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성탄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송년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성탄후(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송년주일

관리자 2024-12-28 (토) 21:20 19시간전 16  

본문) 눅 2:41~52, 삼상 1:19-28, 히 2:9-18


오늘은 성탄 후 첫째 주일이다. 동시에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2024년을 보내는 마지막 주일인 송년주일이기도 하다. 아직도 내란 사태에 종료가 되지 않아서, 온 나라가 다소는 어수선하고, 국민들이 받는 피해가 엄청나지만, 그래도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이 다행이다. 특히 지난 번 남태령 고개에서 있었던 농민들의 트렉터 시위에서 보여 준 우리 국민들의 깨어 있는 모습은 추운 계절을 보내는 우리 스스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특히 어린 젊은이들 십만 명이 넘는 숫자가 농민 시위를 가로막은 경찰대를 뚫게하면서, 시민과 농민들의 연대를 이룬 일은 우리나라 시위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본다. 특히 농민들의 독재정권에 항거하면서 전라, 경상도 양쪽에서 몰고 온 트렉터들이 경기도와 서울까지 진입해 온 일은 전봉준의 동학혁명도 이루어내지 못한 커다란 업적(?)으로도 평가받을 만하다. 

부디 연말연시, 우리 내란 주범자와 일당이 모두 정리되고, 새 질서로 시작된 희망의 새해 새 아침을 맞이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오늘 주신 세 본문 말씀은 소년 예수의 첫 예루살렘 성전 나들이를 전하는 내용이다. 소년 예수님은 비록 나이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 영혼은 하늘 아버지의 독생자이셨기에, 성전을 보시는 마음이 아주 남다르셨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성전을 그냥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칭하지 않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신 것이다(49절). 이를 보면서, 과연 우리 인간들 중에 누가 교회 성전을 보면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만큼 예수님의 생애는 세상 전체를 끌어안고 사셨지만, 그러나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늘 아버지를 향한 예배와 말씀이 선포되고 그곳에 모여서 그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고 사는 그의 백성들의 요람인 지상의 성전(聖殿)인 교회에다 뿌리를 두고 계셨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오랜 조상 중의 하나인 사무엘 선지자의 성장 과정에서도 밝혀진 모습에 연유하기도 한다. 그는 그의 부모에 의하여 그 어린아이 때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평생(平生)을 여호와께 드리게 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아, 평생 여호와의 성전의 일꾼으로 살았고, 백성들의 사사로 나라와 백성을 돌보면서,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도록 이끌었다. 


서신서인 히브리서는 이 구약의 성전이 신약의 교회 공동체로 전이(轉移)된 상태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에는 여호와의 집의 개념도 더욱 강화되면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고, 성도들은 그의 자녀들로 칭하였다. 그러면서 성도 사이에는 형제요 자매로 불렀다. 가족 개념이 훨씬 더 강화된 것이다. 가족은 혈연 중심인데, 교회의 가족관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공유받은 일을 고백하면서, 그 예수의 피를 나눈 하나님의 가족과 형제자매를 인식하며 지내게 되었다. 


사실 성도들은 평생을 한 교회만 섬기는 경우가 허다하고, 사정상 이동한다고 해도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기에 평생 한 교회에서 주일마다 아니 모든 집회마다 계속 참석하면서 함께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일은, 사실상 교회 가족이 친가족보다 훨씬 더 가까운 가족이 될 수밖에 없다. 친자식도 멀리 떨어져 지내면 어쩔 수 없는 일을, 교회의 성도들 사이는 친가족 이상으로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힘이 되어 주지 아니한가!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교회는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성도가 서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교회를 다시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을 찾아보자.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친부모도 따라가시지 않고, 그곳에 머물면서 그 성전의 사람들과 대화와 토론으로 당신의 아버지의 뜻과 세계를 보더 더 호흡하고 싶어 하신 예수님의 그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우리의 교회 사랑의 정도를 더욱 발전시켜 가도록 하자. 


