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합 2:1~4, 마25:1-13, 롬13:8-14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완연해진 겨울 날씨가 널뛰기처럼 시작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더위와 오랜 씨름을 해왔는데, 지금은 가을을 즐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떠나보내고,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엄청난 양의 초설(初雪)로 온 대지가 몸살을 앓기도 했다. 산책하다 보면, 이번 초설은 마치 대설처럼 왔는데, 그것도 물기가 담긴 습설(濕雪)이어서,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작은 가지들이 부러지고 꺾어진 가련한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확실히 인간을 향한 자연의 대 역습(逆襲)이 본격화되었다. 자신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퇴폐한 쓰레기장으로 만든 인간들의 무자비한 행태에, 자연은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제는 자신의 고유한 때의 질서를 무시하고 분노를 숨기지 않는 공세로 역공을 시작한 것이다. 사막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무더운 지역에 갑자기 영하 40-50도의 냉추위가 밀려오며, 높은 산과 바위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가 하면, 온갖 생태계의 교란과 변이 현상이 전 지구촌을 떨게 하고 있다. 실로 종잡을 수 없는 햇갈림이 자연의 산물을 먹고 살아온 인류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다. 실로 인류는 안전한 피난처를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지구촌은 전쟁 몸살을 앓고 있다.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미국우선주의 정책에 약소국들과 이해 당사국들의 입지가 매우 좁아지고 있다. 게다가 선장 잃은 선박처럼, 허망한 대통령을 둔 우리나라의 앞길도 매우 난감하다. 경제위기는 생각밖에 매우 심화된 모양이다. 교회들의 예언자적 음성도 실종 상태이다. 차라리 거짓 예언자들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인구절벽 시대에 경제 불황과 정치 불안에-, 우리는 지금 길잃은 양들의 방황하는 모습으로 대림절을 맞는다. 이제 두 번째의 촛불은 무엇을 위한 빛이어야 되나?
마침 우리는 이번 주일을 성서(聖書)주일로 맞이하면서 동시에 인권(人權)주일로도 맞이한다. 이 어렵고 난감한 시대에 성경마저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숨을 쉬며 살고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정말 성경이 고맙고 성서를 주신 하나님이 감사하다. 어둠이 깊을수록, 그래도 주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불이며 나아갈 유일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인권은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권리로서, 모든 인간 생명체가 복되게 누려야 할 소중한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인권 사각지대가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러면서 인권을 유린하는 자들이 여전히 득세하면서, 약한 자와 힘없는 자들 위에 군림하고 짓밟는 행태가 계속되고 있음은 아주 유감이다. 특히 지금의 검찰 공화국(?)의 틀 속에서 공무원의 일원에 불과한 검사들이 그들의 사익과 권력과의 유착된 행태를 가지고 강한 특권의식에 빠져서 공의와 정의를 짓밟고 있는 행태는 어서 속히 불식되어야 할 엄중한 과제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리들의 악행을 어떻게 끝내야 할 것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그들을 저지할 수 있음을 믿기에, 이 문제를 하나님께 호소하며 그의 정의로운 손길로 바로 잡아 주시기를 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유대의 마지막 예언자 시대에서 활동했던 하박국의 고민과 그의 탄원의 기도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의 호소를 들어보면, 마치 오늘 우리의 마음을 오롯이 대변한다는 느낌도 주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그 시대가 안고 있던 여러 모순된 아픔과 행태에 대하여 크게 갈등하고 고민했던 사람이다. 특히 그는 개혁자 요시아왕이 전사하고 여호야김이 들어서 정반대의 길을 가는 일에 깊은 고민과 갈등했고, 동시에 앗수르를 무너뜨린 신흥 제국 바벨론의 약소국 침략을 심각히 우려하던 예언자였다. 이에 그는 모든 상황을 능히 제어하고 심판할 능력을 갖고 계시면서도 그런 모순과 아픔을 묵묵히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그 점을 항의하고 따지듯 호소하였다.
