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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야야할까

관리자 2024-12-24 (화) 10:59 16시간전 15  

본문) 요 3:16~21, 미 5:2-5, 요일 4:7-12

제목) ” 서로 사랑으로 화목제물 되신 예수께 응답하자 “


오늘은 2024 성탄일이다. 구세주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로 이 세상이 오신 날이다. 그것도 유대 땅 베들레헴이란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신 날이다. 그것도 베들레헴에 정착한 유다족의 여러 계보 중에서도 가장 작은 가계인 에브라다(에브랏)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오신 날이다. 미가 선지자는 사전에 이 에브랏 가문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왕(王)이 태어날 것을 예고하기도 했다(미5:2, 마2:6 참조). 


이 가문의 시작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넷째인 유다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룻4:18-22 참조).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베레스를 머리로 삼아 5대를 거쳐 보아스까지 이르렀다가,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을 만나 오벳을 생산하면서 그 아들인 이새와 그 손자인 다윗으로 이어지는 에브랏 가계를 이루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가계 형성 과정에는 이방 여인 네 사람들의 헌신들이 모아졌다는 점이다. 첫 여인인 다말은 유다와, 두 번째 여인인 라합은 살몬과, 세 번째 여인인 룻은 보아스와, 네 번째 여인인 우리야는 다윗과 결합하여 모두 에브랏 가계를 이루게 하였고, 다윗 왕가를 잇게 하면서 결국은 요셉과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마1:3-16, 삼상17:12, 룻1:2,4:11-22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의 혈통은 단순하지 않다. 소위 순혈(純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계인의 피가 그 몸안에 원초적으로 화합(和合)되어 형성된 피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 같은 특정 민족이나 특정인만의 주가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의 주이시기에 적합함을 밑받침해 준다. 특정 민족만을 사랑하고자 오신 분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을 모두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 오신 분임을 말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성경은 인간 족보(族譜)에도 깊은 관심이 있다. 사람을 소개할 때, 그가 누구의 후손이며 누가 그의 조상이냐에 대한 증언이 빠지지 않는다. 이는 열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도 함께 본다는 점 때문이다. 뿌리 없는 열매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성서가 확고히 하고 있음이다. 이런 시각 때문에, 구약의 경우에는 보통 한 사람을 소개할 때 2대와 3대 조상은 보통이고, 5대인 현손(玄孫)에까지 그 인물의 뿌리로 밝힌다. 


어디 그뿐인가? 복음서의 시작인 마태복음은 오신 예수 한 분을 소개하기 위하여 무려 그의 조상으로 42대 조상이었던 아브라함까지도 거슬러 올린다. 28대 조상인 다윗도 거슬려 올린다. 14대 조상인 바벨론 포로기의 여고냐도 찾아 올린다. 그래서 아버지 요셉와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고대하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음을 상세히 알린다(마1:1-17).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를 단순한 하늘에서 뚝 떨어져 오신 분으로 보질 않는다. 역사의 피가 그 안에 흐르고, 세계인의 피가 흐르는 분으로서, 인간 우리와 동일한 분으로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성경은 오신 예수의 원(元) 뿌리에 대하여서도 더 깊이 증언한다. 인간 혈통에서의 뿌리만이 아니라, 근원적 뿌리 아니 원래적(元來的)인 뿌리에 대하여서도 언급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 인간과 같으면서도, 전혀 차원이 다른 분의 새로운 면모를 함께 접하게 된다. 인간 족보상으로는 우리 인간들과 다를 바 없지만, 그의 원래적 뿌리는 창조주 자신의 신적 영역이요 영원자의 영역에 속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선지자 미가는 왕으로 오실 이의 근본을 상고(上古)와 영원(永遠)에 있다고 밝힌다(2절 하반부). 이는 그의 기원이 ‘아득한 옛날이요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 영원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표준새번역). 마태는 그의 탄생을 ’그의 별‘이 빛을 내어 알려 주었기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음을 증언하기도 했고(마2:2 참조), 요한은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 계셨던 태초 이전인 영원에서부터 계신 분으로 증언한다(요1:1-2, 14절 참조). 


