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35:1~10, 막9:33-37, 벧전 1:22-2:3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일이다. 메시아 주님의 탄생(誕生) 직전 주일이다. 금주 수요일 25일 성탄일을 대비한 직전 주일이다. 날씨도 영하의 날씨가 계속하면서 한 겨울에 깊숙이 들어섰다. 여러분 모두 몸 관리 잘하셔서 겨울나기에 승리하시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최근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온 세계에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하나는 여성작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스웨덴 현장에서 수상하는 영광을 누린 일이다. 그것도 지난 45년 전에 광주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들의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다. 작가는 무참히 죽임을 당한 한 소년을 통하여, 그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뭔가 살아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음을 밝혔다. 그것은 ‘죽은 자가 산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묵직한 실존적 질문이었다. 이에 세계는 그 질문의 대응으로 그에게 노벨상을 주었다, 그 울림은 실로 엄청났다.
또 하나의 일은 윤석열 대통령의 셀프 쿠데타로 인한 내란(內亂) 사건으로, 한국은 여전히 집단적 폭력에 의하여 또다시 대규모 살상을 일으킬 수도 있는 취약성을 가진 나라의 모습을 보여준 일이다. 이는 마치 한강의 소설의 부정적 배경을 입체적으로 입증한 역할을 해준 일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한국에 대하여 기대가 컸던 세계는 충격이 컸다. 세계 경제 10위권의 위치에 있고 민주주주의가 성숙하다는 소문을 듣는 나라에서, 어떻게 군사쿠데타가 가능하냐는 궁금증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참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악한 자들의 꿈과 시도는 성숙한 우리 국민들에 평화적인 대규모 저항에 의하여 순식간에 제압당했다는 모습도 온 세계에 함께 보여주었다. 우리는 결코 폭력과 비정상적 위정자의 테러로 인한 권력 행사에 결코 무릎 꿇을 수 없다는 국민적 저항 의지를 가지고, 100-200만명의 우리 국민이 평화적인 대규모 저항적 시위를 꾸준하고 견고하게 전개하면서, 결국 그 무도한 폭력 세력들의 작동을 ’허망한 10일의 내란 천하‘로 끝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란 수괴인 윤석열을 탄핵하여 대통령직무를 정지시키고, 동조자들을 하나하나 재판에 회부하면서 그동안의 국가적 수치들을 이제 본격적으로 씻어내게 되었다. 이 바람에 지금 온 세계는 한국 국민의 시위 문화를 온 세계가 배워야 한다며 무한 존경심을 보내고 있다.
실로 짧지만 정말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지금 그들을 막아냈기에 우리가 이렇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편안히 살고 있지만, 혹 그의 내란이 성공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폭군 치하의 국가로 전락하면서, 숱한 인사들이 체포되어 끌려가 살해와 고문과 치상을 당하면서, 또다시 저항하는 국민과는 엄청난 마찰과 함께 피비린내 나는 살상을 당하면서, 제2의 암흑기를 맞이하였을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도 어떻게 형성되었을지도 아찔했다.
두 가지 고백하고 싶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다는 점이다. 대통령 부부는 정말 우상숭배와 악령의 하수인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이 지난 2년 7개월간 집권 중에 우리 국민에게 보여준 모습은 정치,경제,사회,문화,외교,의료,교육,국방,환경 등 그 어디 하나 제대로 된 것들이 없었다. 손만 대면, 모두가 국민과 국가의 자존심만 훼손하는 어리석은 행동들만 계속했다. 진짜 그런 대통령은 처음 볼 정도였다. 법치와 정의의 정치를 내세웠으나, 가장 법과 정의를 훼손하는 짓을 계속하다가 이번에 자기 부인에게 계속 압박이 들어오니까, 결국 힘으로 누르려다가 이렇게 내란까지 일으켰다가, 강제 퇴임하고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곧 트럼프가 취임하면서 우리나라에 많은 압박을 가할 터인데, 이제는 강단 있고 역량있는 우리 대통령이 대응해야 한다. 그렇다면, 윤석열이 가능하겠는가? 재앙만 가득할 뿐이다. 이에 나는 개인적으로 얼마 전부터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호소했다. ’이번 성탄절엔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십시오‘ 그러던 중 지난 12.3 대통령 자신이 내란을 일으켜 스스로 수괴가 되고 말았다. 그 누구도 끌어내릴 수 없었는데, 결국은 자기를 끌어내려달라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덕분에 국민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새 정부와 새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성숙해진 우리 국민의 모습이다. 이번 수백만의 국민들이 가슴에 품었던 저항 정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확실히 말하면, 다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군홧발이나 독재자의 발굽에 짓 밝힐 수 없다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곧 다시는 45년 전의 광주 5.18의 비극을 반복할 수 없다는 단호한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그 이전의 4.3 제주 양민 학살 사건, 4.19 폭거, 5.16 군사 반란, 10월 유신, 지난번 세월호 참변, 채상병 익사 사건, 이태원 150명 참사 사건 등등의 무모한 참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강한 저항 의식 때문이었다.