-“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합1:2-4/ 표준새번역)
- 그뿐 아니다. 하박국은 계속 고(告)했다. ” 주께서는 눈이 밝으시므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계십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 “(합1:13/ 표준새번역)
이 내용을 보면, 하박국은 국내의 새 정권의 어처구니없는 퇴행에 울분하였고, 신흥 바벨론의 거센 약소국을 향한 정복과 제압에도 분노하면서, 그 일에 침묵하시는 여호와를 상대로 강한 심판의 손길을 펼쳐 달라고 요구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모습은 마치 요즈음의 우리 한국의 실정, 곧 윤석열 무속 정권의 무모(無謀)성과 트럼프 미국의 과도한 약소국을 향한 압박 등과도 너무 흡사한 느낌도 들어 더욱 주목하게 된다. 그러면, 그런 하박국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어떤 응답을 하셨나? 외면하고 무시하셨나, 아니면 지지하고 후원하셨나?
우선 하박국의 이해 부족도 컸다. 하나님은 약소국이나 약자를 맹목적으로 편드시는 분이 아니다. 강대국이라고 무조건 배척하시지도 않는다. 동시에 유대인이라고 무조건 하나님이 감싸시는 일도 없다. 이방인이라도 필요하시면 언제든 당신의 은혜의 도구로도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유대인은 여호와의 징벌의 대상이 이미 되어있었고, 바벨론은 그를 징책하기 위한 회초리로 선정된 상태였다. 다만 그 기간이 회개할 때까지 한정적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여호와의 대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그 대신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시면서, 그의 역사와 인류를 향한 구원의 포괄적인 새 지평을 제시하셨다. 그 말씀은 바로, ‘오직 의인(義人)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합2:4, 롬1:17)이었다. 무슨 말씀인가? 이는 하나님의 구원은 특정 정치 이념이나 제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공의의 뜻을 펼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고 그를 좇아 사는 의인들에 의해 당신의 구원 역사를 펼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런 응답에 하박국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1. 구약 / 합2:1-4 /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선지자 하박국은 집중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라는 그런 식의 기도자가 아니었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답변을 확실히 듣고자 마음과 귀를 열고 기다리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1절). 여기서 그는 자신이 응답받고자 하는 믿음의 자리를 군인들의 초소와 그곳의 망루(rampart-성벽)로 표현했다. 적군의 동향을 잘 살펴서 아군 측에 전달하는 중요한 위치인 망루를 자기 자리로 파악한 것이었다. 여기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곳이다.
이에 그런 집요하게 깨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종에게 하나님께서는 주저할 것이 없으셨다. 곧장 답을 보내 주셨다. 그런데 그 내용을 전하기에 앞서서 그 받을 방법부터 먼저 통보하셨다(2절). 곧 ‘이 묵시(默示)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글로 기록해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면서 이 묵시의 성취는 때가 되어야 이루어질 것이지만(네가 바라는 그때가 아니라), 그러나 때(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오게 될 말씀이었다(3절).
이렇게 말씀을 음성만이 아닌 글로 남기도록 지시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종종 택하신 계시의 방법이다. 그것은 그만큼, 자료로 삼아 역사와 후대에 길이 보전 하도록 뜻을 담아 주신 계시의 방법이다. 하나님이 친히 쓰신 십계명도 있었고, 여호수아(수24:26), 이사야(사8:1). 예레미야(렘30:2-3), 그리고 여기 하박국에 이르기까지 숱한 이들이 받은 말씀을 글로 써서 받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친히 땅에 글을 쓰신 장면도 생생하다(요8:6-8). 음성 계시는 순간적일 수 있으나, 기록(記錄)된 계시는 영구성을 띨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계시의 무게감이 크다.
그래서 하박국이 받게 된 묵시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결국 이런저런 모든 시련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게 될 사람(구원받게 될 사랑)이 어떤 사람인가를 밝히신 내용이었다. 곧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4절)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실로 불후(不朽)의 구원론이 되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원의 지표가 되었는데, 요점은 여기서 누가 구원에서 배제되고, 누가 구원을 취하게 될 것이냐는 거였다.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당할 자들은 누군가? 그 마음이 교만(驕慢)하여 정직하지 못한 자들이다. 이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거나 보이지 않고, 매사를 자기 마음과 육정에 따라 좇아 사는 자들을 말한다. 그러기에 중심을 잃고 평강을 못 찾아 표류하며 사는 인생이다. 하지만 끝내 구원받게 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이들은 특징이 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그 가르침과 약속을 붙들고 산다. 이 점에서 흔들림이 없다. 굳센 마음으로 이를 고집하며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다. 진실하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주목하신다. 그래서 곧 닥칠 시험과 심판에서 끝내 살아남게 하신다. 그래서 굳센 믿음이 생명이다.
