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애3:19~33, 눅1:68-79, 히6:9-20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날씨는 완연히 겨울에 접어 들어서, 상당히 춥다. 이런 중에 지금 온 나라는 지난 12월 3일(화) 밤에 있었던 대통령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로 인한 국회 장악과 주요 인사 체포 시도를 통한 독재체제 구축 시도 등으로 연일 시끄럽다. 천만다행으로 <불발 쿠데타>로 끝나고 내란(內亂)의 행위로 판가름 나서 그렇지-, 만일 그들의 계엄이 성공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이 시간을 엄청난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을 것이다. 참 아찔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대통령의 미친 행위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할 때의 대통령의 모습은 실로 적개심이 얼굴과 선포 속에 가득했다. 국가 살림을 훼손하는 종북 및 반국가세력들을 척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국정운영을 못 하겠다는 논지였다. 지금 자기와 자기 부인 김건희로 인하여 국정이 이토록 마비된 상황에 대하여서는 전혀 미안해하는 기미가 없었다. 오직 ‘너 때문이야’라는 돌 던지기만 있었다. 참으로 그의 친위 쿠데타가 실패하길 다행이지, 만일 성공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숱한 사람들이 지하 감옥에서, 또다시 시작된 군사정권 아래에서 집단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주 치욕적인 2024년 대한민국의 추운 겨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되새겨 보면, 이번 일은 꼭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란 373장의 찬송 가사를 생각나게 하는 면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이번의 셀프 쿠데타가 실패한 것을 보면, 그래서 윤석열이가 내란주모자로 지목되어 수사를 받게 된 것을 보면, 이제 그의 시대는 조기 마감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탄핵은 아직 진행 중이라도, 그의 시대를 이미 끝났다. 따라서 탄핵과 업무 중지의 절차는 엄중히 밟되, 미래를 향한 출발의 발걸음도 시작됐다. 이 또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큰 성탄 선물이 아니겠는가!
오늘 셋째 주일에 주시는 세 본문 말씀은 어떤 내용인가? 주 본문인 예레미야 애가(哀歌)의 내용이 말하듯이, 선지자는 온통 고초와 재난 속에서 탄식과 신음으로 세월을 보낸다. 자기 백성에 내리신 여호와의 징벌(懲罰)의 손길에 따른 고통이 너무 깊고 심하기에,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은 쑥과 담즙뿐이었다(19절). 그러기에 그가 유일하게 붙잡고 매달리는 것은 오직 하나다. 바로 매를 드셨던 그 전능자요 구원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내려주실 자비와 긍휼이다.
그러면서도 선지자는 아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자기들이 겪고 있는 시련은 쉽게 몇 대 더 매맞고 끝날 성격이 아니라, 적어도 70여 년, 아니 3대(代) 정도의 세대까지의 복역(服役)을 치르고 나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될 성격의 징벌임을 알고 있었다(렘25:11). 이는 무엇인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과 불신의 장벽이 높았고 깊었으며 크고 고질적이었음을 말한다. 그 구도를 씻어내고 재출발하려면 아주 오랜 연단 기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나 백성들은 그 긴 기간에 실망하여 여호와께 등을 돌리어도 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여호와께 등돌린다고 해소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신들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만 절망에 떨어지고 말게 된다. 그러기에 유일한 방법은 자기 가족에게 벌을 주시는 여호와의 궁극적인 뜻과 마음을 이해하면서, 그러기에 그런 여호와를 향한 믿음을 갖고, 그의 자비와 긍휼을 호소하면서, 이 어둠의 터널을 잘 견디며 극복해 갈 수 있는 인내력, 지혜, 소망의 힘을 강화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힘써 강조한다. 여호와의 백성들을 향한 본심(本心)은 멸망이나 시련이나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선하고 은혜롭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절). 이는 여호와 징벌의 마음은 마치 부모가 탈선하고 잘못된 자식의 훈육과 회개를 위하여 매를 드신 것과 흡사하게 본 것이다. 징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백성들은 회개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여호와는 자기 자식인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큰 위로와 평강의 시대를 열어 주실 것을 믿어라.
