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 3:1~7, 눅3:1-17, 계3:14-22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이다. 구원자 예수께서 오심을 고대(苦待)하며 기다리는 주일이다. 추운 계절은 따뜻함을 기다리는 계절이기도 한데, 그래서 지금의 이 세상 현실은 너무 추워졌기에, 더욱 메시아 구세주의 그 따뜻한 사랑과 품을 고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대림절이 감사하고 희망이 된 일은 내가 메시아를 찾아가서 만나는 계절이 아니라, 그분이 직접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게 되는 때라는 데에 있다. 만일 우리가 그를 찾아가야만 뵐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출발도 하기 전에 포기부터 했을 것이다. 모든 면에서 너무도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림절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오심을 믿고, 몸과 마음을 잘 준비하여 그가 오실 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기쁘게 영접하는 일이다. 그 일만 잘하면, 우리는 오신 그분과 함께 그분이 주도하는 새로운 유형의 삶의 잔치를 누리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세계교회는 그의 오심이 완성되는 성탄일까지의 네 주간을 매 주일마다 등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주일마다 하나씩 네 개의 촛불을 밝힌다.
이제 그의 오심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고대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아야 할 때이다. 오실 분은 온 세상의 주이시기에, 막연한 만남은 아무런 기쁨을 얻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계속되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속히 끝나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요즈음은 종전(終戰)을 앞두고 휴전 후의 땅 배분 문제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더욱 격하게 타격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북한 젊은이들이 만수 천명이나 용병으로 참여하여, 무고하게 전사당하고 있어서 더욱 종전이 절실하다. 자칫 우리도 그 싸움판에 휘말려 들지 않기를 더욱 간절히 기도한다.
또 하나의 간구는 우리나라 현 대통령의 조기 퇴진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요즈음은 그들 부부의 반헌법적이고 법률 위반한 숱한 일들이 연일 폭로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국민적 불신과 항의가 이제는 폭발할 시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대학교수들의 정부 퇴진을 촉구하는 성명서들이 연일 잇따르고 있다. 그가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는 일이 바로 우리나라가 회생할 지름길이다. 부디 역사의 주되신 주님께서 이번 성탄 선물로 그의 퇴진을 우리 백성에게 안겨 주시길 기도한다. 그래서 새 정부가 들어서 내년에 등장할 미국 트럼프 행정부를 잘 상대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세계에 부끄러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국의 교회들도 다시 새 힘을 받아 회복되고 부흥하기를 기도한다. 코로나의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한 체, 힘을 잃은 교회들이 너무 많다. 이번 다시 오실 주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신데(눅3:16), 바로 한국교회에 그분의 그런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 교회들이 다시 일어나는 기회를 맞이하면 좋겠다. 여기에는 그동안의 정신 차리지 못한 교회와 목회자들의 깊은 회개 운동과 각성 운동이 함께 밑받침되어야만 할 것이다.
오늘 받은 세 본문 말씀은 우선 구약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기다리고 사모하는 그 주님의 오심을 대비하기 위하여, 당신의 사자(使者-특사)부터 보내시리라는 예고를 하신다(1절). 그러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언약의 특사(特使-표준역)가 오실 때, 행하실 일들 몇 가지를 예고하신다. 우선은 모든 더러운 곳의 정화(淨化)와 잘못된 것들의 연단(鍊鍛)이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불의한 것을 향한 심판(審判)과 악한 것들에 향한 멸망(滅亡)이 가해질 것도 예고하셨다(2-5절). 이에 대한 대비(對備)는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복음서는 말라기의 주의 사자의 파송 예고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그 예언 사역으로 성취되었음을 전한다.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주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일을 전개했다. 그의 불같은 선포를 듣고 사죄의 길을 찾는 자들과 아브라함의 후손의 길을 묻는 자들에게는 그 구체적인 회개의 삶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역할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자기 뒤에 오실 분과 그가 주실 성령과 불세례 에로 안내한다. 그래서 듣는 자들이 쭉정이 인생이 아닌 알곡 인생의 길을 택하도록 촉구한다.
서신서인 계시록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그들의 미지근한 신앙으로 세상의 풍요로움에 빠져 영적인 맹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분별력이 부족한 그들을 일깨우신다.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신다. 그러면서 그들 마음에 들어가시려고 당신의 음성(말씀)을 통하여 문을 두드리실 때, 즉시 당신을 영접하라고도 일깨우신다. 그들과 함께 깊은 생명의 교제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전하신 것이다.
