일 예배 강단에서 증언하는 뜻깊
은 시간을 가졌다. 교회창립 제120주년을 맞이하면서, 교회는 지난 역사의 흐름을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현재 상황도 점검하고, 다시 시작할 미래를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를 듣기 위하여
다양한 행사들을 준비하면서, 나와 같은 증언자도 초청하여 마음을 열며 듣기도 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현장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되는 일은 이 교회가 같은 남원 지역에 5교회를 분립 또는 개척했던 일이었
다. 그중에 두 교회는 같은 남원 시내 안에 완전 분가(分家)를 시켰다. 성전 땅도 사주고, 교
역자도 파송하며, 교인들 일부까지도 따라 보내서, 아예 독립교회로 출발하게 한 일이었다. 참
놀랍고 혁명적인 결단이었다. 사욕이나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결단을 한 것이다. 이
런 조치는 거의 고 유재천 목사(총회 제80회 총회장) 시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어서,
그분의 인격과 능력과 넓은 품을 새롭게 엿볼 수 있기도 했다. (분가교회는 그 후 향린교회를
통하여, 강남향린교회, 들꽃향린교회, 섬돌향린교회 등으로 확산된 사례로도 이어졌다).
주일 오후 집회는 그렇게 해서 세워진 6교회들이 처음으로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며 성찬
식까지 함께 하였다. 자신들은 남원제일교회란 주님의 교회에 뿌리를 둔 거룩한 하나의 교회
임을 함께 고백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더욱 가까운 형제자매로 살아갈 것을 다
짐하는 자리였다. 그러면서도 지역 안에 있는 빈곤한 교역자의 생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
로가 주머니를 열어 서로 섬기는 교회로 나아갈 것도 다짐하였다.
초대교회 모습을 엿보게 하는 감동의 시간이었다. 남원 지역의 교회들이 모 교회와 함께 성서
적 미래형 교회로 진출할 것을 기대할 만할 은혜의 시간이었다. 요즈음 거의 모든 교회들이
각자도생(各自圖生)하기에도 힘겨워하는 때인데, 이렇게 울안에 있는 연약한 형제를 먼저 돌보
기를 다짐하는 일은 얼마나 반갑고 감사한 일인가? 부디 교회 간의 이런 돌봄과 섬김과 공존
공생 공영의 모습이 온 총회와 전 노회들로 확산하기를 기도한다.
이런 중에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재물이 많은 어떤 한 사람이 영생(永生)까지도 얻고 싶어서
주님께 나아와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하겠느냐’고 묻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사람을 보면, 매우 고무적이다. 그것은 부자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생
명에 대한 관심과 갈증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가 평소 영생의 삶을 관심하
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꾸준히 실천하고 지내온 모습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노출된 결정적인 문제가 무엇이었나? 바로 자기가 관심하며
붙잡아 두고 싶어하는 대상인 하나님과 재물에 대한 선택적 정리(整理)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는 점이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들에 비교적 충실히 응답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하나님 신앙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 주신 계명들은 힘써 지켜 살아왔으나,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그의 나라와
공의를 위하여 지켜 행하기를 원하시는 차원의 ‘내려놓는 일’, 곧 ‘버리고 따르는 일’에 까지
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한마디로 ‘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까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주님이 지적하신 ‘한 가지 부족한 것’의 실체(21절)가 바로 그 점이었다!
그 바람에 그의 신앙은 단순히 윤리와 교훈적 차원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신앙의 가장 핵심
적 차원인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포기와 자기 부정의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이다. 곧
참믿음만이 가능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취하여야 할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차
원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 점을 확연히 드러나게 한 것은, 바로 그가 꽉 쥐고 살아온 재
물(財物)이었다. 그 점을 예수께서 예리하게 지적하시자, 그는 충격을 받아 등지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신앙의 마지막 보루인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작 영생에
필요한 영적 준비는 제대로 갖추지 못한 까닭으로, 고개를 떨구고 등지고 떠나고 말았다. 그
렇다면 대체 그를 그 시점에서 낙마(落馬)하게 만든 재물이 무엇인데,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까? 그것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 한계는 어떤 것인가? 신앙인은 대체 그 위력적인 세상의 또
다른 신적 위상을 가진 재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이제 살펴보자. 나는 지금 재물 신에게
굴복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 신에 승리하며 사는지. 다른 본문에서 확인하자.