바로 이 의식 혁명의 기조(基調)에 있는 것을 이번 작가 한강이 지적한 것이다. 어떤 지적인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가‘란 질문에 대하여 ’할 수 있다‘라는 답변을 이번 우리 국민들이 불의와 독재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표명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5.18이나 4.3과 같은 참혹한 과거사와 치욕사가 있었는데-, 그와 유사한 일이 이번에 또 발생하자, 국민들은 그때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서, 이번에 이토록 거리로 쏟아져나와 완강하게 ’NO’라고 외친 것이다. 결국 죽은 과거가 산 현재를 살린 것이다. 그때 죽었던 자가 지금 산 자들인 우리를 이 민족적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되신 하나님께서는 이번 우리에게 진짜 커다란 성탄절 선물을 주셨다. 아울러 하나님은 이번 일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금 구하시려고 이 땅에 죽으러 오신 예수를 다시 보게 해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기다리고 사모하는 메시아는 우리를 살리시고자 먼저 죽으러 오신 이시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산 우리를 구하신다는 점을 알게 해 주셨다. 그의 처참한 십자가의 행적이 화려한 지금의 우리를 구하고 계심을 보게 하신다. 이와 함께 꼭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주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접하게 되고, 이웃 사랑의 근거도 찾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기쁨으로 맞이할 이유이다.
1. 구약 / 사35:1-10 / “ 굳세어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
사실 이 본문 전체 내용은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 사람들이 70년의 오랜 포로 생활을 끝내고, 본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의 모습을 매우 환상적인 빛깔로 묘사한 내용이다. 본문은 이때에 살아서 남은 자로 돌아올 사람들을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라 지칭한다(8-10절). 그런 점에서 곧 ‘풀려난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장을 잘 이해하려면, 마지막 부분부터 보면, 크게 도움이 된다.
그때 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축복으로 그 시대의 메시아로 부름 받았던 페르시아 왕 고레스로부터 ‘본국에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며 살아라’는 칙령(勅令)을 받아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 어찌 충만한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 아니었겠는가! (이번 우리의 탄핵 사건으로 우리 국민들이 12.14에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 환호한 정도를 넘어선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1) 이는 분명, 삶의 대혁명을 안겨 주는 일이기에, 그들이 받아낸 해방과 귀환의 길은 당연히 어둠에서 빛을 찾은 자의 대변화로 묘사되기에 충분하다. 본문은 그들의 그 간의 포로의 삶의 정황을, <광야와 메마른 땅>으로 묘사한다(1절). 이 땅은 어떤 곳인가? 강수량이 적고 증발량이 많아서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극심한 일교차와 건조한 바람으로 동물도 서식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사막에 서식하기 좋은 독충들인 전갈이나 불뱀들이 득실거려 무섭다(신8:15 참조). 그런 곳에서의 해방(解放)은 곧 사막이 꽃피는 땅으로 바뀜을 의미한다(1-2, 6-7절 참조).
2) 선지자는 그곳에서의 해방될 삶을 이렇게도 묘사한다(2-7절). 주변의 전체 상황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그러면서 낙담(落膽)한 자가 담대해지고 맹인들이 눈을 뜨며, 귀먹어리가 듣고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며, 벙어리가 노래하고 광야에서 물이 솟아나며, 시내가 흐를 것이다. 그뿐 아니다.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원천을 이루며, 승량이 잠자리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난다.
3) 그러면 이 길, 곧 ‘거룩한 길’이라 일컫게 된 길을 누가 들어서게 되는가? 결코 아무에게나 허락된 길이 아니다. 들어서지 못할 자가 있다. 죄가 있어서 더러움에 머문 자(깨끗하지 못한 자), 어리석은 자, 힘자랑하고 거친 자들이 통과가 불허(不許)될 자들이다.
4) 반면에 들어갈 자들이 있다. 곧 <구속(救贖)함을 입은 자들>이다(8,9절). 이들은 이때를 믿고 기다리며, 이때를 위하여 자신을 준비시킨 사람이다. 고대하던 메시아를 만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될 사람이다. 또한 <여호와의 속량(贖良)함을 받은 자들>이다(10절). 이는 짐을 대신 지어주는 자인 조상이나 선조들로 인하여 고엘의 은혜를 입은 자이거나, 자기 죗값을 제대로 치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복역의 때를 마치고, 속박의 사슬과 슬픔과 탄식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희락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될 자들이다. 복음서는 좀 더 언급한다.
