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문) 신 26:1-11 , 막6:30-44, 롬12:1-8
오늘은 창조절 열세 번째 주일이다. 절기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다. 다음 주일부터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기(待臨節氣)에 들어간다. 기온은 때마침 겨울의 한기를 체감하게 하는 영하의 날씨이다. 어제부터 추적추적 비가 오고, 거리는 온갖 낙엽으로 덮이게 되더니, 끝내는 이런 추위를 맞게 되었다. 부디 모든 설교동역자들과 이곳 말씀목회연구원의 참여자로 함께 하신 독자 여러분들의 건강한 겨울나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세계는 지금 어디로 튈 자 모르는 트럼프가 미국 차기 대통령으로 들어서자, 온통 그에 대처하는 몸짓을 조율하느라 바쁘다. 그런 중에 우리나라 대통령 부부의 어처구니없는 행보와 불신에 모래성 위에 올라서 있는 위상은 너무도 위태로워져서, 우리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주말에 모인 거리 시위들은 더욱 격렬해지는데, 대체 우리나라의 활로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가슴 아픈 일은 우리 북한의 젊은 군인들이 러시아의 용병이 되어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되어 전쟁의 최전선에 서게 된 소식이다. 참으로 미친 짓들이다! 그들도 우리 민족의 젊은이들인데, 도대체 왜 타국의 용병이 되어 전쟁의 희생물이 되고 살상자들이 되어야 하는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요,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이다. 애꿎은 희생양들로 시대의 모순과 아픔을 대신하는 제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민인 우리도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다. 대통령으로써 자기 안위에만 매달리고, 국가 안위와 국민의 평안을 도모하려는 따뜻한 마음은 한푼도 없는 사람을 우리가 앞세워서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속들의 정치 장난질에 휘둘려서 국가를 경영하는 처지이다 보니, 우리의 처지가 더욱 한심스럽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하나님 여호와가 계시다. 공의와 정의와 평화의 주이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이 계시다. 당신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사람을 세워 역사와 판을 바꾸고 변화시켜 가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가 먼저 바로 서서 살길을 구하고 답을 얻어내는 일이 우리의 몫이 아닌가! 마치 저 하박국 선지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합2:4).
오늘 절기 마지막 주일에 주시는 세 분문 말씀의 주제는 무엇일까? 세 본문 모두가 하나님께 바치는 일과 이웃들에게 나누고 주라는 말씀을 담고 있다. 이는 여태껏 매 주일 우리를 일깨워 왔던 계명들의 핵심이자 영생의 조건이기도 했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총완결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살아있고 정상적인 예배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총정리하는 내용으로 전하면서, 우리의 온전한 생활 신앙을 격려하신다. 또한 이런 예배자의 모습을 굳건히 견지하면, 우리는 어떤 세상의 풍랑 속에서도 건강하게 대처할 수 있음을 전하신다.
구약 신명기 말씀은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지의 소산물을 거두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마땅한지를 계명으로 지시해 준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두 감사절인 장막절과 초막절에 행할 백성들의 행동 지침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먼저 자신들을 구원해 내시고 이곳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여호와께 신앙고백을 드림과 함께 수확의 첫 열매를 바치는 일을 명하신다(2,10절). 그런 후에 집에 가서는 주변의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생각하며 받은 복을 베풀고 나누는 일도 지시하신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삶이라는 것이다(11절).
복음서의 경우는 오병이어를 통한 예수의 계명을 전한다. 여기에서도 주님의 관심은 저들을 먹이시는 일이다. 그 먹이실 양식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하늘 양식인 말씀을 먹이시는 일이다(34절). 길잃은 양과 같은 몰려 온 무리들의 삶의 방향을 잡아주시는 일을 행하셨다. 둘째 양식은 가진 양식을 함께 나누어 먹게 하신 일이다. 여기에서는 대중을 먹이는 일을 자신들이 준비하여 먹이라는 분부와 함께 받는다. 이때의 확장되는 나눔의 기적(표적)은 주님의 몫이라는 점도 일깨워주시면서 말이다.
서신서의 경우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예배, 곧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변화된 마음에서 나온 거룩한 제물로 드리는 데에서 나온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각자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믿음의 분량과 은사를 가지고,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내어놓은 삶을 제시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가장 작은 분량을 가지고도 가장 많은 사람을 풍성하게 해주는 표적, 곧 오병이어의 기적을 실제 경험할 수 있음을 알린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받고 누리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아 누린다. 하지만 받는 것으로 끝내서는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일 수 없다. 아직 못 받은 사람들, 길잃은 사람들, 받아야 살아갈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가 마음을 열고 손을 펴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창12:3참조). 이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 예배자가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게 되면서, 우리의 삶은 큰 기쁨과 긍지와 보람 속에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창조 질서에 제대로 부합된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 내용들을 살펴본다.