1. 복음서 / 막10:17-31 / “ 예수께서 이르시되 — 나와 복음(福音)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자
매나 부모자식이나 전토(田土)까지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
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 ”
본문을 보면, 영생을 얻기 위한 길은 무척 긴장해서 좇아야 하는 길이 분명하다. 이 부자가
예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17절)란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그는 영생에
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자는 아니다. 매우 근접해 있기는 한데, 자기가 무엇이 더 필요한
지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나온 질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자기 정도의 수준이라면
구원의 합격증 정도는 받지 않을까 싶은 나름의 자부심에서 나온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런 그에게 자신의 시선을 보다 냉정히 갖도록 촉구하시는 말씀을 던지셨
다. 곧 그에게 부담되게 말씀하실 당신을 선하다 평가하려는 말을 미리 경계하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만의 선하심을 내세우셨다(18절).
주님의 그를 향한 점검의 일차 기준은 십계명 속에 담긴 이웃 사랑의 부분들이었다. ‘-하지
말라’는 금지 계명들과 함께 제5계명인 ‘부모 공경’을 점검하셨다. 그의 대답은 매우 밝았다.
그 계명들은 자기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살아왔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런 그를 대견해하셨다.
그래서 그가 당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
셨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사전에 떨쳐버려야 할 장애가 있음도 보셨다. 그가 가진 많은
재물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에게 매우 구체적인 한 가지를 가감(加減) 없이 단호히 요구하셨다. ‘너에게
는 아직도 부족한 한 가지가 있다. 네가 지금 재물이 많아서 땅에서의 부자로 살고는 있지만,
그걸 움켜쥐고 살고 있는 한, 하늘 부요(보화)까지 얻어낼 수 없다. 네가 진정 하늘 부자가 되
기를 원한다면, 그 재물을 과감히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버려)라. 그런 후에 가벼워
진 몸과 마음으로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하늘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21절, 눅19:1-9참조)
주님의 이런 요구의 배경에는 그를 통한 아브라함 자손의 참모습을 그에게서 이루어보게 하시
고 싶은 심정이 있었다고 보인다. 아브라함이 받은 두 번째 복은 그와 그의 후손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창12:3 참조). 그런데 현재의 이
젊은이는 자기의 복은 풍성한 데, 자기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 이웃이 없었다. 곧 도울 이웃
이 없고, 자신의 복을 공유할 대상이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물질의 부자는 되
어 있었으나, 신앙과 영혼에서는 아주 빈곤한 자였다. 삭게오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할 자였다.
결국 주님의 예기치 못한 날카로운 대안적 행동 요구에,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부자 청년은 슬
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가고야 말았다(22절). 그가 떠난 후, 주님은 부자의 천국행이 크
게 어려움을 밝히셨는데, 제자들의 반응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랴’라며 갈등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역시 희망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개입되면, 못할 일도 아님을 밝히셨
다(23-27절 참조).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될 자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온전히 따른 제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말씀은 이렇다
(28-30절).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에게는, 그의 필요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서 영육간에 부족함이 없도록 온전히 책임져 주신다는 진리를 밝히신 내용이다(마6:33참조).
2. 구약 / 전5:10-20 / “그가 모태(母胎)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
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
그리스도인에게는 재물이나 소유에 대한 기본적이고 올바른 인식이 대단히 중요하다. 금은이
나 소득 같은 재물이나 자산은 본질적으로 인간에서 만족을 안겨주지 못한 것이다(10절). 아
무리 많이 가져봐야 자기 것은 극소수의 몫일 뿐이고, 압도적인 나머지는 결국 모두 다른 사
람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11절). 그러기에 노동자는 차라리 편한 잠을 자지만, 소유주인 부자
는 그 쥔 것을 관리하고 지키려고, 편한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11절).