복음서의 내용은 요한의 아버지인 제사장 사가랴가 성령의 힘으로 찬미한 내용이다. 사실 그는 지난 10개월 기간을 벙어리로 지냈던 인물이었다. 천사가 나타나 사가랴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통보를 받게 되자, 그 순간 자기 같이 늙은이에게 무슨 아이 생산이 되겠느냐며 의심을 드러냈다가 그만 그 벌칙으로 아기 탄생 때까지 말 못 하는 벌칙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 그는 제사장으로써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회개하며 견뎠다. 마치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의 암흑기를, 사가랴는 10월로 압축하여 미리 개인적으로 체험한 셈이다.
서신서에서 히브리 기자는 다시 오실 메시아 예수를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무엇보다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한다. 소망과 믿음 속에서 오래 잘 참아내야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맹세가 담긴 약속을 굳게 믿고 오래 참아서 기업을 받아내신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의 세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마치 저수지의 물을 개인 집의 수도꼭지로 이어지게 하려면 지하의 수도 파이프(배수관)가 견고하고 확실하게 작동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온전히 영접하는 데에는 우리 내부의 영적 통로인 인내와 기다림, 여호와를 향한 신실한 긍휼과 자비에 대한 소망과 믿음의 파이프가 -단단해야만 가능함을 말해준다.
1. 구약 / 애3:19-33 / ”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
애가(哀歌)서의 주 배경은 나라가 패망하여 적잖은 엘리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자기들은 함께 끌려가지도 못한 체, 본국 곳곳에 버림당한 모습으로 나날을 지내던 나약한 자들의 슬픈 처지를 담고 있다(애1:1-6참조). 바벨론은 유다에서 유력한 자라고 판단할 만한 자들은 자기 나라로 끌어갔고, 이곳에 버려지듯 남은 자들은 가난과 질병과 무기력과 나약함을 벗 삼아 오랜 세월 자포자기 심정으로 본토를 지키며 지내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런 중에도 이들은 주변의 이방 족속의 공세와 약탈도 끊임없이 당하기도 했다. 실로 낙심(落心)이 본심이었다(20절).
하지만 그곳에 남겨진 자 중의 하나인 선지자는 깨어 있었다. 이럴수록 견디며 이겨 낼 방법을 찾았다. 남은 자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려 했다. 본문은 그래서 받은 영감에 찬 신앙 고백문이다.
곧 이런 시련의 터널을 견딜 힘은 결국 희망인데, 그 희망은 인자와 긍휼이 많으신 여호와로 보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여호와의 인자하심 때문에 자기들은 그래도 진멸되지 않고 이렇게라도 생존하게 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21-22절). 그동안 바벨론에 의하여 떼죽음을 당한 동족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성벽이 무너지고 성내가 불타며, 성전이 파괴되고 성물이 대거 약탈되는 등의 피해상황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렇게라도 생존한 자기들은 분명 큰 은혜를 입는 무리들이 분명했다.
따라서 이제 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낙심이나 자포자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어떤 힘으로든 이 고난의 터널을 버티면서 극복해 가는 것이 절대 과제였다. 선지자인 그는 이 점도 결국은 여호와를 해답으로 보았고,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하는 믿음과 소망의 분량에서 견디어낼 그 에너지를 찾고자 하였다(24-26절). 매를 드신 부모님에게 엎드리고 의지하며 그에게 돌아가는 모습이 그래도 살길임을 제시한 것이다.
지금은 비록 자기 뺨을 치는 자에게 반항 대신 돌려대는 기간이지만(30절), 그러자 주께서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기에, 조용히 순복하며 그 고단함을 견디어 내기만 하면, 나도 더욱 성숙해지면서 그가 열어 주신 새 세상에 적합한 정금(精金)같은 그릇이 되어 나갈 것이라 봤다. 그때를 위하여 지금 견뎌낼 말씀은 역시 이 말씀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절). 그러면, 그렇게 견디어 낸 후에는, 과연 어떤 밝은 아침이 활짝 열릴까? 복음서 기사가 바로 그 해답으로 제공된다.
2. 복음서 / 눅1:68-79 / “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
드디어 봉쇄(封鎖)되었던 입이 10개월 만에 열렸다! 약속대로 그의 아들 요한이 태어나면서 주의 성령께서 제사장 사가랴의 입술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증언은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것들로 가득하다. 그는 메시아가 자기들을 원수(怨讐)에게서와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서 구원하신다고 예고했다(71절). 그렇다면 메시아가 이겨 내실 대상인 원수와 미워하는 모든 자란 누굴 말하는 걸까? 정치적 원수인 로마 제국인가, 자신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종교집단인 유대교 지도자들일까?