1. 구약 / 신26:1-11 / “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 네 하나님 앞에 경배할 것이며 —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의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그 동안의 목축 위주의 생활에서 농업 중심의 삶에로 대변화를 겪게 되면서, 거기에 필요한 생활 신앙의 기조를 소개한 내용이다. 그러기에 이 지침은 이후의 후손들의 신앙생활에도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예배의 모범형식도 매우 규범적(規範的)이다.
1) 먼저 할당된 토지에서 소출한 곡식(소산)의 첫 열매(맏물-the firstfruits of the soil)를 거둔 후에, 그것을 구별하여 광주리에 담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회막)으로 가져간다.(2절). 그러면서 그곳에 있는 제사장에게 자신이 여호와께서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음을 보고 드린다(3절). 제사장은 그 손에서 광주리를 받아 여호와의 제단에 놓는다(4절).
2) 그는 고백한다. 곧 자기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애굽에 내려가 소수로 거류하다가 거기서 크고 강한 민족이 되었는데, 그곳 애굽인들이 자기들을 학대하고 괴롭히며 중노동을 시키자 자기들이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확인하시고 그의 강한 손과 편 팔로 출(出)애굽하게 하신 후, 이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주셨다고 고백한다(5-9절).
3) 그러면서 ‘여호와 주께서 자기에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첫 열매)를 가져왔나이다’라며 그것을 여호와 앞에 두고 그에게 경배(敬拜)드린다(10절).
4) 경배드린 후, 그들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집에 주신 모든 복(소산)을 가지고, 주변의 경제적 약자인 레위인과 사회적 약자인 나그네(거류민)과 함께 즐거움을 나눈다(11절).
이런 규범 제시는 무슨 까닭인가? 모든 새로운 생활과 주어진 환경과 거기에서 거두어들인 소산들 모두는 다 스스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로 주어진 것이요 은혜의 선물들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백성들이라면, 사랑과 은혜를 받기만 하고 끝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감사하고 보답(報答)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먼저는 주신 분인 여호와께 나아가 감사하고 경배를 드린다. 그 증표가 될 첫 열매를 구별하여 드린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감사의 고백을 구체적으로 함께 올리는 일이다. 물질만 쑥 내밀 듯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입술의 고백과 함께 드려야 한다. 정성의 진정성을 물질과 입술로 표현해야 되기 때문이다. 또 있다. 자기 주변에 아직 함께 누리지 못한 약자들을 기억하여 그들과도 즐거움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그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하는 후손들이 취할 모습이기도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2. 복음서 / 막 6:30-44 / “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
본문은 마가가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특징을 섬세히 전한 내용의 일부이다. 그것도 백성들을 먹이시는 사역을 예수께서 어떻게 펼치셨는지를 매우 깊이 있게 전하신 것이다. 소위 ‘오병이어 사건’으로 명명된 이 기사에서, 마가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이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먹이는 사역을 앞장서 감당하신 모습을 소개하였다.
주님은 두 가지로 생명 살리는 사역을 펼치셨다. 하나는 하늘 양식인 말씀을 백성들에게 먹이시는 일이었다(34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시면서, 그들의 어긋난 삶의 방향을 고치시고 제대로 된 삶으로 거듭나도록 이끌어 주시는 일을 행하셨다(34절). 또 하나는 실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먹이시는 일이었다. 그 일은 마치 작은 씨앗이 자신을 받은 땅속에서 변화되어 새순과 열매로 나올 때에는 30배-60배-100배로 많아져서 나오는 방식과도 같은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통하여, 먹이셨다. 소위 오병이어의 먹이시는 표적 방식이 그랬다(35-44절).