1. 복음서 / 눅2:41-52 /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


본문은 소년 예수 시절에 관련된 유일한 복음서의 기록물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소년으로 13세가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출입을 시작하면서 사실상의 성년으로 새출발을 하게 되는 예식을 갖는다. 마치 개신교에서 부모의 신앙에 따라 아기세례를 받았던 유아세례자가 성장하여 고등학생 정도가 될 때, 자기의 주체적 믿음에 따라 평생 신앙인으로서의 출발을 공인받게 하는 견신례(堅信禮)적 성격과 흡사하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유월절 예루살렘 성전 예식에의 참여는 좀 일렀다. 12살 때에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년 예수의 성장 속도가 매우 빨랐음을 엿보게 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미 소년 예수의 지혜가 성전의 인사들도 놀랍게 여길 정도였기 때문이다(47절). 


고향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대략 120km 정도여서, 순례자들에게는 대략 3일 길의 나들이 코스였다. 이런 중에 예수 가족에게는 커다란 해프닝이 발생하였다. 함께 올라갔던 아들 예수가 제사 일정을 마친 후, 부모를 따라나서지 아니하고 계속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고 계셨기 때문이다. 처음엔 부모들이 예수를 실종(失踪)한지도 모르고 하룻길을 왔다가, 함께 올라갔던 친족과 친지 등을 통하여 소수문해도 아들을 찾지 못하게 되자, 뒤늦게 무려 사흘 후에까지 거슬러 다시 예루살렘까지 올라와 보니, 아들 예수는 그때까지 성전에 계시면서, 그곳의 선생들과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고 지내고 계셨다. 


그러면서 그곳 랍비들의 물음에 대한 답변과 지혜에서 그들 모두를 매우 놀라게 하고 계셨다(47절).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예수님은 모처럼 당신의 아버지 집을 찾은 아들의 감동과 기쁨을 마음껏 즐기고 계셨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지, 누가 객이고 누가 주인인지도 햇갈릴 정도로 예수님의 그곳 성전에 관련된 모든 입장 표명은 그곳의 그 누구보다도 훨씬 앞지른 식견(識見)을 드러내셨다고 본다. 소년 시절부터 이미 놀라움을 야기시키는 메시아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신 것이다(눅7:28 참조).


더 기가 막힌 것은 ‘왜 그렇게, 부모를 애타게 했느냐’라고 힐난한 부모의 말에, 아들 예수가 동문서답(東問西答)식의 응대를 하셨다는 점이다(48절).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도 답변하셨기 때문이다(49절). 이 예수의 예고(豫告)는 아주 충격적이었다. 먼저는 자신에게는 본 아버지가 계시다는 선언을 하셨기 때문이다. 육신의 부모로서, 그들은 아들 예수의 그러한 말을 쉽게 소화 시킬 수가 없었던 발언이었다(50절). 그리고 이제는 아들의 활동 무대가 성전이며(늑19:47, 20:1,21, 21:37 참조), 하늘 아버지를 상대한 전 영역이라는 점을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동시에 아들 예수의 이런 말은 육체적 가족관계를 정리할 때가 임박했음을 통보하는 것도 되었다. 



부모자식 간의 충격적 해후는 그 다음에 보인 예수님의 부모 공경에 대한 자세로 상당 부분 해소되기도 했다고 보인다. 고향에 돌아가서는 더욱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지혜와 키 모두도 더 자라가셨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기 때문이다(51-52절). 


2. 구약 / 삼상 1:19-28 / ”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성전 중심의 인물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들여다보게 하는 증언이다. 바로 사사이자 예언자였던 사무엘(=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이런 성전 중심의 삶을 사는 무리가 등장하였음을 보여 준다. 


아이 사무엘이 젖떨어지자마자 곧바로 여호와의 집에 평생을 드리게 된 존재가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어머니 한나의 서원 신앙 때문이었고, 그에 부응하는 아버지 엘가나의 성숙한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어머니 한나가 자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눈물과 통곡으로, 자식을 주시면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겠다는 서원(誓願)을 드림으로써 응답받아 낳은 자식이 사무엘이었기 때문이다(19-20절). 


