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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추수감사절

관리자 2024-11-12 (화) 10:32 1개월전 86  

본문) 민 20:1-12, 마 18:1-9, 약 3:1-12


오늘은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이다. 늦가을 정취도 절정을 이루고 있다. 지난 주간에는 미국의 새 대통령에 트럼프가 다시 돌아와서 온 세계가 새로운 긴장에 들어선 때이다. 그가 주는 긴장감은 그의 강한 미국 우선주의에서 나온다. 누구나 일국의 대통령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것은 상식이지만,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인 트럼프의 그런 입장은 관련 이웃 국가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기에, 큰 걱정과 염려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트럼프는 우리나라를 ‘돈다발 부자 국가’처럼 생각하면서, 미군 체류비 부담을 무려 현재보다 5배나 요구해서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그때 문재인 대통령이 침묵의 태도로 일관하여서 견디어냈으나, 현재의 윤 대통령의 사대국(事大國) 우선주의의 태도와 막무가내식 전쟁 불사를 추구하는 개념 없는 행태가 실로 큰 문제이다. 자칫 트럼프의 먹거리 상대로 놀아날 가능성이 커져서, 우리나라 역사에 큰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미국의 대통령에 향한 우리 입장 요구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 내부의 적(?)이 된 우리 대통령의 국민 뜻에 어긋나는 돌출 행동들은 우리 국민들 스스로가 단호히 막아내야 하는 새로운 국면이다. 그러잖아도 윤정권 퇴진을 위한 국민들의 제2 촛불집회가 열기를 높이는 중인데, 이번의 트럼프의 새로운 공세를 막아낼 국민적 역량을 키워내기 위한 싸움은 보다 더 가중되었다. 이제 내부의 적을 강하게 억제함으로써, 외부의 공세를 방어할 새 과제까지 안게 되었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내부의 적(敵)을 막으라’는 메시지이다. 실제로 우리 삶과 공동체의 기반과 건강을 위협하는 적들은 결코 외부의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적들은 우리 내부에 항존(恒存)해 있다. 소위 자기의 삶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하는 내부의 적들이 우리가 보다 더 엄중하게 대적해야 할 실제적 적들이란 말이다. 이런 일 때문에, 우리는 회개와 자성과 성찰과 참회하는 훈련을 하면서 산다. 이 훈련을 얼마나 가혹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인생의 승패(勝敗)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오늘 주일은 상당수의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런 자기 안의 적들을 경계하라는 성격의 말씀이 집중되어 있음은 또 다른 의미를 안겨 준다. 진정한 감사는 자기 극복과 잘못된 행태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과 성찰의 기반 위에서 나온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부가 무너진 상황에선 온전한 감사가 불가능하다. 다만 감사절만을 위한 말씀은 오히려 다음 주일 세 분문 말씀이 더 적절함을 알린다.


구약 민수기 본문 이야기는 가나안의 입주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 이르자 잠시의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찾아와 자기들을 죽게 하려고 ‘이 나쁜 곳’으로 이끌고 왔다며 심히 불평하며 말다툼을 벌린 내용을 전한다. 결국 그 장면을 보신 여호와의 지시로 그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그곳에서 모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대응하다가 여호와로부터 뜻밖의 큰 징계를 당한다. 


‘너희(모세 형제)는 이 회중에게 준 땅에로 이들과 함께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중징계(重懲戒)를 받은 것이다(12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여호와는 모세가 백성 앞에서 주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것을 이유로, 곧 여호와의 지시가 아닌 자기의 방식으로 대처하여 하나님의 일을 처리하려 한 일로 인하여(8-11절 참조), 지난 40년간의 가나안에로의 여정을 성취할 마지막 기회를 그에게서 거두어들이신 것이다. 매우 온유했던 모세가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 자기 통제력을 잃게 되면서, 그렇게 걸려 넘어진 것이다. 


복음서에서도 성자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질문을 받으시자, 크고 작고 이전에 들어갈 조건부터 말씀하셨는데, 그게 바로 어린아이들과 같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후에 천국에서 큰 자가 결정될 터인데, 거기에서의 조건은 철저히 자기를 낮추는 자였다(1-4절). 이와 함께 주님은 추가로 덧붙여 주신 경고 사항이 있었다. 바로 실족(失足)하게 하는 자(죄짓게 하는 자)의 비극적 심판 사항이었다. 