1) 예수께서 가시는 곳은 당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룰 정도로 숱한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주님은 그들의 그런 모습을 이렇게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다’(34절). 이는 당시의 유대교가 제 역할을 못하여서 백성들의 영적 기갈이 극심한 상태였음을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했다. 그들의 율법 교육은 정죄형이었고 심판형 교육이어서, 율법을 따라 살기에 힘없고 버거운 이들에게는 언제나 두렵고 피하고 싶은 말씀이어서, 백성들은 차라리 죄인으로 살다 가면 된다는 자포자기식 포기 상태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이었고 용서였으며 포용이어서 따뜻한 치유의 양식이었다. 그래서 유대교에 목말랐던 영혼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하시는 현장에는 그토록 압도적으로 몰려들었다. 먹거리가 풍성한 하늘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2)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당신에게 모인 그들을 실제로 먹이시는 일에도 앞장서셨다(35-43절). 육체의 기근의 문제 해결에도 주님은 깊이 관심하였다. 오병이어 기사는 예수가 실제로 당신의 허기진 백성을 먹이시는 일에도 앞장 서신 분임을 알리는 곳이다. 동시에 당신의 제자들의 하늘 사역에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지시를 통하여, 생명의 양식을 영육 간에 주고 베푸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제자가 되어야 함을 확실히 하셨다. 사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나날의 생계) 해결을 구하는 기도도 가르쳐 주신 분이 아니신가-!(마6:11 참조)
3) 그가 취한 먹이시는 방식은 오병이어 방식으로서, 마치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니, 30배 60배 100배가 되어 부풀린 양식이 되어 그것들을 먹이고 나누는 방식이다. 곧 가장 적은 씨앗이 대지 속에서 떨어져서 부풀려지고 변화되어 나와 맛볼 수 있는 추수 방식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오병이어의 양식 공급을 예수께서 당신의 피와 살을 먹이고 마시우면서 모두에게 당신의 생명을 공급하신 성만찬의 모형으로 본다. 성만찬의 신비가 무엇인가? 가장 적은 음식으로 가장 풍성하고 배부르게 하는 표적을 경험하는 놀라운 식탁이라는 점 아닌가-!
3. 서신서 / 롬12:1-8 / “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본문은 사도 바울이 교회 현장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떻게 오병이어 사건을 실제화시킬 수 있을까를 보다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며 그 해결의 방안으로 제시한 곳이다. 다만 그 놀라운 맛을 보기 위해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바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라는 내용이다(1절). 이 말씀은 자기가 가진 오병이어를 주님께 내어 드린 일과 같다(요 6장 참조). 즉 네 몸을 제물(祭物)로 내어 드릴 때, 거기에서 숱한 파장도 일어나고, 그게 계기가 되어 제2 제3의 오병이어 사건이 나타날 수 있음을 전하려 했다.
1) 우리에게는 그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恩惠)와 은사(恩賜-gifts)들이 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分量)도 있다(3-4절). 그런데 그 은사와 분량들은 다 다르다. 우리 서로의 얼굴과 개성이 다르듯이 서로 다르다. 중요한 것은 그 다름과 거기에서 나오는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면 된다. 비교하려 들면 안 된다. 차이를 귀하게 여기고 금은처럼 고귀한 특성으로 여기면 된다. 만일 차이를 차별(差別)로 옮겨가면 불행의 씨앗이 된다!
2) 그러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려는 교회 공동체는 어떤 곳인가? 바로 그 차이들, 다양한 특성과 개성들, 다양한 은사와 분량들을 땅에 묵히지 않고 개발하여 서로를 유익하게 하고 모두의 풍요를 이루도록 협력하게 하는 공동체이다. 마치 우리 몸의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의 필요를 위해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면서, 온전하고 건강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는 서로 다른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 되게 하여 큰 역사를 창출하게 한다. 오병이어와 같은 개인의 몫이 예수께 마음껏 사용해 주시라고 제물로 바쳐지면, 그로 인해 많은 생명이 배부르게 먹고 12광주리나 남기게 하던 일을 재현하는 곳이 바로 교회다.
3) 따라서 이런 하늘 역사를 위해 우리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주를 섬겨야 하는가? 먼저는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은사와 기능을 주셨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6-8절). 둘째는 그것을 왜 주셨는지를 묵상하여 답을 찾는 일이다. 셋째는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것으로 모두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언제나 사용해 달라고 자신의 오병이어를 기꺼이 제물로 드리는 일이다. 그럴 때, 하늘 기적은 일어난다. 다만 이때 과욕이나 과시욕은 절대 금물이다. 주님이 주신 분수를 따라서 겸손과 지혜로 나아가면 된다(3절)
o 우리는 이제 가장 영적 예배 곧 가장 합리적이고 주님이 기뻐하신 예배를 찾았다. 이는 역시 하나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들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그 실체가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은사인 오병이어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언제든 내어놓을 자신이 될 때, 하나님은 나에게 당신의 풍성하고 감동 충만한 세상을 맛보게 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