이런 놀라운 분이 우리 인간이 되어 오셨으니, 그의 존재는 분명히 인간이지만 하나님이기도 하시고,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인간인 분, 곧 소위 양면적(兩面的) 존재로 당신을 보여주실 수밖에 없을 것이 당연하다. 즉 칼 바르트가 지적한 대로, 예수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가장 온전한 인간이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신적인 면도 접하게 됨과 동시에, 그에게서 가장 인간다운 면도 함께 보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 성탄은 제1 아담의 죄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계속 시행착오만을 범하며 살아가는 가련한 우리 인생들을 돕고 구원하시려고, 제2 아담으로 오신 예수를 뵙게 되는 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의 영광된 세계와 그의 생명의 세계를 만나고 배우며 들어가기 위하여 훈련하게 된다. 동시에 참사람이신 예수를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무너진 삶의 문제들을 되찾게 되는 참사람의 길도 찾아서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아보고, 또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교회)에게 알려 주신 삶의 방안들을 알아보겠다. 먼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선명하게 밝혀 주시면서, 그를 향한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서서 그가 열어주신 구원을 받으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미가 예언서를 통해서는 그의 기원과 그의 존재에 대한 배경을 소개해 준다. 서신서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함을 역설한다. 이런 기조에서 우리는 이번 성탄절기에 내려주시는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1. 복음서 / 요3:16-21 /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審判)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救援)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獨生子)이신 예수를 이 세상에 주신 일을 매우 긍정적으로 설명한다(16-17절). 그 결정적 목적이 세상의 멸망(滅亡)이 아니라 영생(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요, 심판하려 함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말씀의 선물인가? 


그렇다고 이 선언이 무작정이요 무조건은 아니다. 여기에는 확실한 조건이 하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 주신 독생자를 ’믿는 자‘라야 한다. 그래서 그 독생자를 영접(迎接)하고, 그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시인(是認)하며 감사하는 자라야 한다. 따라서 그런 은혜로운 증언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 자는 여기 곧 영생이나 구원을 받게 되는 자리에는 합당하지 못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다면 믿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 절대 중요하다. 믿음은 받아들이고 시인하는 일 자체이기에, 예수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선한 선물들이 송두리째 그에게 전달되어 들어오게 하는 통로가 되기에 중요하다. 마치 저수지의 생명수가 각자의 집안으로 전달되게 하는 내면의 파이프와 같기에 중요하다. 그러기에 주신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없게 되기에, 당연히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스스로 제외된다. 하나님이 그를 정죄하셔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불신으로 마음 문을 닫아 정죄를 자초(自招)하여서 망하게 된 것이다. 


1) 사도 요한은 그 점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를 매우 예리하게 지적한다. 믿는 자는 영생과 구원을 안겨 주실 메시아 예수께 마음을 열어 영접한 자이기에 당연히 심판을 받을 이유가 사라졌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그렇지 못하다. 곧 하나님이 그에게도 주고 싶어서 독생자와 그를 통한 빛된 선물들을 안겨 주셨는데도 불신하고 의심하며 수령을 거부하고 있기에, 그는 그 자체로써 이미 심판의 자리에 떨어졌음을 지적하였다(18절). 


2) 그러면 왜 그는 그토록 심판과 멸망의 길을 자초한 것일까? 그는 이미 어둠의 자식이 되어 깊이 빠져 살면서, 자기 존재와 행위가 악하고 어둠의 색깔로까지 변질되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19절). 그 정도 된 자들은 진리나 빛을 아예 미워한다. 대적의 대상으로까지 생각한다. 동시에 선과 빛을 멀리하려고 하는 것도 자기들의 행위가 드러나고 폭로 당할까를 우려하기 때문이다(20절). 이런 자들의 마음은 –지난 주일 사도 베드로가 지적했던 바(벧전2:1), 그 마음이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 등으로 가득해서 그렇다. 


우리는 최근 국가 내란 사건의 실체를 접하면서, 그 주동자들과 협력자들의 비겁하고 뻔뻔함과 끈질김 등의 다양한 악한 모습을 목격한다. 모두가 똑같다고 매도할 순 없으나, 그들의 어둠을 강고히 지켜내려고 하는 사악한 행동은 우리를 매우 두렵게 한다.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서는 국가나 백성들이 어떻게 되든 별로 개의치 않고, 그 엄청난 모반을 전개해 온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우리와 ’같은 나라 같은 백성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그럼에도 우리의 희망은 진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있다는 점이다(21절). 선포된 말씀과 들은 말씀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회개하며 새 가르침과 교훈을 좇아서 살겠노라며 영접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빛으로 나오는 이들이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대상이다!