2. 복음서 / 막 9:33-37 /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all)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본문에서 보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관심사는 자기들 중에 누가 으뜸이냐는 문제를 놓고 적잖은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세 복음서 모두). 이는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볼 때, 머잖아 제자인 자기들에게도 때가 올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모습을 엿보신 예수님은 매우 신중히 대응하셨다. 당신이 추구하는 미래의 삶과 제자들이 꿈꾸는 미래가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사실 ‘누가 크냐’라는 의욕적 질문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 서야만 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자리를 자기 성취와 군림과 개인적 영광을 누릴 곳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 자리에서 감당할 일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 갖춘 인물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면, 그곳은 정말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모두가 복 받은 곳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논쟁의 주제를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는 아니하셨다. 그 대신 수정(修正)해 주셨다. 진정한 첫째와 으뜸이 될 사람은 어떤 인물이냐로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셨다(35절). 거기에 적합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그 공동체나 집단은 아주 건강하고 생산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제시하신 바람직하고 생산적인 으뜸인 첫째 될 사람은 누구일까?
그 점에서 주님은 이렇게 답(答)을 주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두의 끝이 되며 모두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35절). 바로 이 부분은 우리가 이제 우리의 지도자들을 새로이 선출하는 데에도 절대 참고해야 할 지침이 아니겠는가! 주님이 제시한 첫째 될 사람의 모습은 이랬다.
첫째는 자기보다도 전체인 모두를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공사의 문제에서, 언제나 공(公)을 사(私)보다 앞세울 줄 알아야 한다(이점에서 윤석열은 완전 실패자였다). 둘째는 모두의 전진과 발전을 위하여, 자기는 수난(受難)의 자리에도 기꺼이 들어설 준비가 된 사람이어야 한다(희생 번트에도 능해야 한다). 끌어가려고만 하지 않고 뒤에서 밀어줄 수도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의 세상 짐을 걸머지고 모두를 살릴 고엘 정신을 담고(레25:23,47,민5:8,35:19참조), 겸손하게 이웃 사랑을 실천할 자이다(36-37절).
3. 서신서 / 벧전 1:22-2:3 / ”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
교회의 사도인 베드로는 주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항상 대비하고 살아야 할 생활신앙의 지침들 몇 가지를 제시했다. 우리에게 매우 합당한 신앙 지침이다.
1) 진리인 주님의 말씀에 순종(順從)하며 사는 일이다(22-24절).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말씀은 국가의 헌법(憲法)과 같다. 순복하면 국민이고 거슬리면 죄인이 된다. 그런데 말씀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땅위의 풀이나 꽃과는 다르다. 썩지 아니할 씨로 있고, 살아 역사하는 능력으로 존재하면서 영원토록 있다. 그래서 복음이다. 그 말씀을 좇을 때, 우리는 깨끗한 영혼으로 살게 된다. 말씀으로 우리는 뿌리 깊은 죄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거듭난 새 생명이 된다.
2) 확실히 버릴 것도 있다. 악독-기만-외식-시기-비방 등이다(2:1). 그 대신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여야 하고,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1:22절,하). 이는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이며 주도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신 말씀이다. 앞에서 확인한 대로, 모두를 축복하고 귀중히 여기며 그들 전체의 발전과 성장을 위하여 자기를 헌신할 섬김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런 자에게는 황무지에 장미꽃이 피는 새 세상이 열릴 것이다!
3) 신령한 젖인 말씀을 계속 먹고, 계속 자라나야 한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야 한다’(2:2참조). 젖먹이는 항상 젖만 먹으려 하고 있으면 큰일이다. 때가 되면 미음도 먹고, 밥도 먹으며 계속 성장해야 한다. 그래서 성장의 기쁨을 누리면서, 자기의 역할과 책임과 의무를 당당하게 감당해 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언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지라도, 그에게 보고드릴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주님은 여전히 원하시고 만나고 싶어 하신다.
o 오늘 우리는 2024 성탄을 맞이하고자, 네 개의 촛불을 다 밝혔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온누리에 가득히 퍼지길 기원한다. 밝고 건강한 나라를 견인하는 빛 되길 기도한다. 첫째는 간절히 기다림의 믿음의 촛불이다. 둘째는 인내와 겸손의 촛불이다. 셋째는 우리를 깨우는 소망의 촛불이다. 넷째는 그를 향한 사랑의 촛불이다. 메시아 주님은 죽어서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다. 우리를 깨우신 분이시다. 우리 가련한 민족까지 이렇게까지 깨우신 분이시다. 부디 우리 안에 있는 증오나 미움을 씻어내고, 서로 사랑하면서 그분의 오실 편안한 구유를 마련해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