지혜가 필요하다. 재물은 삶에 매우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재물이 자기에게 폐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않다(13절). 재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지는 폐해
는 절대 피하는 것이 좋다. 또 재물은 기본적으로 내 손안에 있을 때, 유효하지 어느 순간 재
해나 재난을 당하면, 금방 바람에 날리듯 사라진다(14-16절, 욥 참조). 그렇기에 재물에 의지
하고 산 사람은 한순간에 완전히 망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벌거
벗고 와서 벌거벗고 떠난다) 아닌가!
그러기에 ‘재물 의지 인생은 마치 바람을 잡으려고 수고를 하는 자’의 모습일 뿐임을 명심해
야 한다. 실로 큰 불행에 빠질 인생이다. 그런 사람의 결과는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
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17절). 복음서에서의 부자 청년이 바로 그런
위험 중에 빠져 있음을 주님이 보신 것이다. 그래서 소망의 삶에로의 방향 전환(轉換)을 요구
하셨는데, 그가 아직 준비되지 못한 자라서, 그런 소중한 말씀을 못 받고 떠난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인생이 삶의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지혜자는 이렇게 전한다.
먼저 사람은 자기의 전 생애를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자각하여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먹고 살도록 재물(財物)과 부요(富饒)를 주시고 있음을 알고, 그중에 자기 몫으로 주
어진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임에 감사하며, 그것으로 먹고 마시며 수고함과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삶이 지극히 행복한 것임을 고백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자기 생존의 때도 전적
으로 조물주의 손안에 있음도 명심해야 한다. 자신 분수를 아는 자에게 하나님은 선히 응답하
신다(18-20절).
3. 서신서 / 약1:2-11 / “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 정함이 없는 자로다”
교회의 사도인 야고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두 마음을 품어 그 믿음이 흔들리고, 그래서 구
한 것은 많지만 결국은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종류의 신도들이 된 일에 대하여 매우
가슴 아파했다. 그러기에 두 마음을 품는 일을 엄히 경고하였다. 시험들은 많지만, 그중에 가
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많이 걸려 넘어지는 일인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붙들고 섬기려는
태도에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두 주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섬김의 주이실
뿐이다. 재물과 명예로 사업이나 출세도 꼭 필요하면, 그것의 결정권자인 여호와 하나님께 진
실하게 구해야 한다. 이것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시험과 시련은 끝없이 밀려오게 된다.
마귀가 그를 아주 얕잡아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그 믿음 위에 서 있으면, 그는 시련을 넘어오는 형통(亨通)의 삶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붙잡을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물질도 내 미래도 그분께 구하여 그분의 은혜로 주신
내용들로 받아내면 무사하다. 물질은 구할 것도 아니고 매달릴 것도 아니다. 주신 분의 뜻을
따라 잘 사용하며 하나님 영광의 도구가 되도록 사용하면 된다. 하나님 없이 물질과 소유 자
체에 매달리면, 그게 바로 우리가 패망에 빠질 길이다. 재물을 신처럼 좇으면 그게 죽음이다.
두 마음은 절대 안 된다! 조금 힘들어도 인내와 겸손으로, 모든 것을 주를 통해 해결하라!
소유나 재물이 빈곤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일도 위험하다. 그것도 큰 시험이다. 그
는 자신의 빈곤과 그로 인해 힘든 생활을 하고 사는 이들을 더욱 어여삐 여기시고, 다른 측면
에서 더욱 채워주시려는 여호와의 손길을 외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빈곤도 감사할 수
있을 때, 그는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놀랍게 뵙게 될 것이다. 불평불만은 답이 아니다.
부요한 자는 늘 조심해야 한다. 항상 겸손해야 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한다. 한순
간 쇠잔하게 하시는 여호와가 그의 행보를 늘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9-10절 참조).
o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주님을 따르는 이 사순절기에, 우리는 내 신앙
의 가벼움을 점검하고 회개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과 재물, 말씀 복종과 육신의 욕망, 영과 육
사이에서 여전히 애매모호하고, 우왕좌왕하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듯한 두 마음을 품
은 자의 모습은 아닌지를 깊이 점검하고 정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물질을 굴복시켜야 한다. 내 인간 재능이나 자랑거리들도 복종시켜야
한다. 필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 고(告)하고 그분의 선하신 허락으로 받아 사용하며 살도록
질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 오직 여호와만이 나의 주님이심을 영원히 고백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