2. 구약 / 미5:2-5 / “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리니 —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


본문은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메시아 예수가 어떤 분으로 오시는 지를 밝혀 준 내용이다. 그는 땅에서의 분명한 족보와 소속도 보유하고 계신 분이셨고, 동시에 하늘에서도 그가 누구셨는지를 밝힌 매우 희귀(稀貴)한 증언 자료도 함께 보여준 곳이다(2절). 이런 메시아 예수의 하늘과 땅의 소속임을 밝힌 부분은 그를 믿고 좇아 사는 그의 신부(新婦)된 백성인 우리에게도 커다란 희망과 꿈을 갖게 해 준다. 특히 땅의 족보는 물론이지만, 하늘에까지도 갈 곳을 둔 자로서의 희망과 꿈을 품을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가! 


동시에 선지자는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고자 기다릴 때에는 다소의 인내와 인고의 고통이 있음도 알려 준다(3절). 마음은 마냥 설레고 기쁘지만, 현실은 오실 신랑 맞이를 준비하느라 힘들고 거칠며 시험 같은 것들이 많이 있기에, 잘 참고 견디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지혜와 대비성을 갖추고 살아야 할 이유이다. 


선지자는 그가 오셔서 펼쳐질 세상에 대하여서도 언급한다(4-5절). 오실 메시아는 여호와의 능력과 이름의 위엄을 보유하고 계셔서 그 이름과 권위로 그에게 모여든 양무리들을 위한 사랑의 목회(牧會)를 하실 것을 예고하신다. ’목축(牧畜)‘이란 말은 자기가 돌보는 목동의 돌봄의 행위를 지칭하는데, 그는 마치 그의 양무리를 당신의 지체인 양 품고 돌보며 사랑하는 사역자이다. 이는 지금의 교회 목회자들 목양(牧養)의 근원이 되기도 한 부분이다. 그러기에 그의 돌봄을 받는 양무리 현장은 언제나 평화(平和)이며 평강(平康)이다! 목자는 주변의 강도와 절도들까지도 막아줄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피난처도 된다(요10:1-10 참조)! 


3. 서신서 / 요일 4:7-12 /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和睦)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예수를 모시고 그의 제자로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주님의 모습을 대면했던 사도 요한은 결국, 그 십자가의 예수와 그곳에서 드러난 하늘의 빛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빛(light)이었다. 사랑하는 독자(獨子)를 이 세상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먼저 희생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은 분명히 사랑의 주님이셨음을 본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ls love)라고 힘써 고백하고 외치기 시작했다(7-8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아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하나님을 나의 주님이요 아버지로 영접하고 관계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바로 그런 관계 설정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을 이 죄악된 거친 세상에 보내셔서, 그 어렵고도 복잡한 곳을 풀어낼 인간이 되게 하신 것이다(9절). 그러면서 그를 믿는 자들을 당신의 아들을 닮게 만들어서 구원해 내시려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역설(力說)한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하고, 찾아야만 되는 지를 지시한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和睦祭物-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절).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先)사랑의 공세가 성탄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태어난 어린 아기에게 부모의 주도적인 사랑 공세가 가해진 바와 같다. 그 사랑을 받고 성장했기에, 아이들은 인간으로서 사랑하기 시작하게 되며, 나중엔 이웃 사랑도 해가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가 그 화목제물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우리도 이웃들과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일이다(11절). 그래야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심을 알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입증할 길이 잃게 된다. 그러기에 오직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만이 결정적인 답이다(12절). 우리와 교회는 그런 화해와 평화의 세상을 예수와 함께 열어가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것을 오늘 더욱 다짐하기를 바란다. 


o 올해 예수 성탄은 국가의 탄핵정국 속에서 맞이하는 때이다. 탐욕과 사욕에 빠진 위정자를 심판하면서 새로운 미래의 지도력을 기다리는 순간에서 맞이한다. 이때의 우리 마음은 무엇이어야 하나? 미움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평화와 화해와 섬김의 실천자를 찾아 세우는 일이다. 그런 사람이 새 지도자로 나라와 백성을 섬기도록 기도하고 힘을 모으는 일이다. 부디 복된 성탄을 맞이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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