서신서의 내용은 교회 공동체에서 거룩성을 잃고 발생할 수 있는 가벼운 실수(失手)들을 상기시키면서 우리에게 엄중한 주의를 요구하는 말씀이다. 이 부분이 모세 형제가 실수하여 걸려 넘어진 부분으로 보인다. 그 실수는 자기 안에 들어있는 생각과 마음을 전할 말의 출구가 된 입과 혀에서 나온 것이다. 신체 중에 가장 작은 부분인데도, 책임은 온몸이 지게 하는 매우 특이한 지체가 바로 이 혀이다. 혀는 하나이면서 찬송과 저주란 아주 다른 내용을 쏟아낼 수 있는 기이한 지체라서, 혀를 제대로 통제하여야만 구원도 받고, 공동체도 복되게 할 수 있다.


이상에서 거론된 모든 내용들은 일단 모두 다 자기 내부의 요인들로 기인한 것들이다. 이런 내부의 적들은 모두 외부에서 들어온 시험들을 뿌리치고 이겨내지 못해서 터져 나온 ‘나의 것들’이란 점이다. 그러기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 가르침도 매우 필요하고, 그러기에 ‘다만 악(惡)에서 구원하소서’란 간구도 더더욱 필요하다(마6:13절 참조). 이제 오늘의 세 본문 말씀에 나타난 내용들을 더 깊이 살펴보자. 


1. 구약 / 민20:1-12 / “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


본문의 기록은 두 번째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처음 사건은 40년 전에 이곳에서 가나안 정탐한 12명의 보고 내용을 듣는 중, 10지파 보고자들이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하자 백성들이 미혹되어 폭등을 일으킬 정도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 불평한다. 그 바람에 여호와가 진노하셔서 광야 생활을 40년 연장케 하셨고, 그 기간에 그들 40세 이상 된 가담자 전원을 40년 광야에서 전멸되게 하셨다. 조상들을 포기하고, 후손들을 택하신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두 번째 사건이 바로 그 지역에서 40년 만에 또 발생했다(1절). 이번의 원망 불평 주원인은 마실 물 부족 때문이었다. 그래서 회중은 모세 형제에게 몰려와 ‘우리를 죽게 할 곳이 없어서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라고 공박하였다(3-5절). 그 모습과 그 불평 내용을 보면, 그야말로 ‘딱 그 조상의 그 후손’들이었다. 그들 불신앙엔 조상과 다를 바 없었다. 


모세 형제는 회막 문에 나아가 하나님께 엎드렸다(6절).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시는 방향으로 응답하셨다. 40년 전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 조상의 불신앙에 따른 징벌을 내리지도 않으시고, 즉시 그들의 필요를 해결해 주시는 쪽으로 모세에게 지시하셨다. -‘회중을 모으고 그들이 보는 데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라’(8절). 


이는 하나님의 세대 유지에 대한 깊은 배려로 보인다. 만일 예전처럼 그들의 불평에 즉각적인 징벌을 내리신다면, 그들에겐 앞선 세대처럼 거의 사라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들의 가나안 땅 이주의 계획도 결국 무산되거나 큰 차질이 불가피하게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다른 측면으로 그 해결책을 찾으시고자 하셨다고 보인다. 


그것은 잘못된 백성(회중)을 향한 직접적인 징벌을 피하시면서 그 대신, 중도에서 그 일을 위해 말할 수 없이 애쓰고 고생하던 당신의 종 모세에게 그 책임을 대신 지게 하시는 대속(代贖)의 방식(?)을 취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세가 자칫 범할 수 있는 실수급(?)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여호와께서 통로를 찾으셨다고 본다. 그 일의 촉발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라는 명령에 있다. 이는 사실상 말씀만으로 성취가 가능한 하나님의 방식이자, 그런 권능이나 믿음이 부족한 인간의 방식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모세가 보인 인간적 방식은 무엇인가? 손에 든 지팡이로 그 반석을 치는 방식이다. 몇 번이고 나올 때까지 쳐보는 방식 말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방식으로 응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반석의 물은 공급해 주시면서도(11절), 모세가 취한 그 방식은 문제 삼으셨다(12절). 그 일로 모세는 회중 앞에서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자신의 능력만을 과시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간주하시고, ‘그런 모습으로는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에 함께 들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시면서, 모세의 역할을 ‘거기까지로’ 정리하셨다. 