결국 이 세 본문 내용은 우리가 이번의 대림절을 어떻게 맞이할 것이냐에 대한 총체적인 영적 안내 말씀이다. 따라서 이제 본문을 살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들어보자.
1. 구약 / 말3:1-7 /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主)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
여호와의 종인 말라기 선지자는 여기에서 이 세상에 오실 두 인물을 전한다. 하나는 선발대로 오는 여호와의 사자(使者)이다. 그는 오실 주님이 당신의 앞길을 준비하게 하시려고 보낸 일꾼이다(1절,상). 또 한 분은 그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오시길 사모하며 기다리던 주님이시다. 그의 오심에 대하여 말라기는 ‘임하신다(=이르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1절,하). 이는 주님이 스스로의 의지로 오시는 모습을 그렇게 전한 것이다.
이분은 ‘언약(言約)의 사자(=특사)’이신데, 이는 오시겠다고 미리 약속하신 까닭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렘31:31-33, 히12:24 참조). 오실 때는 ‘갑자기’이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 이외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의 내용과 흡사하다(마24:36 참조). 당신이 원하시고 필요하다고 인정하실 그때이다. ‘문득’과도 같은 개념이다. 그리고 오실 곳은 성전(temple)이다. 궁궐로도 말한다(=새번역). 당신이 일하기 마땅한 처소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오신 까닭이다. 물론 이 세상은 당신의 땅이고 당신이 소유이시기에 언제든 오시는 것은 당연하시지만, 그래도 당신이 친히 오신다면, 그 목적과 효과는 분명하고 극대화(極大化)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선지자는 이렇게 우려 섞인 말을 했다. ‘누가 능히 그를 당하며 누가 능히 그 앞에 서겠느냐’(2절). 이는 당시 여호와의 백성의 영적 환경 때문이었다. 완전 절망적인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삶이 건강하지 못하고, 이방인과의 혼인이나 이혼 등으로 영적 상황도 좋지 않은 상태였으며, 예배도 변질되어서 율법도 지키지 않으려 하는 어긋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이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지 못할 상황이었고, 도리어 심판과 책망으로 견책당할 환경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 중인데도 메시아가 오시는 일은 어떻게 보아야 좋을까? 일종의 나이 든 사람들에게 건강검진(檢診)을 받으라고 날아든 종합검진 통지표와 같은 성격으로 보인다. 그 바람에 국민들은 마음의 불안감을 품고 검진을 받게 되면서, 그 기회에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래서 중병을 발견하면 수술도 받고, 가벼운 질병이나 증상이 확인되면 거기에 걸맞게 치료와 투약을 해서 건강을 되찾으면 된다. 그런 중에서 혹 누군가에게는 사망에 이를 만큼 중병이 확인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시간을 갖고 생의 마지막을 대비한다.
마침 예수께서는 당시의 죄인들을 병든 자로 보시고, 당신은 그들을 치유하는 의사(醫師)와 같은 이로 표명하신 바가 있었다(눅5:31-32 참조). 의사의 역할은 당연히 정직하고 정확해야 하고, 질병과 환자에는 분명히 진단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곧 오실 메시아의 중요한 치료용 심판은 이랬다. 먼저 성전과 예물을 관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부정은 철저히 척결되어야 했다(3-4절). 공의롭지 못한 제물은 가인의 제물과 같아서, 하나님의 외면과 성도들의 비정상적 예배 생활을 견인하게 되기 때문에 마땅히 쇄신되어야 한다.
백성들의 무너진 삶의 문제도 심판을 받게 된다. 점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을 떼먹는 자,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는 자,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 등등은 모두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들이기에, 그 내용의 경중(輕重)에 따라 하나님의 책망과 배제를 받게 되리라 예고하셨다(4-5절).
그러면 이런 사전 예고를 하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치유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치유의 길은 무엇인가? 의원 되신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이다(7절). 그 점에서 남은 두 본문의 내용은 그 위험한 질병을 벗어나기 위한 처방전(處方典)이다. 깊이 살펴보자.