사가랴는 그 대답을 여호와께서 맹세하며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언약을 상기시킨다(72-75절, 창12:2-3 참조). 그 약속은 무엇이었나? 먼저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고(2절), 다음은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하여 세상 모든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리라는 약속이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또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리라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에는 메시아가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지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71,74절). 그러면서 우리가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성결(聖潔)과 의(義)와 두려움으로 섬기게 하리라고 말한다. 이는 원수의 손에서 건지신다는 말씀이 세상 권력자들의 권력 쟁취나 전쟁을 통한 제압에 따른 방법이 아니란 말씀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세속적이고 육체적 욕망과 수단을 싸우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는 더 크고 의로운 새 방법, 곧 사랑과 정의와 의에서 나오는 담대함에 의하여 지도력을 행사하면서 얻어낸 것으로써, 그 수명도 잠깐이 아니라 영구성을 띠는 방법을 말한다. (-이번 윤석열의 힘과 폭력 수단을 제압하게 하는 국민들이 추구한 민주주의의 법과 정의와 의를 통한 시민의 평화적 저항의 힘을 생각하게 한다)
오시는 메시아는 그 구원의 방법을 이렇게 보여 주셨다. 곧 너를 정죄하고 따돌려 배제 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도 감당치 못하는 죄를 끌어안고 해결책을 찾지 못하며 저주의 늪 속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식의 불행에 빠져서 죽어가는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당신이 친히 그를 대속(代贖)하고 속죄(贖罪)할 고엘이 되어 그가 겪는 저주의 굴레를 자기의 것으로 전가(轉嫁)시켜서 그를 영원히 자유케 하는 메시아의 구원 방식을 스가랴가 예고하였다.
그 바람에 세상의 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평화의 길에 들어가서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68절). 그 바람에 메시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드러내 주심으로써, 그가 진정 온 세상의 영원한 의와 평화의 왕이 되셨고, 불의한 자들에 대한 영원한 심판자가 되실 분으로 알렸다(76-79절 참조).
3. 서신서 / 히6:9-20 /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히브리 기자는 예수 믿는 자들로서, 그가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밝혀 줄
표지(標識)에 관하여 설명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으로 이웃도 사랑하고 섬기며 사느냐의 여부(與否)이다(9-10절). 하늘에 계신 주님은 그 점을 지켜보고 계시고 또 잘 지키며 살고 있는 모습을 잊지 않고 계신다고 증언한다. 이런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택한 자에게는 분명한 것이 있다. 게으르지 않고 항상 부지런하다. 믿음과 소망과 인내심이 확고히 자리하고 있다. 약속의 기업을 받게 될 것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이다(11-12절).
그에게는 아브라함 후손의 향기(香氣)가 있다. 복을 받고 번성할 뿐만 아니라, 그 복을 받지 못한 이웃들에게도 나누며 사랑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를 바쳐주는 영적 기둥은 역시 조상이 약속을 맹세로 받았던 언약들을 초지일관 흔들림 없이 자신도 믿고 의지하며 실천하면서 사는 모습이다. 이런 사람은 소망을 주 앞에 서게 될 ’그날 그때‘에다 두고 살아가기에, 이 세상 것으로 흔들리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이미 영적 승리를 오실 분을 향한 믿음을 통하여 선취(先取)하여 살기 때문이다.
o 오늘은 교회가 세 개의 촛불을 밝히는 주일이다.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어둠이 더욱 짙다. 그러기에 더욱 참 빛 되신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한다. 어떤 촛불을 밝힐까? 인내의 촛불을 밝히자. 참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까지 물러나지 않고 선한 싸움을 싸우겠다는 강인한 인내심을 드러내자. 소망의 촛불을 밝히자. 오시는 사랑과 의와 성결의 주님에 의하여 우리의 어둡고 굴절된 세상에는 곧고 정직한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게 되는 세상이 오리라는 그 소망의 촛불이다. 섬김의 촛불을 밝히자. 어둠이 깊으면 앞에 보이지 않기에, 더욱 많이 충돌과 갈등이 폭발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주변의 이웃들에게 우리의 따뜻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겠다. 그것이 구유이고, 우리 주님을 모실 자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