이 결정은 모세에게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힘겨워 실수하는 모세를 계속 가나안 이주라는 중차대한 과제까지 맡게 하는 일이, 모세를 더욱 힘겹게 하고 더큰 실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고 보셨다고 본다. 그래도 모세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신 여호와는 그를 위하여 비스가산에서 약속의 그 땅을 보도록 큰 환대도 베풀어 주셨다(신34장참조)


2. 복음서 / 마18:1-9 / “ 너희가 돌이켜 이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


예수 시대에도 사람들은 천국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중에서도 제자들 관심은 ‘누가 크냐’에 두었다. 경쟁심(競爭心)이 그들 안에 강하게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천국에서는 크기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과연 그곳에 들어갈 것이냐가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어린이의 같은 마음의 소유자, 특히 무모한 경쟁심, 시기심, 다툼 등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천국 입성은 물론, 그곳에서 큰 자임을 예시해 주셨다. 


1) 천국에 관심하는 이들은 누구나 조심해야 한다. 그곳은 세상과는 달리 경쟁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고 인정하며 서로 밀어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들어갈 곳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기도 하잖은가! 주님은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알리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마11:29). 


2) 그러면서 실족(失足)하게 하는 자의 무거운 죄에 관하여 언급하셨다(6-9절). 여기서 ‘실족하다’는 말은 ‘사람을 죄짓게 하는 유혹이나 행위’(cause people to sin)를 말한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사람을 죄에서 건지고 살려내는 일을 모든 행위 중에 최고의 규범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전도와 선행을 강조한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방편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족은 어떤가? 그런 규범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사람을 죄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기에 그 죄질의 무거움은 최고조에 달할 수밖에 없다. 


3) 그런 중에서도 주님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셨다(6절). 이런 표현은 흔하지 않고 매우 특별하다. 믿는 자를 죄짓도록 유혹하여 지옥 가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흔히 발생할 수도 있는 행위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할 일이다. 상대에 대한 무시나, 훼방이나, 거짓 증언이나, 인격모독 등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내 안의 내부 적들이 아닌가?


4) 이런 자의 죄는 정말 무겁다. 그래서 더 무섭다. 주님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6절) 까지 그 죄의 심각성을 지적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 유발이 내 손이나 발이 될 수 있음과 내 눈이 될 수 있음도 거론하신 것을 보면, 우리 몸의 지체들 관리도 우리는 매우 유념해야 하겠다(8-9절 참조). 내 몸의 지체들이 죄와 실족게 하는 자의 악한 도구들이 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하겠다(7절). 


3. 서신서 / 약 3:1-12 / “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모세는 대단히 온유한(humble) 분이었다(민12:3).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와 대화를 많이 나누셨다. 하지만 그런 모세도 실수(失手)의 질곡에 빠져들기도 했다. 사람에게 시달리고 주의 일에 힘겨워지면서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 대신에 자기를 내세우는 혀의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 점에서 교회 사도인 야고보는 교회의 선생된 지도자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을 감안하여, 선생이 많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까지 권면했다(1-2절). 


문제는 우리의 혀(입의 말)인데, 이는 그 무엇으로도 길들일 자가 없다는 데에 있다(8절). 말이나 개와 같은 짐승은 재갈을 물려서 통제도 하고, 크고 작은 배들도 뒷 켠에 키를 통해서 통제를 하지만, 인간의 입에 붙은 혀는 통제할 것이 없다. 그 바람에 혀는 몸에 가장 작은 지체이면서도 큰 것만을 상대한다(5절). 


그 바람에 사람은 혀로 자신을 망하게도 하고 상대를 불에 태우기도 한다.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를 불사르기도 한다(6절). 실로 혀는 쉬지 않은 악이요 죽이는 독이다(8절). 하나님께 찬송도 드리지만, 사람에게는 저주도 한다(10절). 실로 하나만 나오는 샘이나 나무와는 너무 다르다(10-11절). 이 작은 혀로 내 전체 인생 운명이 결정된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o 절대 간단하지 않다. 다만 내 혀와 입술이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통제 하에서 활동하도록 각고의 훈련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오직 주의 자비를 힘입어 내 혀가 주님의 도구가 되고 그의 뜻을 펴며, 그의 기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혀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대변하는 도구이기에, 내 마음이 의와 평화와 긍정의 영성으로 가득하고 항상 주의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지내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다. 외부의 적(敵)은 말씀으로 방어하고, 내부의 적은 채워진 주님의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방어하며 살자.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모든 나’에게 더욱 충만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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