결국 하박국은 이 계시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린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합3:18-19). 후에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박국이 받은 이 계시, 곧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를 그의 선교 기치(旗幟)로 내세웠다(롬1:17). 그 후에는 이를 종교개혁자 루터가 받았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 개혁교회가 받아서, 구원론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2. 복음서 / 마25:1-3 / ”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본문은 두 처녀 이야기이다. 곧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구원 이야기이다. 예수 앞에서 우리 교회는 예수 신랑을 기다리는 그의 신부이기에, 이것은 예수를 깨어서 맞이할 교회와 맞이하지 못할 교회를 구분 짓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메시지는 이렇다.
1) 모든 교회와 성도는 신랑 예수를 맞기 위하여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1절). 이것은 무엇을 말하나?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신랑 예수는 이미 그곳을 떠나 이곳으로 오시고 계심을 말한다(마9:14-15, 22:2 참조). 즉 교회는 예수를 맞을 혼인잔치 자리에 들어섰음을 말한다.
2) 그런데 교회가 다 같지 않다. 슬기로운 교회와 미련한 교회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구분을 어떻게 하나? 신랑 예수를 맞이할 준비 태세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예상 밖에 더디 오는 신랑을 언제 오든 상관없이 맞이할 준비가 되었느냐 여부로 구분하게 된다. 잘 준비된 교회는 혹 모를 신랑의 더디 옴을 대비하여, 예비 기름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준비가 안 된 교회는 만일의 늦을 경우를 예측 못한 체, 가진 등잔만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3) 두 교회에 대한 심판은 늦은 한밤중에 판가름 났다. ‘신랑이 오니 맞으러 나오라’는 파수꾼의 전갈을 듣게 되자, 다 졸던 신부들이 등불을 챙겼다(5-7절). 모두 등불이 꺼진 상태라고 서둘러 추가분 기름이 필요했다. 준비된 교회는 예비용 기름으로 등을 밝히며 신랑 맞이하러 나아가는데, 미련한 교회는 등을 밝힐 수 없었다. 채울 기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끝났다. 그날을 대비하여 잘 깨어 준비한 교회는 영접받았으나, 탈락한 교회는 탄식과 후회뿐이었다.
4) 누가 깨어 있는 교회요 성도일까? 우리는 그때와 그곳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박국처럼 파수꾼 의식으로 자기 성루를 갖고 기도와 말씀의 봉우리로 올라간 자는 그 결정적일 때를 환희 속에 맞이하게 된다(13절, 합2:1 참조).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만전의 준비를 기할 때이다.
3. 서신서 / 롬 13:8-14 / ” 이웃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주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던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우리 성도들의 예수 맞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자세히 제시하여 주었다. 크게 두 가지 차원이다.
1) 사랑의 빚 이외에는 그 어떠한 빚도 지지 말라고 말했는데, 그는 이웃 사랑을 율법의 성취와 완성으로 보았다. 나머지 모든 계명은 이 이웃 사랑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8-10절). 사랑의 계명이 왜 그리 우선적인가?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열심히 살아야 하고, 게으를 수 없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며, 죄지을 수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11-14절). 우리에게는 처음 믿을 때보다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졌기에, 이제는 자다가 깨어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 어둠의 일은 이웃에게 행악하는 일이다. 방탕한 일, 술 취하는 일, 음란한 일, 호색하는 일, 다투거나 시기하는 일들러써,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벗어버릴 낡은 육신의 옷들이다.
O 대림절 둘째 주일이다. 주님께서 오시는 발자취와 그의 숨소리를 민감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하겠다. 무엇보다 자다가 깨자. 하박국의 탄식의 기도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반열에 들어서야만 한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범사가 이루어지는 역사의 경륜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강조하신 이웃 사랑의 실천에도 우리는 열심을 내야 한다. 소극적 신앙이 아니라, 적극적 실천자로서 오실 주님을 맞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