본문은 한나 부부가 그 서원을 좇아 아이 사무엘을 여호와께 데려다 바치는 예식을 전하는 내용이다. 인간적으로는 이제 자기들의 자식이 아니라, 여호와의 소유로 바치는 예식이었기에, 더욱 엄중한 예전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내 한나가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22절)라고 소견을 표명하자, 남편 엘가나가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라 —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응답하면서, 이루어진 드림이었다. 그것도 그의 평생을 드린 것이다(28절). 


그냥 드림도 아니다. 엄청난 예물도 함께 드렸다(24-26절). 수소 세 마리, 밀가루 한 에바,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 바치면서 드렸다. 엘리 제사장을 만나서, 서원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바친 아이임을 밝히고, 그를 잘 받아서 여호와 앞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해 달라 요청한 것이다. 이런 완벽한 순종과 서원 이행과 전적인 헌물을 받으신 여호와께서는 그런 사무엘을 어찌 사랑하지 아니하시겠는가! 


여호와께서는 그의 전 일생을 온전히 사용하셨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당신의 말씀을 직접 듣게 하시면서(삼상3장), 그를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민족을 일깨우는 큰 선지자로, 나중에는 사사 시대에서 왕권 시대로의 대전환을 이끄는 매개자로, 그리고 사울 왕 시대에서 다윗 왕조 시대를 여는 매개자로 이 사무엘을 참으로 오랫동안, 진정 그의 전 평생을 사용하셨다. 그의 생애 전체를, 전혀 버릴 것이 없이 모든 전체를 사용하시고 데려가신 것이다. 


3. 서신서 / 히2:9-18 / ”거룩하게 하신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


히브리서 본문은 교회 공동체 내부의 역동적인 영적 구도를 엿보게 해주시면서, 그 주어진 역할을 알리는 내용이다. 


1) 교회 핵심과 중심은 십자가에 고난의 죽음을 당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9절). 그는 죽으심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신 유일하신 주님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우리 구원의 창시자가 되셔서, 그를 좇는 모든 자들의 주가 되시고 머리가 되셨다. 그리고 그의 은혜로 베푸신 보혈(寶血)을 공유하면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그 안에서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가 된 것이다(10-11절). 예수의 가족(Family)가 된 것이다. 


2)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하늘 아버지를 자기들의 아버지로 부르라고 지시하셨다(주의 기도). 그러기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은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외아들이신 예수를 머리로 해서,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13절). 그러면 왜 주님은 이런 혈연적 관계 구축을 도모하신 것일까? 


3) 가족의 공고함만이 모든 사이비(似而非)적 어둠의 세력과 위선적인 장난들을 극복할 능력과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족에는 차별과 멸시가 없다. 모두가 한 부모 아래에서 하나다. 모든 기업과 권리도 공유된다. 약함과 강함도 공유하고 연대하여 대적자를 퇴치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곧 마귀 권세를 퇴치할 하늘 가족 연대의 강고함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14-15절). 이런 모습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이름에 적합한 대상들이다(16절). 


4) 이런 강고한 연대 그룹을 형성하여 말세에 거세게 파괴적 장난을 펼쳐올 마귀와 대적하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성탄(聖誕)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제자들을 형성하게 하셨으며, 성령까지 보내셔서 교회 공동체를 온 세상에 세우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성령안에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시험받아 힘들어하는 모든 연약한 당신의 지체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도우신다(17-18절). 


o 한 해를 보내는 시간이다. 성전과 교회를 섬길 수 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자. 그 안에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 성령과 함께 계셔서 우리를 지금껏 돌보고 지켜주셨다. 그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드리자. 믿음의 약속도 성실히 준수하자.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우리의 응답은 신실함과 충성됨이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임도 잊지 말자.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며, 성도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기에 더욱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 새해를 기다리며, 우리의 부족을 살펴서 새해에는 더 성숙한 진보를 보여드리고자 기도하자.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올 한 해, 이곳 말씀의 장에서 함께 대면해 온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축원한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