2. 복음서 / 눅3:1-7 / “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
세례 요한은 예언자의 예고대로 온 이로써,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요단강을 거점 삼아 모든 사람에게 광야의 소리가 되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물세례를 주었다. 그 일로 그는 오실 분의 길을 준비하였고 그의 길을 평탄하게 닦았다. 그 앞에서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들은 낮아지며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 져갔다. 숱한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엿보게 되었다(1-6절 참조). 그에게 큰 영향을 받은 자들 중에는 요한이 바로 ‘오실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15절).
하지만 요한은 자신의 존재와 역할의 한계를 분명히 견지하면서(16절), 백성들 자신이 할 수 있는 회개와 갱신의 삶을 전파하는 일에만 전력을 다했다(10-14절). 요한을 찾아온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였다. 그중에는 당시의 사회적 실세들인 세리들도 많았고 군인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요한의 처방은 현재의 삶의 자리를 버리고 새 직업으로 변경을 요구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있는 그 자리에서, 삶의 변화와 새로운 가치를 위한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였다.
곧 지금의 서 있는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의 곤경을 헤아리고,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여 주는 삶을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악이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자리를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현재의 자리로 만들라고 권고하였다. 매우 적극적이요 역동적인 방안이었다. 그 일을 위하여는 자기희생(犧牲)이 있어야 하고, 정의 실현을 이루는 단호함이 필요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임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새 가르침은 당시 사회와 사람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기득권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일, 그래서 마찰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생겼을 것이다. 이를 대비하여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 이외에, 당신의 뒤에 오실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실 새로운 세례들을 강력히 소개하면서, 그 세례까지 받아서 그 세례가 주는 거룩한 힘과 능력으로 자신이 제시한 새 삶의 소명을 감당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세례가 곧 성령과 불세례이다(16절). 그 단계에 들어가야 비로소 우리가 쭉정이 교우에서 알곡 성도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17절).
3. 서신서 / 계3:14-22 / “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이 많이 사랑을 하시는 공동체였지만, 비교적 지역의 부요한 특성 때문에, 생활에 여유가 있었고 근심 걱정이 없던 곳이었다. 은행이 있었고, 양모(羊毛) 산업이 발달했으며, 의사학교가 있을 정도로 산업기반이 튼튼했다.
하지만 그들 신앙의 특징은 –마치 말라기 시대의 유대교도 처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 중간 정도의 ‘미지근(lukewarm)’했다. 그래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부자요 부족한 것이 없다는 느긋함을 누리며 살았다(14-16절). 그 바람에 말씀을 향한 긴장감이 없고, 선행에도 열심이 부족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그들을 영적 맹인으로 보시고 토해낼 정도라고 평가하시면서, 정신 차리고 열심을 내라고 강력히 재촉하신 것이다(16-19절).
의사이신 주님께서 보내신 그들의 신앙의 진단표는 매우 위험 상태였다. 풍요한 물질에 취하여, 그들은 영혼은 몹시 가난한 상태였다. 곤고함-가련함-가난함-눈멈-벌거벗음의 수준이었는데도,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무너진 영혼의 상태를 모르고 살고 있었다. 육체의 풍요로움에 취해서 영혼의 헐벗음을 모른 채 지내온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정금 같은 신앙이요, 정결한 마음이며, 주님과 그의 십자가를 바라볼 영적 안약이었다(17-18절).
이런 문제해결의 열쇠는 간단명료하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소위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분이시기에, 그의 말씀에 내 마음 문을 열어드리면서 신실하게 응답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주께서 그의 영으로 내 안에 들어오셔서, 그가 준비하신 기쁨과 위로의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20-21절). 세상과 육체가 줄 수 없는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신령한 하늘 잔치이다.
o 우리는 오늘 대림절의 첫 불을 밝힌다. 오실 주님을 온전히 맞이하려는 열린 마음을 제단 위에 드리자. 먼저는 나의 미지근한 신앙, 열심이 실종된 신앙, 뜻밖에도 주님의 문드리는 소리에도 완고해져서 문을 걸어잠고 지내는 교만한 마음 --, 이 내 안의 것들을 나의 영혼과 구원을 허물어뜨리는 적으로 보고, 담대히 물리칠 마음과 기도의 촛불을 밝히자. 스스로의 자구책(自救策)만으로는 안 됨을 깨닫고, 주께서 주실 성령과 불을 내려달라고 간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